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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풍홍 또한 얼마 뒤에 련에게 죽었다.
436년 북위(北魏)가 북연(北燕)을 공격하였다. 북위의 공격을 받은 풍홍은, 백성을 이끌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고구려는, 비록 풍홍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홀대하였다. 약 2년 동안 굴욕을
참던 풍홍은, 다시 송(宋)나라로 옮길 생각을 하였다. 장수왕이 그 사실을 알고, 군사를 보내
438년에 풍홍을 죽였다.
자세한 내용은 위서(魏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나온다. 먼저, 위서(魏書)를 옮긴다.
二年 (태연太延) 이년 (436년)
春正月甲寅 봄 정월 갑인날에
車駕還宮 임금 가마(御駕)가 궁궐로 돌아왔다.
二月戊子 이월 무자날에
馮文通遣使朝貢 풍문통(풍홍)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求送侍子 자식을 볼모로 보내고 싶다 했으나
帝不許 태무제(太武帝)가 허락하지 않았다.
壬辰 임진날에
遣使者十餘輩 사신 십여 명을 보내,
詣高麗東夷諸國 고려(高麗)를 비롯한 동이 여러 나라에
詔諭之 가르침을 주었다.
三月丙辰 삼월 병진날에
劉義隆遣使朝貢 유의륭(劉義隆:송나라 임금)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辛未 신미날에
平東將軍娥清 평동장군(平東將軍) 아청(娥清)과
安西將軍古弼 안서장군(安西將軍) 고필(古弼)이
率精騎一萬 정예 기병 일만을 이끌고
討馮文通 풍문통을 쳤다.
平州刺史元嬰 평주자사(平州刺史) 원영(元嬰)도
又率遼西將軍會之 요서에 있는 장수와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文通迫急 풍문통은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求救於高麗 고려(高麗)에 도움을 청하였다.
高麗使其大將葛蔓盧 고려(高麗)가 대장 갈만로(葛蔓盧)에게 명하여,
以步騎二萬人 보병과 기병 이만 명을 거느리고,
迎文通 풍문통을 맞이하게 하였다.
甲戌 갑술날에
以闕鎮虎牢 궐(拓跋他)[11-1]에게 호뢰(虎牢)[11-2]를 맡겼다.
夏 여름
四月 사월
甲申 갑신날에
皇子小兒苗兒 황자 소아(小兒)와 묘아(苗兒)가
並薨 한꺼번에 죽었다.
五月 오월
乙卯 을묘날에
馮文通奔高麗 풍문통이 고려(高麗)로 달아났다.
戊午 무오(戊午)날에
詔散騎常侍封撥使高麗 산기상시 봉발(封撥)을 고려로 보내,
徵送文通 조서를 주고 풍문통을 돌려보내라 하였다.
丁卯 정묘날에
行幸河西 태무제가 하서(河西)로 갔다.
... ...
... ...
四年 (태연太延) 사년 (438년)
春 봄
三月 삼월
庚辰 경진날에
鄯善王弟素延耆來朝 선선(누란) 왕의 아우 소연기(素延耆)가 내조하였다.
癸未 계미날에
罷沙門年五十已下 (태무제가) 파사문(罷沙門) [11-3] 가운데 나이가 쉰 이하인 중들을 불렀다.
江陽王根薨 강양왕(江陽王) 탁발근(拓跋根)이 죽었다.
是月 이 달에
高麗殺馮文通 고려(高麗)가 풍문통(馮文通)을 죽였다.
<위서(魏書) 권4상 세조기(世祖紀) 상>
이어 자치통감 제123권에 적힌 글이다. 먼저, 풍홍이 고구려로 달아나는 대목이다.
夏 여름
四月 사월
魏娥清古弼 위(北魏)나라 장수 아청(娥清)과 고필(古弼)이
攻燕白狼城 북연 백랑성(白狼城)을 쳐서
克之 깨뜨렸다.
高麗遣其將葛盧孟光 고려(高麗)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으로 하여금,
將衆數萬 군사 수만을 이끌고
隨陽伊至和龍 북연 사신 양이(陽伊)를 따라 화룡(和龍)으로 가서
迎燕王 북연 임금을 맞이하게 하였다.
高麗屯于臨川 고려군은 임천(臨川)에 진을 쳤다.
燕尚書令郭生 북연 상서령(尚書令) 곽생(郭生)은,
因民之憚遷 백성들이 피난 갈 생각에 두려워한다는 핑계를 들어,
開城門納魏兵 성문을 열고 북위 군사를 끌어들였다.
魏人疑之 하지만 북위군은 의심을 품고,
不入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生遂勒兵攻燕王 결국, 곽생이 손수 군사를 이끌고 북연 임금을 쳤다.
王引高麗兵入自東門 북연 임금이 동문을 열고 고려군을 끌어들이니,
與生戰于闕下 고려군이 궁궐 아래서 곽생과 싸웠다.
生中流矢死 곽생은 싸움 도중 화살에 맞아 죽었다.
葛盧孟光入城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은 성안으로 들어가자,
命軍士脫弊褐 군사들에게 해진 옷을 갈아입으라 명하였다.
取燕武庫精仗 또, 북연 무기고를 열고, 잘 벼린 무기를 끄집어 내서
以給之 군사들에게 나눠준 뒤,
大掠城中 성안을 크게 노략질 하였다.
五月 오월
乙卯 을묘날에
燕王帥龍城見戶 북연 임금이 용성(龍城) 백성을 이끌고
東徙 동쪽으로 피난 가면서
焚宮殿 궁전을 태우니,
火一旬不滅 불이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令婦人被甲居中 (풍홍이) 명을 내리되, 부인들은 갑옷을 입고 가운데 서게 하고,
陽伊等勒精兵居外 양이(陽伊) 등은 날랜 군사를 이끌고 바깥쪽에 서게 하였다.
葛盧孟光帥騎殿後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이끌고 임금 뒤를 지키며
方軌而進 수레와 함께 길을 가니,
前後八十餘里 행렬이 앞뒤로 팔십여 리나 되었다.
