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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쭉빵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정석
정석의 욕사속으로
http://cafe.daum.net/ok1221/74fn/201144 고구려는 사실 고구리 주몽이라 하디망
http://cafe.daum.net/ok1221/74fn/201252 731부대? 'ㅅ'??? 독립군이에염?????? 총장님..
안뇽. 추석을 맞아 하라는 과제는 안하고 친구도 없고 게임도 하기 싫고
그래서 이렇게 쭉빵에서 잉여중인 심도는 전혀 없는 역사덕후 정석이라그해.
긱사에서 간만에 집에 와서 잉여된 기념으로 전에 재밌게 읽었던 책들을 대강 훑어보다가
백 년 전 한 인텔리녀성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읽고 ㅠㅠ 다른 언니들도 몇명이라도 더 알았으면 좋겠고
이 분 이야기로 불과 80년 전에 여자의 삶은 어땠는지를 이 분 이야기로 일부분이나마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내가 비루하게 촘 요약해서나마 올려봐. 난 이 분 이야기를 이 책으로 처음 접했거든.
이 책 말고 이 이야기를 다룬 책은 없는 걸로 알아. 주로 나처럼 가벼운 역사책 좋아하는 언니들은 알거야.
#. 조선 최초의 스웨덴 경제학사 여성, 콩나물장수로 가난 속에 죽다
1926년 9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 스물 한 살의 조선 여성 최영숙이 나타났어.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사회과학을 공부해오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스웨덴을 찾아간 최영숙.
그 당시 스웨덴은 조선인은커녕 동양인조차 없었다고 해.
그러니 당연히 최영숙이 스웨덴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고, 스웨덴어는 간단한 인사조차 모르는 상태였지.
게다가 그녀의 집안은 유학 경비를 대줄 만큼 넉넉하지도 않았고,
장학금을 대 줄 후원자도, 돈도 별로 없었어.
그러나 최영숙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31년 11월, 스톡홀름 대학 경제학사가 되어 금의환향했어.
귀국길에 덴마크,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이집트, 인도, 베트남 등
세계 20여 개국을 여행했고, 특히 인도에서는 간디, 나이두 같은 저명한 인도의 독립 운동가들을 만났지.
최영숙이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타국살이가 고단했기 때문이 아니었어.
스웨덴 생활을 묻는 질문에 최영숙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지.
“스웨덴은 나의 제2 고향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외국인 대접을 극진하게 합니다.
더욱이 나는 동양 여자로 처음이었기 때문에 후대를 한 몸에 받았더랬어요.
아이들과 여성들이 자유롭고 힘 있게 뻗어나가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특히 연초 전매국이나 성냥 공장 같은 데서 노동하는 여공들까지도
정신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정말이지 부러웠습니다.
그들에겐 일정한 노동 시간과 휴가가 있을 뿐 아니라 임금도 넉넉해 생활비를 빼고도 반은 남습니다.
그들은 노동복만 벗어 놓으면 유복한 숙녀들입니다.
더욱이 체육을 즐겨 날마다 사는 재미가 더없이 호강스러워 보였습니다.“
최영숙이 이처럼 사는 재미가 있는 스웨덴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고 귀국한 것은
사회과학을 공부해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최영숙은 스웨덴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영어, 독일어, 스웨덴어, 중국어, 일본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세련된 국제 감각까지 갖춘, 당시 조선으로서는 적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한 인재였을 거야.
지금으로 쳐도, 진짜 이거 완전 미친 스펙 아니야? 스웨덴 최고대학 졸업, 5개 국어까지.
그러니까 어떤 직장이든 최영숙이 손만 내밀면 잡아줘야 정상이었어.
그러나,
조선의 그 어느 곳도 최영숙을 받아주지 않았어.
“조선 사회는 아직 인텔리 여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국어 교수 노릇을 하려고 애썻으나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경성 어느 학교에 교사로 취직하려다가 문부성에서 교원 면허를 내주지 않아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나중에 어떤 신문사의 여기사로 입사하려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할 수 없이 낙원동에 있는 여자소비조합을 인계해서
사람이 왕래가 많은 서대문 밖 교남동 큰 거리에 자그마한 점포를 빌려서 장사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배추, 감자, 마른미역줄기, 미나리, 콩나물을 만지는 것이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양의 일상 직업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자본이 없는 일개 구멍가게로 어떻게 한 집안 생활비가 나오리까.
