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자집 문고 제13책
협리한화65조목 〔峽裏閒話 六十五〕
1. 임금의 무익한 문장 재능 부터 재밌음 그러다가 8번에서 빵터짐
8. 문장가들의 성현 비방에 대하여
송(宋)나라 포전(莆田) 사람 정후(鄭厚)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맹자(孟子)는 현인(賢人)이 아니다. 주(周)나라의 땅을 밟고 주나라의 곡식을 먹으면서 언제나
주나라를 무시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중니(仲尼 공자)의 도를 배우고는 이를 배반한 것이다.
당시에 제 환공(齊桓公)이나 진 문공(晉文公)이 했던 일을 선창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주나라 문왕(文王)ㆍ무왕(武王)ㆍ성왕(成王)ㆍ강왕(康王)의 훌륭한 업적을 어찌 바랄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고는 하나 맹자는 한갓 말재주로 환심을 사서 자신의 이록(利祿)만을 꾀하여, 오늘은 양 혜왕(梁惠王)에게 유세하고 내일은 제 선왕(齊宣王)에게 유세하여 모두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천자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과 같은 일을 하도록 함정에 빠뜨렸으니,맹자는 잔인한 사람이요 변사(辯士)라 할 것이며, 장의(張儀)와 소진(蘇秦) 같은 유세가들 중에서도 최고 가는 유세가라 할 것이다.”
그리고 시(詩)와 예(禮)를 말한 맹자를 무덤을 파헤치는 종횡가(縱橫家)에 비유하고저잣거리의 여자 장사치에까지 비유하였는데, 이것은 그 추악한 비방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소식(蘇軾)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왕은 성인이 아니다. 당시에 동호(董狐) 같은 훌륭한 사관(史官)이 있었다면 남소(南巢)의 일에 대해 필시
‘반란을 일으키다〔叛〕’라고 썼을 것이고, 목야(牧野)의 일에 대해서는 필시 ‘시해하다〔弑〕’라고 썼을 것이다.
그리하여 탕왕과 무왕은 필시 사관의 서법(書法)에 임금을 시해했다는 악명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주공은 〈무일(無逸)〉을 지어 ‘은(殷)나라 왕인 중종(中宗)으로부터 고종(高宗)과 조갑(祖甲)과 우리 주 문왕(周文王)에 이르기까지 이 네 분이 명철한 지혜를 실천하였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위로는 탕왕을 언급하지 않고 아래로는 무왕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일 것이다.”
명(明)나라 엄주(弇州) 왕세정(王世貞) 또한 문장으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그는 〈의고(擬古)〉라는 시에서 대략 이르기를,
젊은 홀아비 우제 순 임금은 / 虞帝小鰥夫
허명으로 제위 탈취하였고 / 虛名攘唐祚
늙은 대머리 서백 문왕은 / 西伯老禿翁
미인을 바치고 탈출하였네 / 脫身美人賂
순 임금은 죽을 때 창오에 숨어 / 垂死竄蒼梧
짐을 벗듯 우 임금 천거하였고 / 薦禹如有負
오랑캐 말발굽 유왕의 국토 유린은 / 戎馬踐幽王
실로 요망한 한 여자 때문이었네 / 實以妖姬故
시를 지으며 세상 영달 사양하노니 / 寄聲謝時達
성현을 그르쳤다고는 하지 마소 / 毋爲聖賢誤하였다.
이와 같은 자들은 성현을 업신여기고 제멋대로 의론했다는 점에서 모두 장주(莊周 장자)의 무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주는 전국 시대 종횡가들이 횡행하던 시대에 살면서 저 스스로 세상을 향한 울분에 복받쳐 입에서 나오는 대로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었으니, 그 성현을 등지고 지혜를 버려서 스스로 이단이 된 것은 분변(分辨)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송나라나 명나라 시대에는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시했던 한(漢)ㆍ당(唐)의 뒤를 이어 정교(政敎)가 훌륭하고 의리(義理)가 엄정하며, 천하가 같은 문자를 쓰고 편벽된 말〔詖辭〕과 방탕한 말〔淫辭〕이 모두 종식되었던 때이다. 아무리 삿된 소인이라 할지라도 감히 성인을 비방하는 마음을 싹 틔워서 모욕하는 붓을 휘두르지 말아야 했을 듯한데, 정후나 소식ㆍ왕세정은 도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이처럼 방자하게 날뛴단 말인가. 그런데도 송나라 유자(儒者)들은 이들을 배척하지 않고, 후인(後人)들은 감히 이에 대해 의론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괴이하기 짝이 없는 급총서(汲冢書)의 경우, 육경(六經)과 내용이 합치하지 않아 순(舜)ㆍ우(禹)ㆍ문왕(文王)ㆍ이윤(伊尹)ㆍ주공(周公)이 모두 대악(大惡)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후인들은 조만(曹瞞 조조(曹操))과 같은 자가 자신도 죄가 크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대성(大聖)을 모함하면서 이에 대한 비방을 분산시키고자 땅을 파고 책을 묻어둠으로써 후세를 기만하였다고 한다. 나 또한 천지 사이에 물건은 없는 것이 없고 사람은 못하는 짓이 없으니, 혹여 저와 같은 다른 심장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 세 사람의 경우는 읽은 것이 경전이요 담론한 것이 의리이니, 비록 함께 도덕의 깊이를 논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문장과 의론으로 보면 또 일대의 명사(名士)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드러내놓고 시문을 지어서, 백가(百家)가 다 같이 정도(正道)로 돌아오고 만장(萬匠)이 하나로 통일된 때에 전대의 성인을 모함하여 모욕한단 말인가. 또한 전혀 거리낌 없는 자들이라 할 것이다. 이들은 유지(劉摯)가 “한번 문인으로 불리게 되면 볼 것이 없게 된다.”라고 말한 자들이니, 우리 유자(儒者)들이 분명하게 분변하여 엄히 배척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명 태종(明太宗) 때에 사인(士人) 주계우(朱季友)가 황제에게 바친 저서에서 전적으로 염ㆍ락ㆍ관ㆍ민(濂洛關閩)의 설을 배척하자, 태종은 노하여 그를 요주(饒州)로 압송해 돌려보낸 뒤 현관(縣官)과 향사(鄕士)들을 모아놓고 태형(笞刑)을 행함과 동시에 집에 있는 그의 저서들을 찾아내서 태우라고 명하였으니, 우리 도를 높이고 세교(世敎)를 부지(扶持)한 뜻이 지극하다. 그런데도 왕세정 같은 자가 나왔으니, 이것이 바로 문장을 이용해 자신의 하찮은 생각을 멋대로 주장하는 폐해인가 - 정후는 자(字)가 숙우(叔友)이다. 《숭정론(崇正論)》을 지어 맹자(孟子)를 비방하였다. 이 밖에 또 이태백(李泰伯)과 조열지(晁說之) 등이 모두 논(論)을 지어 맹자를 비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