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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6주일설교 담대하라(요한복음16:25-33)
본문: 요한복음16:25-33
제목: 담대하라
오늘은 요한복음 16:25-33절의 말씀을 가지고
“담대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나눌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담대하라”
저는 요즘에는 아침에 오천 보
밤에 오천 보 이렇게 나누어서 걷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밤에 주로 걷기 운동을 하였습니다.
달도 별도 없을 때에도
손전등 하나 없이 저는 만 보 정도
곧 7-8km를 혼자 걷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걸었던 것은 아닙니다.
율리에 처음 왔을 때
낮에 갔던 길이지만 밤에 혼자서 나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율리 마을을 지나
장평 초등학교 쪽으로 가려면
다리를 하나 건너야 합니다.
낮에는 쉽게 그 다리를 지나
다른 곳에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밤에 그 다리를 혼자 지나
들판으로 나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강정 마을 쪽 들판으로 나가는 일은
더더욱 힘든 일이었습니다.
8살 때까지는 시골에 살았지만
율리에 올 때까지는 군산과 서울에서 살아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시골을
혼자서 걷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용기를 내어서
동네 앞 다리를 지나고 강정 마을을 가고
청미천 뚝방으로 나가 옥산까지 가는 것이
저의 삶의 행복한 습관이 되었습니다.
35년째 율리에서 살아가는 동안
난 이 걷기가 나에게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내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은
주저하던 발걸음을 떨쳐내고
담대함으로 나갔던 걸음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말하는 담대함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담대함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같을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것일까요?
1.담대함이 필요한 인생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담대함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가려고 할 때
네비게이션이 길을 알려 준다고 하지만
담대함이 있어야 갈 수 있습니다.
먼저 네비게이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고
그 믿음을 가지고 내가 운전하거나
걸어서 가야 하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은 길을 알려 줌에도 불구하고
주저하느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져서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8월 달 찬양으로 부르고 있는
302장에서 이렇게 찬송가 가사가 되어 있습니다.
“내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 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을 데로 저 한가운데 가보라”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큰 바다 물결을 보고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라고
우리의 마음을 표현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후렴에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담대함은 우리의 삶을 넓혀주고
더 많은 세계와 더 놀라운 것들을 경험하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외국 여행할 때 음식으로 어려워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음식이든지 어떤 냄새가 나든지
담대하게 먹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오지를 가보지 않았기에 그런지 모르지만
담대하게 먹기에 여행 중에도 잘 먹고 건강합니다.
요즘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옛날에 혐오한다는 음식들을 잘 먹고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우리나라가 유명해지고 경험한 사람들이 많아서
안내자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담대하게 와서 혼자 여행하고
혼자 음식들을 시켜서 먹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담대함은
우리의 삶을 확장하고 깊게 해주며
다양한 삶을 경험하게 하고
새로운 것들을 만나게 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만 보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물에 들어가 헤엄도 치고
깊은 물 속도 들어가 보고
배를 타고 먼 곳까지 가기를 원하십니다.
2.제자들의 현실(25-30절)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떠나심을 듣고 있습니다.
그냥 떠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한 일은 자신들에게 핍박과 죽음이라는
환난으로 다가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정확하지 않고 좀 아리송 합니다.
직접 말씀하시면 제자들이 잘 이해하기 어려우니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16:21의 해산의 비유나
15:1절에서 말씀하시는 참 포도나무 등의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상황에서 앞으로 경험할 일이기 때문에
어떤 직접적인 설명으로는
제자들이 알아 듣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14장부터 16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가지고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직접 밝히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놀라운 사건을
이제 직접 말씀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말씀하실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조금 후면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실 것이고
그 후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데려온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그 아래 사람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그해 대제사장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가
심문을 당하고 빌라도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예수님은
성령을 믿는 자들에게 보내 주십니다.
그날이 되면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위해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다’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속죄의 피나 값을 치르지 않아도
친히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기도를 기쁘게 받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대를 가지고
차분하게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이루실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사적 계획을 믿고
우리는 기다려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줄을 믿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줄 알기에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맞습니까? 진실로 사랑합니까?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트 표시를 하면 됩니까?
머리 위로 하트 표시를 하고
두 손으로 하트 표시를 하고
엄지와 검지로 하트 표시를 하는 것입니까?
아이들에게 시키면 잘합니다.