오직 최영숙 양은 살을 깍는듯한 경제적 곤란을 당하고 지냈을 뿐입니다.“
여자로서는 너무 앞서갔기 때문에?
여자의 몸으로 남자보다 더 잘난 일을 해냈기 때문에?
핍박받는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스웨덴에서 5년 동안이나
공부하고 돌아온 최영숙에게 고국 조선이 허락한 일자리는 고작 ‘콩나물 장수’였지.
#. 조선의 마르크스걸, 스웨덴으로
최영숙은 1906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어. 어려서부터 아주 똑똑했다고 하는데,
일곱 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열한 살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
중등학교는 열네 살 이상만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최영숙은 3년을 집에서 보냈어.
사실 그 당시엔 딸에게 글이든 뭐든 가르치려 하지 않는 부모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보통학교라도 나온 여자가 매우 드물었어. 그러니 당연하게도 최영숙의 부모님은
여자가 보통학교까지 졸업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딸이 상급학교로 가는 것을 반대했지.
하지만 최영숙은 완고한 부모님을 기어이 설득해낸 뒤, 상경해서 이화학당에 입학했어.
그녀가 이화학당에 입학한 것은 1919년이야. 3.1운동이 일어난 해.
1919년과 이화학당. 그럼 한명이 떠오르지? 유관순 열사가 바로 최영숙의 1년 선배야!
3.1운동 직후였기 때문에 이화학당은 매우 어수선했어.
학교는 입학식만 치르고 휴교에 들어갔고, 교사와 학생들 다수가 투옥되었고,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 사망했어. 이런 시절을 가장 가까이에서 겪게 된 최영숙은
1923년 이화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해.
그리고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을 향해 유학길에 올랐지.
난징으로 건너간 최영숙은 밍더 여학교에 들어가 중국어를 익혔어.
중국어를 배운 지 단 몇 달 만에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로 어학 능력이 뛰어났다고 해.
이듬해에는 난징 후에이원 여학교에 편입했지. 이곳에서도 최영숙은 단연 돋보이는 학생이었어.
영어와 독일어를 수준급으로 해냈고, 성악과 피아노 실력 또한 뛰어났어.
이곳에서 최영숙은 사회주의 사상을 만나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어.
그 와중에도 틈틈이 상하이로 가서 중국에서 망명 중이던 여러 인사와 교류했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해. 안창호도 총명한 최영숙을 남달리 아꼈고.
후에이원여학교를 졸업한 최영숙은 스웨덴 유학을 결심하게 돼.
많고 많은 나라 중에 유독 스웨덴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한 이유는
스웨덴의 여성/교육운동가 엘렌 케이(1849~1926)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래.
엘렌 케이는 서구보다 동아시아에서 더 유명한 인물이야.
조선, 일본, 중국의 여성 운동과 자유연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지.
이광수가 소설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의 박식함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타고르의 이름을 알고 엘렌 케이 여사의 전기를 보았다”고 기술할 정도였지!
엘렌 케이의 저서는 당시 신여성의 필독서였어.
최영숙은 졸업한 지 1년 후, 사상이 같고 깊이 신뢰하던 중국인 친구 한명과 함께 무작정 난징을 떠났어.
여성운동의 선진국인 스웨덴으로 가서 평소 동경했던 엘렌 케이도 만나고, 사회과학도 공부할 작정으로.
최영숙의 스웨덴 유학 소식은 <동아일보-당시는 진보언론ㅋ>를 통해 국내에도 알려질 정도였어.
“경기도 여주군 태생으로 방년 21세 된 최영숙 양은 지난 7월 13일 밤
하얼빈에서 구아 연락 열차를 타고 멀리 스웨덴을 향하여 떠났다.
최영숙 양은 사회과학을 연구하려고 단신으로 만리타국으로 간다고 한다.