古弼部將高苟子帥騎 고필의 부하 장수 고구자(高苟子)가 기병을 이끌고
欲追之 풍홍을 뒤쫓으려 하였다.
弼醉 고필이 술에 취해
拔刀止之 칼을 빼 들고 못 가게 막았다.
故燕王得逃去 그 덕분에 북연 임금이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다.
魏主聞之怒 북위 임금이 그 사실을 듣고 노하였다.
檻車徵弼及娥清至平城 고필과 아청을 잡아 죄수 수레에 싣고 평성(平城)으로 끌고 왔다.
皆黜為門卒 둘 다 벼슬을 빼앗고 문 지키는 병졸로 삼았다.
<자치통감 (資治通鑑) 권 123 송기(宋紀) 5>
같은 책에 실린 글이다. 풍홍이 장수왕에게 죽는 대목이다.
三月 삼월
癸未 계미날에
魏主詔罷沙門 위(북위)나라 임금이 파사문(罷沙門) 가운데
年五十以下者 나이가 쉰 이하인 중들을 불렀다.
初 삼월 초에
燕王弘至遼東 북연 임금 풍홍이 요동에 이르렀다.
高麗王璉遣使勞之曰 고려 임금 련(璉)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되,
龍城王馮君 <용성왕(龍城王) 풍 군주는,
爰適野次 한데서 묵느라
士馬勞乎 군사와 말이 고생이 많소.> 하였다.
弘慙怒 풍홍은 부끄럽기도 하고 뿔이 나기도 해서,
稱制讓之 천자 흉내를 낸다고 련을 나무랐다.
高麗處之平郭 고려는 풍홍을 평곽(平郭)에 머물게 했다가
尋徙北豐 곧이어 북풍(北豐)으로 옮겼다.
弘素侮高麗 풍홍은 평소에 고려를 얕보았으나
政刑賞罰 정사(政事)와 형벌이
猶如其國 오히려 고려만 못하였다.
高麗乃奪其侍人 고려가 풍홍의 내관들을 내쫓고
取其太子王仁為質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볼모로 삼으니,
弘怨高麗 풍홍이 고려(高麗)를 원망하였다.
遣使 (풍홍이) 송(宋)나라에 사신을 보내
上表求迎 표(表)를 올리고 자신을 받아줄 것을 청하였다.
上遣使者王白駒等 송나라 임금이 사자(使者) 왕백구(王白駒) 등을 보내
迎之 풍홍을 맞이하게 하였다.
幷令高麗資遣 또 고려에도 알려서, 풍홍을 보내는 데 돕게 하였다.
高麗王不欲使弘南來 고려 임금은 풍홍을 남쪽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遣將孫漱高仇等 그래서 장수 손수(孫漱)와 고구(高仇) 등을 보내
殺弘于北豐 북풍(北豐)에서 풍홍을 죽이고
幷其子孫十餘人 아들과 손자 십여 명도 함께 죽였다.
諡弘曰昭成皇帝 풍홍에게는 소성황제(昭成皇帝)라는 시호를 내렸다.
白駒等帥所領七千餘人 왕백구 등이 휘하 군사 칠천여 명을 이끌고
掩討漱仇 손수(孫漱)와 고구(高仇)를 습격하여,
殺仇生擒漱 고구(高仇)는, 죽이고, 손수(孫漱)는, 사로잡았다.
高麗王以白駒等專殺 고려 임금은, 사람을 함부로 죽인 죄를 물어,
遣使執送之 사자(使者)를 보내 왕백구를 붙잡고 송(宋)나라로 보냈다.
上以遠國 송나라 임금은 고려가 먼 나라라는 이유를 들면서[11-4],
不欲違其意 그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下白駒等獄 그래서 왕백구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已而原之 때가 되자 풀어주었다.
<자치통감 (資治通鑑) 권 123 송기(宋紀) 5>
[11-1] 궐(闕)
탁발타(拓跋他)로 추정된다.
참고: http://zh.wikisource.org/zh-hant/%E9%AD%8F%E6%9B%B8/%E5%8D%B74%E4%B8%8A
[11-2] 호뢰(虎牢)
지금, 하남성(河南省) 영양시(滎陽市) 사수진(汜水鎮)에 해당한다.
참고: http://baike.baidu.com/view/231003.htm
[11-3] 파사문(罷沙門)
중을 뜻한다.
[11-4] 송나라 임금은 고구려가 먼 나라라는 이유를 들면서
먼 나라는, 사귀고, 가까운 나라는, 견제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12. 문명태후(文明太后)
성(姓)은 풍씨(馮氏). 생몰: 442-490
북연(北燕) 왕족 출신으로 풍홍(馮弘)의 손녀다[12-1]. 아버지는 풍홍(馮弘)의 아들 풍랑(馮朗)이다.
436년 북연(北燕)이 망하자, 풍랑은 다른 형제 풍숭(馮崇), 풍막(馮邈)과 함께 북위(北魏)를 섬겼다
[12-2]. 풍랑은, 관직이 진주자사(秦州刺史), 옹주자사(雍州刺史), 서성군공(西城郡公)까지 올랐으나,
나중에 죄를 짓고 죽었다[12-3]. 아버지가 죽고 나서 문명태후는 궁으로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문성제(文成帝)가 임금이 되자 문명태후는 귀인(貴人)으로 뽑혔고, 나중에 황후까지 올랐다.
황후가 된 시기는 사서마다 다른데, 위서(魏書)는 이때가 455년이라 적었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은
456년이라 적었다. 문성제(文成帝)가 죽자, 태자 탁발홍(拓跋弘)이 헌문제(獻文帝)가 되고,
문명황후 풍씨는 태후가 되었다. 헌문제(獻文帝)는, 문명태후가 낳은 아들이 아니다.
아래 글은, 위서(魏書)와 자치통감에서 관련 대목을 뽑아 적은 글이다.
二年 (흥광興光) 이년 (455년)
春正月乙卯 봄 정월 을묘날에
立皇后馮氏 풍씨(馮氏)를 황후로 삼았다.
