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6 다해 사순2주일
창세15:1-12, 17-18 / 필립3:17-4:1 / 루가13:31-35
예루살렘이 예루살렘다워지려면
지구상에 있는 나라 중에 ‘우리가 중심이다’라는 뜻을 국가이름으로 삼은 곳은 ‘중국(中國)’입니다. 유구한 역사와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문명을 ‘중심이며 화려하다’라는 뜻을 지닌 ‘중화(中華)’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동쪽사람들을 동이(東夷), 서쪽사람들을 서융(西戎), 남쪽사람들을 남만(南蠻), 그리고 북쪽사람들을 북적(北狄)이라고 경시하였습니다. 만리장성은 주변민족들을 배척하는 이러한 중국인들의 자문화중심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난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어에서 오랑캐를 뜻하는 ‘바바리언(Barbarian)’이란 말도 희랍문명을 자부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주변 야만인들을 ‘바르바로이(Βάρβαροι)’로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처럼 문명의 중심을 자부하는 이들이 갖고 있는 오만함과 배타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문명의 역사를 좀 더 깊이 탐구해 보면, 그러한 태도는 결국 스스로 쇠락의 길을 자초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질적인 문명과 만나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수용했을 때 문명은 융성했습니다. 예컨대, 중국의 수많은 왕조 중 가장 화려한 문화를 누렸던 당나라는 당시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도시였던 수도인 長安(지금의 西安)의 규모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서양의 수많은 문물과 사상이 교차할 정도로 부유했습니다. 그 당시 당(唐)은 타문화에 대하여 폐쇄적이지 않고, 전세계와 연결된 개방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중화문명이 폐쇄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깔보던 이민족한테 지배를 당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루가 13:34-35)”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묵상하며 예루살렘이 예루살렘다워지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단지 종교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큰 차원으로 보면 설교 서두에서 언급한 문명의 역사에서부터 작은 차원으로는 소규모 집단 내지 한 개인의 측면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예루살렘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루가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수난, 부활, 발현, 승천이 일어난 곳일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이 중요한 곳이기에 예수께서는 여우 같은 헤로데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하며 피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하고 전하여라. (루가 13:32)”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마친다’라는 말은 그리스어 ‘텔레이오(τελειόω)’를 번역한 말로 ‘성취하다’, ‘끝내다’를 의미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무엇을 성취한다는 걸까요? 그 실마리는 이 말씀 앞부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오늘과 내일’은 ‘날마다’라는 의미이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준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갈라놓고 고립시키는 것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인간을 다시 하느님과 연결시켜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이 구원이란 말을 라틴어로 salus라고 하고, 이 말에서 파생된 말이 ‘구원(salvation)’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선사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내 일을 마친다는 뜻은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병들어 있는 인간을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와 건강하게 만드는 일을 완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할 곳으로 예루살렘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땅이며, 그 곳에 하느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부 하느님은 오래전부터 예언자들을 보내셨고, 마침내 성자 예수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당신이 ‘보내신 사람들(사도 13:34)’, 달리 번역하자면 ‘파견된 자들’을 지속적으로 보내셔서 하느님과 인간 간에 화해와 일치의 끈을 잇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이자 궁극적으로는 만 백성의 종교적 중심이 될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탄식하시며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루가 13:35)” 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인 서기 70년 유대인 저항세력을 진압한 로마군대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그 후로 유대인들은 그 땅에서 아주 오랫동안 추방당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이 본래의 역할을 망각했을 때, 예루살렘은 그 중심적 지위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일반 역사이건 교회 역사이건, 우리는 중심이 그 중심역할을 망각할 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중심이 중심역할을 잘 하기 위해선 어떠해야 하나요? 우선 오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만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시키며, 심지어는 자신만을 위해 상대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헤로데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대사제 집단의 오만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죽였고, 예수님을 죽였으며, 나중에는 성령으로 탄생한 교회 신자들을 죽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겸손한 모습으로 회개했다면, 예루살렘은 하느님 백성의 중심지요, 보금자리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폐쇄적이고 경직된 태도를 버리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폐쇄성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구원의 메시지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으로 태어난 교회의 메시지마저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중심은 더 이상 유대인들이 아니라 세상 만민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특정집단 혹은 특정민족만의 종교에서 온 세상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은 더 이상 핏줄개념이 아니라 영적개념으로 넓혀졌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러한 태도를 지닌 자에게 하느님이 어떤 복을 주시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손이 없다고 불안해하는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밤하늘을 보여주시며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창세 15: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이 약속을 믿고 소망했습니다. 그렇지만 어찌 보면 아브라함이 비록 그 약속을 믿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설사 그가 불완전하게 알았다 하더라도, 그는 미래의 불확실성 마저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겼습니다. 그러한 그의 겸손과 열린 태도가 있었기에, 그는 하느님과 단절되지 않고 그 섭리를 따라 인생의 여정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에 대하여 ‘믿음의 선조’라고 칭하면서 신앙인들의 중심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구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서로 가까워지고, 교류도 빈번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입고, 먹고, 사용하는 물건은 더 이상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 이곳저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물망처럼 온 세상사람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한 가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가족 간에 내가 중심이고 너는 오랑캐라고 한다면, 그 가족은 불화로 인해 서로 분열과 고립이 되어 결국에 가서는 해체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한탄하신 것처럼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려는 것을 방해하는 행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하느님이 당신 자녀를 당신의 날개 아래로 모으려는 이 일에 함께 하는 자들입니다. 그럴 때 나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중심으로 축복받을 것이고, 우리 공동체는 그 중심이 되는 예루살렘 성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 날개 아래로 불러모아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