지난 9일 기선을 타고 상하이를 떠나 다롄에 상륙했을 때,
최영숙 양은 일본 경찰에게 잡혀 큰 고초를 겪었다 한다.
그는 후일 고국에 돌아와 몸과 마음을 오로지 고국에 바치기 위해
이 같은 고생을 무릅쓰고 공부하러 멀리 떠난다 한다.
그는 나이 어린 여자의 몸으로 일어와 중국어, 영어에 정통하고 매사에 재주가 뛰어나다.
최근에는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한다 하며,
이번에도 사회주의에 관한 서적을 많이 가지고 가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한다.“
다롄에서 그녀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있는 동안
난징에서 함께 출발한 중국인 친구는 힘든 유학길을 포기해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어.
낯선 나라로 혼자 가려니 막막했지만, 그녀는 자신을 수습하고 다시 길을 떠났어.
최영숙은 난징을 떠난 지 두 달 만에 스톡홀름에 도착했어.
그러나 엘렌 케이는 최영숙이 출발하기 석 달 전에 이미 죽었고, 최영숙은 엘렌 케이를 만나지 못해.
그러나 언제까지나 낙담하고 있을 수는 없었어.
최영숙의 부친은 포목상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었지만 최영숙이 스웨덴으로 떠나기 직전
명태 무역에 손을 댔다가 엄청난 손해를 보고, 여주를 떠나 경성 홍파동 빈민가로 이주해야 했어.
그러니 집에서 학비를 조달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어서 스웨덴어부터 배우고, 학비를 벌어 공부할 방도를 찾아야 했지.
최영숙은 스톡홀름 인근의 시골학교를 찾아가 청강생 신분으로 스웨덴어를 배우기 시작했어.
그리고 밤에는 생계를 위해 자수를 놓았지.
베갯잇 하나를 수놓으면 5~6원의 수입이 생겨 그리 힘들지 않게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해.
얼마 후에는 저금을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어.
1927년 스톡홀름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황태자 도서실에서 연구보조원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어.
1926년 아돌프 황태자가 아시아 곳곳(그는 조선도 방문했는데, 그 자신이 고고학자라서
각지 고분 발굴 현장에 참여했어. 세 번째로 발견된 신라금관인 서봉총금관을 발굴 한 것도 이 사람이야.
그 고분이 서봉총(서전의 서, 봉황의 봉)인 이유도 이 사람 때문임. 훗날 구스타프 6세가 됨)에서
수집해 온 자료의 목록을 작성하고, 주요 내용을 스웨덴어로 번역하는 일이었어.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에 능통하면서 스웨덴어까지 할 줄 아는 최영숙은
학구적인 아돌프 황태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됐지.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최영숙은 스웨덴의 저명한 지식인들과 폭넓게 사귈 수 있었는데,
1935년 스톡홀름대학 자연과학부 학장 베르크만 박사가 동식물 표본 수집차
조선을 방문했을 때, ‘미스 최’의 안부를 물을 정도였어.
그녀는 스웨덴에 유학 온 첫 동양인이었어.
그녀가 스웨덴에서 만난 동양인이라곤 중국대사와 그 부인이 전부였다고 해.
그녀의 대학 생활은 풍요롭고 행복했어. 스웨덴 학생들은 처음 보는 동양인 학생을 친절하게 대했고
동양에는 중국과 일본 밖에 없는 줄 알던 스웨덴 사람들에게 조선의 존재를 가르쳐줄 수 있었어.
여름이면 친구들과 수영을 하고, 겨울이면 스키도 타러 다녔어.
조선에서는 여자의 몸으로 결코 맛볼 수 없었던 자유와 행복이었지.
그러나 외국에서 느끼는 행복에는 한계가 있었어.
그것도 홀로 낯선 땅에서 젊은 여자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국 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최영숙은 심각한 향수병에 시달렸어.
1931년 4월, 최영숙은 결국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고 귀국길에 올라.
#. 그리고 사[ɵ]랑
귀국길에 올랐을 때 최영숙의 수중에는 6백원 남짓한 돈이 있었어.
아돌프 황태자의 연구를 보조하고 받은 돈과 틈틈이 자수를 놓아 번 돈이었지.