二月丁巳 이월 정사날에
立皇子弘為皇太子 황자 탁발홍(拓跋弘)을 황태자로 삼고
大赦天下 죄수들을 크게 풀어주었다.
<위서(魏書) 고종기(高宗紀)>
孝武帝孝建三年 효무제 효건(孝建) 삼년 (456년)
... ...
乙卯 을묘날에
魏立貴人馮氏為皇后 북위는 귀인 풍씨를 황후로 삼았다.
后遼西郡公朗之女也 황후 풍씨는 요서군공(遼西郡公) 풍랑(馮朗)의 딸이다.
朗為秦雍二州刺史 풍랑은 진주(秦州)와 옹주(雍州) 두 주에서 자사를 지냈으나
坐事誅 죄를 짓고 처형됐다.
后由是沒入宮 이 때문에 황후는 신분과 재산을 모두 잃고 궁으로 들어갔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송기(宋紀) 10>
[12-1] http://baike.baidu.com/view/314766.htm
[12-2] http://baike.baidu.com/view/179273.htm
[12-3] http://www.sidneyluo.net/a/a10/013.htm
13. 헌문제(獻文帝)
북위(北魏) 임금 탁발홍(拓跋弘). 생몰: 454-476 재위: 465-471
14. 육궁(六宮)
육궁은 천자를 섬기는 후궁들이다. 이 말은 예기(禮記) 혼의(昏義) 편에 나온다[14-1].
혼의(昏義)는 혼인(婚姻)을 뜻한다.
古者天子后立六宮 옛날에 천자와 왕후가 육궁(六宮)을 세우니
三夫人 삼부인(三夫人),
九嬪 구빈(九嬪),
二十七世婦 이십칠 세부(世婦),
八十一御妻 팔십일 어처(御妻)라 하였다.
以聽天下之內治 이로써, 천하를 안에서 다스리는 법을 듣고,
以明章婦順 부인이 따라야 할 바를 밝혔다.
故天下內和而家理 그래서 천하 안쪽이 화목하고 집안이 바로 섰다.
天子立六官 천자가 육관(六官)을 세우니
三公 삼공(三公),
九卿 구경(九卿),
二十七大夫 이십칠 대부(大夫),
八十一元士 팔십일 원사(元士)라 하였다.
以聽天下之外治 이로써, 천하를 밖에서 다스리는 법을 듣고,
以明章天下之男教 사내가 배워야 할 바를 밝혔다.
故外和而國治 그래서 천하 바깥이 화목하고 나라가 바로 섰다.
<예기(禮記) 혼의(昏義)> [14-2]
[14-1] http://baike.baidu.com/view/1012190.htm?fr=ala0_1
[14-2] http://www.sidneyluo.net/b/b06/44.htm
15. 련에게 칙서(勅書)를 보내고 공주를 들이라 하였다
삼국사는, 이 일이 장수왕(長壽王) 54년(466)에 일어난 일이라 하였다.
16. 폐백(幣帛)
혼인 전에 신랑이 신부 집에 보내는 예물
17. 신하들의 말(左右之說)
좌우지설(左右之說)에서 좌우는 임금 옆에 있는 신하들을 가리킨다.
북위 사신이 보낸 폐백을 두고, 신하들이 장수왕에게 여러 의견을 냈을 것이다.
18. 위나라 조정은 예전에 풍씨와 혼사를 맺더니
이 혼사는 문명태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12번 주석에 나왔듯이,
문명태후는 442년에 태어났고, 북연(北燕)은 436년에 망했으므로, 연도가 맞지 않다.
위서(魏書) 황후열전(皇后列傳)을 보면, 태무제(太武帝)의 후궁 중 한 명이
문명태후의 고모(姑母)였다고 나온다. 장수왕이 말한 혼사는 이것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文成文明皇后馮氏 문성(文成) 문명황후(文明皇后) 풍씨는
長樂信都人也 장락(長樂) 신도(信都) 사람이다.
父朗 아버지 풍랑(馮朗)은
秦雍二州刺史西城郡公 진(秦), 옹(雍) 두 주 자사와 서성군공(西城郡公)을 지냈다.
母樂浪王氏 어머니는 낙랑(樂浪) 왕씨(王氏)다.
后生於長安 태후가 장안(長安)에서 태어날 때
有神光之異 신비로운 빛이 번득이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
朗坐事誅 풍랑(馮朗)이 죄를 지어 죽고
后遂入宮 문명태후는 끝내 궁에 들어왔다.
世祖左昭儀 세조(世祖, 태무제)의 좌소의(左昭儀)[18-1]는
后之姑也 문명태후의 고모다.
雅有母德 행실이 아름다워 어머니다운 덕이 있었고
撫養敎訓 훌륭한 가르침으로 태후를 잘 길렀다.
年十四 태후가 열네 살일 때,
高宗踐極 고종(高宗, 문성제)이 즉위하였다.
以選為貴人 태후는 귀인(貴人)으로 뽑혔다가,
後立為皇后 나중에 황후(皇后)가 되었다.
<위서(魏書) 권 30 열전 제1 황후열전(皇后列傳)>
[18-1] 좌소의(左昭儀)
후궁(後宮) 가운데 한 등급이다.
참고: http://baike.baidu.com/view/1618010.htm
19. 은감불원(殷鑒不遠)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나오는 말로서, <은(殷)나라가 거울로 삼을 데는 멀리 있지 않다>는 뜻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과 같은 말이다.
殷鑒不遠 은(殷)나라가 거울로 삼을 데는 멀리 있지 않으니
在夏后之世 하(夏)나라 임금이 다스리던 시절을 보면 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지십(蕩之什)>
20. 효문제(孝文帝)
북위 일곱 번째 임금 탁발굉(拓跋宏). 생몰: 467-499 재위: 471-499
헌문제(獻文帝) 탁발홍(拓跋弘)의 큰 아들로서 헌문제가 죽자 뒤를 이었다.
서기 496년에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펴면서, 성을 탁발씨(拓跋氏)에서 원씨(元氏)로 바꾸었다.
二十年 이십 년 (496년)
春正月丁卯 봄 정월 정묘날에
詔改姓為元氏 조서를 내려 성(姓)을 원씨(元氏)로 바꿨다.
