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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본문 읽기
Ⅱ.『니코마코스 윤리학』 제 2권
201111881김웅장
서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탁월성은 품성의 탁월성과 사유의 탁월성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는 품성의 탁월성들을 『니코마코스 윤리학』제 2권에서 검토하고 있다.
비록 이 탁월성들은 이론적으로는 분리 가능한 것들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들 중의 어느 하나의 소유와 활용은 그것들 모두의 소유와 적절하게 통합된 활용을 요구하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품성의 탁월성’이란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상기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품성의 탁월성의 영역은 도덕적인 탁월성의 영역보다 훨씬 넓은 것이다. 그렇다면 품성의 탁월성들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에 관해서 칭찬하는 데 사용되는 가장 강력한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반대한다. 그는 품성의 탁월성들이란 어떤 사람을 좋은 자로 만들고 자신의 기능을 잘 실행하도록 만드는 칭찬받을 만한 특성들이라고 생각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제2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표는 품성의 탁월성들의 본성을 상술하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2권 제1장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방식으로 품성의 탁월성들이 획득되는지 고찰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는 그것들이 습관을 통해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그는 “품성의 상태는 그 품성 상태들과 유사한 활동들로부터 생긴다.”
즉, (V1) 탁월성들은 습관을 통해서 얻어진 품성 상태이다.
왜 그것들을 습관이 라고 간주하는 일은 오류가 되는지에 관한 두 가지 이유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습관들은 구체적인 행동이다. 탁월성들은 특유한 행동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두 번째로 ‘습관’이 라는 용어는 때때로 행위자가 아무 생각 없이 그 행위를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탁월성들이 ‘무심코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있고 또한 그것을 결정했다면,오직 그때에만 그 사람은 탁월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탁월성들은 품성의 습관화된 상태들이지만 그것들 자체가 습관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2가지 대안적 이론들을 거부하면서 탁월성의 기원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a)탁월성은 ‘본성적인 것’ 즉 선천적인 것이다.
(b)탁월성은 가르쳐진다.
그는 (a)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선천적인 것은 습관화를 통해서 다른 조건 속에서 발생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b)에 대한 반박을 제시하지 않는다. (b)는 우리는 후견인들에 의해서 ‘좋은 행동’을 교육받는다는 상당히 강한 직관적 통찰과 갈등을 빚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버닛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습관화란 학습의 대안적인 방식들을 나타내는 귀납,지각 등등과는 구분되는 학습 방법을 구성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탁월성의 소유에 필요한 특수한 종류의 배움이 존재하며 습관화는 바로 그런 종류의 배움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오직 탁월성을 갖춘 행동들을 함으로써만 탁월성을 성취할 수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2권 제2장
탁월성을 갖춘 행동들의 본성을 검토할것이다.
여기서 세가지 예비적인 논점들을 검토할것이다.
첫 번째 논점은 올바른 행동들은 ‘올바른 이성’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논점은 탁월성을 갖춘 행동들에 관한 설명에서 우리가 성취하려고 목표한 구체성의 정도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기대해야만 하는 개별적인 행동들에 관한 이론이 실천적 문제들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보다 심지어 ‘좀 더 부정확’하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논점은 “모자람이나 지나침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게끔 되어 있는”상태들이라는 점이다.
이 사상의 명백한 목적은 탁월성을 갖춘 상태를 결함 있는 상태로부터 구별하는 일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2권 제3장
"어떤 사람의 실제 행위에 수반되는 즐거움과 고통을 그 사람의 품성 상태의 표시로 간주해야 한다. 만일 무서운 것들을 견뎌 내고 그런 일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 혹은 적어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다“라는 주장으로 시작된다.
즐거움과 고통은 단지 탁월성의 획득에 인과적으로 필요한 것들일 뿐만 아니라 탁월성이 활용될 때 획득되는 상태의 구성 요소들이라는 점이다.
탁월성의 소유에 관한 다음과 같은 필요조건을 그가 상술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V2) 만일 어떤 사람 P가 탁월성V를 나타내는 행동들을 수행하면서 즐거움을 얻는다고 할 때 또는 최소한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고 할 때, 오직 그때에만 그는 그 탁월성V를 소유하고 있다.
앵크라테스 즉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간주한다. 비록 그들은 탁월성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좋은 것을 행하기 때문에 확실히 칭찬받을 수 있다.
탁월성을 갖춘 행동의 수행은 탁월성을 갖춘 사람의 선호도와 갈등을 빚는 어떤 것이 아니다. 사실상 그 행동은 그 사람의 선호도의 표현이다. 따라서 그 사람은 어떤 관점에서는 고통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그 행동은 그 사람의 진실한 선호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탁월성의 발휘가 즐겁다는 것은, 이미 그 목적에 도달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모든 탁월성에 타당하지 않다”
이 주장은 탁월성을 갖춘 행동들의 수행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승인이다. 고통스러운 행위를 유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탁월성을 갖춘 사람이 지향하고 있는 목적의 고귀함이다.
“그러한 행동들은 그것들에 대한 보상이 단순히 돈보다는 명예이기 때문에 고귀한 것이다.또한 그 유익함이 죽음 이후에 향유되는 행동들도 고귀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귀한 행동들은 존경할 만한 것이며 고상한 것이다. 따라서 “고귀함을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는 표현은 존경할 만한 것, 고상한 것 또는 올바른 것을 위해서 행동하기와 유사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우리는 잠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2가지 문제들을 직면하게 된다.
첫 번째로, 탁월하게 행동하는 사람의 심리적인 내용은 고귀함과 관련된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일은 수긍하기 어렵다.
