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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이름으로
사도행전 3:12-19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부활절 세 번째 주일이다. 부활절은 성령강림주간까지 일곱 주간 동안 계속된다.
세계교회의 전통에 따라 부활절 인사를 나누자.
선창-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후창-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 색동교회와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간다. 우리의 고백과 믿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 부활’이다.
부활절 2주간 동안 한국감리교회는 열 곳에서 지역별로 연회(年會)를 연다. 우리는 경기연회에 속한다. 비단 연회 참석이 아니어도 외국에 사는 감리교 목사들이 이 기간에 들어 온다. 친구들을 두루 만날 수 있어서이다. 내 경우 지난 주간에만 7차례 사람들과 밥을 먹거나, 차담을 나누었다. 반가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에서 왔다.
전통적으로 연회에 모이는 감리교인들이 부르는 찬송이 있었다. 찰스 웨슬리의 찬송이다.
“생전에 우리가 또 다시 모였네. 예수의 보호하심을 다 찬송하리라
주 예수 은혜를 힘입어 살 동안 싸움터 같은 세상에 두려움 없었네
주 예수 변찮는 큰 사랑 베푸사 이때껏 인도하셨고 늘 인도하시리
구주의 권능을 힘입고 살았네 그 은혜 찬송하려고 이곳에 모였네.”
처음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감리교 전도자들은 서부 개척시대에 맨 앞장에 있었다. 새로 깔리는 철도와 함께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출하며 위험을 무릅쓴 개척자들 덕분에 감리교회는 미국 전역으로 확장되는 결과를 얻었다. 지금 연합감리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교회가 되었다.
감리교 전도자들의 삶은 위험에 도전한 프로티어의 모습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1년에 한 번 연회에 모여 비장한 찬송을 불렀던 것이다. 감리교회는 ‘Sing Church“였다.
1)
만약 예수님 부활 이후 다시 모였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해마다, 혹은 몇 년에 한 번이라도 모였다면 어떤 만남이었을까? 그런 모임이 가능하지도 않았겠지만, 매우 흥미진진한 보고서를 냈을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몸으로 증언한 그들의 삶은 온갖 위험에 도전한 프로티어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도행전이 그 행적을 증언한다.
오늘 주인공은 베드로와 요한이다. 그들은 과감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하려고 날마다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마침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한 거지와 마주쳤다. 그는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자비를 구하였다. 그날도 지나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부르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성전 문은 구걸하기에 목이 좋은 장소였다. 성전을 들락거리는 사람은 인정이 많다. 왜냐하면 성전에 드나드는 그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처지가 아닌가?
뜻밖에도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심히 스쳐가는데, 베드로와 요한의 태도는 남들과 달랐다. 앉은뱅이인 거지더러 “우리를 보라”(4)고 하는 것 아닌가? 자기에게 보여준 관심은 거지에게 몇 푼을 얻으려니 기대를 갖게 하였다. 그런데 베드로는 거지의 오른손을 잡고 이렇게 외쳤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
베드로가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그가 곧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섰고, 걸었고, 뛰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했던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제 거지의 관심은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얻어 낼 몇 푼 동전이 아니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진심으로 붙들었다. 자기에게 일어난 변화가 너무나 놀라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생생한 현실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거지는 물론, 모인 사람들은 베드로의 경이로운 기적을 보고 놀랐다. 베드로에게는 이 사건으로 카리스마를 얻을 기회였다. 당장 기적을 경험한 당사자가 그의 곁에 있지 않은가? 베드로가 어떤 말로 이 상황을 설명하느냐에 따라 그는 일약 스타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
이 일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권능이나 경건 정도로 할 수 있는 차원의 일이 못 된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은 쓰임 받은 도구일 뿐 자기 능력이 아니므로 놀랍게 여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베드로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이 기회에 ‘예수, 그 이름’을 높인다. 베드로는 담대히 외쳤다. 이 사람을 일오켜 세운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가 능력의 주님이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가 그를 일으켜 세우셨다!
2)
베드로는 유대인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설교할 기회를 얻었다. 베드로는 이 기회에 정면승부를 건다. 베드로는 때를 만난 듯 예수를 증거 한다.
너희의 행한 일을 보라! 너희 유대인들은 예수를 고발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범죄자로 정죄하여 십자가형을 고집하였다. 살인자는 살려주었고, 오히려 의롭고 거룩한 자를 죽였다. 그러나 생명의 주를 영원히 죽일 수는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이 이 일에 증인이라고 담대하게 밝혔다. 얼마 전까지 두려워서 몸을 숨기던 그들이었다. 예수를 아느냐는 물음에 스스로 저주하던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말한다. 사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너희도 모르고 한 짓이 아니냐? 이제 그 무지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그 불신앙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일찍이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일이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신 일이다. 그것을 믿고, 예수의 이름을 믿어라!
베드로는 새로운 믿음을 설교하였다. 그것은 조상들의 믿음에 머물지 않는다. 율법의 차원에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19).
기적에 머물지 말고, 기적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의 능력을 믿어라. 기적에 한눈을 팔지 말고, 기적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의 이름을 믿어라. 그 본질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16)이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음의 새로운 차원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부활 신앙이다.
