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22
3월7일[사순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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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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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NUmh1K5ByI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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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위선은 가장 암(癌)적인 존재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못배운 백성들을 향해 7가지 행복을 선언하신 바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대 부유하고 가방끈이 길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7가지 불행을 선포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전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날선 발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고 예리하며 강력합니다.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업자로서 섬뜩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말씀 선포의 대상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지만 그 말씀들이 온통 저만을 위한 맞춤형 가르침 같기도 합니다. 공격의 이유는 그들의 위선적인 삶과 가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위선은 가장 암(癌)적인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가장 역겨워하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는 가르침과 삶 사이의 엄청난 괴리감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 따로 삶 따로의 이중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삶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신 바가 있습니다.
1. 조용한 익명의 자선과는 반대되는 자랑하고 과시하는 자선.
2. 골방에서의 겸손한 기도가 아닌 길모퉁이에서의 가식적인 기도.
3. 산발(散髮)에다 침통한 얼굴로 하는 보여주기식 단식.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스꽝스러운 그들의 모습 한 가지를 더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마태오 복음 23장 5절)
‘성구갑’이란 성경 구절이 들어있는 작은 통입니다. 유다인들은 작은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녔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의미로 성구갑을 몸에 지니고 다녔겠지요.
그런데 정말 웃기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성구갑은 유난히 크고 화려했습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구갑!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과시욕이 지나쳤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를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의 극치에 달했습니다.
“이것 한번 봐주세요! 이 멋진 성구갑을! 내가 얼마나 하느님 말씀을 애지중지하는지?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을 극진히 여기는지를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칭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실상 그들은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에 반하며 사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철저한 이중성, 과시욕과 허영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공허한 의(義)를 가차 없이 폭로하십니다. 그들의 공허한 의는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신 참된 의와 극명하게 비교·대조되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신앙과 이중적인 삶, 그로 인한 철저한 몰락과 멸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강력한 경고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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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1FhI0dGcI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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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은 자꾸 무언가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요즘 스타 배우 유아인 씨의 불법 약물 뉴스가 많이 나옵니다. 불법 약물 뉴스는 어제오늘 일도 아닙니다. 미국엔 대표적으로 린즈리 로핸이 있습니다. 그녀는 1986년 7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난 가수, 배우, 여성 사업가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연기와 노래에 대한 열정을 가졌으며, 3살 때부터 모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98년 12살 때, 뮤지컬 'The Lion King'에서 나라 공주 역할로 연기 데뷔를 하였습니다. 연기에서 최고의 스타가 된 그녀는 이제 노래 쪽으로 전향합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틴 팝 스타로 대성 하였습니다. 이어 사업도 하였고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일까요? 그녀는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으로 수천 번의 사고를 냅니다. 2004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 'Speak'는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Rumors'와 'Over' 등의 곡으로 히트 차트를 석권하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셀러브리티와 같은 비즈니스 활동도 하였습니다.
린즈리 로핸은 만족을 모르고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범죄, 교통사고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로 인해 인생의 곤경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약물 중독으로 여러 차례 입소하여 치료 받았으며, 불법적인 행위와 법적인 문제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녀는 무면허 운전, 교통사고, 도난, 폭행, 임신설 등으로 인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결국 음악 활동에서마저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술기운인지, 약 기운인지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한 36명의 리스트를 작성했고 이것이 언론에 공개되자 난리가 났습니다. 유명 연예인은 물론 유부남들도 있었고 심지어 이름을 거론하면 안 되는 거물들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리스트를 즉시 부인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임신한 채 술과 담배를 하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결국 30대에 파산의 길로 들어섭니다. 린즈리 로핸은 자기 행동으로 인해 팬들과 대중들로부터 실망과 비판을 받았으며, 그녀의 인생은 인기의 정점에서부터 인간적인 실패로 끝났습니다.