최영숙은 귀국길에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여러 나라를 시찰하기로 마음 먹었어.
(아마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 여행을 한 여성.. 아니 사람일 것 같아.)
당시 조선에서 교사 월급이 50원이던 시절,
6백원은 조선에서는 큰돈이었지만 유럽 여행을 하기엔 빠듯한 돈이었지.
그녀를 친부모 못지않게 아끼던 스웨덴 유력 인사는 최영숙과 작별하며
“돈이 떨어지면 언제든 전보를 치라”고 당부했지만 최영숙은 완곡하게 호의를 거절했어.
그러자 그는 대신 여행의 편의를 부탁하는 내용의 소개장을 써주었고,
그녀는 덴마크,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를 두루 구경하고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하기까지 그의 소개장 덕분에 가는 곳마다 극진한 환대를 받았어.
그러나 긴 여정으로 피로한 상태에서 이집트의 덥고 건조한 기후 때문인지 건강이 너무 나빠져버렸고,
병석에 누워 요양하는 동안 여비를 거의 다 써버렸고, 남은 돈을 털어 인도행 기선에서
쿨리(인도인노동자)들이 타는 화물칸 자리를 간신히 하나 얻을 수 있었어.
이 배에서 최영숙은 평생의 사랑을 만나게 돼.
최영숙과 인도 청년의 사랑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삼천리> 1932년 5월호에는 두 사람이 스웨덴에서 만났다고 했지만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 임효정은 그 두 사람이 인도행 기선에서 처음 만났다고 해.
임효정은 최영숙의 이화학당 동창으로 난징 유학 생활을 같이 했고,
최영숙의 임종을 지키고 그 유골까지 수습한 둘도 없는 친구였으니,
최영숙과 인도청년의 이야기를 선정적인 흥밋거리로 다룬 <삼천리>의 기사내용 보다는
임효정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거야.
나는 임효정의 진술만 소개할게.
날마다 화물칸 선상에 앉아 있는 동양 여인을 멀리서 바라보는 일등실 승객이 있었어.
그가 바로 ‘미스터 로row'야. 문제의 인도청년ㅋ
그는 며칠 동안 먼발치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드디어! 말을 걸었지. 영어로.. 이거슨 80년전의 국제연애!
그는 자신을 조선 사람(어머니가 인도인)이라고 소개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임효정이 친구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허위 진술한 걸 거야.
실제로 최영숙이 인도 청년과의 관계가 알려지기 전에 신문에 기고한 글의 일부를 보면
‘실상 내가 인도를 찾아간 것이나 인도에서 오래 머물게 된 이유는
간디와 나이두 두 분을 만나고 싶은 까닭이었다. 7월 초순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국민회 일로 그 전날 밤늦게야 간디 씨가 봄베이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 나는 나이두 여사의 생질이 되는 이로,
이집트에서부터 우연히 동행했고, 그동안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친구 로 씨와 함께…‘
미스터 로는 나이두 여사의 조카였어. 나이두 여사는 뱅골 지방 브라만 명문가 태생의 여성 정치가였으니,
유서 깊은 브라만(인도의 최고위귀족) 집안에 조선인의 피가 섞였을 리가 없ㅋ지.
당시 조선 사회는 해외 유학까지 혼자서 다녀온 인텔리 여성이 인도인 혼혈아를 임신해 돌아왔다고 하면
‘아 구래?’ 하고 그저 넘길 만큼 개방적이지 않았어.
외국인과 사랑한 것도, 부모 모르게 결혼한 것도, 혼혈아를 임신한 것도 모두 허물이었기 때문에
임효정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친구를 조금이라도 더 감싸주고 싶었던 거야.
어쨌든 그는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과 인도를 오가며 무역상을 하고 있었고,
고향인 봄베이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최영숙에게 소개했어.
그리고 최영숙이 화물칸에 타게 된 사연을 들은 뒤 바로 일등실 배표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최영숙은 초면에 신세를 질 수 없다며 거절했어.
인도 청년도 더 권하지는 못하고, 대신 매일같이 화물칸에 찾아와 최영숙과 이야기를 나눴대.
그들은 조선과 인도에 대해, 간디와 나이두 여사에 대해 이야기했어.
