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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자녀에게 주의 판단력을 주소서(시72:1~19)
주일오전설교
2009/06/19 09:55 http://blog.naver.com/immanuel9597/10050921116 |
<1절> 위에 [솔로몬의 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시72편>은 정확히 번역하면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쓴 시]이다. 그리고 <19절>을 보며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쓴 기도문]이다.
본문을 통해서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기도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이후 다윗은 죽고 솔로몬은 살았는데 솔로몬이 살았던 내용들을 성경이 기록하는걸 보면 다윗이 기도해준대로 살았던걸 볼수 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맡긴 자녀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고, 무엇이 삶에 있어서 소중한 가치인가? 를 알게 될 것이다.
다윗은 자녀를 위해 은도 구하지 않고, 금도 구하지 않고 가장 소중한 것 하나만을 구한다. 마치 대한민국 국적 하나만 있으면 누리는 혜택이 많듯이 (예를 들어 수많은 나라들을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것) 다윗이 가장 소중한 것 하나를 구한다. 왜? 그것 하나만 갖고 있으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을 위해 한가지를 구한다.
다윗은 자녀를 위해 무엇을 구했는가? 그리고 나는 그 소중한것 한가지를 구하고 있는가? 또 내 자녀를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구하는가? 점검할 수 있는 시간되길 바란다.
<1절> 다윗은 두가지를 구한다. 판단력과 의를 구한다. 그런데 단순한 판단력과 의가 아니라 앞에 한글자가 붙었다. ‘주의 판단력과 주의 의’이다. ‘주의 판단력’이란 주님의 관점에서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을 달라는 것이다. ‘주의 의’란 주님의 관점에서 의롭게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오늘 이 시간 주의 판단력과 주의 의를 주시기를 축원한다. <다같이> 하나님, 저와 제 자녀에게 주의 판단력과 주의 의를 주소서.
다윗이 아들 솔로몬을 위해 금, 은을 구한 것이 아니라 주의 판단력을 달라고 기도한다. 훗날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일천번제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내가 네게 무엇해주기를 원하느냐?” 그때 솔로몬 曰 “제가 지혜(=판단력)을 주셔서 백성들을 잘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아버지와 똑같은 기도를 솔로몬이 한다.
이 판단력이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이다. 대한민국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수많은 혜택을 누릴수 있듯이 우리에게 판단력 하나만 있으면 엄청난 혜택을 누리며 인생을 살수 있다.
인생을 되돌아보면 자신의 판단에 대한 탁월함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도 있을 것이고, 그때 한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이 꼬였다는 자신의 판단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한 것도 있을 것이다. 아는 분이 살고 살고있는 집을 시세가 올라 팔았는데 판 이후로도 계속 올라가는 것이다. 나중에는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는걸 본적이 있다. 팔고 이사나 갔으면 좋았을텐데 자신이 판 집을 전세로 살아서 올라가는걸 보시면서 자신의 판단을 두고두고 후회하는걸 봤다.
우리가 앞일을 안다면, 그게 그렇게 될줄 알았다면 그런 판단을 하지 않았을텐데 앞일을 모르다보니 내딴에는 머리 쓴다고 쓴건데 결국 그 판단이 잘못된 판단이었던 적이 있다.
여러분도 자신의 판단에 후회가 되는 그런 경험이 있는가? 만일 그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판단할 수 있다면 아마 그때와 같은 결정과 판단은 절대 안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 묻길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너의 판단을 바꿀수 있다면 너는 어떤 판단을 뒤집고 싶니”라고 묻는다면 뒤짚고 싶은 판단이 몇가지 있을 것이다. 그때 땅 안 산거, 결혼..,
인생을 돌아보면 왜 내가 그때 그런 판단을 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들이 있다.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은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결정하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이 천추의 한이 되는 정도의 잘못된 판단은 거의 없는걸 본다.
아는 사람이 이 일 한번 해 보라고 했는데 거절했다. 그런데 나중에 결과가 엄청 좋은걸 보며 우리는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이제 지난날의 결정은 이미 지나갔으니 어쩔 수 없고 오늘부터 해야 하는 수많은 판단에 후회가 없길 축원한다.
인간의 판단력의 한계는 내일 일을 모르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수치와 통계, 경제동향을 가지고 분석해서 판단한다고 하지만 사람의 한계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을 어떤 분이신가? 내일 일만 아시는 분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를 다 아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내일의 일뿐 아니라 우리의 5년 후, 10년 후를 다 아시는 분이시다. 그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시다. 그 주님은 우리 등쳐먹는 분이 아니고 우리를 세워주시고 살려주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잘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시다.
