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모여 서는 곳에는 그곳이 문화가 발달하였거나 아니거나가 문제가 되지 않고 그들의
필요에 의하여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형성한다. 그것은 학계 쪽에서 민속이라고 이름하는 모양이다.
민족은 어떤 의미로든지 그 민족의 정신적 눈금이다. 이것이 좋고 나쁘고가 문제 아니고 그
나름대로 특이함이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산속(産俗)이라는 게 있었다. 피임을 하는 방법의 피임속(避姙俗),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기자속(祈子俗), 아기 낳기 전에 하는 산전속(産前俗), 아기 낳을 때 하는 해산속(解産俗), 이기 낳은 뒤에 하는
산후속(産後俗), 아기 기르는 육아속(育兒俗) 등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태교에 관한 것은 언제부터 있었느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한 마디로 대답할 자료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불교문화의 유입으로부터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한다. 그것은 우리나라 최고
오래된 역사 자료인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어서이다.
물론 그 이전에 민속적 입장에서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통도사를 창건하였던 자장 스님의 아버니는 진한의 진골(眞骨)인 소판(蘇判)
김무림(金茂林)이다. 김무림은 중요한 관직을 지냈으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에 삼보(三寶)에 귀의하며 천부관음보살(千部觀音菩薩)에게
나아가서 아들 낳기를 바라며 기도 올리고 축원하였다.
그때의 기도문의 한 줄은 다음과 같다.
'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내놓아서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겠습니다.'
문득 그 어머니 품에 별이 떨어져 품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로 말미암아 태기가 있었다.
이런 상황은 은밀하게 이야기하면 거룩한 태교의 실현이다.
새로운 생명을 기다림에 있어 부처님에게 기원하여 그 기원하는 마음으로 새 생명을 탄생케
한다는 것은 차원 높은 사랑이다.
물론 종교사상이 배경이 되었지만 문헌에서 찾아본 태교의 실례로써 최고 오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유교문화의 유입으로부터 대학(大學)·소학(小學) 등 유교경전이 들어와 그것이 우리네 생활의
표본이 된 때가 있었다.
그 영향을 입어 민간사회에 태교의 풍속이 이루어진 것 같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어머니 이씨(李氏) 부인은 『태중훈녀(胎中訓女)』에서
선철(先哲)의 지나간 행적을 더듬고 그에 관한 책을 읽으며 이를 선망하고 부러워하며 나도
그와 같은 위인을 낳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보통 사람이 행하기 힘든 행동을 해야 한다.
고 강조하고 있다.
이조 선조(宣祖) 때 임금님의 의사 노릇을 한 바 있는 허준(허준)이 지은 한의총서
『동의보감(東醫寶鑑)』하권 잡병편에 태교를 언급하였다.
삼가여야 할 약물
삼가여야 할 음식
유산하지 않는 법
임신장리법(將理法)
열 달 양태법(十月養胎法)
등이 수록되어 있다.
율곡(栗谷)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61)은 태교에 남다른 공적을 남겼다.
율곡의 어머니는 일곱 남매를 두었다.
임신 때마다 몸을 극히 조심하였다.
'임신부의 몸가짐이 발라야 뱃속에 든 아이도 바르게 자란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사미(邪味)한 음식은 먹지 않았으며 좋지 못한 것을 보지 않았다.'
이런 생각과 행동의 사실은 그 근원을 중국 주나라 태임의 태교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임당이 본능적으로 한 것인가.
사임당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의 덕(德)을 흠모하여 태임을 스승으로 배운다는 뜻으로
사임(師任)이란 호를 가졌을 정도로 태임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국문화권, 유교적 풍토 위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인가.
숙종 때 신경(申暻)은 「사임당의 풀벌레 그림 발문」에서
'옛날 문왕 어머님이 시를 지어 읊은 것을 본떠서 그려내니 소리없는 시로구나.'
하고 친한 것이 지금도 전해 온다.
사임당의 영향을 입은 사임당의 아들 율곡은 『성학집요(聖學輯要)』 '교자장(敎子章)'에서
그의 어머님의 말씀과 옛 어른들의 태교에 관한 글을 인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