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따지는 마음, 은근히 판단하였던 입술을 회개합니다.
옳은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배우는 온유와 겸손이 옳은 것임을 생각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십자가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
생명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오늘도 파레시아의 은혜로 나아가오니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본문 주해)
1절 : ‘그러므로’는 앞에서 언급한 십자가의 원수와 하늘의 시민권자의 내용과 이어진다. 즉 하늘에 시민권이 있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빌립보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애정이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 면류관’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자들에게 주 안에 서라고 한다.
주 안에 선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요,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말이다.
2~3절 : 바울은 유오디나와 순두게에게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한다. 그들은 빌립보 교회의 대표적인 여신도들이라 추측이 된다.
이들은 처음에는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협력한 자들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 간에 한마음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의 문제보다는 자신의 감정적인 문제와 자기주장으로 인하여 다툰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땅을 사는 동안 성도의 육체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이 연약함으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도 심히 다투었다(행15:36~40). 그러므로 더욱 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한 무명의 사람(진정한 동지:새번역)에게 또 부탁한다. 이 여인들-유오디아와 순두게-을 돕고, 그뿐 아니라 글레멘드(빌립보 교인, 바울의 동역자, 1세기 말경 활동한 감독 클레멘트와 동일 인물이라 보는 견해도 있음)와 그 외에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한다. 그들은 다 생명책에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4~5절 : 빌립보 교회는 외부적으로 핍박이 있고, 내부적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을 뿐 아니라,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다툼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이유는 주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기에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기 때문이다.
복음을 듣고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기쁨은 고난과 핍박과 환난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기쁨으로 관용으로 나타난다.
관용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베푼다는 것인데, 이 관용을 모든 사람-믿는 자와 믿지 않는 모든 이-에게 알게 하라고 권면한다.
치열한 경쟁의 이 세상에는 참된 관용이 나올 수 없지만,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을 아는 성도들은 이 관용이 베풀 수 있는 것이다.
6~7절 : 바울은 모든 일에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를 하라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신다고 하는가?
자신의 소원을 다 들어 주신다거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많은 설교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도하라고 하고, 기도는 마스터키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의 문제해결을 해 주신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한다. 즉 우리 마음과 생각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얻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런 평강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강이다.
(나의 묵상)
1절 : 주님께서 내게,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체들을 점점 늘어나게 해 주신다.
또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불려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3절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다툼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순 없지만, ‘다른 복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데도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자기주장의지 때문인 것 같다.
내게도 종종 이런 경우가 일어난다.
어떤 일을 할 때, 답답하다고 여겨지는 상대를 만날 때가 있다. 그때 상대의 성격이나 상황을 용납하지 못하는 쉽게 판단하는 나의 부정성을 본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신데, 그것을 자꾸 잊어버리고 나 자신이 하려고 설칠 때 사달이 많이 난다.
이럴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한 템포 브레이크를 밟고, 급하게 치솟는 나의 부정성과 판단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이제 이들이 복음의 귀한 동역자임을 잊지 않는다.
비록 지금은 피차 연약하지만 우리들은 다같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의 통치 아래에 사는 것을 믿으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이니 우리들의 이름이 함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임을 믿는다.
4~5절 : ‘항상 기뻐하라’ 라는 말씀은 데살로니가 전서(5:16)에도 나온다.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바울 사도는 ‘주 안에서’라는 구절을 붙인다. 이는 ‘주 안에서는 항상 기뻐할 수 있다’라는 말씀으로 나는 받는다.
주님 안에 있을 때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늘 경험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매일 말씀 앞에 나아가 주님과 교제하면 항상 기쁘다.
하지만 따뜻한 이불 속에 뒹굴다가 이른 새벽에 말씀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고,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도 그렇다. 또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시큰둥할 때도 있고, 바쁜 일정으로 쫓길 때도 그렇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의 결말은 기쁘게 말씀 앞으로 나아갔을 때와 동일하다. 묵상 기도의 마침표를 찍을 때 주님 주시는 기쁨이 내 안에 가득하게 된다.
