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02월14일(금요일) [송월동 동화마을&인천 차이나타운&인천 자유공원&일본풍거리&신포국제시장] 탐방일정
09:00~10:40 수서역에서 3호선을 타고 교대역으로 가서 2호선 성수방면으로 1차 환승하여 신도림역으로 간 후 1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인천역으로 이동하여 인천역 2번 출구로 나옴 [1시간40분 소요]
탐방지 : [송월동 동화마을&인천 차이나타운&인천 자유공원&일본풍거리&신포국제시장]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이듬해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이 현 선린동 일대에 이민, 정착하여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화교들은 소매잡화 점포와 주택을 짓고 본격적으로 상권을 넓혀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소금과 곡물을 수입, 193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20년대부터 6·25전쟁 전까지는 청요리로 명성을 얻었는데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외환 거래규제, 무역 규제, 거주자격 심사 강화 등 각종 제도적 제한으로 화교들이 떠나는 등 차이나타운의 화교사회가 위축되었으나 한중수교의 영향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적 의의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관광쇼핑, 특화점, 예술의 거리 등 권역별로 변화하고 있으며 풍미, 자금성, 태화원, 태창반점, 신승반점 등이 중국의 맛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화교 2,3세들로 구성된 약 170가구, 약 500명이 거주하고 있다.]
탐방코스: [인천역 2번 출구~송월동 동화마을~차이나타운 북쪽에 위치한 제4패루 한중문(韓中門)~차이나타운 서쪽에 위치한 제1패루 중화가(中華街)~짜장면 박물관~한중문화관~차이나타운 남쪽에 위치한 제2패루 인화문(仁華門)~천주교 제물진두 순교성지~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인천일본18은행지점)~한국근대문학관~인천개항박물관(옛 인천일본제1은행)~인천아트플랫폼~대불호텔 전시관&중구생활사 전시관~인천 중구청(옛 일본영사관)~일조용 중화요리~청일조계지 경계계단~삼국지 벽화거리~의선당~황제의 계단 입구~차이나타운 동쪽에 위치한 제3패루 선린문(善隣門)~초한지 벽화거리~석정루(石汀樓)~자유공원 한미수교 백주년기념탑~인천 자유공원 맥아더장군동상~제물포 구락부~송학동 옛 인천시장관사(인천시민愛집)&제물포구락부 부속 전시관~누들플랫폼~신포국제시장~주교좌 답동성바오로성당~애관극장~내리 교회~전철 1호선 동인천역 1번 출구]
탐방일 : 2025년 02월 14일(금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인천광역시 중구 송월동3가 : 최저기온 영하1도C, 최고기온 4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7시간10분 소요)
10:40~10:49 인천역 2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인천 중구 송월동3가 17 번지에 있는 송월동 동화마을로 이동 [9분, 490m 이동]
[송월동 동화마을은 차이나타운과 이어져 있다. 2013년 마을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해 세계명작동화를 주제로 마을을 예쁘게 꾸몄다. 입구의 아치문을 통과하면, 알록달록한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진다. 벽화 및 조형물의 모티브가 된 동화로는 신데렐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피노키오, 알라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백설공주, 라푼젤, 밤비, 엄지공주, 빨간 모자, 미녀와 야수, 피터팬, 헨젤과 그레텔, 브레멘 음악대, 노아의 방주, 선녀와 나무꾼, 도깨비 방망이, 혹부리 영감, 흥부전, 별주부전, 리틀 프린세스 소피아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마을에는 못난이인형, 무지개다리 포토존 등이 설치되어 있다. 동화 캐릭터 입체 조형물이 많아 곳곳이 포토존이다. 이 마을이 개항기 때 독일, 일본, 프랑스인들이 살았던 부촌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인천 중구 송월동 동화마을에 '트릭아트 스토리 체험공간' 조성
유원상 기자yos70@seoulfn.com
서울파이낸스 기사 승인 : 2024.01.31. 00:11
실감 콘텐츠 체험공간 내달 7일 정식 개관···관람료 6000원 어린이 무료
[서울파이낸스 (인천) 유원상 기자] 인천시 중구 '송월동 동화마을'에 최신 정보통신(IT) 기술로 구현한 실감 콘텐츠 체험공간이 들어섰다.
30일 중구에 따르면 최근 송월동 동화마을에서 김정헌 중구청장, 강후공 중구의회 의장, 동화마을 상인회·주민 등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트릭아트 스토리 실감 콘텐츠 체험공간 개관식'을 열었다.
'동화마을 트릭아트 스토리 실감 콘텐츠 체험공간'은 인천 중구가 원도심 지역 관광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자 지난 2022년부터 중점적으로 추진 중인 '송월동 동화마을 활성화 사업'의 일환이다.
기존 착시효과 체험관인 '트릭아트 스토리'의 1층 공간에 동화를 주제로 한 각종 실감 콘텐츠를 도입해 독창적 체험공간으로의 변모를 꾀함으로써, 어린이 등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게 목적이다.
특히 동화 속 주인공이 돼 다양한 놀이를 해보는 체험형 실감 콘텐츠 '동화의 세상 속으로', '애니런 오즈의 마법사'는 물론, 3차원(3D) 기술로 표현한 포토존인 '이상한 나라 동화의 세계'가 눈길을 끌 전망이다.
또 미디어아트 콘텐츠인 '마법과 모험의 세계로 초대', 부모님 세대의 동심으로 아이들을 초대할 미디어아트 '흥부와 놀부', 체험형 키오스크인 '동화숲 샘터' 등 다양한 체험 콘텐츠를 갖췄다.
이 밖에 보호자들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쉴 수 있는 휴게 벤치와 쾌적한 화장실 등 어른들의 편의 공간 마련에도 힘쓴 모습이다.
구는 '대장소 나무의 집 조성', '동화마을 지역 축제' 등 기존에 추진한 활성화 사업과 함께, 트릭아트 스토리를 동화마을의 새로운 거점 관광명소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정헌 중구청장은 "이번 실감 콘텐츠 체험공간이 동화마을 등 원도심 관광에 새로운 활력과 생기를 부여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며 "아이들과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꿈의 공간 동화마을이 되도록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동화마을 트릭아트 스토리 실감 콘텐츠 체험공간은 다음달 7일 정식 개관을 할 예정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한다.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추석 연휴다. 관람료는 6000원으로 어린이는 무료이다.]
10:49~11:49 송월동 동화마을을 탐방
[송월동 동화마을 포토존 10선
1. 사랑에 빠진 피노키오 2. 신데렐라와 호박마차 3. 자이언트 트리 4. 흥부와 놀부 5. 미녀와 야수 6. 트릭아트 스토리 7. 무지개 계단 8. 아프리카 기린 9. 'Swimmy'(영어그림동화) 10. 과자나라]
[송월동 동화마을 11개 테마길
1.도로시길 2.성의나라길 3.북극나라길 4.바다나라길 5.동화속4계절길 6.전래동화길 7.유럽도시길 8.네델란드길 9.동물나라길 10.신비의길 11.앨리스길]
11:49~11:55 차이나타운 북쪽에 위치한 제4패루인 한중문(韓中門)으로 이동
[제4패루인 한중문은 송월동 동화마을에서 차이나타운으로 올라오는 초입에 위치해 있다. 전통적인 붉은색과 황금색의 조화로 화려함이 돋보이는 패루이다. 한중문이라는 이름은 한국과 중국을 잇는 한국 속의 작은 중국으로 들어오는 문이라는 뜻이다.
