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말사람들의 활동 코스
1. 송파구의 문화유산
1) 풍납동토성(사적 11호)
지정일 : 1963.01.21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았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풍납리식 민무늬토기·신라식 토기들과 그물추·물레·가락바퀴(방추차)·기와 등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 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더욱 연구·조사 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되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 있는 곳이다.
※(광주풍납리토성 →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2) 삼전도비(사적 101호)
지정일 : 1963.01.21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삼전도비 → 서울 삼전도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3) 석촌동고분군(사적 243호)
지정일 : 1975.05.27
삼국시대 백제 초기의 무덤들이다. 표고(바다의 면이나 어떤 지점을 정하여 수직으로 잰 일정한 지대의 높이) 20m 정도로 남북 방향의 얕은 뚝 모양 대지 위에 있다. 여러 돌무지무덤, 돌덧널무덤, 독무덤(옹관묘), 널무덤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그밖에 봉토분이나 화장유구 등도 발견되었다. 이 중 대형 널무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무덤 양식으로 제일 아래층의 점토를 파내고 그 안에 8기의 목관을 안치한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백제가 한성에 도성을 정한 후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형성된 고분군으로 백제의 매장 풍습과 문화·정치·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적석총이란 고구려 초기부터 나타난 고구려 계통의 무덤으로서 돌무지무덤이라고도 한다. 석촌동 무덤들은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서 일제 때 처음 조사되었다. 1호, 2호 무덤은 주민들이 농사 는 땅으로 이용해서 내부구조와 유물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며, 3호 무덤은 기원전·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 형식인 기단식 돌무지무덤(기단식적석총)이다. 무덤은 높은 지형을 평평하게 하고 밑 테두리에는 매우 크고 긴 돌을 두르고 자연석으로 층단을 이루면서 쌓아올려 3단으로 되었는데, 옛 고구려 지역인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보다 큰 것임이 밝혀졌다. 5호 무덤은 조사가 완전하게 되지 않아 구조와 유물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무덤 주변에는 무덤을 두르고 있는 돌을 2단으로 쌓았다. 내부구조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는 없고, 이 지역 지배계층의 무덤으로서 주변에 만들어진 무덤의 주인보다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 같고, 독무덤(옹관묘)이나 작은 돌방무덤(석실묘)에 묻힌 사람들 보다는 조금 높은 신분계층의 사람들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이 무덤들은 가락동·방이동 무덤과 함께 초기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 서울 석촌동 고분군)으로 명칭변경 되었다. (2011.07.28 고시)
4) 방이동고분군(사적 270호)
지정일 : 1979.12.28
서울 방이동 일대에 있는 백제전기(4C초∼475)의 무덤들이다. 제1호 무덤은 봉토의 지름이 12m, 높이 2.2m로 널길(연도)과 널방(현실)을 가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도굴로 인해 남아 있는 유물이 없었으나, 주민에 의해 3접의 토기가 수습되었다. 4호 무덤은 아치형천장(궁륭식천장)을 한 굴식돌방무덤으로, 자연적으로 유약이 입혀진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고배)와 굽다리접시뚜껑을 비롯한 토기류와 철제류가 출토되었다. 6호 무덤에서 나온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의 경우 굽구멍(투창)이 전형적인 신라토기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이는 6세기 이후 한강유역이 신라영토로 되었을 때 만들어진 신라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방이동 유적은 백제의 수도가 한성에 있을 때 만들어진 전기무덤으로 가락동·석촌동무덤과 함께 한성백제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적이다.