또 중요한 어떤 일을 처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주님 품안에 온전히 거하니, 그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내 기도보다 더 응답하시는 주님을 경험할 때가 많다. 오히려 기도한답시고 엉뚱한 말이나 주절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겨질 때가 많다.
또 고난이 주어질 때도 그렇다.
고난이 주어지면 언제나 ‘왜?’라고 토를 달아 힘들어 했는데, 이제는 그 고난의 은혜를 기대하는 것까지 나아가게 되었으니 이것이 보통 선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로 인해 나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자로 점점 Increasing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이 있는 자이건만 때때로 관용하지 못하는 나의 연약함을 볼 때는 스스로도 당혹스럽다. 하지만 주님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니 이것도 주님께 맡기며, 이것이 내 기도 제목이 된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로서, 너그럽게 용서하고 베푸는 자가 되길 간구한다.
6~7절 : 기도에 대한 구절로 달달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렇게 달달 외웠어도 그 내용을 오해했었다.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생각했다. 이런 현상은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보다 무조건 내 뜻대로 빨리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새번역)
오늘 말씀을 보면 기도하고 간구하면 그대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이 아니다.
응답이 있는데, 그 응답이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되는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와 상황이 어찌 되었건 간에, 내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정말 최고의 응답이다.
이런 경험을 많이 해 본 자는 기도하기가 힘들지 않은 것이다.
복음을 알고 난 뒤 잠깐 동안, ‘기도할 것이 없어졌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 이것을 ‘내가 하나님께 꼭 붙어 있으니 따로 기도할 것이 없구나’ 하고 스스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분명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셨으니, 이런 내 마음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기도할 것이 없어졌다’는 것은 그 동안 내 기도가 얼마나 내 중심의 소원들로 점철되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복음을 알고 나니 일일이 구하지 않아도 다 채우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 동안 내가 했던 기도 내용들이 정말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것들임을 알게 되어, 이것저것 빼고 나니 기도할 것이 없어진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 성령께서 내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를 다시 알게 해 주셨다.
첫째, 자기부인의 기도였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소원을 전에는 무조건 이루어 달라고 기도했지만, 이제는 이것이 정말 하나님 뜻에 맞는 소원인지를 여쭈게 되고, 한 치 앞도 모르는 내 뜻대로보다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옳은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 기도 내용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는 주님의 기도를 본받아 나를 부인하는 기도를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타인을 위한 기도이다.(이것을 일반적으로 ‘중보기도’라는 말을 쓰는데, 진정한 중보는 예수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읽은 뒤로 이 말을 잘 쓰지 않게 되었다. 용어야 어찌되었건 남을 위한 기도라는 의미이다.)
물론 남을 위한 기도에도 내 욕심이 섞일 수 있음을 경계하며, 그 사람을 위해 해야 하는 당면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그가 복음을 알고 생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니 갑자기 기도할 것이 너무도 많아졌다.
날마다, 순간마다 나 자신을 내세우는 자신을 부인하는 회개를 해야 하니, 당연히 기도할 것이 많다.
또 복음 위에 세워질 영혼들이 수없이 많으니 구별된 기도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이 기도들을 주님 앞에 올려드릴 때 잠시 한숨 쉬며 염려했던 것들이 다 주님께서 어떻게 이루실까 하는 기대로 변하고, 내 안에는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과 평강으로만 가득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본문 말씀에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아멘!’을 할 수 있게 된다.
(묵상 기도)
주님,
날마다 새롭게 해 주시는 은혜가 너무도 큽니다.
많은 복음의 동역자들이 서로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안에서 한 마음이 되도록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행하게 하시고
이 모든 일이 제 안에 계신 주님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일이 되게 하옵소서.
항상 기뻐하는 관용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평강을 응답으로 받으므로
더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