교만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망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그 이후 모든 인간이 그랬습니다. 이 교만을 꺾어줄 그리스도께서 오기까지는 이 원죄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닮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며 그것으로 스승이라 불리고 선생이라 불리고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합니다. 사실 제가 미사 때마다 외우게 하는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입니다.”는 이들과 같지 않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켜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명예를 얻으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피이고 진리는 하느님의 모범입니다. 하느님의 피를 받은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라 믿으면서도 남들이 스승이라고 하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것이 분명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 내 안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으로’ 무언가 됩니다. 그래서 남들이 나를 치켜세워주면 가만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교만한 이들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지 못합니다.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는 칭찬 받기 좋아합니다. 하지만 겸손한 이들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남들이 칭찬할 때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나를 낮추려 하지 말고 나를 무언가 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에 내가 반응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무언가 되려고 하기에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반면 겸손한 이들은 하느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내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칭찬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누군가가 “어머, 하늘을 날고 계시네요. 정말 대단해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인간을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 칭찬에 으쓱할 수 없습니다. 겸손하여지려면 하늘을 날아야 합니다. 그래야 칭찬에 으쓱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열등한 자신을 끌어올리려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가 추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면 교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겸손합니다. 내 힘으로 될 수 없는 수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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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사제가 되면 요구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겸손해야 한다. 강론을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 어른들에게 공손해야 한다. 미사를 성심껏 봉헌해야 한다. 재정에 투명해야 한다. 수도자들에게 잘 해야 한다. 이렇게 요구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은 그런 요구사항을 채우지 못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오솔길에는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매일 읽고 마음에 새기라는 뜻입니다. 사제에게 요구되는 것들 중에 연습해서 잘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판단력’입니다. 의견이 분분할 때 교우들은 사제의 의견을 묻곤 합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사제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세상의 일이 무를 쪼개듯이 확실하면 좋은데 그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덧셈과 뺄셈처럼 딱 떨어지면 좋은데 미분과 적분처럼 복잡할 때가 많습니다. 관계의 문제는 수학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감정의 문제는 이익과 손해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이념과 사상의 문제처럼 전부가 아니면 전무의 방식이기에 죽거나 살거나 입니다. 그곳에는 이해와 화합이 자리 잡기가 어렵습니다.
제게 의견을 물었던 때가 몇 번 있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중고등부 여름 신앙학교를 천마산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천마산으로 답사를 하러 갔습니다. 저녁에 식사하는데 비가 내렸습니다. 교사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비가 더 내릴 것 같으니 안전한 곳으로 장소를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비는 더이상 내리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지금의 자리에 머물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신학생인 저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안전을 위해서 자리를 옮기자고 했습니다. 시흥 5동에서 본당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태풍 곤파스로 성당 뒷산의 토사가 밀려와 아파트의 옹벽이 무너졌습니다. 서울시장이 방문했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뒷산의 높이를 깎아 내자고 했습니다. 시장도, 구청장도 저의 의견을 존중했고 뒷산이 9m 정도 낮아졌습니다. 덕분에 성당에 마당이 생겼습니다. 사목위원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돈이 들더라도 마당을 좀 더 넓히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지금 정도의 마당도 거져 생겼으니 이쯤에서 만족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본당신부인 저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책임을 지더라도 조금 더 마당을 넓히자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저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일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명분과 실리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입니다.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난갔습니다. 대신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명분을 택한 신하들은 끝까지 항쟁하자고 하였습니다.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겨울이 깊어지고, 먹을 것은 없고 왕도 신하들도 궁색하였습니다. 실리를 택한 신하들은 쿨하게 청나라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왕은 궁궐로 돌아갈 수 있고, 전쟁도 끝나니 백성들도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하들은 왕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역사는 왕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도 명분과 실리에 때문에 의견이 둘로 나뉘었던 일을 보았습니다. 명분을 택하면 조금의 손해를 감수 할 수 있었습니다. 실리를 택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 이전에 감정이 있었습니다. 명분과 실리 이전에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감정의 골이 채워지면, 오해가 풀리면 명분도, 실리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랑과 겸손이 만나면 명분과 실리는 봄에 눈이 녹듯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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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1년 가톨릭평화신문에 ‘미카엘의 순례일기’가 연재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2월 7일에는 ‘아이스크림과 노사제의 투박한 고백’이 있었습니다. 서품 42년을 기념하면서 동창 신부님들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작은 섬에 성모승천 성당과 종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종에 매달린 줄을 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종탑이었습니다. 종탑에서 기다리던 신부님이 친구 신부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겸손하게 살아온 동창 신부에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것이었습니다. 70이 넘은 노 사제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소원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잘 들어주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마태오 복음 7장 12절)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성지순례’를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갔던 때는 1995년입니다. 교구의 배려로 동창신부들과 이집트, 이스라엘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부끄럽지만 성지순례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습니다. 마치 여행객처럼 순례하였습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기보다는 신부님들과 친교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지도신부를 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였습니다. 교우들은 미리 성서를 읽었고, 기도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가려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길을 할 때입니다. 서로가 십자가를 지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넘어지심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배반했던 모습을 떠올리고 울었습니다.