※(방이동백제고분군 → 서울 방이동 고분군)으로 명칭변경 되었다. (2011.07.28 고시)
5) 몽촌토성(사적 297호)
지정일 : 1982.07.22
백제시대 토성이다. 1983년부터 1989년까지의 발굴 조사를 통해 돌무덤, 토기, 낚시바늘, 돌절구 등이 출토되었으며, 현재 몽촌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둘레 2.7km. 자연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으며, 토성을 방비하는 물길인 해자와 나무울타리가 출토되었다. 백제 초기의 군사적, 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성곽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뼈로 된 비늘 갑옷”
몽촌토성에서는 동물의 뼈로 만든 비늘 갑옷이 출토되었다. 돼지나 사슴의 뼈로 만들어진 것으로, 비늘에 구멍을 뚫어서 서로 엮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갑옷이라고 하면 흔히 쇠를 떠올리지만 백제인들은 쇠 대신 동물의 뼈를 사용해서 가볍고 활동성이 좋은 갑옷을 만들었다. 이 뼈비늘 갑옷은 백제의 대표적인 갑옷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성벽을 쌓고, 나무 울타리로 목책을 세웠던 흔적도 확인되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만들기도 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도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문터와 집자리,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고, 출토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특히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서진(265∼316)대의 유물이어서 시대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백제의 도성인 위례성이라는 견해와 방어용 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들을 비롯한 백제 전기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 있는 곳이다.
※(몽촌토성 → 서울 몽촌토성)으로 명칭변경 되었다. (2011.07.28 고시)
6) 충헌공 김구 묘역(시도유형문화재 59호)
지정일 ; 1984.11.03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김구(1649∼1704)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김구는 숙종 8년(1682)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사간원에 재직하면서 당대의 시국에 대한 많은 상소를 올리는 한편 노론과 소론의 격심한 당쟁을 완화시키려 애썼다. 그 후 대사간을 거쳐 판결사로 있을 때에는 노산군의 복위를 주장하여 단종으로 왕위를 회복시켰고, 아울러 단종비 송씨의 묘를 능으로 추봉하고 능을 조성하는 공사를 맡아 보았다. 이후 형조판서를 거쳐 숙종 29년(1703)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임금을 충직하게 섬기고 국왕의 위력에 굽히지 않았으며 의지에 따라 처신하여 임금의 총애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그가 죽은 뒤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지붕돌에는 용, 봉황, 불로초, 구름 등의 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어 단순하고 밋밋한 아랫부분과 대조를 이룬다. 영조 19년(1743)에 세운 비로, 비문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이 썼다.
7) 신선경과 유인호 묘역(시도유형문화재 78호)
지정일 : 1991.12.24
조선 전기의 문신인 신선경의 묘를 비롯한 거창 신씨들의 묘역이다. 신선경은 세조 1년(1456) 사헌부 장령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거창 신씨는 원래 중국 송나라 개봉부 출신인 신수(愼修)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의 수도 개경에 왔다가 고려에 귀화하여 고려인이 됨으로써 거창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공원 내에 있는데, 이 가운데 신선경의 묘는 약 500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정부인 한씨와의 쌍분이다. 2개의 봉분 가운데에는 묘비·상석이 있는데 묘비 윗부분이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어 묘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임진왜란 때 이항복과 함께 3등공신으로 선조대왕을 보필한 문양공 류희림(柳希霖), 문원군 류복룡(柳伏龍), 공조참의 류인호(柳仁濠)의 묘소이다. 류희림은 복룡의 아들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명종 15년(1560) 1,000여명의 성균관 유생을 대표하여 다시 일어나고 있는 불교를 비판하고, 선종·교종 모두를 폐지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명종 16년(1561)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선조 14년(1581) 형조참판으로 동지사가 되어 중국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가지고 간 지방의 산물이 부족하여 낮은 벼슬자리로 옮겨졌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첨지중추부사로서 왕을 호종하여 좌승지로 발탁되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예조참판 등을 거쳐 1597년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죽은 뒤인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 3등에 봉해지고 문양공에 봉해졌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공원 내에 있으며, 묘역에는 상석·망주석(望柱石: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돌기둥)·문인석·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들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무덤 가까이에 세워두는 비) 등이 있다.
8) 문화류씨묘역(시도유형문화재 79호)
지정일 ; 1991.12.24
임진왜란 때 이항복과 함께 3등공신으로 선조대왕을 보필한 문양공 류희림(柳希霖), 문원군 류복룡(柳伏龍), 공조참의 류인호(柳仁濠)의 묘소이다. 류희림은 복룡의 아들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명종 15년(1560) 1,000여명의 성균관 유생을 대표하여 다시 일어나고 있는 불교를 비판하고, 선종·교종 모두를 폐지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명종 16년(1561)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선조 14년(1581) 형조참판으로 동지사가 되어 중국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가지고 간 지방의 산물이 부족하여 낮은 벼슬자리로 옮겨졌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첨지중추부사로서 왕을 호종하여 좌승지로 발탁되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예조참판 등을 거쳐 1597년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죽은 뒤인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 3등에 봉해지고 문양공에 봉해졌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공원 내에 있으며, 묘역에는 상석·망주석(望柱石: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돌기둥)·문인석·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들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무덤 가까이에 세워두는 비) 등이 있다.
