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 너무 좋아서 평생 그 일을 하고
싶던 적 있으신가요? 여기 한평생 구두
만들기에 전념하여 명장 1호가 된
유홍식씨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그는 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는데요.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것이 최고의 삶이 아닐까요?
☞기술자가 대접받아야 선진국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 성수동구두타운
근처에 위치한 드림제화 대표 유홍식(70)씨는 서울시 구두 명장 1호입니다.
2014년 성동구는 ‘성동구 수제화 명장
선정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라 성동구
수제화 산업현장에서 수제화 숙련 기술을
보유한 기능인 중 명장을 선발했습니다.
장인정신이 뛰어나고 수제화 제조산업의
계승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죠. 당시 유홍식 씨는 명장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명장 공모에는
유씨 등 일곱 명의 쟁쟁한 후보들이 응모해 서류심사, 현장실기, 면접의 과정을 치렀죠.
☞수제구두의 매력은 맞춤형 디자인
6월 19일 성수동 드림제화를 찾았을 때
유홍식씨는 묵묵히 구두를 만들고 있었어요. 기성 구두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패턴과 문양이 섞인 화려한 구두가 특징이었죠.
유씨는 “내가 직접 디자인한 구두로,
여기서밖에 살 수 없다”고 강조했어요.
그는 “나만 만들 수 있다”는 데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죠.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성공한다고 말했습니다. 명장이 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본인이 좋아하고 미쳐야 가능하다”며 “구두 만드는 것이 재미있었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니 명장이 됐다” 고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수제구두를 찾을까요?
유씨는 “자신이 원하는 색깔과 모양을 가진 구두를 마음대로 고르기 위해서는
수제구두를 신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장인의 과거와 현재
그는 성격이 시원시원했습니다.
유씨는 70세가 되도록 평생 이 일에 매달린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았어요.
“10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는데, 집안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솔직히 공부하기 싫어서 무작정 상경했죠. 선배가 명동에서
구두를 만들고 있었는데, 배워보니 적성에 맞아
평생 하게 됐어요.”
전남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가 그의
나이 열세 살 즈음이었죠. 부모 입장에서는 반대가 크지 않았을까요?
“반대하셨죠. 하지만 적성이 맞으니 끝까지 하겠다고 이야기하자 부모님도 기술을
배워오면 신발가게를 열도록 도와주겠다며 손을 들었죠.”
평생을 매달린 손기술과 명장이라는 명성은 사업에 큰 도움이 되는 듯 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손님들이 가게를 찾아 자신에 맞는 구두를 신어보곤 했지요.
☞“한국인 손재주는 세계 최고”
사실 그는 ‘억대 매출을 올리는 서민 갑부’
이기도 해요. 그가 만든 수제화는 최소
40만 원이고, 특수한 세공법이나 희귀
가죽을 사용할 경우 100만 원이 넘는 것도 많아요. 새벽 5시에 출근해 저녁 7시에
퇴근하면서 하루 최대 여덟 켤레의 구두를
꾸준히 만들고 있죠. 유 씨가 만든 구두는
모두 그의 가게에서만 판매돼요.
유 씨는 “한국인의 손재주는 세계 최고다”
라며 “정책적으로 구두산업을 지원해 세계
일류 상품을 만들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기술에 대한 자부심은
더 대단했어요. 그는 과거 세계기능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수제화 부문을 3연패하자
다른 나라들이 참여하지 않아 수제화 부문이 없어질 정도로 한국인의 실력은
세계적이라고 강조했죠.
이렇듯 실력이 출중하니 기술 한국의 미래는 밝다는 것이 유씨의 생각입니다. 조금만
지원하면 된다는 부탁도 했죠. 어떤 지원이 가장 필요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서울시장이 직접 가게를 방문해 구두명장 인증패를
수여한 기억을 떠올렸어요. 경제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자긍심을 키워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죠.
☞대통령의 구두를 만들다
유 씨는 작년 말 갑작스러운 유명세를
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구두 여섯 켤레를 만들었기 때문인데요.
유씨는 “직접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 발
사이즈를 쟀다”며 “그전까지 낡은 구두를
신고 있어 놀랐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구두를 제작하자, 성수동 거리에서는 그를
‘구두 대통령’이라고까지 부르게 되었죠.
유홍식 장인은 나이를 먹으면 기술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기술을 배워 당당하게 살라’는 조언을 끝으로, 장인은 다시 구두를
만들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자신의 길에서 묵묵히 정진하는 기술자들이 존중받는 환경 속에서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더 밝아질 게 확실합니다.
(옮겨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