<위서(魏書) 고조기(高祖紀) 하(下)>
明帝建武三年 명제(明帝) 건무 삼 년 (496년)
春正月丁卯 봄 정월 정묘날에
以楊炅子崇祖 양경(楊炅)의 아들 숭조(崇祖)를
為沙州刺史 사주자사(沙州刺史)로 삼고
封陰平王 음평왕(陰平王)에 책봉했다.
魏主下詔 위(북위) 임금(효문제)이 조서를 내리니
以為 이러하였다.
北人謂土為拓 <북녘 사람들은 땅을 탁(拓)이라 하고
后為跋 임금(后)을 발(跋)이라 한다.
魏之先出於黃帝 위나라 선조는 황제(黃帝)로부터 났기 때문에
以土德王 땅 기운으로 임금이 되었다.
故為拓跋氏 그래서 탁발을 성으로 삼았다.
夫土者 무릇 땅이란,
黃中之色 가운데를 상징하는 누런 빛깔을 띠며,
萬物之元也 만물 가운데 으뜸이다.
宜改姓元氏 따라서 성을 원씨(元氏)로 바꾸는 것이 마땅하다.
諸功臣舊族 여러 공신(功臣)과 호족(豪族) 들은,
自代來者 지금 이후부터는
姓或重複 성이 혹시 겹쳐있으면,
皆改之 전부 고쳐라.>
於是始 이에 처음으로
改拔拔氏為長孫氏 발발씨(拔拔氏)는, 장손씨(長孫氏)로 바꾸고,
達奚氏為奚氏 달해씨(達奚氏)는, 해씨(奚氏)로 바꾸고,
乙旃氏為叔孫氏 을전씨(乙旃氏)는, 숙손씨(叔孫氏)로 바꾸고,
丘穆陵氏為穆氏 구목릉씨(丘穆陵氏)는, 목씨(穆氏)로 바꾸고,
步六孤氏為陸氏 보륙고씨(步六孤氏)는, 육씨(陸氏)로 바꾸고,
賀賴氏為賀氏 하뢰씨(賀賴氏)는, 하씨(賀氏)로 바꾸고,
獨孤氏為劉氏 독고씨(獨孤氏)는, 유씨(劉氏)로 바꾸고,
賀樓氏為樓氏 하루씨(賀樓氏)는, 누씨(樓氏)로 바꾸고,
勿忸于氏為于氏 물류우씨(勿忸于氏)는, 우씨(于氏)로 바꾸고,
尉遲氏為尉氏 위지씨(尉遲氏)는, 위씨(尉氏)로 바꿨다.
其餘所改 그 밖에도 바뀐 성씨들은,
不可勝紀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 140>
21. 광주(光州)
지금 신양시(信陽市) 황천현(潢川縣).
참고: http://baike.baidu.com/view/101309.htm
22. 소도성(蕭道成)
남북조 시절, 남제(南齊)를 세운 임금. 생몰: 427-482 재위: 479-483
23. 강좌(江左)
남북조 시절,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이 있던 강동(江東) 지역을 말한다.
좌(左)가 붙은 것은, 북쪽에서 남쪽을 봤을 때, 이곳이 왼편에 있기 때문이다.
참고: http://www.zdic.net/cd/ci/6/ZdicE6ZdicB1Zdic9F318817.htm
24. 무너진 나라를 옛 땅에 다시 세우고(興滅國)
흥멸국(興滅國)과, 그 다음에 나오는 계절세(繼絕世)는 논어 요왈(堯曰)에 나오는 글귀다.
興滅國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고
繼絕世 끊어진 대를 다시 잇고
舉逸民 흩어진 백성을 다시 거두면
天下之民歸心焉 천하 민심이 되돌아온다.
<논어 요왈(堯曰)>
25. 국경 너머
越境에서 境은, 고구려 국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북위 국경으로 봐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26. 나이가 백여 살이었다
삼국사에는, 장수왕이 아흔여덟 살에 죽었다고 나온다.
세(歲) 대신 살을 쓴 것은, 살이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七十九年 칠십구 년 (491년)
夏五月 여름 오월
遣使入魏朝貢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秋九月 가을 구월
遣使入魏朝貢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冬十二月 겨울 십이월
王薨 임금이 죽으니
年九十八歲 나이가 아흔여덟이었다.
號長壽王 시호(諡號)는 장수왕(長壽王)이다.
魏孝文聞之 북위 효문제(孝文帝)가 소식을 듣고
制素委貌布深衣 흰 위모관(委貌冠)과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擧哀於東郊 동교(東郊)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遣謁者僕射李安上 알자복야(謁者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
策贈 추증하되,
車騎大將軍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太傅遼東郡 태부(太傅) 요동군(遼東郡)
開國公高句麗王 개국공(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이라 하였다.
諡曰康 시호(諡)는 강(康)이다.
<삼국사 고구려본기 장수왕>
여기서 위모관(委貌冠)은 '모자붙이'이고 심의(深衣)는 '옷붙이'이다.
('붙이'는 같은 종류에 속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송(宋)나라와 원(元)나라 시절 사학자이던
호삼성(胡三省, 1230-1302)[26-1]은, 위모관에 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을 자치통감에 남겼다.
高麗王璉卒 고려 임금 련(璉)이 죽었다.
壽百餘歲 나이가 백여 살이었다.
(麗力知翻) (麗는 력지(力知)를 짜맞춰 읽는다: '력'+'지' = '리')
魏主為之制素委貌 북위 임금이 련을 위해 흰 위모관(委貌冠)과
布深衣 심의(深衣)를 지었다.
(為于偽翻 (위(為)는 우위(于偽)를 짜맞춰 읽는다.
委貌冠 위모관(委貌冠)은
長七寸高四寸 길이가 일곱 마디, 높이가 네 마디이고,
制如覆盃 생김새는 뚜껑 달린 잔(覆盃)과 같다.
前高廣 앞이 높고 넓으며
後卑銳 뒤가 낮고 좁다.