9) 송파다리밟기(시도무형문화재 3호)
지정일 : 1989.08.16
다리밟기는 정월 대보름에 하는 놀이로 자기 나이만큼 개울가 다리를 밟으면 다리에 병이 나지 않고, 모든 재앙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복도 불러들인다는 신앙적인 풍속에서 나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다리밟기를 하면 다리병을 앓지 않는다는 관념이 강한 것은 다리(脚)와 다리(橋)의 발음이 같은데서 생긴 민간신앙이며, 언어의 유희성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다리밟기는 답교 또는 답교놀이라고도 하며 강릉지방에서는 다리빼앗기라고도 한다. 다리밟기놀이는 양반에서부터 서민까지 구분없이 즐겼으며, 다리밟기를 할 때에는 사대문도 닫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옛날 장안에 있던 다리는 몇 개 되지 않아 몰려든 사람들로 혼잡해지자 양반층에서는 서민과 어울리기를 꺼려 하루 전날인 14일 저녁에 다리를 밟아 양반다리밟기라 하였고, 부녀자들은 16일 저녁에 다리를 밟았다고 한다. 무리를 지어 다리밟기를 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어 혼잡한 가운데 여흥으로 기분을 돋우던 것이 점차 그 성격이 변하여 놀이패가 따로 조직되면서 연희성을 띠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송파다리밟기는 뛰어난 가무가 특색이다. 다리밟기놀이는 고려 때부터 행하여졌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며 우리민족의 생활감정이 담겨 있는 민속놀이이다.
10) 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
지정일 : 1973. 11. 11
산대놀이는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 지방에서 온 탈놀음으로 구파발, 녹번, 애오개(아현)등에 본산대가 있었고 그 분파로 보이는 양주구읍, 퇴계원, 송파, 노들(노량진)등지에 산대놀이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관원관노놀이의 성격을 띤 양주별산대놀이와 상역지에서 성행하던 탈꾼패놀이의 일종인 송파산대놀이뿐이다.
송파(현 잠실대교 근처)는 서울 근교 오대 한강나루터 중의 하나로 수운으로는 강원도까지 배가 내왕하였고, 육운으로는 마행상들이 전국을 돌았던 상역지였다. 조선후기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열다섯 향시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상업적 부촌이었기 때문에 송파산대놀이의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동대문밖의 우시장과 천호동시장 등이 생겨나 송파의 상업적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을축년(1925년) 한강 대홍수로 인하여 마을이 유실되어 신송파(가락동)와 돌마리(석촌동)로 물러나 정착하면서부터 차츰 탈놀이도 시들어 갔으며 겨우 명맥만을 유지해오다 197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면서부터 다시 전수활동이 활발해졌다.
연희시기는 정월대보름, 단오, 백중, 추석등의 명절에 세시놀이로 행해졌는데 특히 백중 명절에는 각 지방에 보양을 띄어 명연희자들을 초청하여 1주일씩 탈놀음을 하였다 하며, 또한 상역지였기 때문에 장이 덜 되어도 상인들이 추렴하여 줄걸고(줄타기), 씨름 붙이고, 산대놀이를 벌이면서 장이 어우러지게 했다고 한다.
연희형태는 다른 탈놀음같이 춤이 주가 되고 재담과 소리와 동작이 곁들어지며 반주음악은 삼현육각의 염불 12박, 타령, 굿거리 장단이 주가 되며, 춤사위는 염불 거드름춤, 타령 깨끼리춤(깨끼춤), 굿거리 건드렁춤의 유형으로 나뉘며 40여종의 춤사위로 세분화되어 있어 한국민속 무용의 춤사위로 대변할만 하다.