송월동 동화마을 입구에 제4패루가 완성되면서 차이나타운의 동서남북 모두 제대로 된 패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차이나타운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패루는 차이나타운의 시작과 끝을 표시하는 경계일 뿐 아니라 각각의 문들에 차이나타운의 번창을 기원하는 화교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
인천 차이나타운은 인천역 앞에 있는 차이나타운이다. 중국 음식점이나 기념품 등을 파는 상점이 많은 편이다. 화교중산학교가 있다. 매년 9월과 10월엔 각각 인천-중국의날 문화축제와 짜장면 축제가 열린다. 1883년 인천항 개항 후 1884년에 만들어진 중국(청나라) 조계지에 화교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되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특이하게 산둥 출신이 중심을 이룬다.
역사
조선 말 청나라 사람들이 대거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임오군란 때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조선의 정세가 급변하자 청은 조선의 공식 요청이 없었는데도 산둥성에 주둔 중이던 오장경(吳長慶)의 수군을 파병하였다. 오장경이 지휘하는 4,5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40여 명의 상인이 따라 들어왔으며, 이들은 청군이 주둔하던 용산 근처에서 장사를 시작하였다. 이전부터 사신 왕래나 공무역인 개시(開市)를 통해 중국인이 조선에 머무는 일이 잦았으나, 장기 체류를 한 것은 이 일이 시초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제물포는 개항 후보지로 선정되었지만 실제 개항지로 선정되는 데에는 6년이 걸렸다. 조선도 서울의 바로 옆에 개항장이 들어서는 것을 꺼렸고, 일본도 다른 후보지들을 물색하느라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1882년 제물포가 개항지로 선정되었고, 청과 일본, 서구 열강들이 앞다투어 제물포로 몰려들었다. 1883년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이 체결되어 제물포에 조계지가 형성되게 되었다. 일본은 제물포 조약 직후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영사관을 세웠고, 청나라 역시 청국이사부(靑國理事府)를 세웠다. 1885년 청나라는 본국과 연결되는 전신선을 세웠다. 청나라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채결하고 제물포를 통한 무역을 시작하였다. 1884년 3월 7일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어 청조차지가 결정되었고, 이후 이곳에 많은 중국인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금의 차이나타운은 당시의 조차지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국의 화교 규모는 1910년 11,800 여 명이었고 이 가운데 2,800 여 명이 조계 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인천에 사는 화교는 약 2,000 여명으로 차이나타운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는 약 120 가구 500명이다.
1883년 개항이 된 이래, 인천 차이나타운 내에는 중국의 종교시설이 만들어졌다. 황합경(黃合卿)이라는 스님이 창건하여 1884년 청나라 상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의선당이라는 묘우(廟宇: 신위를 모셔놓은 곳, 일명 사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화교들의 흥망성쇠를 같이 하던 이 곳은 1970년 거의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가 2005년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수리를 거친 후 다시 문을 열었고, 현재 이곳은 인천광역시 화교협회 지정 문화유산 제 1호이다.
조계지가 형성된 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청나라 정부의 호호 아래 상하이와 인천을 오가는 해운 사업이 지속되었다. 1883년 취항한 남승호는 월 1~2회 나카사키와 부산을 경유하여 상하이와 인천을 오갔다. 1888년부터는 상하이에서 산둥성을 거쳐 인천으로 연 20회 운항하였다. 이를 통한 무역도 활발하여 청일전쟁 당시인 1984년 조선의 무역 가운데 중국 무역은 절반에 해당하는 13,446,363 원 이었다.
청조계지의 화상(華商)은 처음에는 광동, 홍콩 지역 출신의 남방상인이 많았으나 점차 산둥 출신의 북방상인이 늘었다. 또한 화교 노동자 역시 개항장 인천의 건축 붐에 따라 입국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산둥성 출신이었다. 이들을 따라 이들에게 음식을 파는 요리업자가 들어왔고, 요리업자에게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 농부들이 들어왔다. 1905년 무렵 산둥성의 가정 요리에 바탕을 둔 짜장면이 만들어져 팔리기 시작하였다.
중국인 거주지는 항구의 서부 끝 쪽에 위치해 있고 통(C.T. Tong) 중국 영사의 관할 구역 내에 있다. 이 항구에 거주하는 중국인 500명의 다수가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인근 경작지의 소규모 채소밭을 소유한 중국인 채소 재배자가 상당히 많다. 이들 중 대부분이 산둥지방의 농부로, 봄이면 이곳에 와 자신들의 토지에서 일하고, 겨울이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 Korean Review, 1901년 1월호, pp. 11-12.
차이나타운 내에 인천화교소·중산중고등학교가 있다. 1901년 중산소학교로 개교한 이 학교는 한 때 학생수가 1,500명에 이르는 큰 학교였고, 평택이나 수원 등지에서도 화교들이 자녀를 입학시켰다. 지금의 학생 규모는 400여명이다. 1992년 8월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며 중화민국과 국교를 단절하였지만 학교는 여전히 중화민국의 소유로 중화민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매년 졸업생 중 10여명이 대만으로 유학간다. 유학생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는 1950년대 중반 졸업생 이수영을 들 수 있다. 당시 인천 당면 공장 화교 노동자의 딸이었던 이수영은 13세에 대만으로 유학하여 1961년 18세의 나이로 미스차이나에 선발되었다. 이수영의 일은 대한민국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1971년 대한민국 정부는 외국인이 한 가구에 200평 이하의 주택 한 채와 50평 이하의 점포 한 채만을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을 시행하였다. 이 때문에 화교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음식점과 자영업은 큰 타격을 맞았다. 서울의 태화관 인천의 공화춘과 같은 대형 음식점은 문을 닫았다. 이후 중국음식점은 영세한 규모를 면하기 어려웠다. 1973년 정부는 분식 장려를 명목으로 중국식당에서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식당은 밀가루를 밥알처럼 때어 말린 다음 쪄서 볶음밥을 만들어야 했다. 화교 단체들의 진정으로 3개월만에 쌀밥 판매가 재개되었지만 화교들은 큰 심리적 위축을 받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갖가지 규제를 견디지 못한 화교들은 한국을 떠나 미국과 대만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화교 인구 자체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말까지 차이나타운은 쓸쓸히 퇴락해가는 곳이었다. 인천항의 여객터미널과 어시장 등이 연안부두로 이전하면서 상권을 잃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새로운 부흥이 일기 시작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은 1990년대 후반의 일이다. 또한, 2001년 문화관광부가 차이나타운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근대문화재를 제정비하면서 관광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화교 이야기
화교란?
중국인들이 외국에 이주한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른다. 그러나 정식으로 「華僑」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약 100여년 이전인 청나라 말기부터이다. 1898년 중국인들은 일본 요코하마에 학교를 세워 정식으로 화교 학교란 이름을 지어 이 때 세워진 화교 학교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옛날 청조와 조선이 서로 교환한 문서에 따르면 화교에 대한 명칭이 淸朝人, 華人, 淸商 등으로 명칭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후에 청조 農工商部 대신이 작성한 문서에 "화교"라는 단어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華僑를 한자의 의미대로 풀어보면 華란 중국인을 가리키고, 僑란 잠시 거주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즉 외국 영토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모두 통칭하여 "華僑"라 일컫는다. 1909년의 청나라 헌법과 1929년의 중화민국 헌법에 의하면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모두 화교라고 부른다." 라고 나와 있다.