所謂夏之毋追 이른바 하(夏)나라 시절 무추관(毋追冠)과
殷之章甫者也 은(殷)나라 시절 장보관(章甫冠)이 이것이다.
本以皂絹為之 원래는 검은 깁으로 짓지만
今制素者 지금 흰색을 쓴 것은,
以舉哀) 추모식에 쓸 것이기 때문이다.)
舉哀於東郊 동교(東郊)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遣謁者僕射李安上 알자복야(謁者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
策贈太傅 태부(太傅)로 추증하였다.
諡曰康 시호는 강(康)이다.
孫雲嗣立 손자 운(雲)이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제137권 호삼성 역주>[26-2]
심의(深衣)는 웃옷과 아래옷이 통짜로 이어진 옷이다[26-3].
위모관(委貌冠)을 흰색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원래 우리나라 상복은 흰색이지만,
북위(北魏)도 흰색을 상복으로 쓴 모양이다. 서양과 일본은 상복이 검은색이다. 요즘 장례식장은
대부분 검은 상복이다. 하지만, 원래 우리나라가 어떤 색을 상복으로 썼는지는 알아야겠다.
[26-1] http://baike.baidu.com/view/140924.htm
[26-2] http://www.guoxue123.cn/shibu/0101/01zztjhz/137.htm
원래 내가 본 것은 위에 나온 주소지만, 현재 이 주소는 닫고 없어 아래 주소를 새로 적었다.
http://blog.sina.com.cn/s/blog_4ccc05c90100p8ch.html
[26-3] http://baike.baidu.com/view/71513.htm
27. 운(雲)
삼국사를 보면, 문자명왕(文咨明王)은,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하며, 운(雲) 외에 나운(羅雲)이라
는 이름도 있었다.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다. 장수왕이 오래 사는 바람에,
아들인 고추대가(古鄒大加) 조다(助多)가 먼저 죽었고, 그래서 손자인 문자명왕이 뒤를 이었다
문자명왕에 관해 조사하다 보니, 원년에 관해 두 설이 있음을 알게 됐다.
어떤 자료는 원년이 491년이라 하고, 어떤 자료는 492년이라 하였다.
삼국사는 문자명왕 원년을 492년으로 잡았다. 따라서 문자명왕 2년은 493년, 3년은 494년이 된다.
혼란이 생긴 것은, 장수왕이 491년 12월에 죽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임금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는다. 장수왕이 죽은 뒤, 문자명왕이 곧바로 즉위했다고 보면, 원년은 491년이 된다.
이병도 박사는 삼국사 주석에서 문자명왕 원년을 491년으로 보았다.
史記 年表에도 이 해를 元年으로 하였으나, 東國通鑑(권5)에는 前年 즉 長壽王 薨年으로써
文咨王 원년을 삼았다. 史記의 稱元法이 대개 卽位年稱元法을 취하였음에 불구하고
여기에 踰年稱元을 한 것은 誤謬로 볼 수 밖에 없다.
<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434쪽>
하지만 이 부분은,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다. 앞 임금이 죽으면, 뒤 임금이 저절로 임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즉위식을 올려야 임금이 되는 것이 아닐까? 즉위식을 거쳐 임금이 되야 비로소 원년이
정해지는 것이지, 앞 임금이 죽었다고 해서 무조건 원년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장수왕이 491년 12월에 죽었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고 즉위식을 여는 동안 해가 바뀌었다고 보면,
문자명왕 원년은 492년이 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28. 옷치레감
옷치레감은 복물(服物)을 옮긴 말이다. '감'은 재료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29. 교구(郊丘)
임금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참고: http://xh.5156edu.com/html5/274552.html
30. 종숙(從叔)
당숙(堂叔)을 달리 일컫는 말
31. 정시(正始)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가 쓴 연호. 사용 시기: 504-508
32. 선무제(宣武帝)
북위(北魏) 임금 원각(元恪). 효무제의 둘째 아들이다. 탁발(拓跋) 대신 원(元)이 성(姓)인 까닭은,
효무제가 성을 바꿨기 때문이다.
생몰: 483-515 재위: 499-515
33. 천극(天極)
천극은 뜻이 두 개다. 하나는, 지축을 늘인 선이 하늘공(天球)와 만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북극성(北極星)이다. 어느 경우든, 천극은 우주에서 중심 되는 존재를 가리킨다.
여기서 천극은 천자를 나타낸다.
34. 땅에서 나는 산물(土毛)
원래는 곡식, 나물 등을 가리키던 말인데, 나중에 땅에서 나는 모든 산물을 가리키게 되었다[34-1].
이 말은 좌전(左傳) 소공(昭公) 편에 나오는 말이다.
王將飲酒 임금이 술을 마시려 할 적에
無宇辭曰 우윤무우(芋尹無宇)가 아뢰되,
天子經略 "천자는 온 세상을 두루 다스리고[34-2]
諸侯正封 제후는, 맡은 땅을 바로 다스리는 것[34-3]이
古之制也 옛 제도입니다.
封略之內 제후에게 나눠준 땅 가운데
何非君土 임금 땅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食土之毛 식토(食土)에서 나는 풀 중에
誰非君臣 임금에게 딸리지 않은 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故詩曰 따라서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普天之下 온 하늘 아래
莫非王土 임금 땅 아닌 곳이 없고
率土之濱 바다까지 이르는 땅 가운데
莫非王臣 임금에게 딸리지 않은 것이 없다 했습니다." 하였다.
<좌전(左傳) 소공(昭公) 칠 년>
[34-1] http://baike.baidu.com/view/343267.htm?fr=ala0_1
[34-2] http://baike.baidu.com/view/715154.htm
[34-3] http://www.chazidian.com/r_ci_2008853cbc215b49036da2c5a415d596
35. 섭라(涉羅)
제주도를 가리킨다. 탐라(耽羅), 탐모라(耽牟羅)라고도 한다.
탐모라는 무슨 뜻일까? 모라(牟羅)는 우리말로서 마을을 뜻한다. 탐(耽)은 무슨 뜻일까?