5처와 6처를 묵상하면서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고자 다짐했습니다.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아드리고자 다짐했습니다. 성지순례는 순례자로 갔다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 특히 성직자들이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말은 들으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은 하면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색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맡기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이 특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생각합니다. 감옥에서도 교우들을 생각하며 위로하였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친구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꺼이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참된 목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여러분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라는 말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세상의 나이로는 26살밖에 되지 않았고, 사제생활은 1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국의 ‘수선탁덕(首先鐸德)’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늘 부족한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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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2절) 칭호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사제여야 한다. 자리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거룩하게 만든다. 사제는 거룩하여야 한다. 자리에 앉아 훌륭히 처신하는 이는 누구든지 그로 말미암아 영예를 받을 것이다. 자리에서 나쁘게 처신하는 이는 누구나 그 자리에 해를 입히는 사제가 되고 만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3절) 나쁘게 처신하는 사제들 때문에 훌륭한 사제들까지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선을 이루려다 의로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보다는 의인들을 지켜주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버려진 땅에서도 귀한 금이 나올 수 있다. 그 금이 버려진 땅에서 나왔다고 금을 버리느냐? 금만을 취한다. 우리도 그들의 가르침은 취하고 그들의 행실은 버릴 수 있으면 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얹어 놓고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에는 말하기 전에 행하고 현명하게 이야기하며 혼란에 빠진 자들을 인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자애로운 짐을 얹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 먼저 가장 무거운 짐을 진다. 주님은 이들을 두고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파멸을 불러올 허영을 꾸짖으신다. 이 허영은 그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일을 하게 하였고 그들을 타락하게 했다. 결국 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에 목을 맨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5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직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였고, 그들의 손에 묶은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8절)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9절)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누구도 스승님이나 아버지로 불려서는 안 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분만이 아버지이시다. 또한 그리스도만이 스승님이시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본성상 사용하는 아버지와 스승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1절) 먼저 우리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고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될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낮은 자리는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이다. 진정한 권위는 섬김과 봉사에서 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그리하여 사순시기가 은총의 기간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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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여기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자신들의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 또는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누가 전하든지 간에, 또 어떤 사람이 전하든지 간에, 성경 말씀은 성경 말씀이고,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는 “그들처럼 살지 마라.”, 즉 위선자들의 삶을 본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다.”라는 뜻입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을, 말만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한다는 뜻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엄격하고 철저하게 율법을 실천했던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실천만 따진다면 그들은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 가운데에서 첫 번째로 실천을 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실천을 잘했는데, 그러나 그 실천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실천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실천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가짜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22,37-40)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율법 실천에는 ‘하느님 사랑’도 없었고, ‘이웃 사랑’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엄격하고 철저하게 하느님을 섬겼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냥 ‘위선’이었을 뿐입니다. (스스로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라고 자처하면서 자기 만족감, 또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죄인 취급했고,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도 없이 자기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사랑 없이 이웃을 대하는 그 태도는 바로 ‘교만’과 ‘이기심’입니다.