오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한가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 나의 판단력을 믿고 살 것인가? 주의 판단력을 믿고 살 것인가?
사람들은 공부 좀 했다고, 사회적인 경험이 있다고 해서, 머리가 명석하다고 해서.., 자기가 갖고 있고 알고 있는 것들로 자신의 문제들을 판단하고 결정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름 이리재고 저리재서 판단한다. 물론 무때포로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언제나 나의 판단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다윗이 안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인생을 보면 자신의 판단력으로 산 것이 아니라 주의 판단력으로 살았다. 만일 하나님이 다윗에게 “너 과거로 돌아가 너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 잡고 온다면 뭘 하겠니?”라고 주님이 물으신다면 다윗은 그때 옥상 올라갔던 판단을 바꿔 기도실로 갔을 것이다.
만일 다윗이 옥상으로 올라가서 여인을 보고 하나님에게 기도했다면.., “하나님 데리고 올까요? 말까요?”라고 기도했다면 하나님이 확실한 판단력을 주셔서 여인을 데려오지 않았을텐데 다윗은 기도하지 않았다. 왜? 하나님의 응답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응답받기 위해 기도하지만 반대로 너무 응답이 빨리 확실히 올 것 같을 때도 기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밥 먹을 때는 기도하지만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술 먹을 때는 기도하지 않고, 커피 마실 때는 기도하는데 기호식품이라고 주장하는 담배 필 때는 기도하지 않는다. (예) 십일조, 주일성수.., 왜? 기도하면 응답이 빨리 확실하게 오기 때문이다.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일과 그 일을 감추기 위해 남편 우리야를 범한 일 외에는 다윗은 후회할 판단을 거의하지 않았고 그의 판단의 거의 옳았다. 어떻게 다윗은 이렇게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다윗은 늘 하나님에게 물었다. 전쟁 나갈 때도 “하나님 전쟁 나갈까요? 말까요?”라고 물었고, 전쟁 중에도 “하나님 가서 치리이까 말리이까?”라고 항상 물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판단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판단하신 것을 순종하는 삶을 산 것이다.
다윗은 ‘나의 판단’으로 옥상 사건을 만들었기에 남은 평생을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주의 판단’을 믿고 따랐다.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 마치고 가나안에 입성해서 첫 번째 전쟁이 여리고 성전 전투이다. 하루한번씩, 마지막 날은 일곱 번을 돌라는 주의 판단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큰 여리고 성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아이성에 주의 판단을 듣지도 않고 자신의 경험만을 의지하여 작은 성이기에 이길 수 있다는 자기 판단을 갖고 올라갔다고 패배한다. 이들은 여리고성 전투 때는 주의 판단을 구했지만 아이성 전투 때는 주의 판단을 구하지 않았다. 결국 패배하고 돌아와서 주의 판단을 구한다.
다윗은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매순간 판단력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1절>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주의 판단력을 왕(=나)에게 주시고 왕의 아들(=솔로몬)에게 주소서.”
<시72편>을 압축하면 다윗이 하나님에게 기도하길 자신과 아들이 왕으로 민족을 섬기며 의로운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이 주의 옳은 판단력에 순종하며 살길 축원한다. 이거 하나만 분명하면 인생을 참 행복하고 반듯하게 살 수 있다. 만일 내 자녀에게 ‘바른 판단력’만 제대로 가르친다면 나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준 것보다 더 훌륭하게 부모노릇한 것이다.
<2, 4, 6, 7, 8, 12, 13, 15절> ‘저가’라고 반복적으로 나온다. 여기서 ‘저가’란 <1절>의 “주의 판단력과 주의 의를 가진 인생에게는 이런 축복이 있을 것이다”는 예언적인 축복이 기록되어 있다.