나는 이 말이 '담'을 뜻한다고 본다. 집을 지키기 위해 담을 쌓듯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도
담을 쌓는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쌓은 이 담은 곧 성벽(城壁)이다.
담이 성벽이란 뜻으로도 쓰이는 것은, 영어를 참조하면 확실히 알게 된다. 영어에는, 우리말 성(城)에
해당하는 말이 두 개 있다. 캐슬(castle)과 월(wall)이다. 캐슬은 집 형태로 지은 성이고, 월은 성벽
형태로 지은 성이다. 우리나라는, 캐슬(castle)은 없고, 남한산성, 삼년산성 같은 월(wall)만 있다.
성벽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바로 담이다. 담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담마을 곧 탐모라(耽牟羅)다.
탐모라를 한자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 성읍(城邑) 또는 읍성(邑城)이다.
탐라(耽羅)는 무슨 뜻일까? 김성호 박사는 탐라(耽羅)가 다물(多勿)과 같은 말이라고 보았지만[35-1],
나는 의견이 다르다. 탐라에서 탐은, 탐모라와 마찬가지로 '담'을 뜻한다. 라(나)는 '땅'을 뜻한다.
<삼국사 권 제35 잡지 제4>를 보면, 노(奴)가 '흙, 땅'으로 쓰인 예가 나온다[35-2].
노(奴)와 라(羅)는 같은 말을 다르게 적은 것이다. 종합하면, 탐라(耽羅)는 '담으로 둘러싸인 땅'이다.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 담로(檐魯)가 나오는데[35-3], 내 생각에 이 담로도 탐라와 같은 말로서,
'담으로 둘러싸인 땅'이란 뜻이다.
[35-1] 김성호(金聖昊) 지음,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148-150쪽
[35-2] 삼국사 권 제35 잡지 제4
黑壤郡 흑양군(黑壤郡)은
(一云黃壤郡) (황양군(黃壤郡)이라고도 한다.),
本高句麗今勿奴郡 본래 고구려 금물노군(今勿奴郡)이었는데,
景德王改名 경덕왕 때 이름을 바꿨다.
[35-3]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
號所治城曰固麻 온 나라를 다스리는 성을 고마(固麻)라 부른다.
謂邑曰檐魯 마을은, 담로(檐魯)라 부른다.
如中國之言郡縣也 지나 말로 군현(郡縣)과 같다.
其國有二十二檐魯 그 나라에는 스물두 담로가 있다.
皆以子弟宗族分據之 왕실 자제(子弟)로 하여금, 담로를 전부 나눠 다스리게 한다.
36. 섭라(涉羅)는 백제(百濟)에 병합됐습니다
삼국사를 보면, 탐라(耽羅)는, 위덕왕(威德王) 때 백제에 복속했다고 나온다.
二年 이 년 (662년)
... ...
耽羅國主佐平徒冬音律 탐라국 군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一作津) (진津이라고도 적는다. à 도동음진徒冬音津)
來降 와서 항복하였다.
耽羅 탐라(耽羅)는
自武德以來 무덕왕(武德王, 위덕왕) 때부터
臣屬百濟 백제에 복속하였다.
故以佐平爲官號 그래서 좌평(佐平)이라는 벼슬 이름이 붙었다.
至是 이때에 이르러
降爲屬國 (신라에) 투항하고 속국이 되었다.
<삼국사 신라본기 문무왕>
백제본기를 보면, 위덕왕 때는 탐라가 백제에 복속했다는 기록이 없다. 또, 위덕왕은 재위 기간이
554-598년으로, 문자명왕의 재위 기간인 492-519년과 맞지 않는다. 위덕왕은 문자명왕보다 나중
사람이기 때문에, 위덕왕 때 탐라가 백제에 복속했다면, 문자명왕 대에 이 사건을 이야기할 수 없다.
위덕왕을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 동성왕(東城王) 때, 탐라와 관련된 사건이 나온다. 탐라가 조공하지
않자, 동성왕이 군사를 이끌고 탐라를 치려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가 서기 498년이다. 삼국사를
보면, 예실불(芮悉弗)이 북위에 사신으로 간 해가, 문자명왕 13년 곧 504년이라고 나온다. 6년 차이
이므로 얼추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탐라는, 백제 동성왕 때 백제에 병합됐을 것이다.
二十年 이십 년 (498년)
設熊津橋 고마나루 다리를 놓았다.
秋七月 가을 칠월
築沙井城 사정성(沙井城)을 쌓고
以扞率毗陁鎭之 한솔 비타(毗陁)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八月 팔월,
王以耽羅不修貢賦 동성왕은,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親征 몸소 탐라를 치려고 하였다.
至武珍州 군사가 무진주(武珍州:광주)에 이르자
耽羅聞之 탐라가 소식을 듣고
遣使乞罪 사신을 보내 용서를 빌었다.
乃止 그래서 군사를 거두었다.
(耽羅卽耽牟羅) (탐라는 탐모라耽牟羅다.)
<삼국사 백제본기 동성왕>
37. 고려 임금인 신하 운(雲)이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고자 하는 뜻에서
繼絕之義는, 흥멸국계절세(興滅國繼絕世)라 하여,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고 끊어진 대를
다시 잇는다'는 뜻이다. 앞에서 부여(夫餘)와 섭라(涉羅)가 말갈과 백제에 멸망 당했다는 말이
나오므로, 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전체 글 흐름을 살펴보면,
그런 뜻으로 썼다기보다는, 글자 그대로 풀이해서, 고구려와 북위가 서로 사이가 멀어졌는데,
이제 두 나라 관계를 다시 도탑게 하겠다는 뜻으로 썼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 다음 글귀를 보면, '고려가 예전에 조공을 게을리했다'는 말이 나오므로, 고구려가 공물을 제때
보내지 않아, 사이가 나빠졌음을 알 수 있다. 문자명왕은 북위에 공물을 다시 보냄으로써,
두 나라 관계를 예전으로 되돌리려고 한 것 같다.
