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사
신라 617년(진평왕 39)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했다고 전한다.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가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로 이름을 바꾼 뒤에 많은 승려가 주석했다고 하며 946년(정종 1) 선각국사(先覺國師)가 3차 중수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했고, 1555년(명종 10) 태감선사(太甘禪師)가 어명으로 중창하여 현재의 이름인 무위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최근까지 경내에 있던 목조건물은 극락전(국보 제13호)·명부전과 요사채뿐이었으나 1974년에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해탈문(解脫門)·분향각(焚香閣)·천불전·미륵전 등을 새로 지었다. 이밖에 경내에는 946년에 세워진 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507호)와 종형의 옥신을 가진 사리탑, 석탑형식을 한 부도가 있고 미륵전 안에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그리고 1955년 보수공사 때 무위사가 1476년에 크게 중창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극락전 안에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상 및 29점의 불화는 조선 초기 작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재 삼존불상과 후불벽화만 남기고 모두 벽화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다.
무위사 일주문
무위사 사천왕문
무위사 사천왕상
무위사 보제루
무위사 법당오르는 길
무위사 극락보전
국보 제13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의 단층 겹처마 건물로 되어 있다. 무위사에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1555년(명종 10) 4창할 때 건립된 것인데, 1983년 대량 상부를 해체 수리하면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을 통해 이 극락전만큼은 1430년(세종 12) 효령대군(孝寧大君) 등에 의해 건립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엇맞추어 쌓은 석단(石壇)에 갑석(甲石)만을 둘러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아 세웠으며, 기단은 앞쪽만 높게 쌓고 옆면과 뒷면은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세웠다
주좌(住坐)를 새기지 않은 주춧돌 위에 배흘림을 가진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머리와 주심포작을 짜올려서 가구를 결구시켰다. 기둥머리에는 2출목의 공포를 올려놓았는데, 바깥쪽 포의 끝은 제공(諸貢)처럼 되어 있고, 내포는 1장의 판으로서 파련(波蓮) 무늬를 새긴 운공(雲工)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가운데칸 양쪽 포 위에 놓고 대들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올려놓은 뒤, 그 위에 다시 파련대공(波蓮臺工)과 ㅅ자 솟을합장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이렇듯 가구구조(架構構造)는 2중량 구조로 되어 있는데, 건물 외부에서 보면 2종량 구조로 보이지 않고 두 고주(高柱) 위에 중종보만이 걸쳐져 있고 그밖에 창방ㆍ퇴보ㆍ장혀 등 작은 직선재로 측면을 간결하게 구성하였다.
무위사 경내
무위사 요사
무위사 괘불지주
무위사 극락보전 문살
무위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보물 제1312호
극락보전 불단 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으로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좌측(향우)에는 왼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한 채 보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을, 우측(향좌)에는 석장을 짚고 오른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는 지장보살상을 배치하였다. 모두 개금처리와 개채가 되어 있는데, 다소 미숙한 개금처리로 인해 표면이 거칠어졌을 뿐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닌 이 아미타불좌상은 연화대좌와 불신이 하나이며, 통견의 법의에 손은 하품중생인을 짓고 있다. 전반적으로는 고려 후반기의 단아한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미소가 사라져 근엄해 보이기까지 하는 둥글넓적한 얼굴에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와 처진 가슴, 간략화하고 정형화된 옷주름, 가슴 아래로 가로지르는 승각기의 평행 띠주름, 금구장식의 소멸 등 조선 초기 불상들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을 함께 갖추고 있다.
무위사 경내
무위사 극락보전
무위사 명부전
무위사 명부전내
무위사 경내
무위사 3층석탑
전남문화재자료 제76호
무위사 3층석탑은 전형적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된 석탑이다. 지대석은 여러 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 중식이 연결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데,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개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를 모각하고 2ㆍ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을 보였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벼운 반전을 보였다.
이 탑은 3층 옥개석과 1층 옥개석 일부에서 약간의 훼손을 입었으나 그 외의 부재는 완전한 상태로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비교적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탑의 조성연대는 선각대사 편광탑비의 조성연대(946년)와 동시대이거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고려 초기로 여겨진다. 높이는 396cm이다.
무위사 범종각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보물 제507호
극락보전에서 천불전 쪽으로 30m 정도 가다보면 미륵전 못 미쳐 남향으로 서 있는 비를 만나게 된다. 이 비는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 864~917)의 탑비(塔碑)로, 비명(碑銘)은 ‘고려국 고무위갑사선각대사 편광영탑비명병서(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幷序)’이며, 당시 태상(太上)인 최언위(崔彦撝,868~944)가 글을 짓고, 유훈률(柳勳律)이 썼다.
비문 끝에 ‘개운삼년세차병오오월경인삭이십구일무오입(開運三年歲次丙午五月庚寅朔二十九日戊午立)’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946년(고려 정종 1)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해는 대사의 입적 후 28년이 되는 해이다.
비문에 따르면 선각대사는 무주(武州) 출신으로 법휘(法諱)는 형미(逈微)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신라 헌강왕 8년(882)인 18세에 구례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 후 가지산 보림사 구산선문의 태두인 보조선사에게 찾아가 선법을 배웠다. 27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운거도응(雲居道膺)의 심인(心印)을 받고 효공왕 9년 (905)에 귀국하여 강진 무위갑사에 머무르니 이때가 대사의 나이 41세 때의 일이라 한다.
귀부와 비신, 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는 양각으로 뚜렷이 조각한 용두(龍頭)로서 여의주를 머금은 입은 투조되어 있다. 두 귀의 모습은 용의 귀와 같이 깃털이 날리는 듯 조각하여 사납게 표현하였고,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갑문을 정연하게 양각하였다. 비좌(碑座) 전후 2면에는 운문(雲文)을 조각하고 양측에 안상(眼象)을 각각 조각하였다.
비신 위의 이수(螭首)에는 3단의 받침을 복판연화문으로 장식하였는데, 이수는 상하 2석으로 겹쳐 쌓았으며 중앙에 방형의 전액(篆額)을 마련하고 있으나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이수 주위는 모두 반결 운룡문(雲龍文)과 반결 쌍용문(雙龍文)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며, 사실성을 띠고 있는 우수한 조각기법을 보이고 있다.
전체 높이는 406cm, 비신 높이는 250cm, 이수 높이는 56cm이다.
무위사 산신각
무위사 산신각내
무위사 미륵전
무위사 미륵전내
무위사 나한전
무위사 나한전내
무위사 천불전
무위사 천불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