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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인(淸人)으로서 중국에 들어온 사람은, 남자는 모두 머리를 깎게 하고, 부녀는 모두 명(明) 나라 제도를 그대로 따르게 한다.
만인(滿人)은 모두 헌칠하게 크게 생겼고, 아들을 일곱 명까지 낳은 사람이 많았으니, 그들의 왕운이 아직 쇠퇴하지 않은 듯하다.
● 청인은 문식(文飾)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므로 대부분 순실(淳實)하다. 그러나 중국에 들어온 지 이미 오래고 또 문교(文敎)를 숭상하므로 그 풍속이 쇠퇴해졌다. 한인(漢人)은 대부분 경박(輕薄), 교사(狡詐)한데, 남쪽 사람이 더욱 심하다.
한인으로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은 만인과 반반씩을 차지했는데, 항시 나그네로서의 우울한 생각을 갖고 있다.
● 한족 여인은 모두 분을 바르는데 만족 여인은 바르지 않는다. 한족 여인은 발을 활처럼 만드는 전족(纏足)을 하는데 만족 여인은 그렇지 않다. 발을 활처럼 휘는 법은 남당(南唐) 이후주(李後主)의 궁인(宮人) 이요랑(李窅娘)에게서 시작되었는데, 대개 어릴 때에 발을 피륙으로 감아 놓으면 발이 구부정하면서 뾰족하여 그 형상이 마치 활처럼 되니, 그것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이다.
● 귀고리, 팔찌 및 머리꾸미개는 한족 여인과 만족 여인이 다 같다. 입에 붉은 칠을 하는 법은 입술에만 발라서 바라보면 마치 붉은 구슬을 머금은 것 같다.
한족 여인이든 만족 여인이든 막론하고 대부분 예뻤으며 관외가 더욱 미인이 많다고 일컫는다. 머리털을 깎는 법은 이마에 두른 털만 깎고 나머지 털은 모두 땋아서 뒤로 드리운다.
● 사내아이는 나눠서 두 갈래로 땋았다가 성장한 뒤에는 합쳐서 한 갈래로 땋는다. 계집아이는 머리털을 땋아 드리우기를 마치 우리나라 풍속처럼 하고, 출가한 뒤에는 모두 쪽을 찌되 고법(古法)대로 한다.
남자는 20세 이전에는 구레나룻이나 아랫수염을 모두 깎는데, 그것은 아마 활을 당기기 편리하게 한 때문이리라. 25세 이후에는 구레나룻만을 깎고 아랫수염은 두며, 30세 이후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 청인은 모두 한어(漢語)와 한서(漢書)에 능하나 한인은 만어(滿語)와 만서(滿書)에 능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무릇 궁궐에서나 아문(衙門)에서 기밀(機密)에 속한 일은 청어(淸語)를 사용하고, 황제에게 아뢰는 문자는 모두 청서(淸書)로 번역한다. 그리고 시골에서는 만인이건 한인이건 모두 한어를 쓰므로 만인의 후생들은 대부분 청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황제는 이를 걱정하여, 나이 어린 사람으로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를 뽑아서 영고탑(寧古塔)에 보내 만어를 배우게 한다고 한다.
● 관원이 행차할 때에는 말을 탄 한 사람이 반드시 좌석(坐席)을 가지고 앞서 가게 되는데, 그것은 좌석으로 품급(品級)의 고하를 구별하기 때문이다.
대소 인원(大小人員)은 모두 말을 타고 동, 서 천안문(天安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말에서 내린다. 길에서 황자(皇子)를 만나면 모두 말에서 내리되 각로(閣老) 이하는 그렇지 않다.
● 한인으로서 벼슬이 높은 자는 모두 교자를 타고, 청인은 지위가 각로에 이르더라도 교자를 타지 않으니, 그것은 아마 말타기를 익히는 뜻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리라.
● 환시(宦寺)는 명 나라 때의 폐단에 징계되어 벼슬이 6, 7품을 넘지 못하게 하였을 뿐더러, 청소하는 사역(使役)만을 시킬 뿐이다.
● 황제 이하 말 타는 사람은 반드시 손수 고삐를 잡고, 황제는 누런 고삐로 구별할 뿐이다.
● 상견(相見)하는 예(禮)는 읍(揖)만 하고 절은 하지 않으며, 경의를 표할 적에는 몸을 굽히고, 사의를 표할 적에는 머리를 조아린다. 그리고 친한 사람을 만나면 앞으로 나아가 두 손을 잡아 흔들어서 반가운 뜻을 나타낸다.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 대소 사역(事役)은 수레 모는 일, 밭갈이, 나무하는 일, 물 긷는 일, 절구질, 씨 뿌리는 일, 베 짜는 일, 바느질 등의 일인데, 모두 남자가 한다. 여자는 문밖을 나가는 일이 드물고 하는 일은 신 꿰매고 수놓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남쪽 지방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점사(店舍)의 일 또한 모두 남자가 한다. 길에서 여인이 서로 뒤섞여 다니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였다.
● 행객(行客)으로서 수레를 타지 않고 도보로 걷는 사람은 아주 적다. 도보로 다니는 사람은 반드시 이부자리 등 행장을 어깨에 멘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점사 주인이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는 아마 금법(禁法)에 관계될 뿐더러 간사한 소인을 방비하는 것이리라.