한국화교의 태동
현재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남아있는 기록으로 보면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을 때 화교가 한국으로 이주해 왔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으며 모든 단체 활동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종 19년(1882년) 6월 9일 일본이 조선에서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청조는 조선을 돕기 위해 오장경(吳長慶)과 3,0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당시 청군과 함께 한국에 온 화상 수는 약 40여 명이었다. 기록상으로 볼 때 이 40명이 한국 화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이들은 본래 한국에 머물러 있는 청군을 도와주려고 온 것이었는데 청군이 한국에 오래 머물게 됨에 따라 점차 한국인과 교역을 하게 되었다.
1882년 청군이 주둔한 지 한달 후 청조는 즉시 조선과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청과 조선간의 무역관계를 맺었다. 12년 후인 1894년 11월 양국은 청상보호규칙(淸商保護規則)을 제정하였는데 이때가 화교들의 정착기라고 할 수 있겠다.
1882년 이후 일본 항구도시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일부 화교들도 일본인들을 따라 조선에 건너와 부산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1884년 한국의 대도시에 있는 화교의 숫자는 크게 늘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서울의 화교 숫자는 약 350명 정도로 약 4배 가까이 늘었다. 인천도 235명으로 늘었는데 그 이유는 산동반도와 인천항 사이에 정기적으로 배가 운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선과 여객선의 운행으로 화교들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져서 서울과 인천의 화교 수는 더욱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한국화교의 성장
당시조선사회는 상업이 세분화되어있지 않아 화교들은 여러 가지 상업 활동에 모두 종사할 수 있었고 이는 조선 사회와 조선 상인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초기 화교들은 중국 정부의 정책적 도움을 받아 일본인을 제외하고 조선에 가장 많이 거주한 외국인이었다.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면서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5천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으며, 중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졌다. 이곳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차이나타운"의 최초 형태이다. 그리고 이후 원세개가 조선 통상 사무를 맡아 1887년에는 부산, 1889년에는 원산에 조계지역에 대한 담판을 성공시켜 중국 조계지역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인천에 조계 지역이 설립되면서 화교의 수는 급증하여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화교가 약 1천명에 이르렀다.
이들 대부분은 인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 잡화를 팔고 다시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전반적인 상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인천 조계지 내의 화상들은 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사업은 날로 흥성하게 되었다. 또한 1898년 의화단 (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차 가까운 한국으로 대거 건너오기 시작하였는데, 이들도 주로 인천을 자신들의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부지불식간에 화교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 세력권이 되었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1884년 35척의 청조 선박이 인천과 마포항을 왕래하였으며 1만 3천톤의 화물을 운반하였다고 한다.
화교들의 활동 범위가 날로 확대되어 가면서 공관과 중화회관을 중심으로 한국인들과 접촉하는 횟수도 날로 많아졌으며 이로 인해 화교들과 한국인들간의 충돌도 점점 많아졌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1883년 7월부터 1884년 9월까지 한국과 화교간에 발생한 채무 분쟁이 15건이며 액수는 30687량에 달했다. 정착 초기에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지리적 환경이 달라 한국인들과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이 가운데에서 침략자 일본의 이간책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920년대의 10년 동안 화교의 경제력은 막강하였다. 특히 20년대의 후반기인 1927년 전후에는 화교의 경제활동이 가장 막강했던 시기였다. 서울과 인천에 분포해 있던 화교 무역 상인들은 주로 비단, 옷감, 면화, 양식, 고추, 마늘 등 각종 토산품을 중국에서 대량으로 수입한 후 다시 한국의 전역으로 판매했다. 1923년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과 인천 양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의 수는 약 6천명 정도였다. 이들이 40년간 중국으로 보낸 액수는 1천만 엔에 달했다. 당시 경성 시민 중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사람은 화상 동순태(同順泰) 사장인 담걸생(譚傑生)씨였다. 1920년대 화상이 경영하는 상점들은 대체로 잡화점, 비단가게, 양장점, 이발소 등이었으며 후반기에는 요식업이 늘기 시작했다.
한국화교의 위축과 이동
한국화교의 재도약
그 이후 1998년 200평 이하로 소유를 제한했던 외국인 부동산 관련 법규가 풀리고, 외국인에게 호의적인 정책이 시행되면서 2001년도에는 22,917명(법무부 집계 F-2 비자 대만인 거주현황)으로 점차 안정적이 되었다.
그리고 21세기에 접어들어 중국의 부상과 21세기 지구촌 시대 도래, 특히 1997년 IMF사태 이후 외국 자본 유치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한국 화교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즉 이들은 막대한 세계 화교 자본을 국내로 유치하는 교량 역량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면서 이들이 중심이 되어 2005년 서울에서 제8차 세계화상대회(世界華商大會)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서서히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역시 한국 화교의 재도약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들은 전 세계 화교망을 이용하여 화교 자본 유치는 물론 우리 경제의 교역활성화를 위한 최첨병의 역할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다문화 사회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 나간다면 한국 화교는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충분히 그 한 축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화교 현황
2010년 현재 한국 화교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2001년 5월말 기준으로는 약 22,917명이다. 이 통계는 최근의 현황을 나타내기에는 부족하지만,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한국 화교 인구의 큰 흐름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80년대와 90년에는 아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 주 요 원인은 해외유학이나 취업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거주여건이 비교적 나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선진국으로의 이민 등이다. 둘째, 그러나 1999년부터 2001까지 다시 증가 추세를 보이는데, 이는 이른바 IMF 금융위기에서 외국인에 대한 규제가 대폭적으로 완화되면서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 한도 역시 철폐되는 등 외국인에 대한 여건이 호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급속한 성장 및 한중 교류의 폭발적인 증가가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셋째, 2001년부터 최근까지의 현황은 관련 자료를 구하지 못해 정확히 서술하기 어렵지만, 상기 추세에 따라 예측할 경우, 향후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화교 후손으로 이루어진 기존 화교에 최근에 한국으로 건 너오는 신이민 화교층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을 본다면 당분간 이들의 수는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화교 학교
먹거리
깐쇼새우 : 작은 새우를 튀겨서 칠리소스와 함께 불에 볶아 먹는 요리
꽃빵, 고추잡채 : 꽃빵은 꽃모양으로 된 빵, 굽거나 튀기지 않고 쪄서 먹는 빵이다. 고추잡채와 함께 먹으면 일미이다.
전가복 : 새우와 점보고기.각종 친환경 야채를 볶아 국물에 끓인 요리로, 전가복에 들어가는 요리는 식당에서 가장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는 만큼 가격도 만만치 않다.
오향장육
탕수육 : 고기튀김에 달고 새큼하게 끓인 녹말채소 소스를 끼얹은 중국요리
양장피 : 중화요리의 하나. 전분으로 만든 얇은 판을 두 겹으로 겹쳐서 만든 요리
공갈빵 : 중국의 빵요리이다. 중국식 호떡이라고도 한다. 속이 텅비고 겉만 부풀게 구운 중국식 빵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겉으로 볼 때는 크지만 속은 비어 있기 때문에 '공갈'빵이라고 부른다.
월병 : 중국 과자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둥글고 납작한 모양이지만, 중국 지역마다 재료 등에는 차이가 있다.
