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자 박지원 의원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그리고 고모
글쓴이 : 오막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해방 - 서울 소공동 근태빌딩에는 일제 때 돈을
인쇄하던 정판사가 있었다. 왜놈 기술자 “쫑”으로 있던 박지원
조부 박락종은 해방이 되자 왜놈 사장이 버리고 간 인쇄소 정판사를
꿰차고 사장이 된다.
그는 공산당 열성 신도였다. 해방 두 달 뒤, 10월 15일, 정판사
사무실에는 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 박락종 사장이 위조지폐
인쇄를 모의, 박헌영과 김상룡에게 보고했다.
박헌영은 무릎을 쳤다. “그래, 돈만 찍어 낼 수 있다면 이 나라를 먹는 건
식은죽 먹기다.”
1945년 10월 22일, 이들은 네 차례에 걸쳐 1,500만원을 찍어 냈다.
모두 1억원을 찍어낼 심산 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꼬리가 잡혔다.
작업에 동참했던 빨갱이가 지폐 인쇄판을 팔려다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대가 이재원 등 7명을 체포한다.
보고를 받은 박헌영은 잔대가리를 굴렸다.
1946년 5월 17일, 구속된 정판사 직원 14명은 공산당원이 아니라고
공산당은 성명을 발표한다.
경찰들이 증거를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중 이었다.
잡혀있는 김낙기 부인이 면회를 할 때 부인은 남편에게 담배를 건네는 것이
발각됐고, 담배속에는 "김동무, 사흘만 버티면 30만원을 지불 하겠소 " 라는
쪽지가 발견된다. 수사반은 확신을 갖게 된다.
같은 시간, 서울 장안빌딩 공산당 아지트에서는 김상룡이 박헌영에게 "김낙기
처가 사식을 넣을 때 지령을 전달했습니다. 이제 경찰 놈들이 억지를 쓴다고
선전만 쎄게 하면..." 박헌영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경찰계장이 집적 용의자들
을 조사하고 있었다. 드디어 용의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1,500만원을 찍어 해방일보 사장과 공산당 재무부장이 전부 가져 같습니다."
그들의 자백에 의하여 5월 7일 가담자 16명 중 간부 3명을 제외한 14명을 체포된다.
30여 회의 공판에서 공산당은 사건을 담당한 판사, 검사를 협박하고 공판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10여 명의 좌익 변호사들 재판 기피로 폐정까지 연출된다.
1946년 5월 14일, 수도 청장 장택상은 기자 회견을 갖고 "이번 위조지폐 사건
은 공산당이 한국 경제를 교란시키고 조직 확대를 위해 벌인 천인 공로할 사건
입니다." 장택상의 기자회견은 석간신문에 대서 특필됐고 국민들은 경악 했
다. 신문을 읽은 국민들은 한마디씩 했다: "민족, 진보, 수구, 껄텅 거리던 뻘갱
이 들이 드디어 일을 저지르는구먼, 속 빨간 놈들..."
박헌영은 혜화동 아지트에서 석간신문을 모조리 읽었다. 그 옆의 김 삼룡과
이주희도 침통한 얼굴로 장택상을 가만 두지 않겠다고 투덜거린다.
"투쟁, 투쟁하시요 전국에 투쟁 지령을 내리시오" 박헌영이 눈에 불을 켜며
고함을 쳤다.
전국 주요 도시에 벽보가 붙기 시작 한다.
[인민이여 위폐사건은 날조다, 장택상을 타도하자!] 부천 변두리 복덕방 늙은 푼수머슴 허돌이는 "맞아 장택상이 꾸민 일이이야!" 맞장구를 쳤다. 20여개 신문들은
증거가 없는위폐사건을 장택상이 공산당을 잡기위해 조작한 사건이라고 쓰기 시작 했다.
좌빨의 억지 투쟁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 한 것이다. 박헌영은 경찰서 안에 있
는 뻘갱이들에게 끝까지 오리발 투쟁을 벌이라는 지령을 내리고, 제 2인자인
가짜 김상룡을 체포시켜 경찰서 안의 분자들과 접촉하려 했으나 가짜는 조재
천 검사의 기지로 발각된다. 가짜 김상룡이 들통 나고 몇 분 만에 조검사 앞에
한통의 편지가 전달된다. "조선생, 판단에 앞서 타협이 있음을 아시오, 김 상
룡." 편지를 본 조 검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나 김상룡이요, 우리 공산당 조직을 만만히 보지 마시오,
지령만 내리면 행동할 많은 전사가 있다는 걸 명심 하시오."