오가는 장사꾼들에게는 모두 장부를 비치, 그들의 성명, 주소 및 물화(物貨)의 이름과 숫자를 기록하니, 간사함을 조사하고 허위를 방비하는 일이 매우 엄격하다.
● 겨울에는 노인들이 밖에 나다니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다가 봄철이 된 뒤에야 비로소 볼 수 있었다. 이는 아마 추운 겨울에는 깊이 들어앉아 있다가 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다니기 때문이리라. 또 길에 노인은 한 사람도 오가는 일이 없었으니, 아마 노인을 우대하는 것이 풍속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노가재(老稼齋)의 《연행일기(燕行日記)》에 “일행 중에 나이 70이 넘은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한 곳에 이르렀더니, 그곳 주인이 그의 나이를 묻고 또 자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묻고는 곧 그의 낯에 침을 뱉었다.” 하니, 아마 비루하게 여겼던 때문이리라.
● 손님이 올 경우 평교(平交) 이상은 모두 대문 밖에서 영접 또는 전송한다. 손님이 문에 들어오면 손님에게 먼저 오르기를 양보하여, 손님이 먼저 오르면 주인은 그 뒤를 따른다. 읍양(揖讓), 주선(周旋)하는 일에도 예의가 곡진했다.
● 아이를 낳은 지 몇 달 뒤에는 곧 배냇머리[胎髮]를 깎아 버리고 자그마한 모자를 씌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열두어 살 이상이 될 경우에는 이마 위의 털을 길러서 그것을 땋아서 변자(辮子.길게 땋아서 뒤로 늘어뜨린 머리)를 만드니, 귀인이나 천인이나 다 그렇게 한다. 만약 개인끼리 싸울 때 남의 변자를 잘못 뽑은 사람은 살인한 사람과 똑같은 죄를 받는다.
● 관가에서나 민가에서나 모두 초[燭]를 쓰고 횃불은 사용하지 않는다. 금수(禽獸)의 기름을 섞어 모은 뒤에 솜으로 심지를 만들어 기름통에 넣어서 차례로 담갔다가 꺼낸다. 그래서 엉기면 다시 담가서 지름이 1치 남짓 되면 그 과정을 그만두고, 그 지름의 5분의 4를 더해서 길이를 만든다. 그런 다음 겉에 백랍(白蠟)을 먹여서 터지는 것을 방비한다. 대개 응지(凝脂) 7냥, 백랍 3냥으로 정량을 삼는다. 초의 모양은 위는 퉁퉁하고 아래는 점차 가늘다. 쇠꼬챙이 같은 것을 등잔대에 박아 거기에 초를 꽂는다. 대개 어용(御用), 군용(軍用) 또는 정월 보름날 밤에 다는 등이나, 민가에서 날마다 켜는 등에는 모두 이것을 사용한다.
● 유리등(琉璃燈), 양각등(羊角燈)은 모두 뿔을 녹여 아교로 만들어서 제조한다. 그리고 정월 보름날 밤에 다는 등은 별도로 기이한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꽃, 풀, 새, 벌레를 그리는가 하면 채색실로 술을 드리워 극도로 화려하게 한다.
● 관동에서는 나무 수레를 끌거나 밭을 가는데 오로지 소만을 사용하고, 관내에서는 토질이 부드러우므로 노새, 나귀, 말, 양 등을 함께 사용해서 간다.
● 어떤 사람이 오수전(五銖錢)과 개원통보(開元通寶)를 우리들에게 팔라고 요구했는데, 이는 대개 점칠 때 사용하는 돈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 한다.
돈을 계산하는 단위에는 맥(陌)과 조(條)가 있다. 맥, 조의 수는 관내와 관외가 동일하지 않다. 관내에서는 15냥을 1맥, 100냥을 1조라 하고, 관외의 것은 잊었다.
● 또 전표(錢標)의 법이 있는데, 부포(富鋪)에서 인지(印紙)에 그 돈 액수의 다소를 적고 거기에 도장을 찍은 다음, 그것으로 돈을 대신하여 서로 사용한다. 그 법이 매우 좋은데, 오직 북경 및 통주(通州)에서만 사용한다. 이는 곧 송(宋), 원(元) 시대의 이른바 지폐인 ‘초(鈔)’이며, 우리나라 국초의 저화(楮貨) 제도인 것이다.
● 연로의 점사 주인들은 그 자녀를 이따금 우리나라 역졸(驛卒)들과 부자 관계를 맺어 준다. 여러 역관(譯官)들 중에도 더러 이런 관계가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볼 때 은애(恩愛)가 애연(藹然)했다. 그 집에서는 반드시 주찬(酒饌)을 준비해 대접하고 또 토산물을 선사하였다. 이는 아마 어린아이의 액막이로, 마치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파는 것[賣兒. 자손이 귀하거나 낳아도 번번이 죽거나 하는 가정에서, 아이의 수명을 위해 부처, 큰 바위, 큰 나무 등에 수명 장수에 대한 여러 가지 뜻의 글자를 새기는 일]과 같은 것이리라.