<2절> 주의 판단력을 가지면 모든걸 의롭고, 공의롭게 판단하게 되고,
<3절> 주의 판단력을 가지면 백성들에게 평강을 선물로 주게 되고,
<4절> 주의 판단력을 가지면 가난한자, 궁핍한자, 압박당하는 자, 즉 주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그의 마음도 머물게 된다. 주의 판단력을 가지면 주님과 같은 심정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가게 된다. 주님의 마음은 항상 고아와 과부에게 가 있다. 그래서 고아의 아버지가 되시며 과부의 재판장이 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주의 판단력을 가질 때에 가난한자, 고통당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 가난한자, 고통당하는 자를 무시하는 자의 장래는 어둡다. 요즘 잘나가는 어떤 기업이 있는데 가난한자와 연약한자들을 위해 흘려보내는 것이 전혀 없다면 그 기업에는 투자도 하지 말고, 펀드, 주식도 하지 말라. 결국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업은 장래가 없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나 기업, 혹은 공동체에게 권력과 물질을 주시는 이유가 있다. 전부 다 내것이라고 우기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 일부를 가지고 반드시 가난한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 쓰라고 주님은 내 능력 이상으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교회에 물질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끼리 먹고 놀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흘려보냄으로 저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을 감당하길 원하신다.
우리교회가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늘 은혜롭기 위해서는 늘 우리 마음이 가난하고 궁핍한자들에게 가 있고 저들에게 우리가 가진 것들을 흘려 보낼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마음의 행복과 교회의 하나됨의 은혜를 허락하실 것이다.
<5절> 주의 판단력을 가지면 하나님을 경외(=두려워)하게 된다.
<7절> 주의 판단력을 가지면 의인이 흥왕하고 마음에 평강이 풍성하다. 이 복이 우리 성도들과 가정에게 있길 축원한다.
<8절> 주의 판단력을 가지면 그의 지경이, 그의 영향력이 점점 넓어질 것이다.
<9~11절> 주의 판단력을 받아 살면 명예를 주시고, 원수를 이길날이 오고, 물질이 따라올 것이다.
<12~14절> 주의 판단력을 가진 자는 결코 가난한자와 궁핍한자를 무시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들을 품고 살아갈 때에 <16절> 이하의 복을 주신다.
<16절> 주의 판단력을 가지면 풍성하고 왕성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주의 판단력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고, 아들 솔로몬에게도 주의 판단력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왜? 주의 판단력이 있으면 엄청난 축복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이다.
결국 기도란 주님이 주시는 판단력을 받는 시간이요 기회이다. “주님, A입니까? B입니까? 제 눈에는 A가 좋아 보이는데 제가 좋아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주님 저에게 주의 판단력을 주시옵소서.”
눈으로 보기 좋아 보이는 것을 결정한 사람이 롯이다. 주의 판단력을 구할 때에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17절> 주의 판단력을 가지고 살면 사람들이 주의 판단력을 가진 나로 인하여 복을 받는다.
예수 잘 믿는것이 뭘까? 나는 이 물음에 굉장히 많은 시간을 들여 생각했고 지금은 분명한 답을 갖고 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하자. 회사를 운영하는 분들은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우리 회사와 거래하는 거래처들이 우리 회사로 인하여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 어린이집(학원)에 오는 아이들이 손해 보는일 없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 교회 나오는 성도들이 손해보는일 없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다른 사람의 손해를 통해 나의 이익을 취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다. 남을 밟아야 내가 올라간다는 세상적인 생각 버리고 남을 섬기면서도 내가 올라갈수 있는 길을 주의 판단력을 가지고 찾아서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요 성공자가 되길 축원한다.
나에게 물건 판 사람은 남아야 한다. 만일 나에게 물건 팔고 손해난다면 그건 그 사람도, 나도 거래 잘못한 것이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손해 주는 인생 살지 말길 바란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는 방법이다. 이것만 제대로 된다면 복음전파에 굉장한 유익이 있다. 만일 누군가에게 손해끼치는 일을 해야 한다면 교패 띄었다가 그 일 끝나고 다시 부치는것이 신앙양심상 옳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내 주변사람들에게 내 덕 좀 보게 살게 만드는 인생 살자. <다같이> 나를 만난 사람들이 내 덕 보고 살게 하자. <옆> 제 덕 볼 날이 곧 올겁니다.
제 소원은 우리 성도들이 저 만나서 손해 보는일 없길 바라고, 우리 성도들이 저 만나서 작은것이라도 덕 좀 보고 살길 소원한다. 어떤 사람은 曰 “제가 목사님 만나서 덕 볼라는것 없어요”라고 한다. 그런 말하지 마라. 그럴려면 뭣하러 만나나? 성도는 목사 덕 좀 보고 살고, 목사는 성도 덕 좀 보고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야 정도 들고 예수 안에 한 형제, 한 자매 아닌가? 이렇게 서로가 사랑의 빚을 지고 살면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들로 인하여 좀 더 따뜻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