38. 대대로 우리 은혜를 입어 상장군 지위에 있으면서
세하상장(世荷上將)은, <世荷國恩 位居上將>을 줄인 말이다. '대대로 나라 은혜를 입어 지위가
상장군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상장군은 부하를 거느리는 존재다. 고구려를 상장군에 빗댄 것은,
고구려가 동이 나라 중 으뜸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수서(隋書) 열전 제35 양현감(楊玄感) 편에 나온다.
玄感世荷國恩 양현감(玄感)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어
位居上將 자리가 상장(上將)에 있었다.
<수서 열전 제35>
여기서 '대대로(世)'라고 한 것은,
양현감의 아버지 양소(楊素)도 수(隋)나라에서 큰 벼슬을 했기 때문이다.
39. 연솔(連率)
태수(太守)와 맞먹는 벼슬로서 지방 장관을 뜻한다.
여기서는, 조공을 게을리한 책임이 신하에게 있지, 문자명왕에게 있지 않다는 뜻으로 썼다.
참고: http://baike.baidu.com/view/2939952.htm?fr=ala0_1
40. 위회지략(威懷之略)
때로는 위엄을 보이고 때로는 달래는 전략. 요즘말로 당근과 채찍(carrot and stick)이다.
41. 신구(神龜)
북위 임금 효명제(孝明帝)가 쓴 연호.
사용 기간: 518-520
42. 운(雲)이 죽자
삼국사에는, 문자명왕이 519년에 죽었다고 나온다.
43. 안(安)
삼국사에는 이름이 흥안(興安)으로 나온다.
44. 정광(正光)
북위 임금 효명제(孝明帝)가 쓴 연호.
사용 기간: 520-525
45. 양(梁)나라
남북조 시절 남조(南朝)에 속하는 나라.
첫 임금은 소연(蕭衍)이다. 존속 기간: 502-587
46. 연(延)
삼국사에는, 이름이 보연(寶延)으로 나온다.
안원왕(安原王)은 안장왕(安藏王)의 아우이지 아들이 아니다.
47. 효무제(孝武帝)
북위 마지막 임금 원수(元修).
생몰: 510-534 재위: 532-534
48. 천평(天平)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 원선견(元善見)이 쓴 연호.
사용 기간: 534-537
원선견은 동위(東魏) 첫 임금이었다.
534년에 북위(北魏)가 무너지고, 지배층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갈라졌다.
49. 성(成)
삼국사에는 이름이 평성(平成)으로 나온다.
50. 무정(武定)
무정 연호는 두 개 있다.
동위 효정제(孝靜帝) 원선견(元善見)이 쓴 연호: 543-550
북주(北周) 명제(明帝) 우문육(宇文毓)이 쓴 연호: 559-560
북주 우문육(宇文毓)이 쓴 무정(武定) 연호는 559년 8월부터 시작한다. 양원왕(陽原王)은
559년 3월에 죽었으므로, 여기 나오는 무정(武定)은 동위(東魏) 임금 원선견(元善見)이 쓴 연호다.
51. 무정 연호가 시작한 뒤에도
<訖於武定已來>에서 '武定已來'는 무슨 뜻인가?
이것과 비슷한 글귀가 위서(魏書)에 나오므로 여기 적는다.
延死 연(延)이 죽자,
子成立 아들 성(成)이 즉위하였다.
訖於武定末 무정(武定) 말년이 될 때까지
其貢使無歲不至 공물과 사신이 오지 않은 해가 없었다.
<위서(魏書) 제100권>
두 글을 비교하면, '武定已來'는 '무정(武定) 연호가 시작한 뒤에도'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무정(武定) 연호를 처음 쓰기 시작한 때까지'가 아니라, '쓰고 나서 한참 뒤에도'라는 뜻이다.
52. 대통(大統)
서위(西魏) 문제(文帝) 원보거(元寶炬)가 쓴 연호.
사용 기간: 535-551
53. 서위(西魏)
우문태(宇文泰)가 원보거(元寶炬)를 임금으로 앉히고 세운 나라.
존속 기간: 535-557
북위(北魏)가 534년에 무너지자, 선비족(鮮卑族) 우문태(宇文泰)는 535년에 효문제(孝文帝)의 손자
원보거(元寶炬)를 임금으로 앉히고, 서위(西魏)를 세웠다.
우문태는 556년에 병들어 죽었다. 일년 뒤인 557년, 우문태(宇文泰)의 조카 우문호(宇文護)가
서위(西魏) 공제(恭帝)를 협박하여, 왕위를 우문태(宇文泰)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에게 물려주게
하였다. 이로써 서위(西魏)가 무너졌다.
참고: http://zh.wikipedia.org/zh/%E5%8C%97%E5%91%A8
54. 제(北齊)가 동위(東魏) 뒤를 이은 해에
서기 550년에 일어난 일이다.
동위(東魏) 존속 기간: 534-550
북제(北齊) 존속 기간: 550-577
55. 문선제(文宣帝)
북제(北齊) 첫 임금 고양(高洋).
생몰: 529-559 재위: 550-559
56. 천보(天保)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 고양(高洋)이 쓴 연호.
사용 기간: 550-559
57. 영주(營州)
지금 요령성(遼寧省) 조양(朝陽) 일대.
참고: http://baike.baidu.com/view/804427.htm?fr=ala0_1
58. 박릉(博陵)
하북(河北) 안평현(安平縣), 심주시(深州市), 요양(饒陽), 안국(安國) 일대.
참고: http://baike.baidu.com/view/454965.htm?fr=ala0_1_1
59. 최류(崔柳)
박릉(博陵) 최씨(崔氏)는 한(漢)나라 때부터 당(唐)나라 때까지 박릉(博陵) 일대를 주름잡던 유명한
호족이었다.
참고: http://baike.baidu.com/view/1909466.htm
60. 최류(崔柳) 사건
삼국사에는 이 내용이 빠졌다. 김부식 같은 당대 최고지식인이 북사(北史)를 읽지 않았을 리 없다.
김부식이 이 내용을 뺀 까닭은, 고구려 임금이 다른 나라 사신에게 맞은 것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최류(崔柳)가 난동을 부릴 수 있던 까닭은,
귀족들이 득세하면서 이때 이미 임금의 힘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61. 탕(湯)
삼국사에는 양성(陽成)으로 나온다.