● 촌락을 지날 적마다 남녀노소들이 나와서 구경하는데, 비록 두어 살 난 어린아이일지라도 모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일찍이 옛 역사책에서, “고구려의 동자는 달리기를 잘한다.” 라는 글을 보고서 마음에 괴이하게 여긴 나머지, ‘동자가 달리기를 잘하는 것은 천성인가 보다.’ 하였더니, 중국의 동자 중에는 우리나라 아이들처럼 달리는 일이 없음을 보고서야 비로소 내지와 외지의 풍기가 현저하게 다름을 알 수 있었다.
● 어린아이가 글을 읽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백가(百家)의 성(姓)을 익히고, 그다음 《삼자경(三字經)》ㆍ《천자문(千字文)》ㆍ사서(四書)ㆍ삼경(三經)ㆍ《예기(禮記)》ㆍ《좌전(左傳)》 순으로 읽는다.
그리고 글을 읽는 과정은, 먼저 음독(音讀)을 하니, 그것을 ‘염서(念書)’라 하고, 염서가 이미 익숙해져야 그 뜻을 강설(講說)하니, 그것을 ‘강서(講書)’라 한다. 사서는 집주(集註)를 읽지 않으며, 《시경(詩經)》은 대지(大旨) 및 육의(六義 즉 風,雅,頌,賦,比,興)를 읽고, 《서경(書經)》은 편제(篇題)를 읽는다.
우리나라에서는 10여 세 된 아이가 읽은 것은 매우 많은데도 그 뜻을 물으면 까마득하게 모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미처 강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서책은 모두 규벽(奎璧.경서를 축소해서 박은 책)으로 얇은 종이였지만, 세월이 오래되었는데도 심하게 때가 끼거나 해어지지 않았으니, 그 정세(精細)함을 곧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처음 책문(柵門)에 들어서니, 변두리 촌점(村店)들은 대부분 빈곤하였다. 그래도 부녀들은 모두 해어진 옷을 입었을망정 오히려 허름한 단장이나마 폐하지 않았다. 그 조잡한 단장을 처음 볼 적에는 해이하게 느꼈으나, 며칠이 지나 눈에 익자 보통으로 여겨졌다.
● 길을 가는 데에는 선후의 구별이 있을 뿐 귀천의 구별은 없었다. 험한 지경을 만나도 서로 핍박하지 않고, 나루를 건널 때에도 차서가 문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풍속이었다.
● 말똥을 줍는 사람들이 길 위에 늘어섰다. 그들은 삼태기를 메고 네 가지로 된 자그마한 쇠꼬챙이를 들고 말이 가는 것을 발견하면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따라가면서 똥을 싸는 대로 쇠꼬챙이로 삼태기 속에 주워담으니, 농사에 힘쓰고 부지런하며 절약하는 풍속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분뇨 더미가 모두 일정한 모양을 이루었다. 둥근 것은 둥근대로 규격에 맞고 모난 것은 모난대로 반듯하였으며 세모진 것은 삼각형 규격에 맞았으며, 평행한 것은 소반처럼 생기고 둥실한 것은 우산처럼 생겼으며, 윤택하기는 칠해 놓은 벽 같고 견고하기는 바위 같다.
● 중외를 막론하고 모든 경영(經營) 포치(鋪置)하는 법이 모두 정착(整飭), 단방(端方)하였고, 한 가지 일도 구차하게 미봉(彌縫)하는 법이 없었으며 한 물건도 마구 흩어져 잡란(雜亂)한 현상이 없었다. 심지어 소 우리, 돼지우리, 나무 더미, 변소 따위도 바르고 곧음에 법도가 있어, 이처럼 정려(精麗)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른바, ‘큰 규모에 세밀한 심법(心法)’이라는 것이다.
● 길에서 더러 여자가 말 달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여자는 머리에 등립(藤笠)을 쓰고 좌우로 7보(步) 간격으로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였는데 그 방법이 매우 재빨랐다. 이는 가난한 한족 여자로서 생활할 길이 없어, 이런 짓을 해서 돈을 얻는다고 한다. 노상에서 걸식하는 여자 중에는 역시 한족 여자가 많았다.
● 지나치는 길에 있는 성보(城堡)는 모두 명 나라 때 변방을 방비하던 기구였다. 그리고, 마을에도 역시 간혹 보(堡)를 두어서 자위(自衛)하였는데, 이제는 모두 파괴된 채 수축하지 않고 사람과 축산물이 들에 널려 있는 것만 볼 수 있었으니, 태평한 날이 오래여서 사교(四郊)에 융마(戎馬)의 걱정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북방 풍속에는 벽제(辟除.고귀한 사람이 행차할 때 사람의 통행을 금하여 길을 비키게 함)하는 규례가 없는데, 오직 봉성(鳳城) 사람들만이 우리나라의 풍속을 익히 보고서 성장(城將)이 가면 반드시 앞에서 통행을 차단하는 일이 있었다.
● 요동에서부터 서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평탄하고 넓다. 그래서 바람이 한번 불거나 비가 한번 오면 모래가 이리저리 옮겨져서 길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이따금 버드나무를 심어서 길을 식별하게 했다.
