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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묵상글 ( 연중 제16주일 월요일. - 더불어(together) 믿음의 여정. 등 )
*** 05:35,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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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연중 제16주일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믿음의 여정
-회개와 겸손한 믿음-
저에게 단 하나의 강론을 뽑으라면 저는 지체없이 31년전인 1992년 1월 15일 왜관수도원에서의 대축일 종신서원 미사시 강론을 뽑겠습니다. 31년전이니 그동안 참 많은 수도형제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를 주제로 한 강론이었고 셋째 대목을 나눕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새롭게 들립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좋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인 패거리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이 불러 주셔서 모인 은총의 공동체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좋아서 살기로하면 벌써 공동체는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착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착해서 구원받기로 한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머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막같은 그 어둡고 단조로운 회색빛 세월을 얄팍한 재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달콤한 인간관계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한계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근원적인 고독에 부닥쳤을 때 속수무책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외모를, 마음을, 재주를, 자리를, 업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만이 영원하기에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으로보며 우리의 삶은 어둔밤 물위를 걷던 베드로와 흡사하다 하겠습니다. 도대체 믿음이 없이는 온갖 유혹의 바다, 쾌락과 탐욕의 바다, 환상의 바다를 건너 주님께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성 쁠라치도를 구해 낸 것은 성 마오로의 지극한 순종의 믿음이었습니다. 불신과 불안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 베드로를 질책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믿음을 견고히 해야 하겠습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젊음이 순수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연륜이, 있는 자리가 성숙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구나 초보자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초발심의 자세가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라는 대목에 대한 나열이었습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반드시 앞에 붙어야할 말마디는 더불어요, 더불어 믿음의 여정이어야합니다. 내달 8월1일부터 6일까지 포르투칼 수도 리스본에서는 세계 젊은이들의 날 행사가 있고 교황님은 물론 전세계에서 60만명의 젊은이들이 모일 거라 합니다.
교황님의 비디오 메시지 제목이 “타인들과 함께 기쁘게 걸어라” 였고 그 뒤에 “결코 혼자(never alone)’가 아닌 말마디가 붙어 있습니다. 도반 형제들과 더불어 믿음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이 참 많이 강조하는 말마디가 더불어(together)입니다. 어제 조부모와 노인의 날, 교황님의 강론중 한마디가 마음에 꽂쳤습니다.
“더불어 자라는 밀과 가라지들(Wheat and weeds growing together)”
최후 심판의 날까지 가라지와 더불어의 삶,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요 삶의 신비입니다. 제가 꼭 강조했어야 했는데 못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밀의 성장에 함께하는 가라지도 필수입니다. 가라지없는 밀만의 세상, 환상이요 결코 영적진보도 없습니다. 가라지와의 영적전쟁중 영적진보입니다.
더불어 믿음의 여정,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더불어 여정중 고군분투하는 믿음의 전사, 모세요 예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대가, 믿음의 달인인 두분 모세와 예수님입니다. 모세와 함께 하는 믿음이 부족한 더불어 여정중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우리 믿음의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됩니다. 추격하는 파라오의 군대와 과거를 그리워하며 불평을 쏟아놓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처지에 있는 모세입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놔두시오.’하면서 이미 이집트에서 말하지 않았소.”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의 리더십은 얼마나 결정적인지 배웁니다. 리더십(leadership)은 펠로우십(fellowship)인데 공동체가 잘 따라주지 않으니 모세의 리더십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하는 모세에 이어 즉시 하느님께서 모세를 격려하시며 인도하십니다. 모세와 늘 함께 하는 더불어의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이집트의 파라오 군대도 하느님 수중에 있음을 보여주는 두 대목, “주님께서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므로”, “나는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라는 구절입니다.