마당구성도 탈놀음 12마당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으며, 가면수도 32개로 산대도감 탈들이 거의 보존되어 있어 비교적 고형을 보존하고 있다.
11) 향온주(시도무형문화재 9호)
지정일 : 1993.02.13
향온주는 멥쌀과 찹쌀로 빚은 맑은 술로, 조선시대 양온서라는 관청에서 빚어 대궐 안으로 들여보내던 전통 궁중주이다. 향온주를 빚을 때는 궁중어의들의 관리 아래 항상 어의들이 처방을 내려 빚었고,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문헌인『고사촬요』, 『규곤시의방』에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누룩 만드는 법이 특이한 것이 특징이다. 녹두와 보리, 밀을 섞어 빻아 누룩을 만들고 일주일 동안 밤이슬을 맞혀 누룩 냄새를 없앴다. 발효가 끝나면 덧술을 여러 번 거치고 한 달 가량 후숙을 하고, 소줏고리에 넣어 증류시킨다. 증류가 끝나서도 옹기 항아리에 넣어 보관시켜 6개월간 마셨다.
12)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보물 1683호)
지정일 : 2010.10.25
이 《다산사경첩》은 정약용(1762-1836)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조영했던 다산초당의 전후좌우에 있는 다조(茶竈)ㆍ약천(藥泉)ㆍ정석(丁石)ㆍ석가산(石假山)의 네 가지 경물을 읊은 칠언율시를 행서로 쓴 것으로 어느 필적보다도 그 의미가 깊다. 표지 제첨은 예서로 “茶山四景帖(茶山親墨橘頌堂珍藏)”이라 쓰여 있다. 정약용의 글씨는 초년에 전대의 명필 이광사ㆍ강세황의 서풍을 따르다가 강진 유배 이후로는 특유의 서풍을 이루었다. 이 첩은 강진 유배시절 이후의 정약용의 서풍을 볼 수 있다.
13) 기사계첩(보물 639호)
지정일 : 1978.12.07
숙종 45년(1719)에 있었던 소속이 같은 문인들이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풍류를 즐겼던 모임인 계회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글과 그림으로 만든 화첩으로, 크기는 가로 53㎝, 세로 37.5㎝이다. 70세 이상 대신들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왕의 시문, 전체 내용을 요약한 김유의 발문과 참석자 명단, 행사장면의 그림 등 50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사계첩은, 보물 638호와 거의 비슷하지만, 김창집을 비롯한 계회참석자 10인의 초상화에서 평소 집무복인 단령의 모양이나 색채가 다르며, 조선 후기 문신인 홍만조의 축시제목이 없는 점 등으로 두 기사계첩을 대조하여 연구해 볼 수 있다. 임금의 초상을 그렸던 박동보·장득만·허숙 등의 화원들이 초상화를 그린 이 기사계첩은 보물 제638호로 지정된 기사계첩과 거의 같으나, 보물 제638호가 1974년 2면을 1면으로 붙인데 반해 이 화첩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작품으로 10여 명의 초상화와 자필로 쓴 축시, 화원 명단이 들어 있어 당시 화풍과 서체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4) 김응남 호성공신교서 및 관련 고문서(보물 제1756호)
지정일 : 2012.02.22
김응남 호성공신교서는 임진란에 선조와 세자를 호종하고 피란할 때 시종(侍從)한 공로로 난후인 1604년에 김응남에게 내린 것이다. 호성공신은 서울에서 의주(義州)까지 시종(侍從)한 신하들을 공로에 따라 3등으로 나누어 모두 86명을 녹훈하였는데, 1등은 이항복(李恒福)등 2명, 2등은 이원익(李元翼)등 31명, 3등은 정탁(鄭琢)등 53명이다. 김응남은 2등공신의 9번째에 책록되었다.