<‘위선’과 ‘교만’은 항상 짝을 이룹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늘 위선자이고, 위선자들은 늘 교만합니다. 가끔 겸손한 것처럼 보이는 위선자가 있는데, 그것은 칭찬받을 욕심으로 겉으로만 겸손한 척 하는 ‘거짓 겸손’입니다.>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이 했던 말입니다. 우리는 계명과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이고, 하느님 뜻도 ‘사랑’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사랑 없이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실천’을 강조하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왜” 실천해야 하는지, 그것부터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의 ‘사랑’은 세속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믿음’과 하나로 일치된 사랑(아가페)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믿음을 증명해야 하고, 믿음으로 우리의 사랑을 완성해야 합니다.>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랑을 ‘선’과 ‘사랑으로만’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악을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유욕과 집착을 사랑이라고 우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랑은 선과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왜 실천해야 하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는 방법은, 또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4-7)
여기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인데, 뜻으로는 “자기들은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같다.”입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실천이 아니라면, 아무리 많이 하고, 열심히 해도, 한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라는 말씀은,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위선자다.”가 아니라, “입은 옷과 실제 삶이 다른 위선자다.”, 즉 “옷을 그렇게 입었어도 실제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 위선자다.”라는 뜻입니다. 입은 옷이 문제가 아니라 삶이 문제입니다. <예의 없게 아무렇게나 입는 것도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이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교만과 허영심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좋아한다는 말에는 자기들이 먼저 요구한다는 뜻도 들어 있는데,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주님이신 하느님께도 요구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위선자들은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 같은 기도를 합니다. (교만과 허영심으로 바치는 것이니,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빈말’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안 들어 주신다고 불평만 합니다. 감사할 줄은 전혀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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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마태오 복음은 하느님 말씀을 실행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합니다. 가까운 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7,21)라는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일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듯 하느님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고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거듭거듭 강조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25,45)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율법을 삶의 중심에 두던 이들이고, 그들에게 율법을 따르는 것은 믿음을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태도에서 잘못된 부분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계명과 율법은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신앙인들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보다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기대하는 평판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스스로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뛰어난 모범을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낮추신 분이셨고 그런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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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 백성에게 1)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우리라고 하며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리고 악행을 멈추라고 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 2)그리고 이어서 하느님께서 다시 예언자를 통하여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고 하신다.
신명기계의 전형적인 가르침인 순종하면 ‘좋은 소출’을 먹겠지만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라며 축복과 저주의 양면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르치기만 하지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이르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오 복음 23장 4절)
그들은 모세의 자리3)에 앉아 있으며 군림하는데, 그들은 말만 잘하고 실행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지만 그들이 실천하지 않는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4) 길게 늘어트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이 잔칫집에서는 윗자리,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 장터에서 인사받기, 사람들에게는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그들을 비판하십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도 스승, 아버지.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판하시면서 마감으로 가르침의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오 복음 23장 11절-12절)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나무라시는 것은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세세하게 나누어서 복잡한 규정들을 만들면서도 정작 자신은 실행하지 않는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이 지워주는 율법의 멍에를 가볍게 하시고 특히 안식일 법의 정신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식에 대한 복잡한 규정들을 풀어 주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힘겨운 율법의 의무의 속박에서 풀어주시어 구원으로 연결시켜 주신 것입니다.
(설명)
1) 창세기 18- 19장에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도시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응징하려는 의도를 아브라함에게 알리십니다.(창세기 18장 21절)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시지만 결국 그 도시에 의인 열 명도 안 된다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기의 청을 멈춥니다.(창세기 18장 33절)
대대적인 도시의 멸망의 전조가 나타나자 천사는 롯과 그 가족을 그 도시의 멸망 직전에 탈출하도록 인도하고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 도시에 유황을 퍼부시어 멸망시키십니다.(창세기 19장 15절-22장 5절)
이사야가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이라는 표현은 사해 부근에 존재했다 사라진 역사적인 나라보다는 죄악을 대표하는 나라로 표현한다고 보아야 한다.
2) 구약에서 소외 된 대표적인 계층인 ‘고아와 과부’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신다. (신명기 10장 18절, 14장 29절, 24장 17절. 19장 20절-21절, 27장 19절 / 즈카르야 예언서 7장 10절 / 이사야 예언서 1장 16절-17절 / 에제키엘 예언서 22장 7절 / 예레미야 예언서 7장 6절 / 시편 7장 6절, 10장 14절.18절, 68장 5절, 146장 9절)
3) ‘모세의 자리에(에피 테스 모위세오스 케테드라스 Ἐπὶ τῆς Μωϋσέως καθέδρας)’ 앉아 있다.”라고 말씀하신다.(마태 23.2) 여기서 자리라는 것은 모세가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갖고 있던 지도자로서의 위치, 절대적 권위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4) 현대에도 전통신앙을 고수하는 이들은 술이 달린 의복을 입고 통곡의 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왼 팔에는 긴 가죽 끈으로 감고 이마에는 성구갑을 단다. 이렇게 이마에는 성구갑을 달고 팔에는 가죽 띠를 드리는 관습은 성경(신명기 6,8)에서 유래한다.