어쨌든 이런 믿음의 여정을 통해 모세도 함께하던 백성도 회개와 더불어 믿음도 새로이 배웠을 것입니다. 새삼 믿음도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날마다의 공동전례기도수행이 참 좋은 믿음의 훈련이 되고 이와 더불어 알게 모르게 성장하는 은총의 믿음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로 두분의 대조가 우리에겐 위로와 힘이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불신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믿음이 없는,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합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예수님의 전생애가, 특히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 빛나는 표징인데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이미 요나의 표징은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완성됨을 봅니다. 이어 예수님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온 남방 여왕의 예를 들면서 거듭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이 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요, 회개와 더불어 겸손한 믿음이자 참나의 발견입니다. 평생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여정에 충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믿음의 모범인 예수님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다음 두 말마디가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런 주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그러니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빛나는 표징은 없습니다.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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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연중 제16주일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억수로 내리는 하늘의 비를 보며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주님께서 표징을 일으켜 보여주시기를
요구하는 것을 보면서 지금 우리 시대를 성찰해봤습니다.
지금 밖은 비가 억수로 내리고 있습니다.
하늘의 비,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이지요.
이 비를 보면서 우리는 비 걱정 곧 수해 걱정이나 하고 있습니다.
이 비를 내리는 하늘을 보지 않습니다.
이 비를 내리는 하늘의 뜻을 보지 않고,
회개하라는 비라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처럼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비가 뚝 그치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똑같은 말씀,
곧 하늘에서 내리는 이 비 외에 다른 표징은 없다고 하실 겁니다.
우리의 요구를 하늘이 들어주기를 바라지 말고,
하늘의 이치와 하늘의 뜻을 우리가 오히려 알아야 한다고,
이 비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늘의 뜻은 보지 못하면서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들어주실 수 없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그리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너희가 회개하라고 또 말씀하실 겁니다.
폭우와 기상 이변을 멈추게 해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폭우와 기상 이변을 자초하는 우리의 죄악들,
모든 것을 쓰레기로 만드는 과소비,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는 편의주의,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수없는 욕망을 회개하라고 말입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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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연중 제16주일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보라, 요나보다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1.42)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시자,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며,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여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개탄하시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 구나!”(마태 12,39)
“악한 세대”라는 말은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치달은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곧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함할 구실을 찾기 위한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세대”라는 말은 이백주년 성경에는 “간음하는 세대”라고 번역하였듯이, 마치 부부의 신의와 같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대해 불충하고, 신의를 지키지 않는 절개 없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들은 표징을 요구하지만, 표징을 본다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표징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표징을 보았다고 해서 모두가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죽은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아직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죽은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루카 16,30)라고 간청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이 표징을 알아볼 것입니다. 믿음으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 11,1-3)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요나보다도, 솔로몬보다도 더 큰 분이심을 계시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1.42)
그러나 요나의 설교만 들고도 회개한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평판으로만 듣고도 찾아온 이방인 세바의 여왕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건만, 이스라엘 백성인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표징을 보고서도 태도를 고치기는커녕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굳이 표징을 보여주지 않아도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실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표징들 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마태 12,39)
주님!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주님, 오늘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당신의 자비를 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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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연중 제16주일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의 문을 열어라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것을 보면 믿음이 성장하고 굳게 다져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표징을 요구하기에 앞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한 때는 표징을 많이 요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는 주님의 강한 음성을 가슴에 담고 이제는 초연해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 합니다. 보여 주실 때는 보십시오. 그리고 삶을 바꾸어 증인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믿음이 성장하였고, 성령을 체험한 후 목숨을 내 놓고 주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실행할 때 표징을 넘어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자기 뜻에 맞추려 하는 한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표징을 요구하거나 기적을 멀리서 찾지 말고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터를 믿음의 자리로 만들어 주님을 자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우리가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신다면 어디서나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내 삶의 깊은 곳에 주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즐길 것 다 즐기고 시간이 남아야 겨우 미사참례하고는 ‘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지녀야 할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누가 대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만큼 성장 과정 안에서의 진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쉽게 이루려는 어리석음이 우리의 성장을 오히려 더디게 하고 맙니다.
