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금강경 강의
無爲福勝分 第十一 제 11분
무위복이 수승함
이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언제나 복(福)을 바라며 도 나름대로 복을 얻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열어 보여 주셨고, 또한 우리들이 불교를 통해 구하는 복은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보다 더 고급스러운 행복을 얻기 위해 불교를 믿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오감(五感)의 충족에서 오는 행복을 뛰어넘어 '해도 한 것이 없고(無爲)', 영원히 새지 않는 복(無漏)'이 완전무결한 행복인 것입니다. 진리를 체득했을 때에 완전한 무위복(無爲福)이 되겠지만, 설사 깨닫지 못햇다 하더라도 보다 높은 정신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그런 방향에 있어서 기쁨을 느끼고 독경, 기도, 염불, 참선을 통해 법희 선열(法喜 禪悅)에 잠길 수 있다면 그 행복은 가히 수승하다고 할 것입니다.
須菩提야 如恒河中所有沙數하야 如是沙等恒河 가 於意云何오
수보리 여항하중소유사수 여시사등항하 어의운하
是諸恒河沙가 寧爲多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시제항하사 영위다부 수보리 언 심다
世尊하 但諸恒河도 尙多無數온 何況其沙리잇가
세존 단제항하 삼다무수 하황기사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만큼이나 많은 항하가 또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는냐,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단지 항하만이라도 오히려 무수히 많거늘 하물며 그 모래 수이겠습니까."
부처님게서는 항하 유역을 기점으로 오랫동안 교화 활동을 폈기 때문에
항하강을 자주 비유로 드셨습니다.
항하는 갠지스 강으로 설산(雪山)에서 시작하여 인도 전역을 돌아 흘러 내리는데
주위 땅이 비옥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문명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실제로 가서 항하의 모래를 만져 보면 우리나라에 있는 모래 한 알을
십여 개로 나눈 것처럼 알갱이가 매우 가늘기 때문에 마치
가루같이 미세하고 부드럽습니다.
2511킬로 미터나 되는 긴 항하에 있는 그러한 모래 수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나 많은 모래 수만큼의 항하가 있고,
또 그 모든 항하에 있는 모든 모래 수를 다 합한 모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우리의 상상으로는 감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입니다.
須菩提야 我今實言으로 告汝호리니 若有善男子善女人이
수보리 아금실언 고여 약유선남자선여인
以七寶로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하야 以用布施하면
이칠보 만이소항하사수삼천대천세계 이용보시
得福이 多不아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득복 다부 수보리 언 심다 세존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얻을 복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실다운 말로 일러주십니다.
지금까지도 늘 그래왔지만 중생의 역량으로 제대로 납득을 하지 못할까봐
진실로 이야기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앞의 의법출생분 제 8에서는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를 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비유의 양이 훨신 더 많아집니다.
앞에서의 보시만 해도 받게 되는 칭찬은 끝이 없을 터인데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그 때 돌아오는 보람과 찬탄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어마어마하게 남을 위해 많이 보시했다 하더라도
하루에 모래 한 알이 샌다 치더라도 세월이 가고 가면
언젠가는 다 새어버리는 유루복(有漏福)이고, 유위복(有爲福)이라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사실 남을 위해 물질로 보시하는 유루복, 유위복을 짓고
주상보시(住相保施)를 하더라도 복을 받기는 받습니다.
'주상 보시는 생천복(生天福)'이라 하여 우선 자기 자신이 흐믓하고 남들로부터 한없는
칭찬을 듣고 그리하여 천상에도 수백 번을 가겠지만
그 복이 다하고 나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법입니다.
활이나 미사일을 쏠 때 너무 세게 쏘면 땅 표면으로 떨어지지 않고 땅 속으로 떨어집니다.
그것처럼 유위복을 많이 지어 놓았다고 더이상 복을 지으려 하지 않으면
천상락(天上樂)을 실컷 누리고 나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설사 인간 세상으로 온다고 해도 빈천한 삶을 살게 됩니다.
죽은 뒤에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습니다.
'제 까짓 게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이렇게 되면 복 지으나 마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항상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꾸준히 복 짓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수행을 본격적으로 하는 사람에게도 '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라고 합니다.
복 짓느라고 일생을 보내고, 복 쓰느라고 일생을 보내고,
복을 다 쓰고 나면 하천하게 일생을 보내게 되니
삼생을 복 때문에 헛되게 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 지으려고도 복 받으려고도 하지 말고
영광을 누리려고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유위복에 빠져 있으면 참된 수행자가 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계속-
=유정=
어느 날 부부가 크게 다투었습니다.
아내가 동창친구를 만나러 몸단장을 하고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남편이 “여보 빨리 다녀와”라고 하자, 아내가 “아니 이이가, 평생 종살이 했으면 이제 나도 좀 자유로울 수 있잖아! 당신도 친구 만나고 오면 되지!”라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이에 남편도 지지 않고, “아니 이 여편네가 환장을 했나, 평생 먹여 살린 것은 누군데 내가 돈벌이 못한다고 이제 날 무시하는 거야 , 고약한 것 같으니.”
“ 돈 벌이 하는 것 당신만 했나? 나도 한 푼 두 푼 모아 땅 사고 집사고 하여 이제 살만하니 뭐라고 떠들고 있어. 기분 나쁘게”
이 두 부부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과거 상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서로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느낍니다.
두 부부가 만든 생각은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만든 허상에 사로잡혀 그 생각이 실체라고 착각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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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갖가지 망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만든 생각의 울타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망상의 소굴(巢窟)이라 합니다.
누가 자신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망상의 울타리를 치고 그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괴로워하고 가슴치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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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때, 3조 승찬 선사에게 14세의 어린 사미[4조 도신]가 찾아왔습니다.
“스님, 스님의 자비로서 해탈법문을 하나 주십시오.”
“누가 그대를 해탈하지 못하도록 묶고 있는가?”
“아무도 묶은 사람이 없습니다.”
“묶은 사람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벗어나려고 하는가[何更求解脫乎]?”
- 『경덕전등록』
위의 문답은 2조 혜가가 달마에게 안심(安心) 문답을 구했을 때,
달마가 “불편한 마음을 내어놓아 보아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이 불편한 것을 주고 고통을 준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보고 불편하다거나 고통을 느끼는 자신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든 허상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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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우님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만일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그 고통을 만들어내는 자가 누구이고,
누가 괴로움을 받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육근(六根)으로 육경(六境)을 바라보고 육식(六識)을 일으키는 주체는
바로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인연과법의 이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평안하고 청정해집니다.
감사합니다.
=정인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