자장면 : 돼지고기 간것과 양파, 호박, 생강 등을 다져 중국된장(춘장)과 함께 볶은 양념을 국수에 넣어 비벼 먹는 요리
중국 전통차
옹기병
포춘쿠키 : 미국, 유럽 등지의 중국 음식점에서 후식으로 나누어 주는 과자이다. 과자의 안을 깨보면 보통 운세가 적힌 쪽지가 들어 있지만, 단순한 중국어 낱말을 배울 수 있는 쪽지가 들어 있기도 한다.
대만 크래커
살거리
치파오 : 중국의 전통의상이다. 원래 남녀 의상 모두를 이르는 말이지만, 보통 원피스 형태의 여성 의복을 지칭한다.
전통차 :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녹차, 홍차, 꽃차등으로 구별하는데 용정차, 우롱차,철관음, 보이차 등이 많이 알려져 있음.
엔틱도자기 : 중국의 차와 도자기는 이미 천년전 송대에서부터 서양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었다. 징더전(景德鎭)이 도자기 산지로 유명한 곳인데 이곳도 옛날 전통 도자기에서 좀더 화려하고 실용적인 제품으로 고객들을 부른다.
악세사리 및 소품
찻잔세트
볼거리
중국관련 볼거리
화교중산학교 : 1884년 인천에 조계지를 설치한 청국의 영사관이 있던 현재의 자리에 1934년 건립된 2층 조적조 건축물이다. 지금도 지역 내 화교들을 교육하고 있는 인천 유일의 대만 교육기관으로 목조트러스의 모임지붕과 중앙포치(Poach), 아치형 창호 및 지붕 층의 출창 형태가 특징이다.
해안 천주교 : 원래는 가정집이었던 곳으로 현재 맞은편 해안 천주교 성당의 교육관으로 사용 중이다.
한중원 쉼터 : 청나라시대 중․후반기 소주지역 문인들의 정원 양식을 활용해 조성한 야외문화공간으로 중국 전통정원에 사용되는 영벽(影壁), 조벽(照壁), 정자, 목교와 연못, 대나무 및 용기와를 얹은 담장 등을 통해 중국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와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한중문화관 : 2005년 건립된 문화관은 한중 양국의 역사와 문화 교류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곳으로 화교의 역사와 삶, 중국 자매결연도시의 문물 및 경극, 기예공연, 중국어와 한국어 교실 등 다양한 체험 및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중국을 방문하지 않고서도 다양한 중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중국어마을 문화체험관 : 기존의 차이나타운을 활용하여 관광, 교육, 체험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중 다양한 공연과 이벤트를 통해 중국어 학습 공간은 물론 생활 속의 중국어권 문화 공간으로 역할 할 수 있도록 해당 지자체인 인천광역시 중구청에서 운영하는 기관.
삼국지벽화거리 : 청일 조계지 계단을 올라가서 밑으로 난 길 양쪽의 벽면에는 삼국지의 중요 장면을 설명과 함께 타일로 제작하여 장식한 벽화가 나온다.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림으로써 남에게 설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총 80여컷의 장면이 있는데 차이나타운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짜장면 박물관 : 처음 짜장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구)공화춘’을 개조해 박물관으로 조성한 것으로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는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했으며 2층에서는 짜장면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 삼국지 벽화거리 끝에 이르면 나오는 계단으로 좌측에는 청국, 우측에는 일본의 조계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 계단은 외국의 행정권과 경찰권이 행사되었던 곳으로 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힘 없었던 나라와 백성의 서러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의선당 : 본래 '화엄사'라는 이름으로 실제 화교들이 찾아와 소원을 빌기도 했던 중국식 사당. 개항 이후 정착한 화교들이 세운 사당으로 명절인 춘절이나 중앙절 등의 시기에는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일본 관련 볼거리
구)일본영사관 : 1883년 인천이 개항하고 조계지가 설정되면서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늘어나게 되자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 현 인천 중구청 자리에 일본 영사관을 설치한다. 현재의 건물은 1933년에 2층으로 지어져 사용하다가 1964년에 한층을 증축한 상태이며, 해방 이후 계속 인천시청으로 사용하다가 1985년 시청이 구월동으로 옮기면서 중구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일본은행들
구)일본18은행 인천지점
구)58은행 인천지점
홍예문
인근 관광지
자유공원
월미도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화평동 냉면
화도진공원
신포시장
인천아트플랫폼
답동성당]
11:55~12:00 차이나타운 서쪽에 위치한 제1패루 중화가(中華街)로 이동
[패루는 차이나타운의 입구를 지키는 문이다. 차이나타운 제1패루 중화가(中華街)는 인천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웨이하이시가 기증한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중화가라는 이름은 중화사상의 반영으로 세상의 중심에 있는 중국인들의 거리라는 뜻이다.]
12:00~12:02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짜장면 박물관으로 이동
[짜장면 박물관 매표소에서 (짜장면 박물관&한중문화관&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인천일본18은행지점)&인천개항박물관(옛 인천일본제1은행)&대불호텔 전시관&중구생활사 전시관)의 6곳을 관람할 수 있는 통합관람권을 3,400원에 구입]
[짜장면 박물관
소재지 :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56-14
영업시간 : 9시에 운영 시작
전화번호 : 032-773-9812
등록문화재 제246호
개화기 때 청나라 조계지에서 유명했던 요릿집 ‘공화춘’ 건물에 박물관을 들인 것이다. 공화춘은 짜장면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짜장면박물관은 짜장면 관련 다양한 콘텐츠와 커리큘럼을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국내 최초의 짜장 테마박물관으로 총 6개의 상설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짜장면의 유래와 역사, 문화를 시기적으로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매년 다양한 주제의 기획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12:02~12:17 짜장면 박물관을 관람
12:17~12:22 인천 중구 제물량로 238 번지에 있는 한중문화관으로 이동
[한중문화관은 차이나타운에 자리한 한국과 중국의 역사, 문화가 공존하는 인천 차이나타운의 특성을 잘 담아내는 공간이다. 중국풍 양식으로 지은 건축물을 중심으로 인화문(仁華門)이라는 차이나타운 제2패루(예전에 중국에서, 큰 거리에 길을 가로질러 세우던 시설물이나 무덤, 공원 따위의 어귀에 세우던 문), 중국에서 기증한 왕희지 석상, 중국식 정자 등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2005년 개관한 한중문화관은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로 1층에 갤러리, 2층에 한중문화전시관, 3층에 우호도시홍보관, 4층에 공연장이 있으며 중국 복식, 중국 음식 등에 대한 전시와 함께 우리에게 친숙한 주윤발, 이소룡 등 배우들의 미니어처도 진열되어 있고, 중국 의상 체험과 다도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2015년에는 별관인 인천화교역사관을 개관해 볼거리를 더한다. 본관과 별관은 2층 연결로를 통해 이어지며 본관 1층, 3층, 2층 순으로 관람 후 2층에서 별관으로 이동하는 동선을 추천한다.]
[차이나타운 남쪽에 위치한 제2패루 인화문(仁華門)은 한중문화관 옆에 위치해 있다. 금색의 화려한 용문양이 빛나는 패루로 어질고 밝은 빛이 퍼진다는 뜻으로 차이나타운의 번성을 기원하는 소망을 담고 있는 이름이다.]