● 장정(長亭)과 단정(短亭)에는 모두 두 기둥을 맞대어 세우고 가로로 판자 하나를 달아서 거기에다 본지명을 쓰고, 각기 그 아래에 사방 도리(道里) 및 지명을 아울러 썼다(장정은 나그네가 묵을 수 있도록 10리마다 두는 역(驛)을 말하고, 단정은 5리마다 두는 역을 말한다).
● 연로에는 가끔 두어 칸의 초가로 된 군포(軍鋪)가 있어 갑군(甲軍) 두어 명이 지키고 있으며, 군포 벽상에는 비적(匪賊)을 체포한 사실과 여행(旅行)의 호송을 계시했다. 노가재의 《연행일기》에는,
“대(臺)를 만들어 3장(丈)의 기(旗)를 세우고 벽에는 활집, 화살통, 표창(熛鎗), 화포(火砲)를 그렸으며, 대 아래는 칼과 창을 나열하여 꽂았고, 봉화[燧]에 관한 일 등을 군포 벽에 벌여 썼다.” 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그 안일(安逸)에 빠져 태만해졌음을 알 수 있다.
● 비석을 세우는 제도는, 비석 양쪽 변면(邊面)을 처음부터 갈지 않고 그대로 벽돌을 쌓아 올려 담장을 만든다. 그 담장이 비석 꼭대기까지 묻히게 한 다음, 기와를 덮어 지붕처럼 만들고 비석은 그 속에 묻혀 있어 전면(前面)만 노출되게 만들었으니, 비각(碑閣)을 지어 비석을 보호하는 것보다 오히려 편리하게 인력과 비용도 많이 절감된다. 그러나 어제비(御製碑) 및 대가(大家)들의 묘비는 그렇지 않다.
● 전세(田稅)는, 밭 하루갈이에 소전(小錢) 120문(文)인데, 박토는 등급을 나누어 감축하였으며, 조적(糶糴)은 매두(每斗)에 5합(合)을 낸다.
● 호역(戶役)은, 대호(大戶)는 은(銀) 10냥, 중호(中戶)는 5냥, 하호(下戶)는 2냥 5전을 내며, 1부역(夫役)은 매인당 정은(丁銀 품질이 가장 나쁜 은) 4전 2푼이다.
● 배고(拜叩)하는 법은,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두 손을 땅에 대고 발꿈치를 엉덩이에 붙이는 것을 배(拜)라 하며,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히는 것을 고두(叩頭)라 한다. 세 번 조아린 후에 일어나 다시 절하기를 세 번 거듭하는 것을 삼배 구고두(三拜九叩頭)라 하니, 이는 군신(君臣)간에 행하는 예절이다.
● 경의를 표하는 자는 공수(拱手)를 하지 않는다. 조정의 의식에서는 손을 드리우고 빨리 걷는 것으로 예를 삼으며, 미천한 자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짚는 것으로 가장 공손함을 삼는다.
비록 대관(大官)이나 단정한 선비의 걸음이라도 반드시 팔을 휘두르고 자주 걸으며, 광대놀음[場戲]에서 옛 의관을 갖춘 자가 어깨를 높이고 천천히 걷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한관(漢官)이 위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일찍이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쇠사슬에 목이 매어 끌려다니고 있었다. 이는 사형수(死刑囚)로서 형기를 기다리는 동안 돌아다니며 걸식을 한다고 한다. 또 들으니, 인삼(人蔘)을 캔 범죄인을 ‘알방퇴(控梆槌)’라 일컫는다고 한다.
● 꾸짖고 욕하는 말에는 추잡한 말은 전혀 없고 보통 쓰는 욕설로는 ‘몰양심(沒良心)’ㆍ‘삼마동서천한(甚麽東西賤漢)’ 등이며, 모욕적인 욕설로는 ‘왕팔재자(王八滓子)’ㆍ‘잡종구재자(雜種狗滓子)’ 등이며, 매우 화가 났을 때의 욕설이라 하더라도 ‘천화(天火)’ㆍ‘소화(燒火)’ㆍ‘안불출세(眼佛出世)’라 하는 데에 불과하다.
● 화금(火禁)이 너무 엄하여 횃불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밤길에 횃불을 이용하거나 혹은 섶을 묶어 태우면 반드시 질색을 하며 말린다. 그들의 옥사(屋舍)는 기와로 이은 것이 많고 초가로 된 것은 드문 편인데, 비록 초가라도 반드시 처마를 높이고 시렁을 넓게 했으며, 벽은 모두 벽돌로 쌓아 불이 쉽사리 붙지 못하게 하였다. 불조심이 이와 같으므로 각 관청에도 처마 밑에 동분(銅盆)을 빙 둘러놓고 염수(鹽水)를 담아 늘 엄하게 경계하고 있다.
● 담배를 즐기는 풍속은 우리나라보다 심한데, 몽고와 회자국(回子國) 역시 마찬가지다. 오직 서양 사람들은 코담배를 좋아하는데, 중국 사람들도 지금 많이 그를 본받아 시중에는 코담배통의 매매가 자못 성행하고 있다. 그러나 연호를 차고 다니는 자는 모두 만주 사람이다.