본 교서의 구성은 김응남의 관계(官階)에 이어 선조가 몽진(蒙塵)할 때 의주까지 호종한 공로로 2등 공신에 책봉한다는 것과 그에 따른 포상으로 본인과 부모·처자의 벼슬을 2계(階)씩 올려주고, 자식이 없으면 조카나 여조카에게 1계씩을 올려 주며, 적장자에게 벼슬의 지위를 세습하게 하며, 노비(奴婢)9구, 전(田)80결(結), 은자(銀子)7냥(兩), 표리(表裏)1단(段), 내구마(內廐馬)1필(匹)을 하사 한다는 내용을 열기(列記)하였다. 끝으로 공신 86명의 명록(名錄)과 본 교서의 발급일인 ‘萬曆三十二年十月日’을 쓰는 순서로 되어있다. 발급연월일 위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인장이 날인되어 있다. 축의 바깥 하단부에는 ‘안대진제오정서(安大進製吳靖書)’라 쓰여 있어 교서문은 안대진(安大進, 1561~?)이 짓고 교서문의 글씨는 오정(吳靖, 1579~1623)이 썼음을 알 수 있다. 겉면과 안면의 표장, 축두(軸頭)의 형태, 축을 묶는 색실띠[多繪帶]와 상아침(象牙針)등이 최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현존하는 여러 호성공신교서와 비교할 때 기준이 되는 예에 해당된다.
김응남 증시교지는 1753년(영조 29, 건륭 18)4월 23(무신)일에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1690~1752)과 좌의정 정석오(鄭錫五, 1691~1748)등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에게 시호가 하사될 때 좌의정 김응남에게도 ‘충정(忠靖)’이라는 시호(諡號)가 하사되었는데, 이는 증시교지(贈諡敎旨)의 발급일자(發給日字)인 ‘건륭십팔년사월이십삼일(乾隆十八年四月二十三日)’과도 일치되고 있다. 또한 발급일자 위에는 ‘시명지보’의 어보(御寶)가 안인(安印)되어 있다.
김응남의 호성공신교서 및 증시교지는 김응남의 전기(傳記)자료로 임진난사 연구의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고문서(古文書)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여러 호성공신교서 중에서도 1604년 책록 당시의 원장(原粧)을 잘 보존하고 있어 호성공신교서의 형태적 기준이 되고 또한 교서문을 지은 제진자와 교서문을 쓴 서사자가 적혀 있는 건수도 극히 희소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 강동구의 문화유산
1) 서울 암사동 유적(사적 제267호)
지정일 : 1979.07.26
서울 암사동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0여 년 전에 우리의 조상인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 유적으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밝혀진 신석기시대의 최대 집단취락지이다.
이 유적은 동남쪽의 구릉에 신석기시대 다음시대인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유적(無文土器遺蹟)과 인접되어 있어 두시대의 문화가 접촉 하는 양상을 알려주며, 또 농경문화 개시를 입증하여 주는 고고학적 자료도 발견 되어 한국선사문화의 추이를 밝히는 데 있어서 유일하고도 귀중한 유적이다.
이 유적은 1925년 을축년 홍수 때 한강변 모래언덕 지대가 심하게 패어져 수많은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노출되면서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임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1967년에는 대학연합발굴단, 1968년에는 서울사대 조사팀, 1971∼1975년에는 국립중앙 박물관, 그리고 1983년에는 서울대 암사동 유적발굴단에 의한 대규모 조사로 수혈주거지군(竪穴住居址群)과 그 부속시설이 확인되었고, 이후 계속된 발굴조사에 의해 많은 빗살무늬 토기와 석기는 물론 청동기·백제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이 서울 암사동 유적은 1979년 7월 26일 사적 제 267호로 지정되었고 1981∼1988년까지 유적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총면적 78,133㎡의 문화재 보호구역을 확대하여 9차에 걸친 복원공사로 신석기 시대 움집이 복원되었고 원시생활전시관을 건립하였으며, 이용 시민들의 불편이 없도록 주차장, 산책로 등 편의시설을 완비하여 '88년8월 준공되어 개방되고 있다.