62. 건명(乾明)
북제(北齊) 폐제(廢帝) 고은(高殷)이 쓴 연호.
사용 연도: 560
63. 북제(北齊)
고양(高洋)이 동위(東魏)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
577년 북주(北周)에 망하였다.
존속 기간: 550-577
64. 폐제(廢帝)
북제(北齊) 임금 고은(高殷).
서기 560년 고연(高演)에게 왕위를 뺏기고, 이듬해에 살해됐다.
생몰: 545-561 재위: 559-560
65. 북주(北周)
선비족 우문호(宇文護)가 우문각(宇文覺)을 임금으로 앉히고 세운 나라.
존속 기간: 557-581
우문호는 서위(西魏) 공제(恭帝)를 협박하여, 우문각(宇文覺)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하였다.
북주(北周)는 수(隋)나라에 망하였다. 581년에 양견(楊堅)이 임금 자리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수(隋)나라를 세웠고, 이로써 북주(北周)는 망하였다.
참고: http://baike.baidu.com/view/50117.htm
66. 건덕(建德)
북주(北周)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이 쓴 연호.
사용 기간: 572-578
67. 무제(武帝)
북주(北周) 세 번째 임금 우문옹(宇文邕).
생몰: 543-578 재위: 560-578
68. 상개부의동대장군(上開府儀同大將軍)
상개부의동대장군(上開府儀同大將軍)에서 의동(儀同)은 의동삼사(儀同三司)를 줄인 말이다.
삼사(三司)은 삼공(三公)과 같은 말로서, 태위(太尉), 사도(司徒), 사공(司空)을 가리킨다.
의동삼사(儀同三司)는, '삼사는 아니지만 삼사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뜻이다.
요즘말로, 부장대우, 이사대우를 떠올리면 되겠다.
참고: http://xh.5156edu.com/html5/51721.html
69. 문제(文帝)
수(隋)나라를 세운 양견(楊堅).
생몰: 541-604 재위: 581-604
[한자 풀이]
敖 [오] 거만하다, 놀다, 희롱하다, 시끄럽다
致 [치] 이르다, 도달하다, 보내다
撥 [발] 다스리다, 제거하다, 파내다
丕 [비] 크다, 으뜸
尋 [심] 찾다, 갑자기, 얼마 되지 아니하여, 이윽고
敕 [칙] 칙서, 조서
薦 [천] 천거하다, 드리다, 올리다 [진] 꽂다
敷 [부] 펴다, 퍼지다, 다스리다, 두루, 널리
矯 [교] 바로잡다, 거스르다, 속이다, 거짓, 핑계
拒 [거] 막다, 거부하다, 거절하다 [구] 방진(方陣: 병사들을 사각형으로 배치하여 친 진(陣))
切 [절] 끊다, 베다 [체] 온통, 모두
審 [심] 살피다, 조사하다, 정하다, 참으로, 만일, 만약 [반] (물이) 빙빙 돌다
聽 [청] 듣다, 들어 주다, 기다리다
愆 [건] 허물
竊 [절] 훔치다
竊號 [절호] 천자를 자칭하다
篡 [찬] 빼앗다
掩 [엄] 가리다, 숨기다
祗 [지] 다만, 겨우, 한갓, 공경하다
承 [승] 잇다, 받들다
輯 [집] 모으다, 상냥하다, 화목하다
部 [부] 떼, 마을, 곳, 거느리다
聞 [문] 듣다, 묻다, 알리다
策 [책] 꾀, 채찍, 상을 주다
謚 [익] 웃다 [시] 시호
臚 [려, 여] 살갗, 펴다, 전하다
及 [급] 미치다, 닿다, 함께 하다
辭 [사] 말씀, 핑계
引見 [인견]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러 봄
芮 [예] 성씨 [열] 나라 이름
係 [계] 매다, 이어매다, 묶다, 얽다, 끈
葉 [엽] 잎, 갈래, 후손 [섭] 땅 이름, 성(姓) [접] 책
土毛 [토모] 땅에서 나는 생산물
珂 [가] 마노(瑪瑙), 흰 옥돌, 조개 이름
悉 [실] 다, 모두, 남김없이, 궁구하다, 깨닫다, (뜻을) 펴다
遷 [천] 옮기다, 옮겨가다, 내쫓다
荷 [하] 메다, 짊어지다, 은혜를 입다
奬 [장] 장려하다, 권하다, 돕다
將 [장] 기르다, 양육하다
黠 [힐] 약다, 영리하다, 교활하다, 간교하다
虜 [로, 노] 사로잡다, 생포하다, 종, 노복, 오랑캐
懷 [회] 길들이다, 따르게 하다
策 [책] 꾀, (상을) 주다, 포상하다
珮 [패] 차다, 달다, 노리개
訖 [흘] 이르다, 도달하다, 마치다, 그만두다, 마침내, 까지
[글] 마치다, 그만두다, 다하다, 마침내, 모두, 까지
反命 [반명] 돌아와 보고하다
進 [진] 나아가다, 더하다 [신] 선사, 선물
# 이 글을 퍼가는 분은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참고 자료]
북사(北史) 권 94 열전 제82: http://www.sidneyluo.net/a/a15/094.htm
영문판 몽골비사: http://storage.worldispnetwork.com/books/0700713352.pdf
The Passing of Korea (1906) [PDF]
http://api.ning.com/files/oCQwPV7MQUOsThjVUcXrJqCgTMIeB5icOzxv-zmEItofhwOjiYJjW6qQ5XCR*jHMJeODo1is5aj*W*MnAF*KCeUdbDr2ygNu/1906ThePassingofKoreaHULBERTHomerB.pdf
[참고한 책]
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신장판 1쇄, 2005 개정판 8쇄
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하, 을유문화사, 1983 신장판 1쇄, 1999 개정판 4쇄
김성호(金聖昊) 지음,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지문사(知文社), 1982 초판, 1986년 10판
[출처] 북사(北史) 고구려전(高句麗) (원문) (2/4)|작성자 길동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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