그 뜻은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게 실천한다.’라는 것이다. 성구갑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성경구절 (신명기 6장 4절-9절, 11장 13절-21절)을 적은 양피지를 넣었다. 이 성구갑 외에도 이 말씀을 문패(메주자 mezuza)에 적어 집을 나설 때나 들어 올 때 말씀을 읽고 기도한다. 심지어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이 메주자를 벽에 붙여 놓은 곳도 있다. 그 뜻은 모세의 분부대로 ‘하느님 사랑과 말씀에 충실하겠다.’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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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사제로서 저는 강단과 제대에 올라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은 내가 말한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언제나 저를 일깨웁니다.
좋은 말로 희생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눔은 좋은 것이라며 나눔의 실천을 강조하지만, 그 나눔과 자선의 결과물 속에서 나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고 있지는 않은지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면 언제나 부끄럽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바로 저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가식과 오만을 비판하고 험담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무엇을 하고 있냐며 따져 묻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그렇게 비판하고 지적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의 가식과 거짓에 얼마나 분노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오만과 독선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먼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말로만 하는 우리의 가식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우리의 오만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자랑하는 우리의 위선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 부끄러움들이 한 번 더 행동할 힘을 줄 것입니다. 조금은 아깝고 두려운 마음이 들지라도 나누고 사랑하고 내어놓는 삶을 살아갈 용기를 줄 것입니다.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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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만큼의 나이기를>
마태오 23,1-12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나만큼의 나이기를>
보이는 나
보이지 않는 나
둘이 하나이기를
보이고 싶은 나
보이고 싶지 않은 나
둘이 하나이기를
애써 보이려 하지 않고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늘 나임에 감사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나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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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권력이 아니라 권위다>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자를 거꾸로 하면 ‘푹’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옛말에 권력의 끝자락에서 ‘동문 밖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을!’하고 후회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결국은 후회하고 맙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권력과 권위는 분명 다릅니다. 권력을 가졌어도 권위는 살 수 없고, 권력의 힘은 없으나 권위를 가져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라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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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젊은이 자기의 전생을 알고 싶어서 유명한 최면술사를 찾아갔답니다. 최면술사는 최면을 걸고 '자. 지금 무엇이 보이나요?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젊은이가 '네. 사람들이 보입니다.'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나요?' 최면 술사가 물었습니다.
다시 젊은이가 대답했습니다. '네, 모두 저에게 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쁜 여자가 제 앞에서 춤을 춥니다.'
최면술사가 말했습니다. 네, 됐습니다. 눈을 뜨세요! 하나, 들 , 셋.
최면에서 깨어난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전생에는 왕이었나 봅니다.' 그러자 최면술사가 대답했습니다. ' 아닙니다. 당신은 왕이 아니라 돼지 대가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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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이를 키운 적이 없어서 그 힘듦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 키우기가 쉽지 않음을 막연하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데도 나름대로 최고의 사랑을 주려고 노력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큰 존경심을 품습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아이를 보살피고 더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부모의 자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우선 자신감이 넘칩니다. 그리고 밝고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부모가 자기를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갑곶성지에서 만났던 한 어린아이가 생각납니다. 부모와 함께 성지를 방문했습니다. 정신없이 뛰놀았고 또 어찌나 말을 잘하는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부모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잘 놀고 있으니 그동안 성물방에 잠시 다녀온 것입니다. 저와 이야기하며 놀고 있다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엄마 아빠를 찾는 것이었지요. 어느 순간 말이 사라지고 대신 눈물을 터뜨립니다. 잘 놀던 아이가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엄마 아빠가 없다는 생각에, 자기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자신감도 사라졌고 신나게 뛰어놀던 열정도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고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는 잠시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러 슈퍼마켓에 가시지도 않고, 성물 구입을 위해 성물방에도 안 가십니다. 언제나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또 열정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또 언제나 함께하시기에 계속 조잘거리며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 대화가 바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껴야지만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떠했을까요? 혹시 말만 하는 기도가 아닐까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말만 하는 기도를 통해서는 아무런 감응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누구보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고, 좋은 모범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열심히 했고, 정작 함께하시는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느님께 많은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지만, 자신의 열심만 과시하는 기도의 형식을 띤 ‘말’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말만 하지 않습니다. 자신감과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힘차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게 됩니다. 진짜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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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취사선택의 도사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따라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하는 것을 무작정 따라 하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입니다.
이렇게 무작정 따라 하는 것은 유행을 따르는 것이나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망치는 길입니다.