신석기인의 생활상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집터로써 암사동 유적은 제일 먼저 알려진 곳으로 이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기원전 4∼3천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거의 대부분 땅을 깊이 파고 움집을 견고하게 지어서 살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는 완전한 생산경제의 단계가 아니고 일부 수렵, 채집, 어로에 의존하는 경제단계였기 때문에 대형 저장시설보다는 대부분 간단한 제작시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암사동 유적은 한강 주변에 위치한 유적으로 고기잡이를 중심으로 한 어로생활이 주 생계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어망추, 작살 등 어로도구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뒷받침되며, 화살촉들의 발견으로 인근야산에서 수렵을 했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또 도토리, 갈판, 갈돌의 발견은 신석기인들의 주식량이 도토리였으며 보습, 돌낫같은 농기구의 출토는 밭농사가 일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움집
신석기시대 살림집은 동굴을 이용한 경우도 있으나 움집이 일반적이다. 움집이란 일정한 넓이와 형태를 가진 구덩이를 파 집바닥을 땅 밑에 두고 구덩이 안은 별도의 벽체 시설 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닿게 된 집을 말한다.
신석기시대의 움집은 해안가 구릉이나 큰 강변의 대지에 지어졌는데, 직경 4∼6m 크기의 원형이나 모를 죽인 방형의 구덩이를 깊이 50∼100㎝정도 판 다음 화덕자리 등의 내부시설을 마련하고 지붕을 덮었다.
화덕자리는 돌이나 진흙으로 원형이나 타원 형, 장방형의 테두리를 돌려 집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보온과 취사에 이용되었다. 바닥은 아무런 시설이 없거나 또는 진흙을 깔아 다진 것이 있는데 그 위에 풀이나 짐승가죽 등 을 깔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은 움구덩이 주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한 쪽 끝을 움중앙에 모이게 묶어 골격을 형성하였는데 서까래 아래 사이에 잔나무 가지나 갈대, 억새 등 의 풀을 이어 덮었다. 움집의 규모로 작은 움집은 2∼3명, 큰 움집은 5∼6명이 생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
집터에서 드러난 유물 중 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빗살무늬 토기이다. 이 토기는 바탕흙이 사질토에 운모가루 또는 석면과 활석이 섞여 있으며, 흙테를 하나씩 따로 빚어 차례로 쌓아올린 수법으로 만들어졌다. 그릇 모양은 곧은 입술모양에 뾰족밑 또는 둥근밑이고 반 달걀 모양을 하고 있다. 빛깔은 부드러운 갈색이나, 문살무늬, 생선뼈무늬 등 여러 유형이 있으며 무늬가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지역별로 크게 동북, 서북, 중서부, 남부지방 의 4개 문화영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중서부 지방은 뾰족밑 토기가, 동북지방은 납작밑 토기가, 남부지방은 둥근밑 토기가 주류를 이루 며 뾰족밑 토기는 계란의 윗부분을 옆으로 잘라 버린 것 같은 모양을 보인다. 암사동 집터유적지에는 여러 가지 석기가 드러났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돌화살촉 · 돌도끼 · 공이 · 긁개 · 갈판과 갈돌 등이며 이러한 유물은 들짐승의 사냥과 가죽을 벗기는 데 쓰였다고 보여 지며, 공이는 들짐승의 뼈나 열매 같은 것을 부수는데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갈판과 갈돌은 도토리알과 같은 열매를 갈아서 가루를 내는데 쓰였을 것이다.
2)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시도유형문화재 제 90호)
지정일 : 1993.04.03
조선 세종 때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7명의 왕을 섬기면서 도덕정치를 실천한 광릉부원군 이극배(1422∼1495)와 그 후손들의 묘이다. 이극배는 세종 29년(144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큰 공을 세워 좌익공신 3등에 기록되고, 이어 광릉군에 봉해졌다.1459년 북방의 야인정벌 때 신숙주의 종사로 출전하였으며, 1462년부터 이조 · 예조 · 병조 · 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성종 10년(1479) 영중추부사가 되었고, 1481년부터 2년 동안의 흉년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진휼사로 활약하였다. 성종 16년(1485) 우의정이 되었고, 1493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노병을 구실로 사양하였으며, 다시 광릉부원군에 봉해졌다.