조 검사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 경찰서 안에 얼마나 많은 세작들이 있길래...
” 좌익들은 담당 경찰계장의 집을 폭파했다.
가짜 김상룡 사건과 경찰직원 집 폭파 사건은 면밀히 보도 되고 위폐사건은 점점
좌빨들이 불리해 진다. 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최신식 인쇄소를 빼앗겼고 해방일보
(박헌영 주간). 중앙 일보 (여운형 주간). 인민일보 (이영수 주간)등 한걸래 신문
세 개가 폐간 된다.
그런데도 경찰서에 잡혀있는 박락종 이하 뻘갱이들은 고문으로 정신이 돈 것처럼 노래를 부르고 발광투쟁을 하고 있었다. 경찰은 테러에 대비해
현장 검증도 비밀리에 했다. 법정에서는 난동이 벌어졌다. 김창선이 법정에서
웃옷을 모두 벗고 상처투성이 몸을 보이며 고문의 증거라고 날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박헌영의 지령에 따라 대못으로 자해 했다는 고백을 하면서 박헌영에게
체포 영장이 발부 된다. 박헌영은 졸개들에게 투쟁하라는 교시를 남기고 관속의 시체로 위장해 서울을 벗어나 포천 뒷산에서 관에서 나와 38선을 넘어 월북한다.
김일성은 박헌영이 자기 수하로 온다는 말에 입이 찢어질 정도로 좋아 했다.
박헌영은 북한의 부수석이 되어 남한의 조직을 동원해 이승만 암살사건, 장택
상 수류탄 암살사건, 제주도 폭동, 여수, 순천 폭동 등 6.25전 남한 전역을 혼란
에 빠트리다, 김일성과 6.25를 일으키고 전쟁 후 김일성에게 처형당했다.
정판사 사건은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사장 박락종 등 조선 공산당 7
명이 남한에 공산정권 수립을 위하여 당의 자금 및 선전활동비를 조달하고 경
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이다.
11월 28일, 선고공판에서 박지원의 조부 박락종과 이관술, 송언필,
김창선 등 주범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는 10-15년 형이 선고된다.
6.25가 터지고 이들은 일제히 사형에 처해진다. 박지원 조부 박낙종은
목포 교도소에서 사형으로 처형되었다.
박지원 아버지와 큰 아버지도 경찰에 사살 당했다.
박지원 부친 박종식(1910년생)은 1940년 부터 해방 될 때까지(1945년까지)
고향 진도에서 일본인 하수인으로 목화 수매 책임자로 일했다.
박지원 아버지 박종식은 재갈 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목포상고 동문이다.
해방 후 박종식 박지원 아버지는 남로당 진도 책임자가 되고
삼촌 박종국은 고군면 인민위원회 부 위원장이 된다. 박종식, 박종국은 1948년 10월 23일 경찰에 수배되고, 그들은 지방 유격대장으로 한국 경찰을 무수히 죽인다.
그들의 은신처 지리산 피아골이 국군에 함락 당하자 신안으로 피신하다 진도 경찰서 김기일, 곽순배 형사와 총격전 끝에
마지막까지 ‘인민공화국’ 만세를부르다 사살 된다.
(1976년 2월 25일 진도군이 발행한 군지(郡誌)에 기록과 곽순
배 형사의 친척 곽우불 진도 번영회 회장 증언)
1993년 8.15 행사 때, 박종식은 김대중 (대통령) 에게 건국포장을 받는다 (포장
증 제1552호).
박지원 삼촌, 고모는 괴뢰군 앞잡이로 면민을 북괴군에 징용 시
키다 9.28 수복 후 주민들에게 붙잡혀 돌과 미제 도끼자루로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진도군 무공 수훈자 회장 최기남씨 증언)
며칠 전에도 박지원은 김정일에게 무상 쌀 50만 톤 주자고 주장 하였다. 그 집안은 김정일 집단을 큰집으로 여기는 가문이다.
조선닷컴 (주) 박지원이 이러하므로,현 대통령도 그의 눈치를 본다.
어디를 보는지 향방도 없이 눈을 뜨고 말을 곱씹으면(한쪽 개눈깔) 국회와 청와대는 곧 으스스하여 진다.
권세있는 집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