● 남자들 중에는 손가락이나 팔목에 계지(戒指.가락지)를 낀 자가 있는데, 이는 대개 술[酒]을 절제하기 위함이거나 언행(言行)을 삼가는 뜻에서이다. 대개 경계하는 바가 있는 자는 모두 계지를 끼었다.
● 형구(形具)는, 한인은 대나무 막대기[竹棍]를 쓰고, 만인은 가죽 채찍을 사용하여 볼기를 치되, 각각 머리와 발을 동인 다음, 잠방이를 벗기지 않고 친다.
● 섣달 스무이레가 되면 모든 아문(衙門)은 종이로 정문(正門)을 봉쇄하고 ‘봉인대길(封印大吉)’이라 쓰는데, 대개 이날부터 공사(公事)를 일제히 멈추고 백성들과 같이 쉬면서, 주식(酒食)과 성악(聲樂)을 베풀어서 세모를 보낸다. 새해를 맞는 자는 모두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새로 만나 인사를 나누는데, 손을 들어 환세(換歲)를 잘했느냐고 묻는다. 이렇게 한 달을 지낸 후 정월 스무이렛날에 비로소 봉인(封印)한 것을 뜯는다.
● 세시(歲時)의 지포(紙砲)는 옛날 폭죽(爆竹) 제도와 같은데, 섣달 보름께서부터 시작하여 관청이나 여염을 막론하고 없는 곳이 없다. 그 요란한 폭음이 마치 뇌성과 같으며, 섣달 그믐날 밤이나 정월 보름날 밤에는 더욱 심하다.
● 지연(紙鳶)을 학아(鶴兒)라 부르기도 하는데, 두꺼운 종이에 남녀노소가 봉황, 학, 거북, 용의 형체를 만들어 오직 멀리 날리기를 힘쓸 뿐, 우리나라처럼 서로 충돌시켜 끊는 풍속이 없으니, 그 풍속의 질후(質厚)함을 볼 수 있다. 혹은 연을 쟁(箏)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의미는 알 수 없다.
● 재상(宰相)의 아들이 시정배(市井輩)가 되기도 하고 시정배의 아들이 재상이 되기도 하여 서로 구애되는 바가 없으니, 비록 명분에는 흠이라 하겠으나, 사민(四民)을 균등하게 봄에 있어서는 또한 아름다운 풍속이라 하겠다. 한인들은 간혹 본래부터 시정에 사는 즐거움이 벼슬에 얽매인 것보다 낫다고 하니, 그들의 여마(輿馬)와 복첩(僕妾)은 왕후에 비할 만하다.
● 남녀간에는 분별이 지극하다. 사대부 집은 내외를 분별함이 매우 엄하며 미천한 비첩(婢妾)이라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체 외출하는 일이 없다. 여자가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수레를 이용하고 걸어다니는 일이 없다.
수레의 휘장이 혹 닫혀 있기도 하고 혹 걷혀 있기도 한데, 한두 명의 시녀(侍女)가 휘장 앞에 앉아 있다. 수레 속에 있는 부녀들은 미인들이 주로 많았고 치장이 또한 사치하되, 결코 수레 밖을 내다보는 일이 없다. 어쩌면 의관의 제도가 다른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곁눈질이라도 할 법한데 일체 돌아보지 않는다. 어쩌다가 눈이 마주치더라도 다시는 눈을 뜨지 않으니, 그 습성의 단아함이 가상하다. 혹 역졸배들이 주시하면 수레를 모는 자가 몹시 꾸짖으면서 그 무례함을 책망하되, 그 부녀들은 끝내 말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 여자들이 30세 이상이면 거의 다 노숙해 보이니, 이는 대개 일찍 성장하고 일찍 노쇠하기 때문이다.
● 수레 품팔이꾼들이 거리에 많이 모이는데 노정의 원근(遠近)을 따져 그 임금을 정한다. 그 폐단은 수레에 사람을 많이 태워 혹은 10여 명에까지 이른다. 돈을 모아 합승하는 자는 모두 낡은 옷에 궁한 사람들로, 요컨대 다리를 쉬려는 것이다.
● 도성(都城) 4문(門) 밖은 모두 벽돌을 깔아 수레 다니는 길을 만들었는데, 그 너비는 수레 아홉 대가 다닐 만하다. 수레가 그 위를 굴러갈 때에는 항상 우렛소리가 은은하게 난다.
● 도로 주변 곳곳에 변소를 지었는데, 단청을 잘한 것도 있고, 기(旗)를 세우고 ‘정방(凈房)’이라 쓴 곳도 있다. 거기에는 붉은 칠을 한 나무를 놓고 밑씻개[厠籌]를 꽂아 놓았으며, 용변 보는 자로 하여금 돈 1문씩을 내어 변소의 주인이 거두어 가게 한다. 또 분전(糞田)을 하도록 하였으니, 그 모든 일의 주밀함이 대개 이와 같다.
● 큰 거리에 날이 저물고 인적이 뜸해지면 부녀들과 어린이들이 쓰레기를 헤치고 버려진 물건을 주우니, 이는 대개 생활이 어렵고 인물이 번성한 때문이지만, 풍속의 섬밀(纖密)함을 또한 알 수 있다.