묘역은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에 있으며, 이 가운데 이극배의 묘는 연산군 1년(1495)에 조성된 것으로 부인 경주 최씨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묘 앞에는 묘비 · 상석 ·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좌우로는 문인석 · 무인석이 각 2쌍씩 있다.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연산군 2년(1496)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명필가로 유명한 예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 신종호가 지은 것이다. 머릿돌에 새겨진 특이한 구름무늬와 비문의 서체, 정교한 석공기술은 커다란 예술적·기술적·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3) 문희공 유창 묘역(시도유형문화재 제 96호)
지정일 : 1995.01.25
신도비란 왕이나 2품 이상의 공신들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가까이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말 · 조선초의 유명한 문신인 유창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유창( ∼1421)은 고려 공민왕 20년(1371)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학우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맡아 보았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그를 도와주어 개국공신이 되었고, 태종 8년 (1408) 태조가 죽자, 능을 지키는 관리가 되어 3년간 그의 능을 지켰다. 태종 16년(1416)에는 옥천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일찍이 이성계와 사귀어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개국 후에도 여러 차례 왕에게 강론을 하였다. 성격이 부드럽고 너그러웠으며,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이 겸손하여 사람들이 당나라의 누사덕(婁師德)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비가 서 있는 이 일대에는 유창의 묘와 그 자손들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는 이 비 외에도 여러 석조물들이 남아있어 당시의 석조미술과 묘제연구에 중요자료가 되고 있다.
4) 바위절호상놀이(시도무형문화재 제10호)
지정일 : 1996년 9월 30일
출상
출상일 망인이 상여에 운구되면 상주, 복재기들이 발인제를 지낸다. 발인제가 끝나면 상여꾼들이 상여옆에 도열하고, 선소리꾼이 상여주위를 돌며 요령잡기소리를 구슬프게 부르면 상여꾼들은 상여를 메고 일어선다. 이때 이 고장 특유의 농악악사가 향토가를 부르면서 선두를 이끌고 집을 떠난다.
상여(喪)놀이
상여가 집에서 발인된 뒤의 대열은 악사, 방상시, 명정, 만장, 지전, 공포, 불삽, 지초연, 혼백, 상여, 운삽, 상주, 복재기, 조객 순으로 길을 떠나는데 상여꾼들은 이 마을 특유의 선소리를 주고받으며 상여가 뒤로 밀리는 듯 앞으로 나가는 모습이 마치 강물이 출렁이는 모습과 같아 보기에 매우 흥겨웁기도 하다.
노제(路製)
상여가 장지를 향하여 가는 동안 미처 상가를 찾지 못한 빈객, 조객은 상여 뒤를 따라간다. 상여는 망인이 살아생전 친히 지내던 사람의 집 앞이나 자기소유 전답의 마지막을 지나칠 때 잠시 쉬는데 이 때 길거리에서 제를 올리고, 빈객·조객은 마지막으로 문상을 하게 된다.
외나무 건너기
농촌지역의 개천에는 흔히 물속에 동발을 박고 통나무 2∼3개를 한데 묶어 발판을 만들거나 발판 위에 떼장을 엎어놓은 외나무다리가 놓여있다. 상여꾼들은 이 외나무다리 위에서 V자가 되어 중심을 유지하면서 건너간다.
징검다리 건너기
상여 발인 후 장지까지 가는 동안 여러 가지 형태의 길을 만나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개천에 돌을 띄엄띄엄 놓은 징검다리를 만나게 되는데 상여를 메고 징검다리를 건너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상여가 약간 요동하지만 선소리에 상여꾼 발을 맞추면 무난히 건너게 된다.
달구질
출상에서부터 상여놀이, 노제, 징검다리 건너기, 외나무다리 건너기를 마친 상여는 하관과 동시에 성분을 하면서 이승에서 마치 집터를 다지듯 고인이 천년만년 지낼 유택을 짓기 위하여 바위절 마을의 특유한 풍습인 갖은 덕담과 방아타령을 부르며 달구질을 한다.
5) 나전칠장(시도무형문화재 제1호)
지정일 : 1996년 12월 31일
나전칠장이란 조개·소라·전복 등의 껍질로 기물(器物)의 면과 가구(家具)의 면을 칠과 함께 장식하여 완성한 나전칠 기능이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곧 나전칠은 옻칠한 농짝이나 나무 그릇 등에 진주빛이 나는 자개조각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박아 붙여서 장식한 공예품이다. 나전(螺鈿)이란 일명 나전(螺甸)·나진·나감(螺嵌)·함방(陷蚌)이라고도 하며, 나(螺)는 조개껍질을 일컫고 전(鈿)은 장식을 의미한다. 자개의 가공기법은 끊음질 기법과 주름질 기법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끊음질 기법은 굵고 가는 직선의 상사(자개)를 대각선ㆍ직선ㆍ사선(斜線) 등 기하학적 연속 무늬를 이룰 수 있도록 끊어가면서 문양을 장식하는 가공기법인데, 문양은 국화문ㆍ거북문ㆍ능화문(菱花紋)ㆍ둥근 완자문(卍字紋)ㆍ대나무문ㆍ능화뇌ㆍ산수문 등 다양한 형태가 사용된다.