그리고 나쁜 친구가 아니더라도 무작정 따라 하는 것은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니기에 인생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작정 따라쟁이가 아니라 오늘 주님 말씀대로 따라야 할 것과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이 있어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시대에 단순한 요한이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따라쟁이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의 한숨 소리에 자기의 한숨 소리를 맞추었고, 프란치스코가 눈물을 흘리면 덩달아 눈물을 흘렸으며, 프란치스코가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면 자기 손도 치켜들었고, 프란치스코를 본뜨려고 무엇이든 프란치스코를 따라 하였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요한처럼 우선 따를 대상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제1의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고, 그다음은 예수님을 잘 따른 성인들이며 하느님께로 그리고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할 사람을 선택해야겠지요.
그런데 따를 대상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성인들을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눈높이를 낮춘 상태에서 취사선택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수없이 선을 보고 다 퇴짜를 놓는 사람처럼 너무 눈만 높고 까탈스러워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말씀대로 누구의 말과 행위에 있어서 따라야 할 것은 따르고, 말아야 할 것은 아니 따르면 되는데 실은 그것이 바로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인이 있으면 성인을 따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요, 성인이 없어도 누군가의 좋은 점을 따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나쁜 점을 따라 하지 않는 것도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가 가르치는 것은 그대로 하되 그들의 행실만은 따라 하지 말라는 오늘 주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 외엔 인간 그 누구도 아버지로 여기지 말고, 주님 외엔 아무도 스승으로 여기지 말 것이며, 인간의 말과 행위 중에 주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면 따르고, 부합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식별할 주체적인 눈을 가져야겠지만 그렇다고 따를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교만스레 다 퇴짜를 놓음으로써 아무에게서 아무런 가르침도 받지 못하는 그런 배움의 빈털터리, 따름의 빈털터리가 되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다만 취사선택의 도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각 사람의 장단점 중에 그리고 모든 사람의 잘잘못 중에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취사 선택의 도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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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섬김, 경청, 회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봉사보다는 저는 섬김이라는 순수한 우리 말을 더 좋아합니다. 복음의 핵심적 요소가 바로 섬김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영성”뿐일 것입니다.
“서로 섬기십시오”, 바로 이미 고인이 된 이 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의 사목 표어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이요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하나뿐입니다. 진정한 리더십도 섬김의 리더십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복음의 사람, 성 베네딕도도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다음과 같이 섬김의 공동체로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성규머리 45-46)
학원보다는 역시 저는 우리말 배움터를 좋아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 바로 마산에 있는 여자 트라피스트회 수녀원 정문 기둥에 쓰여 있는 글귀입니다. 평생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평생학인 수도승들이라는 것입니다. 섬김의 영어가 서비스(service)요, 섬김의 직무는 바로 서비스업임을 깨닫습니다.
서비스업하면 지금도 생생한 30년전 1인6역에 분원장직 소임을 맡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는 1990년대 중반에 제 나이도 40대 중반이었고 사제는 저 혼자였습니다. 1년 365일 혼자 미사와 강론, 신학교 강의, 면담성사, 손님접대, 전화받기, 주방책임, 분원장직, 참 분주했던 때였습니다.
당시는 물불 가리지 않고 전천후全天候로 뛰었고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결연한 각오로 배수진을 치고 종전불퇴의 충일한 정신으로 살 때 였습니다. 수도원 생존의 문제가 참 절박한 때였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라는 자작 좌우명시도 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밤중 피정 신청 전화에 잠결에 퉁명스레 전화를 받았고 격렬한 항의를 받았고, 지체없이 사과하여 간신히 수습했습니다. 바로 이때의 전광석화같은 깨달음입니다.
