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관 李相寬, (1891 ~ 1936)】「1925년 정의부 환런현 남구 총관」
1891년 4월 1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상남면(上南面) 조음리(棗音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이명은 이상관(李相觀), 이정헌(李禎憲)이며, 정의부(正義府) 활동 시기에는 이정헌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전후 중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의부 설립 초기부터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양기탁(梁起鐸)·김동삼(金東三)·이장녕(李章寧) 등은 1924년 10월 18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계열의 7개 단체를 통합하여 정의부라 칭하였고, 삼권분립(三權分立)-공화정체(共和政體)를 표명하면서 군부와 민정부의 분리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특성은 1929년 4월경 정의부가 참의부(參議府)와 신민부(新民府)의 일부 단체를 통합하여 국민부(國民府)-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민-군-당 3정 체제로 전개되는 것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정의부는 이러한 민정-군정 분리의 맥락에서 지방행정조직으로서 현(縣) 단위의 하위에 구(區)를 지정하고, 구에 구의회(區議會)와 장을 두어 지방 통치의 최소 단위로 설정하였다.
1925년 7월 7일 퉁화현(通化縣) 일본영사관에서는 정의부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지목하면서, 환런현(桓仁縣) 남구(南區)의 총관(總管)이라고 보고하였다. 1924년 정의부 창설 당시 환런현 정의부의 현 단위 총관은 송일성(宋日成)이었으나, 1925년경에는 사무와 민정의 필요로 남구와 같은 단위가 세분화되면서 환런현 남부지역의 한국인에 대한 민정 부분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민정 활동 중심의 참여는 1929년 4월 정의부가 통합된 이후 국민부-조선혁명군-조선혁명당으로 발전하는 중에도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1년 12월 19일 신빈현(新賓縣)에서 조선혁명군의 미래를 의논하던 간부급 대원 10명을 포함하여 83명의 주요 인물들이 체포된 이른바 ‘신빈사건’으로 조선혁명군에 상위-중간급 간부진에 공백이 생기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또한 1933년 8월에는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이 함정에 빠져 살해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의부 환인 남구 총관을 역임하였다.
1935년에는 국민부 산하의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과 조선혁명군 재무부장(財務部長)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조선혁명군(軍)-조선혁명당(黨)의 2개 영역에 걸쳐 활동하면서, 신빈사건 이후 간부급 인재가 부족해진 조선혁명군의 운영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1934년 11월 11일 군민 대표자회의를 통한 국민부-조선혁명군 통합, 1935년 7월 5일의 해소선언을 통한 조선혁명당의 해산 이후로 민정의 국민부와 당정의 조선혁명당이 사라진 가운데서 유일하게 남은 조선혁명군 계열의 재정 살림을 총괄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회 군민대표회의(軍民代表會議)에 참석하여 조선혁명군의 군사와 협력자들에 대한 정치적 안정에 힘썼다. 또한 갈수록 악화되는 재정 부족과 인명 피해를 보충하고자, 1936년 9월 재무부장으로서 만주뿐만 아니라 국내에서의 자금 모집과 인력확충을 위해 지도부와 함께 논의하여 류광호(柳光浩) 등 6인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36년 12월경 일본군 동변도특별공작부(東邊道特別工作部) 환런(桓仁) 지부의 한국인 밀정 정만기(鄭萬基)와 박수림(朴樹林)의 공작으로 인해 양세봉의 전사 이후 조선혁명군의 중추였던 고이허(高而虛)가 체포되었으며,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홍심원(洪深遠)과 부관처장 김명암(金鳴庵)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고 고이허 등과 함께 펑톈(奉天)으로 호송되어, 인근 동릉(東陵) 혹은 환런현 현지에서 같은 해 12월 16일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