이 기법은 11과정을 거치는데 먼저 물과 식초의 용액에 자개를 담그고, 다음 굽은 자개를 인두로 반듯하게 퍼지게 한다. 셋째 퍼진 자개를 목척(木尺)으로 눌러가며 거두(상사톱)로 썰어 내는 곧 '상사싼다'를 하며 썰어낸 자개를 '상사'라 한다. 다음 송곳으로 점선을 그어 표시한 다음, 부레풀이나 아교칠을 묽게 하여 얇고 고르게 칠한 다음, 그늘에 건조한다. 다음 부레풀로 덧칠을 해가면서 끊음질 기법으로 상사작업을 한 다음 문양 밖으로 나온 너저분한 것들을 떼어내는 곧 '눈꼽떼기'를 하고 다음 아교를 자개 사이사이에 발라주는 작업을 하는데 이를 '아교물을 으깬다'고 한다. 다음 물로 칠표면의 풀을 씻어내는 소위 '풀빼기'를 하고 끝으로 떨어지거나 틀어진 곳을 바르게 잡아주는 '땜본다'를 한 다음 도장작업인 칠 작업으로 들어간다.
주름질 기법은 송곳ㆍ가위ㆍ실톱 등을 사용하여 자개를 문양대로 오려내어서 문양을 만드는 기법으로, 많이 사용하는 문양은 부귀다남(富貴多男)ㆍ십장생ㆍ사군자ㆍ불로장생도ㆍ운학(雲鶴)ㆍ연화ㆍ모란ㆍ석류ㆍ화조ㆍ당초거북ㆍ고기ㆍ운룡(雲龍)ㆍ학ㆍ사슴ㆍ산수문 등으로 다양한 양태를 띤다. 자개를 붙이는 데는 타찰기법ㆍ상감기법ㆍ부착기법ㆍ복채기법ㆍ시패기법ㆍ부식법ㆍ조각법 등이 있다. 이때 사용하는 접착제가 중요한데 민종태는 찰밥을 짓이겨서 생칠(生漆)을 섞은 특수하게 만든 접착제를 씀으로써 부식이 되지 않으며, 접착력이 강하다고 한다. 자개가 붙으면 틈이 생기는데 기와가루와 생옻을 섞어 만든 고래를 발라 메운다음 자개면 고래갈기를 한 뒤, 자개 등에 초칠과 고래갈기, 그리고 중칠ㆍ상칠을 한다. 상칠은 칠의 마지막 과정이다. 다음으로 초벌·재벌·광내기ㆍ생칠을 묻히는데 중칠이 끝난 뒤 칠로 때웠던 자리를 숯으로 갈아내면 구멍이나 흠이 있던 자리를 다시 칠로 메운다. 재벌광내기에서는 콩기름에 사슴뿔가루를 섞어서 칠면에 묻힌 다음 솜으로 문지르면 생칠이 깎여 솜에 다갈색으로 묻어나면서 광택이 난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칠전(漆典)이란 기술이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어, 고려시대 전기에 성행하기 시작하였고 중기부터는 그 기술이 중국을 능가하여 수출까지 하게 되었다.
민종태의 작품은 웅장하고 섬세함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면서도 나전칠 특유의 화려함도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에 예술적인 차원의 공예품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그는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장인정신이 투철하여 상업적인 작품으로는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 우리 공예의 전통을 살리고 계승해 나가는데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근래에는 출품 활동보다는 기술개발과 작품의 질을 높이는데 힘쓰고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 전통공예의 맥을 이으면서 특수한 나전칠 기법을 창조ㆍ개발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
첫댓글 ᆢᆢ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