성경은 예수 그 이름에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베드로의 선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는 선언은 이후 예수님의 능력을 구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우리는 예수 그 이름의 능력을 믿는가?
부활절의 증인은 생명에 대한 상징으로 가득하다. 부활절기에 교회의 강단에 놓인 두 개의 크고 흰 초는 신생의 빛을 상징한다. 부활절에서 예수님 승천일까지 40일 간 켜놓는 커다란 촛불은 ‘빠스카의 초’라고 부른다.
빠스카는 “너희를 넘어가리”(출 12:13)를 뜻한다. 빠스카는 어둠에서 빛으로, 속박에서 자유로 그리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다’는 사건이다. 주님의 보혈로 은혜의 자녀가 된 나는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린 그 밤을 기억해야 한다. 안식 후 첫 날인 부활주일은 새로운 삶이 시작된 첫 날이었다.
색동교회 십자가는 또 어떤가? 춤추는 모습이다. 이를 부활십자가라고 부른다. 생기와 생명력이 넘치는 생생하게 다시 사신 주님을 증거하고 있다.
3)
부활신앙이 상징이나 입술의 고백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부활신앙은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구체적인 확신과 놀라운 감격의 생활을 가져다준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것이 자신의 능력인양 놀랍게 바라보는 군종을 향해 말한다. 내가 고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
예수를 믿는 믿음에 능력이 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그 믿음, 곧 예수의 이름이 구원한다.
몇 년 전, 한국정교회를 방문했을 때 대주교가 부활란과 함께 ‘예수 기도문’을 주었다. 정교회의 ‘예수 기도’ 방법론 소책자이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해 부르는 기도이다. 그 기도의 원형은 이렇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죄인을!”
예수 기도는 초보자든 경험자든, 홀로 또는 공동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어디서든 할 수 있다. 먼저 회개 후에 ‘예수 기도’를 계속 반복하면서,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왜 ‘예수 기도’를 드리는가? ‘그 이름, 예수로 말미암아’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응용하여 다양한 기도가 가능하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 몸의 질병을 고치소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소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 삶에 평안을 주옵소서.
본래 턱을 가슴에 대듯 고개를 숙이는 자세로 한다. 물론 조용히 산책하며 천천히 걸으면서 할 수 있고, 고요히 묵상 중에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기도 방법을 천년이 훨씬 넘도록 계속 이어 올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묵상법을 통해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는가? 그 이름을 부르며 나를 호소하지 않는가? 그 이름을 통해 내 죄를 고백하지 않는가? 그 이름 안에 나를 고치시고, 나를 위로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6)의 능력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우리에게 은과 금은 너무 많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었다.”
부활신앙은 단지 입술에 머물지 않는다. 부활신앙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 마음의 믿음을 넘어서 우리 삶의 변화와 직결된다. 문제는 겉모습이나, 외적 조건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부활이다. 과연 나는 부활신앙을 소유하였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 실패의 자리에 ‘다시’ 찾아오신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다시’ 불러 주신다. ‘다시’ 찾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는 새 삶, 부요한 삶, ‘정말’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새 세월호 10주기를 맞았다. 지난 주일 오후 6시에 안산 안전공원부지에서 열린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단원고가 바라보이는 맞은편에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안산지역 교회 몇몇 목사들이 주동이 되어 매달 첫 주일 오후 5시에 기도회를 이어왔다고 한다.
그날 안산 화랑공원으로 걸어가면서 잠시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다. 스스로 ‘나도 세월호의 아픔에 동참하려고 노력했지’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10년 전 팽목 항에 3번 찾아가고, 그곳까지 걷기도를 하고, 청와대 청운동파출소과 분수대 앞에서 여러차례 기도회 설교를 하고, 세종대왕상에 올라간 신학생들이 잡혀간 동대문경찰서 항의방문도 가고, 광화문 한복판에서 열린 철야금식기도회 참여하고, 목포신항에서 고난기도회를 열고, 영화 제작이나 세월호합창단에 후원을 하고, 세월호 십자가를 만들어 전시를 하고, 칼럼도 여러 편 쓰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스스로 우쭐해하였다.
그러다가 예배 참석하면서,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나마 우쭐했던 내 생각이 얼마나 송구스러웠던지, 눈물이 날 정도로 후회하고 회개하였다. 내가 남의 아픔에 진지하지 못했구나. 평생 말로는 공감하며 살려고 했지만, 정녕 남의 상처를 다 헤아리지 못하였다. 아주 죄송하고, 두렵고, 가슴이 아팠다.
물론 우리 중에서 누군들 아픔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인생의 숙제, 고달픔, 염려, 두려움, 멍에, 슬픔, 신체적인 연약함 그 누구 한 사람도 자유롭지 못하다. 모두 깨어질 질그릇과 같은 인생이다.
그래서 누구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이다. 누구나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죄인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라. 예수님의 이름을 사랑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하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을 향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이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여러분의 부활신앙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부활하신 주님, ‘그 이름,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인생이 고침받고, 회복될 것이다.
예수, 그 이름이 여러분의 생명을 새롭게 하시고, 평화를 허락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