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1784년 북경에서 이승훈(28세)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돌아와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해마다 사절단들이 북경에 서너 차례 드나들었고, 청나라에서 수많은 책을 구해 오기도 했다. 그 책들 가운데 1600년대 예수회 신부 마태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 (天主實義)를 비롯하여 『성경직해』(聖經直解) , 『칠극』(七克) 등과 같은 천주교 관련 서적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천주교에 관한 책들을 우리 학자들이 학문으로 연구하였는데, 나중에 그 진리를 깨달으면서 종교로 믿게 되었고, 서서히 천주교가 알려지게 되었다.
1779년 주어사 천진암에서 남인 학자 권철신, 이벽, 정약전 등이 중심이 되어 서학을 연구하였다.
그들이 서양 학문으로 생각한 천주학을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 하던 차에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이 동지사로 북경에 가게 되었고, 이승훈도 부친을 따라 북경에 들어갔다(1783년). 그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이승훈은 프랑스 신부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 교리를 배웠는데, 예수회의 드 그라몽 신부는 그에게 조선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가 세례를 받은 해는 1784년이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돌아올 때 여러 교리서와 십자가, 묵주, 성상 등 귀중품들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벽, 권일신, 정약용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렇게 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교우들은 날로 늘어갔다. 이들은 중인인 김범우의 집에 모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정치인들은 천주교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785년 관에서는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하던 사람들 중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양반들은 타일러 보내고, 중인인 김범우만 체포하여 모진 형벌을 내린 다음 귀양을 보냈는데, 형벌의 상처가 깊어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해서 그는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날로 심해졌고, 믿음을 지키던 이벽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뜻은 다른 선비들에게 계승되었고, 교회는 점차 발전하였다. 1786년 이승훈은 북경에서 보고 온 교계 제도를 본떠서 주교직과 사제직을 맡아 한동안 미사도 집전하고 강론도 하며 세례를 주는 등 성무를 집행하면서 교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1789년 북경 주교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주교는 그가 주교직과 사제직을 수행할 수 없음을 알리고 모든 성무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교우들은 또 다른 북경 사절단을 통해 신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우리나라의 미신, 조상 제사 등과 관련하여 어려운 문제를 알렸다.
구베아 주교는 머지않아 신부를 조선에 보내 줄 것을 약속하고, 조상 제사는 미신이니 결코 행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결국, 조상 제사가 미신이라는 주교의 편지 내용이 교우들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고, 반대자들에게는 박해의 구실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전통 관습인 조상 제사를 천주교가 엄격히 금지하자 양반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교우들이 천주교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신분과 상관없이 양반 지식층에서 중인 이하의 인물들이 교회를 지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순수한 신앙은 그대로 발전해 나갔다.
1794년 북경 주교가 처음으로 조선에 신부를 파견하였는데, 그가 바로 주문모 신부이다. 주문모 신부는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 등 남녀 교우들의 헌신적인 활동과 명도회(교리 연구 단체) 활동에 힘입어 교세를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가 처음 조선에 입국했을 때 4,000여 명이었던 신자가 몇 해 지나서는 1만 명에 이르렀다. 신자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위기를 느낀 정부에서는 주문모 신부 체포령을 내리고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와 거의 모든 평신도 지도자들이 희생당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위기를 겪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후 한동안 조정의 박해가 뜸해지자 한국 천주교회는 처음의 목자이던 주 신부를 잃고 북경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어 성직자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또한 교황에게도 조선 교우들이 당면하고 있는 실정을 알리고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 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두 개의 칙서를 반포하여 조선에 대목구를 창설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 천주교회는 북경교구에서 완전히 독립된 교구로 설정되었고, 파리 외방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다른 나라와 달리 이방인 학자들에 의해서 천주교가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고 독립된 교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는 창립 때부터 100여 년 사이에 네 번이나 큰 박해를 겪게 된다.
1악장 (Sonata)
Karl Scheit, Lute
Eduard Melkus , Violin
Gerald Sonneck, Viola da gamba
첫댓글 회장님 천주교의 역사 잘 보고 갑니다. 박해의 연속이였지만 교회는 꾸준히 성장해 왔군요.
유년시절 울 아버님 저에게 그러시더라구요. 순교하신 분들앞엔 예수님이 자신을 보여주셨을 꺼라구요. 그러지 않고서 어찌 그무서운 고통과 죽음을 이겨 냈겠나구요
어린마음에도 아버지 말씀이 맞다고 생각했지요. 수고하셧습니다.
우리 아들이 영국에서 공부할 때 영국인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고 강론을 들을 때 귀가 번쩍 하드랍니다. 김대건 안드레아의 축일이
있는 날 그 신부님은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선교사나 신부의 도움 없이 가톨릭 신앙이 자생적으로 태동한 유일한 국가라고 소개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