12:22~12:42 한중문화관을 관람
12:42~12:47 인천 중구 제물량로 240 번지에 있는 천주교 제물진두 순교성지로 이동
12:47~12:57 천주교 제물진두 순교성지를 탐방
[인천교구 제물진두 순교성지
가톨릭신문 2025-01-22
이승환 기자
하늘 향해 피어오른 꽃, 순교자 감싸 안은 예수님의 손
신자들 공개 처형했던 나루터 땅에 좁고 높은 독특한 모습의 경당 봉헌
희념 기념 전대사 수여 순례지 지정
한국 속 중국이자 원조 짜장면 거리로 알려진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 국철 인천역과 인천 제8부두가 가까운 이곳에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지속된 병인박해 순교사를 간직한 성지가 있다. 인천교구 ‘제물진두 순교성지’다.
진두(津頭)는 한자 그대로 나루터. 흥선대원군은 이곳 제물 나루터를 공개 처형장으로 택했다. 백성들의 왕래가 잦고 외국 선박들의 출입이 빈번한 이곳에서 서양의 종교를 받아들인 천주교인을 처형함으로써, 외세 배척의 뜻을 대외에 밝히고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서울 한강변 양화진두(절두산)와 더불어 많은 신앙인이 공개 처형된 곳임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곳은 2010년에야 순교 터가 규명됐고 2014년 순교기념경당이 봉헌됐다.
제물진두 순교기념경당은 독특한 모습부터 눈길을 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공간에 세워진 경당은 아마도 한국교회의 성지 중 가장 날씬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15m 높이의 경당 외관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 모양이자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을 감싸는 두 손을 형상화하고 있다.
성지 입구에는 ‘위로와 자비의 주님’이 오른팔을 내려뜨려 순례자를 맞이한다. “내 손을 잡아라.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노라. 힘을 내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경당으로 들어서는 복도는 한두 사람 겨우 지날 정도로 좁다. 좁은 경당 입구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성모상이 있다. 복도 옆면으로 제물진두 순교자들의 초상이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나란히 걸려 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는 10명. 1868년 4월 20일 손 넓적이(베드로,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의 이모부)와 그의 부인 김 씨, 사위 백치문(요한 사도) 등 4명의 순교자가 도끼로 참수당했다. 박해는 신미양요를 전후한 1871년에도 이어졌다. 5월 6일 한국교회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베드로)의 증손자 이연구와 이균구가 미군의 배에 들어가 길 안내를 하려 했다는 죄로 순교했다. 5월 21일에는 이재겸(이승훈의 손자)의 부인 정 씨와 이명현(정 씨의 손자), 백용석, 김아지가 사학죄인으로 박해의 칼을 받았다.
두 손 가지런히 모은 성모님 바라보며 경당 안으로 들어섰다. 햇볕 머금은 십자가 스테인드글라스가 그 자체로 조명을 이뤄 순례자를 비춘다. 맞은편 벽면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라는 성구와 함께 순교자의 모습을 담은 부조 작품이 있다.
박해 당시 제물진두 처형장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도끼로 참수당하는 순교자 모습 너머로 이미 천상에 올라 기도하는 순교자들이 그려져 있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초상과 배 한 척이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은 김대건 신부와 이곳 제물진두의 인연을 드러낸다. 1844년 부제품을 받고 조선에 잠시 입국한 김대건은 1845년 4월 30일 신자 11명과 함께 이곳에서 중국 상해로 떠났다.
교회와 제물진두의 인연은 또 있다. 경당을 나와 길을 건너면 인천 중부경찰서 앞 공원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첫 선교 수녀 도착지 기념비’다. 기나긴 박해가 끝나고 종교의 자유가 찾아온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도자 4명(프랑스인 2명, 중국인 2명)이 이곳 제물포항에 도착함으로써 ‘순교의 땅’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도 생활이 시작된 것을 기념하는 자리다. 기념비에는 선교 수녀들이 배에서 내리는 장면을 표현한 청동 부조와 초대 원장 자카리아 수녀의 여행 일기 속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비석을 등지자 길 건너 제물진두 순교성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손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이 멀리서도 또렷이 보인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랑했던 이곳 순교자들이 천상의 기쁨을 얻은 것처럼…절망과 아픔의 역경 속에서도 늘 나에게 손을 뻗어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손 맞잡을 수 있기를 고대하며 순례를 마친다.
◆ 순례 길잡이
제물진두 순교성지(cafe.naver.com/jemuljin,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40)는 순교자 10명의 넋이 서린 순교지이며, 1845년 4월 김대건 부제가 사제 서품을 받기 위해 중국 상해로 떠났던 역사적인 곳이다. 바로 뒤편에 자리한 인천교구 해안본당이 성지를 관할하고 있다. 2025년 희년을 맞아 인천교구가 지정한 전대사 수여 지정 순례지 중 한 곳이다.
- 개방시간: 오전 11시~오후 4시(주일, 공휴일 휴무)
- 미사: 월~토 오후 2시
- 문의: 032-764-4193(성지 사무실)]
12:57~13:02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77 번지에 있는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인천일본18은행지점)으로 이동
[개항기 일본 제 18 국립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개항 이후 인천 내 근대건축물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 정리, 연구하여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 제 18 국립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할 당시 지붕과 금고, 금고 출입문이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전시관에는 개항기 당시 지어져 현존하는 근대건축물과 소실된 근대건축물들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13:02~13:15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인천일본18은행지점)을 관람
13:15~13:20 인천 중구 신포로15번길 76 1-3층에 있는 한국근대문학관으로 이동
13:20~13:40 한국근대문학관을 관람
[예상보다 재미있는 체험형 전시, 한국근대문학관
박유진 객원기자
인천in 기사 승인 : 2025.02.09. 22:30
근대문학 속 인천을 다채롭게 만나는 곳
영상, 게임, 퀴즈, 포토존, 소품, 애니메이션, 오디오로 체험 가능
문학을 사랑하거나 그 역사에 관심이 많은 시민 혹은 청소년이라면 꼭 가봐야 하는 인천의 한국근대문학관.
문학 관련 전시관이라면 책을 전시하겠거니 짐작하며 도서관이나 서점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 근처에 위치한 한국근대문학관은 전혀 뻔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각종 체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생한 경험을 전하는 한국근대문학관은 규모도 크고 동선도 잘 정리되어 있으면서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아 단체 관람으로도 좋다.
본관과 기획전시실로 구성된 한국근대문학관은 인천문화재단과 인천광역시가 함께 인천의 원도심인 개항장의 근대 창고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만든 전국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이다.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본관에 입장하게 되면 근대계몽기에서 해방기까지, 한국근대문학의 형성과 역사적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1894년부터 1910년까지의 문학을 살펴보면, 왕조의 몰락과 근대국가의 열망 속에서 신문학의 씨앗이 뿌려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10년부터 1919년까지는 식민지 근대의 확장과 무단통치의 강화 속에서 근대문학이 출발한 시기다. 자유로운 리듬으로 개인의 정서를 노래한 작품, 자아각성과 근대문명을 외쳤으나 식민지 현실과 유리되는 상황을 그린 작품들이 있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는 근대문학이 본격적 성장을 위한 토대를 현실에서 발견하는 시기다. 김소월과 한용운은 전통 정서를 계승하고 사랑의 윤리를 호소했다.
1925년부터 1935년까지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식민지 현실에 맞섰던 시기다. 농민의 애환과 농촌의 현실에 주목하고 모더니즘 소설과 시 속에서는 식민지 근대의 부조리를 문제삼았다. 염상섭, 이기영, 강경애, 한설아, 채만식 등이 본격 장편소설 시대를 열었다.