매양 이런 것을 보았다. 한 사람이 외바퀴로 된 작은 수레를 끌고 그 수레 위에 네모진 상자를 놓고 상자에는 똥을 가득 싣고 가는데, 우리나라 하례배(下隷輩)들이 혹 그 곁을 따라가면서 희롱하는가 하면 심한 자는 싣고 가는 똥을 튕겨 입에 묻게 하여도 그 사람은 수레가 뒤집힐까 두려워하여 웃고 보복하지 않으니, 그 부지런하고 농업에 치밀함이 이와 같다.
● 혹 대교(大轎)를 타면 앞뒤의 말에 멍에를 메우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쌍교(雙轎)와 같다. 그러나 옆에 종인(從人)이 없고 친히 채찍을 잡고 몰되 전복될 염려가 없으니, 그 제도가 매우 간편한데 2개의 막대를 교자[轎] 허리에 설치했기 때문이다. 또 작은 방울 수십 개를 말의 목에 달아, 모든 행상(行商)들이 이를 타고 다니는데, 혹은, “산서(山西) 일대가 길이 너무 험악하여 수레로 다니기 불편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다.” 고 한다.
● 제왕(諸王.중국 황족으로 군왕에 봉해진 자)의 행차에는 추종(騶從)이 매우 성대하여 전후 각 수십여 쌍인데,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꾸짖어 물리치되, 그 나머지 각로(閣老.중국 재상들의 경칭) 이하는 행인을 물리치거나 길을 빼앗지도 않으니, 그 풍속의 간소함이 이와 같다.
● 인품과 풍습이 매우 관후(寬厚)하여, 몹시 노해서 싸우다가도 한 사람이 스스로 변명하면 대항하던 자도 곧 좋은 얼굴로 마음을 풀고 다시 노여움을 품지 않는다. 또한 고의가 아닌 과실이면 비록 그 이해(利害)가 자신과 밀접하더라도 서로 힐책하지 않으며, 스스로 경위가 틀린 것을 알면 즉시 승복하고 다시 억지로 변명하려 들지 않는다.
● 구문 대도(九門大道)로부터 작은 골목에 이르기까지 길은 모두 편편하고 곧으며, 집 처마는 조금도 어긋난 것이 없어 모두 톱으로 자른 것처럼 가지런하다.
궁정(宮庭)이나 여항(閭巷)에는 모두 하수구를 설치하여 큰비가 내린 뒤에도 오히려 질척거리는 폐단이 없는데, 초봄에 가끔 수리하는 것을 보면 그 깊이가 두 길이 넘는다고 한다.
● 우물이 비록 많기는 하나 물맛이 모두 나쁘기 때문에 옥하(玉河) 주변 사람은 모두 옥하를 마신다. 온 성의 하수(下水)가 모두 옥하로 들어가므로 더러워서 가까이할 수 없으나 오히려 우물보다 낫다고 한다.
● 우물을 만든 제도는, 반드시 벽돌로 쌓고 위에 널따란 전석(全石)을 덮은 다음 두 구멍을 뚫어 겨우 두레박이 드나들게 하였다. 위에 도르래를 설치했는데, 두 기둥을 세우고 나무를 건너질러 시렁을 만든 다음 축(軸)을 두 기둥 사이에 끼우고 축 한복판에 기(機)를 만들었으며, 축 끝에 고부랑한 손잡이를 만든다. 두 줄의 끈을 드리우고 줄 끝에 두레박을 다는데, 두레박은 버드나무로 짜서 만들며 그 형체는 바가지 같되 더 우묵하다. 끈이 하나가 올라가면 하나가 내려가서 물을 긷는 데 힘이 들지 않는다.
● 승려들은 모두 변발(辮髮)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쓰는 모자는 방관(方冠) 비슷하나 그보다 앞뒤가 배나 길다. 겨울에는 난모(煖帽)를 사용하는데 검은 비단으로 솜을 두껍게 쌌으며, 여름에는 양모(涼帽)를 사용하는데 등(藤)으로 만든다. 라마승(喇嘛僧)이라 칭하는 자는 승모(僧帽)와 승의(僧衣)를 사용하지 않고 사용하는 옷과 모자는 보통 사람과 같으나, 다만 순황색(純黃色)으로 염색한다. 그리고 옹화궁(雍和宮)에 있는 자 중에는 황모(黃帽)와 홍의(紅衣)를 착용한 자도 있는데, 이는 대개 직품이 있는 승려이다.
● 여승(女僧)은 보통 여인과 다르지 않되 다만 머리를 깎고 승모(僧帽)를 썼다.
● 도인(道人)들은 머리를 묶어 상투를 틀고 검은 베로 관을 만들되, 앞뒤로 드리우게 하여 마치 우리나라 연엽관(蓮葉冠)과 같다. 혹은 망건(網巾)도 쓰고, 혹은 관을 쓰지 않고 맨상투 차림으로 다니기도 하며, 혹은 머리를 풀어 좌우로 드리우기도 하고, 혹은 머리를 1치쯤 남기고 끊어 마치 두타승(頭陀僧.산야를 다니며 걸식하면서 노숙을 하는 등 고행을 하면서 도를 닦는 승려)처럼 만들어 다니기도 하고, 혹은 쇠로 테를 만들어 머리를 묶기도 한다. 입는 것은 소매가 넓은 흰옷인데 그 제도는 우리나라 도포(道袍)와 같다.