“아, 나는 주님의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서비스업이라면 첫째, 사람이 좋아 친절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 유능해야하고, 셋째 내외적 환경이 좋아 편안해야 하겠구나. 음식점이나 병원, 학교를 보면 금방 들어나듯 주님의 서비스업인 교회나 수도원 역시 마찬가지다. 과연 주님의 서비스업 수도원에 속한 나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며, 영적 실력이 탁월하며, 수도원의 내외적 환경은 좋은가 자주 성찰해 봐야 하겠다.”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인성, 영성, 환경을 일컬어 주님의 서비스업 3대 요소라 칭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결론 같은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충고,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그대로 예수님의 평생 삶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결론하여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바로 겸손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다투어 순종하라는 사부 베네딕도의 말씀이 있는데 참으로 다투어 섬기는, 다투어 겸손한 공동체라면, 참 멋진 주님의 복음적 공동체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참 좋은 주님의 복음적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한결같은 경청과 회개의 삶이 그 답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강조되는 바 경청과 회개로 사순시기를 맞이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개인의 내적회개로는 부족하고 적극적 사회참여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 역할에 충실함으로 회개의 진정성을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경청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가 회개요 겸손입니다. 참으로 겸손과 순종의 사랑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회개란 하느님 안 본연의 제자리로 돌아옴을 뜻합니다.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하느님께 돌아와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참된 회개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회개의 대상이 허영과 외적 삶에 치우친 자기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상징하는바 당대의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모든 교회지도자들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아버지가 있어야 할 중심 자리에, 그리스도가 있어야 할 중심 자리에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모셔선 안된다는, 우상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화와 같은 말씀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바로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 바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며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분 뿐이시다.”
우리 삶의 중심은, 우리 공동체의 중심은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참 선생님인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충실함이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새삼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주님의 선언이 참 눈물나도록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존재론적으로 절대 평등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일체의 우상들을 배격, 배제하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겸손한 존재로, 우뚝한 존재로, 의연하고 당당하게 위축되지 말고 참자유인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경청과 회개, 섬김의 겸손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 중심의 경청과 회개, 섬김의 삶에 더욱 정진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 50,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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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마태 23,3)
<위선을 극복하자!>
오늘 복음(마태 23,1-12)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크게 분노케 했던 가장 큰 죄는 '위선의 죄'입니다. 위선은 말과 행동이 다른 것입니다. 위선은 죄를 짓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고,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야단맞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6.17.18)
이렇게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치는 주님의 말씀을 그들은 거역했습니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멸망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믿음이 없거나 약한 자들'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죽음 저 너머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돌아옵니다. 회개합니다.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고, 하느님보다 위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위선자가 아닌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위선자입니다. 그 때문에 위선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비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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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건축에 대해>
평화를 빕니다.
저의 소박한 복음묵상글을 받아보시는 형제자매님들의 기도와 관심 속에서 성전 건축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이 5억이 넘는 건축기금을 보내주시는 기적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배둔공소신자들과 각 본당 모금액을 더하니, 주님께서 형제자매들의 손을 통해 부족하지 않게 건축기금을 모아주셨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리고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4.2(주님수난성지주일미사)부터 새성전에서 미사드릴 수 있도록 기도 안에서 열심히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건축을 우선적으로 하고 있고, 매일 성전이 건축 되어지는 모습을 제 카톡방 사진으로 올려놓고 있습니다. 기공식(22.11.6)부터 오늘까지 성전 건축 진행 모습을 카톡사진방에 올려놓았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가서 보시면 됩니다.
3월27일부터는 성전 내부 마무리 공사(제대, 독서대, 해설대, 감실, 장의자, 성전문, 음향시설, 십사처, 제대십자가, 종탑십자가 설치 등등)가 있을 예정입니다.
멋진 하느님의 집을 만들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함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지금 은혜로울 때이며 구원의 날인 복되고 거룩한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시기 잘 보내시고 기쁜 부활 맞이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다음에는 성전 건축을 마무리하고,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 여러분을 초대하는 인사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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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1eWGDahLt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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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 3)
주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눈뜨는
은총의
새날입니다.
낡은 방식을
멈추어야
새롭게
배우게 되는
올바른 삶의
새로운
방식입니다.
올바른 방식은
언제나
올바른 자리를
찾게 합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제대로 보게
합니다.
올바른 신앙의
참된 열매는
올바른
실행에 있습니다.
올바른 행위가
중요합니다.
올바른 행위는
이웃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추어
마음으로 진정
존중하면
올바른 실행으로
이어집니다.
자신을 정화하는
아름다운 실행은
이처럼
나를 낮추는
겸손에 있습니다.
참된 실행은
입에 있지 않고
참된 겸손에
있음을 믿습니다.
참된 겸손
참된 실행의
참된 사순입니다.
낮추고
낮아지는
새로운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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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순특강
주제: 예수님의 수난 다시 보기 - 강사: 춘천교구 권오명 사도요한 신부님
https://youtu.be/wcYBHiuGY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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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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