1935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제 파시즘에 맞서 시대를 고뇌하는 시기다. 이 시기 문인들은 생명을 추구하며 조선적인 것을 재발견했다. 한쪽에서 현덕의 작품 '남생이'가 스크린을 통해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만들어져 방영되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보다 재미있는 체험이 가득한 공간이 펼쳐진다. 대중문학 코너에서는 연애와 사랑 이야기의 기원, 탐정과 함께 떠나는 모험의 세계를 보여준다.
인천의 근대 문예지와 인천 근대문학 살롱 코너도 있다. 특히 살롱에서는 체험코너가 있어서 인천 근대문학 오락실, 놀러가요 인천 근대문학 정거장, 인천 근대문학 아카이브, 인천 근대문학 100문 퀴즈, 인천 근대문학 연표로 재미있는 체험이 가능하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면 인천 근대문학을 직접 읽어보고 당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관련자료를 보고 들을 수 있다. 근대시와 소설 속에서 묘사된 인천의 모습은 예상 외의 모습도 있어서 깜짝 놀라게 된다.
국제항구이자 기회의 땅, 일자리와 일확천금을 노리고 몰려든 사람들이 넘쳐나고 전국 최고의 휴식과 여가지였던 인천. 당시 소파 방정환이 보기에는 어떠했을 지를 직접 게임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시민들은 인천근대문학관에서 문학의 향기 속에 푹 빠져보기도 하고 역사 앞에 숙연해지기도 하면서 게임이 주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13:30~13:33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89 번지에 있는 인천개항박물관(옛 인천일본제1은행)으로 이동
[인천개항박물관은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 23번길 89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개항기 인천의 모습을 공공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인천개항박물관의 건물 자체는 구 인천 일본 제1은행 지점으로 사용되었었다. 2010년 10월 2일 인천개항장 문화지구 지정과 발맞추어 개장되었다.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이 휴관이며, 관람신청을 예약할 수도 있다. 인천항 갑문, 광제호의 태극기부터 경인선, 전환국 등 인천에 설치된 여러 기관들에 대한 설명도 같이 하고 있다.]
13:33~13:43 인천개항박물관(옛 인천일본제1은행)을 관람
13:43~13:46 인천 중구 제물량로218번길 3 번지에 있는 인천아트플랫폼으로 이동
13:46~14:10 인천아트플랫폼을 관람
[인천아트플랫폼
인천아트플랫폼은 인천광역시 원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중구 해안동 일대의 근대 개항기 건축물을 리모델링하여 조성된 문화 예술 창작공간으로 2009년 9월에 개관하였다. 예술의 창작, 유통, 향유, 교육에 이르는 전 과정을 아우르는 문화 예술의 창작공간으로 지역의 문화 활성화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새로운 문화 예술의 발신지다.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전시 및 공연, 시민참여 교육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예술가에게는 창작공간, 시민들에게는 예술을 함께 나누는 문화 예술 향유의 광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14:10~14:14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97 번지에 있는 중구생활사전시관으로 이동
[중구 생활사전시관은 1888년에 개업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의 외관을 되살려 지은 건물이다. 귀부인이 머물렀을 법한 객실과 1960~70년대 인천 중구의 의식주 생활공간을 실감나게 재현했다.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97 번지에 있는 중구생활전시관은 제1관 대불호텔 전시관과 제2관 생활사전시관(1960~1970년대)으로 되어 있다. 대불호텔 전시관은 대불호텔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관이며, 생활사 전시관에서는 1960~1970년대 인천중구의 생활사를 볼 수 있다.]
14:14~14:36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101 번지에 있는 대불호텔전시관을 먼저 관람한 후 관람동선이 연결되어 있는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97 번지에 있는 중구 생활사전시관을 나중에 관람
14:36~14:39 인천 중구 신포로27번길 80 번지에 있는 인천 중구청(옛 일본영사관)으로 이동
14:39~14:40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83 1층 번지에 있는 일조용 중화요리로 이동
14:40~15:20 일조용 중화요리에서 간짜장 곱빼기(8,500원)로 점심식사 후 휴대폰을 충전
15:20~15:24 인천 중구 관동1가 24 번지에 있는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으로 이동
[계단을 경계로 북성동 쪽은 청나라의 차이나타운이, 관동 쪽은 일본 건축물이 들어섰다. 계단 양쪽에 세운 석등조차 중국식과 일본식으로 구별돼 있다.
현재 일본풍거리라고 부르는 지역이 과거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일본 조계지이다. 근대에 지어진 일본식 목조주택이나 석조 건축물이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기도 하고 외벽 모습만 일본풍으로 바꾼 건물들이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개항초기 세워진 일본주택은 마찌야 형식(상점이 있는 목조주택)과 나가야 형식(단층 목조건물)이 주를 이루었으나 1930년대이후에는 문화주택이 인천 곳곳에도 세워졌다. 현재 여러채가 관동과 신흥동에 남아있다. 일본풍 목조건물들은 현재 카페나 박물관, 전시관 등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고 거리에서 토토로 간판이나 복고양이 입간판 등을 볼 수 있어 이채롭다. 일본식 연립주택인 나가야가옥을 연상하게 만드는 감성카페들도 많다. 일본풍 거리부터 주변 관광지를 도는 인력거 투어도 있어 차이나타운, 동화마을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15:24~15:28 삼국지 벽화거리로 이동
[삼국지 벽화거리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62-15 (선린동)
‘인천 속 작은 중국’ 차이나타운은 중국 화교의 130년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인천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다. 차이나타운이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중산학교 담장에 새로운 볼거리를 만들었는데 바로 삼국지 벽화거리이다. 현재에는 주말이면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 없는 차이나타운에서도 필수 관광코스로 유명하다. 삼국지 벽화거리는 길 양쪽 벽면에 나관중 원작의 <삼국지>에 등장하는 80여 개의 중요 장면에 설명을 붙여 제작한 타일 벽화로 장식한 거리다. 그 길이가 자그마치 150m에 달해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좋으며 어린이들이나 학생들의 교육에도 좋아 주말이면 많은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곳이다. 삼국지 벽화 거리는 차이나타운 안에 있기 때문에 차이나타운을 전체적으로 같이 관광하면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차이나타운 맨 꼭대기에는 자유공원이 있으니 시간이 된다면 함께 돌아보는 것도 좋다.]
15:28~15:34 삼국지 벽화거리를 사진촬영
15:34~15:39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34 번지에 있는 의선당(義善堂)으로 이동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중국다운 공간은 의선당이다. 우리나라 유일의 중국식 사당이라는 의선당은 1850년대엔 화엄사(華嚴寺)라 했지만 화교들이 이 땅에서 잘 적응하며 의(義)를 지키고 살도록 교화하기위한 뜻으로 의선당(義善堂)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화교들은 이 곳에서 소원을 빌고 중국 명절 때는 축제를 열기도 한다.
의선당에 주신으로 모셔진 신격은 5위로, 다음과 같다.
호삼태신-호삼할아버지라는 산신으로 나온 인천 차이나타운 홈페이지 설명과는 달리 위패에 호삼태야지신(胡三太爺之神)이라 되어 있고 산신도 아니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모시는 신. 재물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용왕-바다의 신.
관세음보살
관성제군-신격화된 관우. 의선당에는 협천대제(協天大帝)라는 이름으로 모셨다.