인도는 영국에게 오랜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었고, 조선 역시 일본에 식민지배를 당하던 시절이니
그들이 서로에게 공감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거야.
그는 고결한 인품과 총기를 지닌 인물이었다고 해. 꺄..
여행이 길어지면서 최영숙의 건강은 더 나빠졌어. 청년이 다시 한 번 일등실로 옮길 것을 청하자
최영숙도 자신의 상태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신세를 갚기로 약속하고 일등실로 옮기게 돼.
이렇게 미스터 로의 도움으로 최영숙은 무사히 인도 봄베이에 도착했어.
최영숙은 도착 즉시 집으로 전부를 부쳤지만 한참이 지나도 집에서는 소식이 없었어.
거기다 주머니에는 동전 한푼도 없는데 설상가상 다시 병석에 눕게 됐지.
숙소도 미스터 로가 잡아주었고, 병원비도 미스터 로가 대신 치러주었지만
그 역시도 외조모가 재산을 관리했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더는 도와줄 수가 없었대.
숙박비가 장기간 밀리자 여관 주인은 한밤중에 가방을 밖으로 내던지고, 최영숙을 내쫓았어.
그녀의 부모는 집을 잡혀서라도 여비를 보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어.
‘영숙이가 혹시 사고라도 당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애타는 마음에 백방으로 뛰어다녀
가까스로 3백원을 마련했지만, 돈보다 배표가 빨리 간다기에 배표를 사서 보냈고,
당장 필요한 돈 대신 배표를 받아 든 최영숙은 더 낙담할 수 밖에 없었어.
낯선 거리를 방황하게 된 최영숙은 하는 수 없이 미스터 로의 집으로 찾아 갔어.
미스터 로는 우선 자기 집에 머물며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권했고, 최영숙은 얼마 후
기독교여성청년회에서 일어 교사 자리를 얻었어.
그러는 동안 그 둘은.. 헤.. ㅎ.. 연인이 되었어.
그들은 성대한 결혼식을 거행하고 정식 결혼신고까지 마쳤어. 사랑의 선물로 뱃속에 아이까지 생겼고.
그러나 최영숙은 영원히 인도에서 살 수 없었어.
결혼한 지 석달이 안 된 어느 날, 최영숙은 남편에게 귀국할 뜻을 전했어.
“가시오,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공부시킨 뜻을 잊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가
고국을 위해 일하겠다는데 낸들 어찌 말리겠소. 그러면 가시오.“
“1년에 한 번씩은 꼭 오세요. 어린애는 고이 가꾸어 큰 일꾼으로 만들 작정이니…”
그 둘은 그땐 몰랐을거야. 그게 영원한 이별이 됐을 줄은.
최영숙은 넉 달간의 짧은 인도 생활을 마치고 1931년 11월 귀국했어.
최영숙은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결혼과 임신 사실을 임효정에게만 살짝 귀띔했어.
남편을 인도에 두고 귀국길에 오르면서 최영숙은 우선 직업을 얻어 가정부터 정리해놓고,
인도로 돌아가 살든지 아니면 남편을 불러 조선에서 살든지 할 계획이었지.
그러나 막상 귀국해보니 집안 형편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어.
첫째동생은 벌써 출가를 한 상태였고, 둘째 동생은 출가도 못한 채 이화여고보를 마치고
여학교 교사로 일하며 부모와 정신병을 앓는 오빠를 겨우 부양하고 있었고.
가족들은 스웨덴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학사학위까지 받은 최영숙이 귀국만 하면
집안 형편이 한순간에 풀릴 것으로 기대했고, 최영숙 또한 집안에 얼마간 도움이 되리라 믿었지만
현실은 냉혹했어.
아무도 그녀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어.
#. 돈, 돈… 나는 돈의 철학을 알았소이다
일자리를 얻지 못해 생활이 갈수록 어려워져가자, 최영숙은 결혼반지까지 내다 팔게 됐어.
그러나 최영숙은 누구에게도 힘든 사정을 말하지 않았고, 절친한 친구가 얼마라도
도와주려 해도 ‘다른 사람에게 구구하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활신조를 가진 그녀는 모두 거절했어.