● 한인(漢人)과 만인(滿人)은 서로 혼인 중매를 통하지 않으니 금하는 것이 아니라 한인이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럽게 여긴 것인데, 근래에는 간혹 혼인하는 자가 있기도 하다. 들으니, 청인(淸人)이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삭발령(削髮令)을 내리고 아울러 전족(纏足)을 금지시켰으나 여자들이 끝내 그 명령을 복종하지 않으므로 비로소 통혼(通婚)법을 제정했다 한다. 무릇 한인을 아비로, 만인을 어미로 삼은 자는 아비를 따라 한군(漢軍)에 소속시키고, 딸은 어미를 따라 전족하지 않으며, 만인을 아비로, 한인을 어미로 둔 자는 기하(旗下)에 소속시키고 딸은 반드시 전족하여 풍속화하려고 하였으나, 한인으로 약간이라도 자호(自好)하는 자는 지금까지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 혼인의 예절은, 남녀가 어렸을 때 약혼하며 성례(成禮)하지 못한채 남자가 사망하면 여자는 종신토록 수절(守節)한다고 한다.
● 딸을 시집보내거나 며느리를 보는 집은 각각 의복과 기물을 구비하는데, 부자는 천금(千金)을 밑돌지 않고, 아주 가난한 자라도 5, 60금을 밑돌지 않는다.
그 행례(行禮)는, 만인은 신랑이 명첩(名帖)만을 신부의 집에 보내면 신부가 수레를 타고 신랑의 집에 이르러 교배례(交拜禮)를 치른 후 신부는 그대로 신랑의 집에서 첫날밤을 지내며, 한인(漢人)은 신랑이 말을 타고 친히 가서 신부를 맞아다가 신랑의 집에서 교배례(交拜禮)를 치르고 다시 신부의 본가에 가서 첫날밤을 지내니, 이는 곧 옛적 친영(親迎)의 예절이다.
● 도중에서 친영하는 자를 보았는데, 그림을 그린 사등(紗燈) 6대, 푸른 일산[蓋]ㆍ붉은 일산 각 1대, 피리[簫]ㆍ초금[笳]ㆍ피리[篳篥]ㆍ첩정(疊鉦) 각각 1쌍이 앞에서 인도하고, 그 뒤에 청색 교자 1좌(座)가 있는데 사면(四面)에는 유리로 창문을 만들고, 4각(角)에는 채색 실로 술을 달았으며 교자의 허리 부분 좌우에 홍색의 긴 채[杠]를 설치하고 굵은 청색 실로 홍색 채의 두 끝을 묶은 다음, 앞뒤에 두 사람씩 메게 되었는데, 네 사람 여덟 발이 일제히 발을 맞추어 가 교자가 요동하지 않고 공중에 매달려 행하니, 그 제도가 극히 기묘하다. 그 뒤 한 수레에는 두 노파를 실었는데, 모두 분식(粉飾)을 한 데다가 머리에는 꽃을 잔뜩 꽂고 두 귀에는 귀고리를 달았으며 검은 저고리에 누런 치마를 입었다. 또 한 수레에는 3, 4인의 소녀를 실었는데, 제법 예쁘고 모두 흑색 저고리에 바지는 혹 붉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며 치마를 걸치지 않았으니, 대개 노파는 신부의 미용인과 유모이고, 소녀는 곧 몸종이다.
그 뒤에는 수십 기(騎)가 옹위한 가운데 한 신랑이 구조 망포(九爪蟒袍)를 입고 백마 금편(白馬金鞭)에 은등(銀燈)을 밟고 앉았으며, 그 뒤에는 몇 대의 수레가 의복, 기물, 큰 궤짝, 가죽, 의자와 탁자, 이불 상자, 책상, 세수 그릇, 세면도구를 가득 실었다. 큰 궤짝의 만듦새는 궤의 길이를 한정하여 밖으로 두 짝의 문을 만들었으며, 안에는 2층, 3층으로 꾸며 의복 및 일용 잡물을 간직하게 되었는데, 그 궤짝의 자물쇠는 모두 가로 잠그게 되었다. 간혹 모든 위의가 이와 같지 못하고 기물을 사람이 짊어지고 가는 자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 상례(喪禮)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몹시 굵은 무명이나 흰 삼베로 상복을 만들며, 부모의 상중에 빈소[殯]를 차리기 전에는 물도 마시지 않는다. 3년상의 제도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로 하는데, 한인은 역월(易月) 후에도 심상(心喪. 상례 기간을 마치고도 마음으로 상중처럼 조심함)으로 3년상을 마친다. 만인들은 화장(火葬)을 한다. 한인은 원래 화장을 하지 않는데 근래 간혹 화장하는 자가 있으나, 모두 관(棺)에 넣어 태운 다음 그 뼈를 추려 그릇에 담아 땅에 묻고 흙을 모아 작은 봉분을 만든다.