낭랑-인천 차이나타운 홈페이지에는 삼신할머니상으로 나오나 삼신할머니는 중국 신이 아니다. 낭랑이란 도교에서 여신을 부르는 호칭으로, 관세음보살도 관음낭랑이라 부르기도 한다. 낭랑은 대부분 아이를 점지해주고 아이와 여성, 특히 산모를 보호해주는 권능이 있다. 의선당의 낭랑상은 세 여신이 한데 모셔진 것으로 보아 삼고랑(三姑娘)일 가능성이 높지만, 신상 중 하나가 아이를 안은 형상이므로 해당 신상은 송자낭랑(送子娘娘)일 가능성도 있다. 인천화교협회 홈페이지(링크)에는 바다와 항해의 여신 마조를 모셨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여러 낭랑을 한 데 모셔 놓았을 가능성도 있다.]
15:39~15:45 의선당(義善堂)을 관람
15:45~15:48 차이나타운 황제의 계단 입구로 이동
15:48~15:51 차이나타운 동쪽에 위치한 제3패루 선린문(善隣門)으로 이동
[제3패루는 선린문으로 차이나타운에서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곳에 위치해 있다. 선린문이라는 이름은 한국사람과 중국사람은 가까운 이웃으로 잘 어울려 살자는 뜻이다.]
15:51~16:00 선린문 옆에 있는 초한지 벽화거리를 사진촬영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에 있는 초한지 벽화거리는 초한지의 대표적인 사건과 등장인물을 대형 벽화로 표현해 놓은 거리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벽화거리는 두 곳이 있다. 먼저 조성된 삼국지 벽화거리가 인기를 끌자 나중에 초한지를 주제로 초한지 벽화거리를 만들었다.
초한지는 중국 진나라 멸망 이후 한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때까지 항우와 유방의 기나긴 대립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다. 초한지는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쥐고 새로운 통일제국 한나라에 황제로 등극하며 끝을 맺는다. 하지만 초한지 벽화거리의 마지막 벽화는 초한지 이후의 한나라의 몰락과 위, 촉, 오 세 나라의 이야기인 삼국지를 예고하고 있다. 초한지 벽화거리가 끝난 지점에서 바라보면 삼국지 벽화거리가 보인다. 선린문 방향으로 걸어서 3분이면 삼국지 벽화거리에 닿는다. 벽화거리는 모두 110m로 순서대로 혼란기의 진나라와 한나라의 성립 과정을 자세히 그려 놓았다.
벽화거리를 거닐며 중국 진나라 말부터 한나라 건국까지의 시간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초한지 벽화거리를 처음부터 제대로 감상하려면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한다. 제3패루인 선린문을 지나면 그 뒤에 초한지 벽화거리가 양쪽으로 펼쳐지는데, 왼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이야기의 처음부터 감상할 수 있다. 인근에는 짜장면박물관과 자유공원, 송월동 동화마을의 볼거리가 가득하다.]
16:00~16:06 석정루(石汀樓)로 이동
[석정루에 오르면 인천항과 월미산 북성포구 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석정루는 삼화조선을 경영했던 이후선(李厚善)이 시민의 휴식처가 될 누각을 지어 인천시에 기증한 것이다. 출생지가 월미도였던 연유로 월미도와 인천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공원 서쪽 언덕 위에 2층 191㎡ 규모로 누각을 짓고 1966년 6월 23일 윤갑로(尹甲老) 시장 등 여러 내외빈이 참석해 준공식을 거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각명은 자신의 아호를 따 ‘석정(石汀)’이라 했는데 당대에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서예가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이 현판을, 제물포고등학교에서 유수한 평론가와 시인들을 길러낸 원정 최승렬(崔承烈)이 ‘기림’이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제영(題詠)을 남겼으며 한샘 장인식(張仁植)이 현액을 썼다.]
16:06~16:10 사진촬영
16:10~16:12 인천 자유공원 한미수교 백주년기념탑으로 이동
[인천 자유공원은 인천항 개항 뒤인 1888년 외국인 거류민단에서 관리·운영하여 당시 시민들은 이를 ‘각국공원‘이라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로 이관되자 그때부터는 서공원으로 불렸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만국공원으로 불렸으며,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진 1957년 10월 3일부터 자유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응봉산 전체를 자유공원이라 부르며, 맥아더 장군 동상과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비롯해 자연보호헌장탑, 충혼탑, 석정루 등을 보존하고 있다. 석정루에 오르면 인천항과 월미산 북성포구 등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진다. 자유공원은 인천 중구 시가지와 인천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의 휴식·위락 장소이며, 4월에는 ‘자유공원 벚꽃축제’가 열리고, 미술대회·글짓기대회 같은 각종 행사도 자주 열리는 인천의 명소이다.]
16:12~16:15 사진촬영
16:15~16:19 인천 중구 송학동1가 1-1 번지에 있는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장군동상으로 이동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부조물 교체
한갑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기사 입력 : 2024.09.11. 11:00
기존 부조물과 동일 규모 신규 부조물 설치
【파이낸셜뉴스 인천=한갑수 기자】 인천상륙작전 당시 모습 재현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을 빚었던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 설치된 맥아더 장군 동상 부조물이 새 부조물로 교체됐다. 인천시는 제74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주간을 맞아 자유공원에서 맥아더 장군 동상 부조물 제막식을 개최했다고 11일 밝혔다.
이번에 설치된 맥아더 장군 동상의 신규 부조물은 기존 부조물이 1944년 필리핀 레이테만 상륙작전의 사진을 참고해 제작된 것이라는 지적에 따라 인천상륙작전 당시 모습으로 새로 마련됐다.
시는 그동안 부조물의 역사성, 작품성, 예술성을 검증하고 정비 및 교체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관계 기관, 시의회, 군사 및 역사, 예술 전문가로 구성된 맥아더 동상 부조물 검증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4차에 걸친 심도 있는 자문회의와 현장 확인을 거쳤다.
그 결과 기존 부조물은 70년 가까이 시민과 함께한 가치를 인정해 존치하고 인천상륙작전과 관련된 사진을 기반으로 한 신규 부조물을 추가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시는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에 위치한 맥아더 기념관에서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 당시 마운트 맥킨리 함에서 상륙작전을 지켜보는 사진과 미 해병대원들이 적색해안에서 방파제를 넘어 상륙하는 모습을 담은 두 장의 사진을 제공받아 가로 2.75m, 세로 1.36m의 기존 부조물과 같은 규모의 신규 부조물을 설치하고 주변 부대시설을 정비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참전용사를 비롯해 유정복 인천시장, 인천시의회 의장, 중구청장, 인천보훈지청장 등 시 관계자들과 해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UN군 부사령관, 인천해역방어사령관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유정복 시장은 “민선 6기에 호국보훈 도시를 선포하고 보훈 전담 조직을 확대했고, 민선 8기에는 국가보훈대상자 수당 증액, 참전유공자 미망인 수당 신설, 역전의 용사 전적지 순례, 월남전 참전 기념탑 건립, 통합보훈 회관 건립 등 다양한 보훈정책을 추진해 왔다”며 “앞으로도 일상 속에서 살아 있는 보훈의 가치를 공유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16:19~16:22 맥아더장군동상을 사진촬영
16:22~16:25 인천 중구 자유공원남로 25 번지에 있는 제물포 구락부로 이동
[개항기 인천 제물포에 거주하던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외국인들의 친목을 돕는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901년에 지었다. 벽돌로 된 2층 건물로 지붕을 양철로 덮었으며 내부에는 사교실·도서실·당구대 등을 마련하였고, 따로 테니스 코트도 있었다.