하영이 정도도 그런 것은 대충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자의 말을 잘 듣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자의 말을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자의 말을 따르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에
하나님께 세상을 구원하라고 보내셨을 때
그 말씀을 잘 듣고 순종했으며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고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0절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믿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역시 제자들처럼 그렇게 믿지 않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순종하시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믿고 있느냐”
그때 우리 성도 대부분은
“예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까지 교회를 다닐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끝인가요?
그렇게 믿고 있으면 다 되었나요?
그렇다면 참 쉬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3.담대하라!(32-33절)
그러나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자기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고
예수님을 알고 있고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각각 자기 곳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며 그 말씀 속에 살았던 때가 아니라
자신이 혼자서 가야 하는 세상으로
예수님이 말씀이 바로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그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께 붙어 있으려고 노력했지만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주일날 와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을 때는 어떻습니까?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것 같고
주님을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배 후에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 직장 생활을 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 사회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더 나가 아무도 없을 때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죄의 유혹이 오고
물질의 욕심이 오고
세상 향락의 욕심이 올 때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하고 숨어 있었던 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단순히 의리가 부족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어서일까요?‘’
성경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알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더더욱 하나님 나라를 이루거나
십자가의 복음을 감당할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사역을 혼자 감당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길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하셨으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목마르지도 않고, 못 박혀도
고통스럽지 않고, 버림당한 그 처절함도 없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참혹한 고통과 외로움을
온몸으로 다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심은 그러한 고통을 없애주는
평안한 동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아들이 당하는
그 참혹한 고독과 형벌을 성부 하나님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품으시고,
마침내 부활의 승리로 이끄신
‘거룩하고 묵묵한 임재’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떠나고
세상이 외면하는 순간에도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담대히 선언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극심한 고통이나 외로움이 있을 때
그 고통과 외로움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고통과 외로움을 겪었기에
우리의 그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르짖을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며
그런 모든 상황을 극복하게 해 주셔서
부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은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몇 주 전에 나누었던 말씀처럼
우리로 하여금 성령님께 기도함으로 감당케 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너희의 모든 고통이나 괴로움을
아주 없게 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세상 담대함은 내 배짱이나 내 경험만 믿고 나가는 거라
더 큰 풍랑을 만나면 무너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담대함은
이미 승리하고 다 적어놓으신 주님의 답안지를
손에 들고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은 것은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누렸던
그 평안을 우리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서 “담대하라”고 합니다.
앞에서 나누었지만 세상에서 담대함은
우리의 삶을 깊은 대로 넓은 대로
높은 대로 이끌어 줍니다.
하지만 그 담대함 때문에
상상치 못할 고통과 어려움과
외로움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담대하게 나간다고 모든 일이
잘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세상이 말하는 담대함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그런 길을 가셨고
이미 승리를 경험하여 부활로 나가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또한 우리를 돕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세상에서 환난과 문제는 찾아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이미 세상을 이기었다’고
선포하십니다.
전쟁의 승패가 이미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결정되었기에
우리는 어떤 시련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환난 속에서도
우리는 평안할 수 있으며
예수님을 따라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밤길이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해도
담대하게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것이 내 삶의 위로와 건강한 습관이 되었듯,
신앙생활은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내 배짱이나 내 경험에서 나오는 세상의 담대함은
더 큰 풍랑을 만나면 무너지고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담대하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고통과 외로움을 친히 다 통과하시고
마침내 부활로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선포할 수 있는 거룩한 담대함입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오늘 들은 말씀을 붙잡고 다음 3가지 영적 행동 지침을
꼭 삶에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1. 주님이 부르시는
은혜의 깊은 바다로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와 환경만 보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찬송가 302장의 가사처럼, 닻줄을 끌러
주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깊은 바다 한가운데로
믿음의 배를 띄워 나아가십시오.
2.입술의 고백을 넘어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말이나 감정 표시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주님의 말씀에 나를 맡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이번 한 주간 작은 말씀 하나라도
삶에서 정직하게 순종해 보십시오.
3. 환난과 외로움의 순간에도
'세상을 이기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예수를 믿어도 삶의 환난과 외로움,
시련의 풍랑은 찾아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미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도우시는 성령님이 함께하십니다.
세상의 시련 앞에서 위축되지 말고
"주님, 세상을 이기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내 마음을 주님의 평안으로 채워 주소서!"
담대히 부르짖으며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주님의 참된 평안이,
이번 한 주간 담대히 승리의 길을 걸어갈
성도 여러분의 모든 삶과 가정 위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강복 선언: “담대하게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
참된 평안을 누리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