생활이 이렇게 어려운데도, 사회를 위한 일에는 발 벗고 나섰다고 해.
낙원동 여자소비조합이 곤란을 겪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손해를 입을 줄 알면서도 자금을 변통해 인수했어.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가 ‘콩나물 장사’에 나선 것은 그저 생계유지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비자 운동을 위해서였던 거지.
거기다 이화학당 시절 은사 김활란이 공민학교를 세울 계획을 말하자 만사 제쳐놓고
공민독본(아마도 교과서.. 같애.. 아마도..?) 편찬에 나서, 밥을 굶어가며 도서관에 다녔다.
임신한 몸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바쁘게 사니, 몸이 성할 리 없잖아.
영양실조, 소화불량, 임신중독이 차례로 찾아왔고, 급기야 각기병까지 걸려 두 다리가 부어올랐어.
이렇게 다섯 달을 지내자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결국 최영숙은 실신해 동대문부인병원에 입원,
사랑이 결실을 낙태수술로 지워야 했어.
그리고 세브란스병원에 후송되어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진단만 받은 채 자택으로 돌아왔어.
4월 23일 오전 11시, 최영숙은 그렇게 27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어.
‘그의 집은 빈한하고 당장 매장할 돈조차 없다. 여사의 평생 동지였던 임효정 여사가
장례비 일체를 부담하는 형편이다. 육십 된 노부모가 망극하여 통곡하는 광경은 실로 씁쓸하다.‘
25일, 최영숙은 홍제원 화장장에서 재가 되었어.
미스터 로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최영숙은 세상을 달관한 듯
“돈! 돈! 나는 돈의 철학을 알았소이다.” 라고 썼어. 그러나 그 편지를 부치지는 않았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픈 기억을 남기고 싶진 않았겠지.
그리고 최영숙이 세상을 떠난 지 며칠 뒤,
미스터 로로부터 여비를 보내니 인도로 돌아오라는 편지가 왔다고 해.
출처 : 경성기담, 전봉관, 2007
조선에 쓰이기를 원했고, 그 일념으로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편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훨씬 더 명예롭게 살 수 있었던 기회도, 사랑도 포기했지만
결국 조선에 버림받아 죽고, 죽어서도 조선인에게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던 여자.
80년 전 이 나라에서 아무 배경도 없이 여자가 남자보다 잘났다는 것은 그런 거였어.
글쓴이가 덧붙인 말이야.
'30년 만에 고국을 찾은 하인즈 워드의 어머니는 "그때 내가 워드 데리고 한국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그놈 거지밖에 안됐겠지? 라고 말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영숙의 삶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1906년에 태어난 최영숙이 백 년 늦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똑같은 실수-조선으로 돌아오는-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씁쓸한 현실이다.'
그래도 난 정말 내가 좋은 시절에 태어났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진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거.......
근데 나 길 잃었으면.. 말해줄래..
앞에 두개 까진 망설임 없었는데 이건 왠지 헷갈리거든.....
앞에 올리던 게 있어서 습관적으로 왔는뎅.......
하디슈로 가야하는고니...... 말해줘...... 나 경고1회야..... 무써월...... 훟홓허헣..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앜ㅋㅋ딴말이지만 이종댁이라는 단어가 뭔가 웃기닼ㅋㅋ
여자로서 헬조선에 애국한 대가가 이거라니...
돌아오지 마시지ㅠㅠ 아니면 콩나물 장사하기 전에 다시 해외로 나가시지ㅠㅠ 너무 안타깝다
너무 안타깝다 ㅠㅠ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저렇게까지 하대받아야하다니 진짜 화나 ㅠㅠㅠㅠㅠ
외국에서 살아야겠다....
저렇게 훌륭하신 분이 한국에선.......
여성에겐 조국이 없다, 여성운동가 버지니아 울프여사가 한말인데 구구절절하게 어울리는 말이야
현대한국은 뭐 다른가 한국최소 우주인 이소연님 봐봐
너무 슬프다...이나라는 미래가 없어
진짜 슬프다....ㅠㅠ 최영숙님 기억할게요
ㅜㅜㅜ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