제물포구락부는 1953년부터 1990년까지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이용하였고,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인천문화원으로 사용되었으며, 2007년 제물포구락부로 재탄생하였다. 새롭게 단장한 제물포 구락부는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독일 등의 국가들과 인천국제문화교류페스티벌을 진행하는 등 지금도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장으로서 역할과 다양한 문화에 관심이 많은 어린이, 청소년, 일반 시민들의 문화 교류 창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6:25~16:30 제물포 구락부를 관람
16:30~16:31 인천 중구 신포로39번길 74 번지에 있는 송학동 옛 인천시장관사(인천시민愛집)으로 이동
[인천 송학동의 옛 시장 관사는 1900년대 일본인 사업가의 별장으로, 일본식과 서양식이 공존한 건축물과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을 갖추고 있는 저택이다. 광복 이후, 레스토랑이나 사교장 등으로 이용되다가 인천시에서 매입, 시장 관사 건물과 인천 역사자료관으로 운영되다가 최근 2021년 7월부터 인천시민애(愛)집으로 탈바꿈하였다. 인천 시민들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다양한 콘텐츠의 복합 역사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근의 제물포구락부, 차이나타운, 신포국제시장 등을 함께 둘러보기 좋다.]
16:31~16:40 송학동 옛 인천시장관사(인천시민愛집)을 탐방
16:40~16:49 인천 중구 신포로27번길 36 번지에 있는 누들플랫폼으로 이동
[인천의 먹거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각종 면 종류다. 짜장면은 물론 쫄면의 시작도 인천이었기 때문. 차이나타운 내에 자리한 누들 플랫폼은 이름 그대로 면을 주제로 꾸민 복합문화공간이다. 1층에선 짜장면과 쫄면의 탄생을 비롯해 화평동 냉면과 새집 칼국수 등 인천 시민들에게 추억의 맛을 떠올리게 하는 전시가 이뤄진다. ‘쫄면 제1호 공장’인 광신 제면소에서 기증한 사출기 등 다양한 관련 유물도 전시돼 일반 관람객들에게도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2층에선 모형이나 스크린을 통해 다양한 면 요리를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이 가능하다.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세계의 향신료가 전시돼 직접 그 향을 맡아볼 수 있다. 한쪽에는 컵누들 만들기 체험장도 운영된다.]
16:49~17:10 누들플랫폼을 관람
17:10~17:20 인천 중구 우현로49번길 11-5 번지에 있는 신포국제시장으로 이동
[신포국제시장은 인천 개항 이후 형성된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다. 19세기 말 화교 농민들이 산둥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키워 시장에 내다 판 것이 신포국제시장의 시초라고 한다. 역사가 깊은 만큼 먹거리도 풍성하다.
쫄면의 탄생지도 신포시장이며, 신포순대, 신포만두의 고향도 이곳이다. 주먹으로 깨 먹는, 단단한 공갈빵과 매콤한 맛을 강조한 신포 닭강정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다. 닭강정을 사려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골목 안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다.]
17:20~17:29 신포 국제시장을 거쳐서 인천 중구 우현로50번길 2 번지에 있는 주교좌 답동성바오로성당으로 이동
[주교좌 답동 성바오로성당 - 느긋한 고요, 언덕 위 믿음의 안식처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바오로성당은 중구 답동 언덕에 우뚝 세워져 있다. 개항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겪어 오면서도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우리 질곡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이런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건물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인천광역시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가톨릭 건축물로 1981년 9월 25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을 눈여겨 본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1884~90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는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개항지에서의 토지 매입과 성전 건축이 가능해지자, 제물포에 코스트 신부(1842~1896년)를 파견해 성당 건립을 하였다.
1933년 신자수가 1500여 명에 이르렀고, 제 4대 드뇌(전 으제니오1904~1937년) 신부는 증축계획을 세우고 1935년부터 성전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작업을 시작하여 2년 후인 1937년 원 라리보(1933~1940년 재임) 주교 주례로 축성식을 가졌고, 현재에 이른다.
전면에 3개의 종탑이 세워져 있고 각 종탑마다 8개의 작은 돌기둥이 8각의 종 머리 돔을 떠받들고 있다. 또 각각의 종탑 아래에는 나무로 된 낡은 출입문이 자리한다. 벽면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붉은 벽돌과 흰 화강암으로 된 돌계단은 조화와 질서를 유지해 장엄함마저 느껴진다. 특히 긴 아치형으로 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신비롭게 느껴져 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느낌을 안겨주고 있다.]
17:29~17:35 주교좌 답동성바오로성당을 사진촬영
17:35~17:40 인천 중구 개항로 63-2 번지에 있는 애관극장으로 이동
[애관극장은 대한민국에서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역사 깊은 극장이다. 1895년 조선인 부호 정치국은 경동 싸리재 쪽에 협률사라는 공연장을 설립해 큰 인기를 얻었다. 협률사는 1925년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의 ‘애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극장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60년 다시 문을 열었다. 한때 경동 일대는 ‘시네마 거리’라 불릴 정도로 인천의 영화 중심지로 번성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다른 극장들이 문을 닫는 상황에서도 애관극장은 살아남았고, 2004년에는 최신식 영사기와 디지털 음향 시스템을 갖춘 복합상영관(5개관)으로 재탄생했다. 지금도 최신 영화와 더불어 지역 영상 문화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기획 상영과 행사를 진행한다. 단순한 극장을 넘어 여전히 지역의 문화예술 공간으로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다. 애관극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면 애관극장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영화 <보는 것을 사랑한다>를 보는 것도 좋다.]
17:40~17:45 내리교회로 이동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67번길 3-1 번지에 위치한 대한민국 기독교 대한감리회 소속 교회이다.
정동제일교회와 새문안교회 등과 더불어 개신교 선교 초창기에 세워진 교회 중 하나로서 한국의 어머니교회로 불리운다.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당시부터 교육과 선교를 병행하며 개화기 시대 대한제국에 신문물을 들여오는 데 일조했다.
'내리'라는 명칭은 교회 설립 당시 지역명이다. 당시 주소는 인천부 부내면 내리였다. 세월이 흘러 도시화가 진행되고 행정구역명이 '리'에서 '동'으로 바뀌면서 현재의 '내동'이 된 것이다. 인근에 있는 성공회 내동성당의 명칭 역시 바로 이 '내동'에서 따온 것이다.
기존 예배당을 철거하고 1901년 12월에 벽돌로 십자형의 새 건물을 지었다가, 1955년에 그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58년 12월 22일에 신축 봉헌 후 한번의 개축을 거쳐 현재 모습의 선교 100주년 기념 예배당을 완공했다. 예배당이 야트막한 언덕에 있고 종탑의 높이가 꽤 높기 때문에 동인천 근방의 지역 어디서도 예배당 건물이 잘 보인다.
현재는 선교 100주년 기념 예배당과 2011년 신축한 아펜젤러 비전센터, 2013년 복원한 십자가형 웨슬리 예배당으로 총 3개의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1999년에는 사회복지기관 내리요양원을 설립하여 무의탁 노인들을 돕고 있다.
인근에 성공회 서울교구 내동성당과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성당이 있다. 정기적으로 두 성당과 합동 기도, 합동 연주회 등을 개최하면서 교회 일치 운동에 힘쓰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17:45~17:50 인천 중구 인현동 1-618 번지에 있는 동인천역 1번 출구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인천 차이나타운 안내도
인천 자유공원 지도
주교좌 답동성바오로성당 위치도
애관극장 위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