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집회서 4,11-19 마르코 9,38-40
"막지 마라."(마르코 9장 39절)
주님의 보편적 진리는 막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아집과 편견의 무서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주님의 일이다.
독점할 수 없는 주님의 일이다. 주님의 일은 결코 막지 못한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반대와 지지 사이에 우리의 자아가 있다. 우리의 자아는 개방된 삶으로 나가야 한다.
개방된 삶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노골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순간 순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하느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하느님의 뜻을 우리는 반대하게 된다.
반대하는 이들의 마음엔 배타적인 마음이 있다.
맹목적인 반대와 맹목적인 추종도 올바르지 않다.
지나친 편향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편견과 아집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는 남용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실천이다. 대립과 차별모순과 불일치를
극복하게 하는 것은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는 성찰에 있음을 믿는다.
되돌아가야 할 길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막지 않는 것이다.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살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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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준 안토니오 신부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집회서 4,11-19 마르코 9,38-40
마르코 복음 9장 38-40절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시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봉사를 바라시는 이유가 뭘까요?”
어느 예비자의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기도와 봉사를 통해 우리가 성화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라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대답을 하고 혼자서 한참 그 이유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편의 시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었지요.
최유수 시인의 ‘( )가 말했다’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이 선물과 편지 자체도 좋지만 물론 그렇지만, 이 선물을 사러 갔던 그 사람의
발걸음, 그 발걸음을 사랑한다. 책상 앞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편지를 썼을 그 사람의
허리춤을 사랑한다. 그 사람의 시간에 내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느님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기도와 봉사도 물론 기쁘게 받으시지만, 우리의 삶에 당신이 들어가는 것을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을 생각하고 마련하면서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가는 까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막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이 자라나기 때문이겠지요.
기도가 어렵게 느껴질 때, 우리도 천천히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시간에 조금씩 스며드는 것을 느끼면서요.
서울대교구 노동준 안토니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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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집회서 4,11-19 마르코 9,38-40
“(그를) 막지 마라.”
앞 장면에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믿음과 기도가 부족함을 질책 당한
제자들은 이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참으로 옹졸한 태도를 보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코 9,38)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양들인 것이지
‘우리’라는 자신들의 양들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유일한 목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떼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해 있는 이유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이지,
‘나’ 혹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에 속해 있기 위함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우리’가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금방 분열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위한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마르코 9,39)
그러므로 요한처럼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제자의 본분을 잃은
자세입니다. 사실 바로 앞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9,37)
하시며,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내로남불의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 혹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가입니다.
교회는 항상 열려 있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만을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코린토 2서 5,15) 때문입니다.
교회는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고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은 되고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안 된다는 독선을 부리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해도 되지만 너희는 해서는 안 된다고 편을 가르지 않게 하소서!
‘우리’라는 특권으로 다른 이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들이 ‘우리’의 양떼가 아니라 당신의 양떼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울타리를 거두고 손짓하여 부르게 하소서!
스스로에게 갇히는 일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게 하소서!
비록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와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볼 줄을 알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오늘도 제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을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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