● 초상 때에는 온 집안이 예절에 따라 슬피 곡(哭)하고 이웃에서도 와서 곡을 하는데 그 곡성이 하늘을 진동한다. 흰 삿자리[簟]로 온 집을 둘러싸서 초상당했는다는 것을 나타내며 내외 상차(喪次)에도 역시 삿자리로 하는데, 다만 대문 안에 풍악을 크게 베풀면서 ‘주검을 즐겁게 해 준다[娛尸]’ 하니 해괴하다. 장례를 지낸 후에 비로소 삿자리와 죽은 자의 옷을 거두어 모두 태워 버린다.
● 관[柩]의 만듦새는 매우 크되 위 끝이 조금 좁아서 구부정하게 생긴 모습이 마치 배[舟]의 형체와 같다. 붉은 옻을 칠한 다음 혹은 화초를 그리기도 하고 혹은 위에 금자로 ‘영수당(靈壽堂)’이라 쓰기도 한다. 객사(客死)하여 반장(返葬)하지 못하면 임시로 절에 두기도 하고, 혹은 도로변에 방치하기도 하는데, 모두 그대로 노출시켜 덮지 않는다.
● 상여(喪轝)의 만듦새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튼튼하여 실용적인 것이 많다. 상여의 크기는 거의 두어 칸 되는 집만 한데, 오색 채단(彩緞)으로 휘장을 만들고 구름, 새, 짐승을 어지러이 그렸으며, 혹은 은을 도금하고 혹은 오색실을 맺어 단추를 만들기도 했는데, 바람에 휘장이 펄럭이면 멀리까지 그 향취가 풍긴다. 두 멍에 대[轅]는 길이가 5, 6장(丈)이나 되는데, 붉게 칠하였으며 누런 동(銅)으로 도금하여 빛나게 했다. 5, 6개의 짧은 채[杠]를 가로놓아 두 사람씩 메게 되었으므로 상여 메는 군정이 매우 많다.
● 혼거(魂車)는 상여 뒤에 따르는데, 붉고 푸른 것으로 장식하였으며, 명정(銘旌)은 상여 앞에 있는데 붉은 비단에 금자(金字)로 쓰고, 깃대는 3장(丈)이나 되며 누런 용[金龍]을 그렸다. 깃대 밑에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역시 2개의 채를 설치하여 8, 9인이 메게 되었다. 푸른 일산, 검은 일산, 붉은 일산 및 주봉(朱棒)ㆍ파초선(芭蕉扇)ㆍ당번(幢幡 당(幢)과 번(幡)을 겹치어 만든 기) 5, 6대가 앞에 가며 고취하고, 양쪽에 나팔(喇叭)ㆍ날라리[瑣吶]ㆍ방경(方磬)ㆍ나고(鑼鼓)를 갖추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검은 전립(氈笠)에 붉은 깃[羽]을 달아 우리나라 제도와 같으며, 양쪽에서 번갈아 울리니, 고(鼓)로 시작하고 금(金)으로 그친다. 승려와 도인들은 각각 그들의 복색을 갖추고 주문을 외고 염불을 하며, 상주들은 수레를 타고 상여의 뒤를 따른다. 또 노소와 부녀들이 수레를 타고 따르니, 죽은 자의 아내인 듯싶다. 반혼(返魂)할 때에도 역시 이와 같이 한다. 중국의 모든 일이 간편하지 않은 것이 없으되, 유독 상례가 이처럼 번다하니 그 저의를 알 수 없다. 상여 위에 반드시 수탉 한 마리를 올려놓는데 이를 혼계(魂鷄)라 한다.
● 분묘의 만듦새는 혹 크게도 하고 혹 작게도 하는데, 모두 회(灰)로 봉분을 쌓고 떼를 이지 않으며 묘에 세우는 비석은 1자 반을 넘는 것이 없다. 부호가의 묘는 수식이 극히 사치스러워 아로새긴 담장으로 둘러 혹은 수백 보나 되는가 하면 흙을 쌓아 산을 만들어 분묘를 옹위하게 하며, 송백(松柏)과 양류(楊柳)를 심어 줄을 이루며, 석교(石橋)와 패루(牌樓)의 제도가 극히 웅장하며 양쪽에 화표주(華表柱)를 세우며, 신도비(神道碑)와 상설(象設. 塑像이나 불상을 설시하는 일)이 구비되었다.
● 연로에서는 영원성(寧遠城) 서문(西門) 밖 조씨(祖氏) 집 선영(先塋)과, 사하점(沙河店) 섭씨(葉氏) 집 분묘가 가장 웅장하고 사치하다고 한다. 북경 근처 통주 40리부터 그 사이에는 도로 주변에 큰 분묘가 많이 있되 사면이 평탄하고 넓어 땅과 분봉을 분별할 수 없다. 들으니, 모두 귀족들의 분묘라고 한다.
● 금년에 흉년이 들어서 그곳 쌀값을 물으니 우리나라 을해년 봄과 같은데, 연로의 백성들이 모두 부황(浮黃)난 기색이 없고 또 걸인이 많지 않은 것을 보아 대개 그 조처하는 법이 있어서다. 이따금 커다란 온돌방을 만들어 유민(流民)을 거처시키되 걸식하는 어린이에 대해서는 특별히 조처하는 곳이 있으니, 이를 육영당(育嬰堂)이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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