사람들이 지혜롭고 명철하다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 곧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주신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의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표징을 요구하고 그 틀에 꿰맞추려는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귀를 막으면 비오는 소리뿐 아니라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완고한 마음을 돌려 주님을 향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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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연중 제16주일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이탈리아 성지순례에는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부가 같이 온 분들 많았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이 많이 온 것입니다. 38명 중에 부부가 12명이고, 학생이 7명이었습니다. 19명이 부부와 학생이니 전체 순례자의 딱 절반입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대부분은 자매님들이 많았습니다. 형제님들은 일하느라 바빠서 못 오기도 하고, 학생들은 공부가 먼저라 못 오기도 했습니다. 순례는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몸이 떨릴 때 가면 힘들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쁜 중에도, 공부가 중요한 데도 성지순례에 함께하시는 분들을 보니 하느님나라에 보물을 쌓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등잔에 기름을 준비해 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다섯 배로 늘린 충실한 종처럼 보였습니다. 저도 올해 성지순례를 5번 다녀왔습니다. 1월에는 이스라엘과 과달루페를 다녀왔습니다. 4월에는 요르단 이스라엘을 다녀왔습니다. 5월에는 그리스 터키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탈리아를 다녀왔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저도 가슴이 떨릴 때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우리는 많은 표징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표징의 인물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10가지의 표징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고한 파라오는 10가지 표징을 보았으면서도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10가지 표징을 보았지만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표징은 이정표는 될지언정 표징이 목적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에 목말랐던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천지사방에 표징이 있습니다. ‘의혹’의 눈으로 보면 지금 여기에 예수님이 계셔도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게 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문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니느웨의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전하여라.’ 요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는 것이 싫어서 도망을 갔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느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병자들,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수많은 번제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직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신기한 기적이나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볼 수도 있겠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꽃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거센 비바람에 떨어진 나뭇잎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거든 너희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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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연중 제16주일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요나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갑니다. 그래서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왜 도망갔을까요?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니네베는 이스라엘의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느님의 계획대로 니네베 사람들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벌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요나를 끝까지 니네베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회개하라고 소리치게 합니다.
요나가 소리쳤을까요? 요나는 소리치고 싶었을까요? 아니요. 그 큰 도시인 니네베 중심에 서서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느님의 진노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모든 사람과 가축들, 왕까지 재를 뒤집어쓰고 단식합니다. 요나의 그 작은 소리에 니네베 사람 모두,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작은 표징은 많은 사람을 구원합니다. 그들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도 요나는 외치고 있습니다. 작은 소리로 말입니다. 우리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 때문에, 내 욕심과 이기심의 소리 때문에 요나의 표징은 우리 내면에 전해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잠시 모든 것을 잠잠하게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내 안에서 들리는 요나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
숨앤쉼을 쓰고 있는데
동기 신부들 단체대화방에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동기 중에 한 신부가 학교에서 공부 중인데
오늘이 축제하는 날인가 봅니다.
유명 가수들과 연예인들이 와서
자리를 빛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즐겁게 지내라고 인사했지만
부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의 묵상 글 숨앤쉼으로 위로받고 힘을 얻을 분들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저는 더욱 행복합니다.
그리고 사실 이제는 대학 축제에 참여할 체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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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연중 제16주일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소시오패스라고 들어봤을 것입니다. 소시오패스는 타인의 모든 것을 다 빨아먹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부류의 인간이라고 하더군요. 이 소시오패스의 숫자는 적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글쎄 자그마치 전체 인류의 4%나 된다고 된다고 하니, 참 많은 사람이 소시오패스를 만나 고통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소시오패스를 치료하기가 특히 어려워서, 이들을 직접 치료하기보다는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데 신경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소시오패스에게 피해를 볼까요?
피해 보는 사람은 대부분 능력이 좋고, 성실하며, 착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소시오패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었습니다. 스스로에게 감탄할 것이 없는 사람이 주로 소시오패스에게 이용당한다고 합니다. 소시오패스는 성실한 사람들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기가 막히게 이용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정신과 의사는 스스로에게 감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그래야 남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기가 자기에게 감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나’를 감탄하며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커질수록 그 감탄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어쩌면 소시오패스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자기는 맞고 남은 틀렸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서도 자기들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표징에 대한 평가를 자기들이 하려고 합니다. 그토록 많은 표징을 보여주었음에도 자기들만을 위한 표징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의 이런 억지 요청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고 말씀하시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위선자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주님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기에 미리 당신의 신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사랑의 길로 다시 돌아오길 눈물 흘리며 기다리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이런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스스로에게 감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악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으면서 지금을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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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발이 없음을 한탄했는데 거리에서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났다(데일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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