두 번째로, 우리는 결국 에우다이모니아를 위해서 행동하지 고귀함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했다.
첫 번째 물음과 관련해서 탁월성을 갖춘 행위자는 행동할 때 마음속으로 “X를 행하는 일이 고귀하기 때문에 나는 X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일 어떤 사람이 탁월성을 갖춘 사람에게 전형적인 이유들 때문에 행동한다면 그는 고귀함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다.
두 번쨰 물음과 관련해서 탁월성과 에우다이모니아의 관계를 회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고귀한 것을 위해서 행동한다면, 그는 탁월하게 행동하는 것이고, 만일 그가 탁월하게 행동한다면, 그는 탁월하게 행동하는 것이고, 만일 그가 탁월하게 행동한다면, 그는 에우다이몬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일 어떤 사람이 즐거움을 주는 탁월성을 갖춘 행동들을 한다면 그는 탁월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논증을 살펴본것이다.
(1) 탁월성은 행위 및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
(2) 행위와 감정은 즐거움 또는 고통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3) 탁월성은 즐거움 및 고통과 관련되어 있다.
지적해야할 논점.
첫 번째 논점은 결론 (3)이 (V2)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탁월성은 (V2)에서 기술된 방식으로 즐거움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진술되지 않았다.
두 번쨰 논점은 전제 (2)가 명백하게 그릇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모든 행동들이 즐거움 또는 고통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비록 전제 (2)가 참인 전제가 되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전제 (1)과 (2)는 결론 (3)을 함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V2)의 의미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는 돕는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지 아니면 마지못해서 그렇게 하는지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왜냐하면 (V2)는 참이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타인의 행동들에 관한 우리의 인식에는 관련이 없는 것이 될 수 있다.
탁월성을 갖춘 사람과 엥크라테스(자제력이 있는 자) 사이에는 확실하게 명백한 차이들이 존재하게 된다.
탁월성을 갖춘 사람은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한다. 엥크라테스는 최소한 어떤 의미에서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자신이 선호하는 것들을 좌절시키는 일을 하지 않거나 또는 그런 일을 하는 것에 분노할 수 있다.
따라서 엥크라테스보다는 탁월성을 갖춘 사람에게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확실히 좀 더 쉬운, 즉 수고가 덜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탁월성을 갖춘 사람의 영혼 속에 아무런 갈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차이이거나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즐거움을 동반하거나 또는 동반하지 않는 행동들은 행위자가 무엇을 귀중한 것 또는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가에 대한 판단들을 얼마만큼 내포하느냐에 따라 필자는 탁월성을 갖춘 사람과 엥크라테스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강한 욕구를 갖는 것은 그 다른 어떤 것이 좋은 것이라는 판단을 함의하고 있다.
이제 어떤 사람의 감정들과 행위에 대한 판단들은 적어도 때로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나는 받아들이게 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 2권 제4장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기술과 탁월성 사이의 좀 더 일반적이고 중요한 차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기예의 산물들은 자체 성질들에 근거해서 훌륭하다고 평가되지만,
탁월성의 경우에는 그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 행동이 올바른 것과 일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행동은 또한 어떤 사람의 품성의 올바른 상태의 표현이 되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통해 이 차이를 진술하고 있다.
(V3):만일 (ⅰ) 어떤 행위자가 자신이 하는 일을 인식하고 있다면,(ⅱ) 그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그 행동 그 자체를 위해서 결정한다면, (ⅲ) 그가 품성의 견고하고 안정된 상태로부터 자신의 행동을 수행한다면, 그 행위자는 탁월성을 갖춘 상태로부터 행위하고 있는 것이다.
(ⅰ) 이 탁월성과 기예의 경우 모두에 해당하지만, 그것은 탁월서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ⅱ)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탁월성을 갖춘 사람은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고귀함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ⅲ)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일 어떤 사람이 영구적인 품성 상태를 통해 행동할 때만 오직 그때만 그가 탁월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는 유사한 상황에서 탁월성을 갖춘 사람이 가진 품성 상태를 동일하게 갖지 않고서도 그가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2권 제5장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은 ‘품성 상태’라는 유개념의 종개념이 된다고 주장한다.
(V4) 탁월성은 품성 상태이다.
논증을 한번 보자.
(A) 탁월성은 감정이거나 능력이거나 상태이다.
(B) 탁월성은 감정이 아니다.
(C) 탁월성은 능력이 아니다.
따라서
(D) 탁월성은 품성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 능력, 품성 상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이 장을 시작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에 공포,신뢰,사람과 같은 감정뿐만 아니라 욕구 또는 욕망도 함께 포함시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능력’이란 말을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우리가 감정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담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품성 상태’는 ‘가짐’ 또는 ‘소유함’을 의미하며 때때로 ‘경향성’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품성 상태란 그것에 따라 우리가 감정들에 대해 제대로 태도를 취하거나 나쁘게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품성 상태는 감정의 어떤 경향이며 따라서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에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B)에 관해 네 가지 논증들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는 어떤 감정들을 가지고 있기때문이 아니라 탁월성 또는 열등감의 소유 때문에 훌륭한 사람 또는 나쁜사람이라고 말해진다.
두 번째,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감정 때문에 칭찬을 또는 비난을 듣는 것이 아니라 탁월성과 결함의 소유 때문에 칭찬을 듣거나 비난을 듣게 된다.
세 번째, 우리가 가진 감정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탁월성이 곧 결정이며 또는 적어도 어떤 결정을 함의하고 있다.
네 번째, 어떤 감정을 경험하는 것은 ‘움직여지는 것’인데 탁월성의 소유는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품성 상태를 있게 되는 것’이다.
(B)논증에 반해서 어떤 사람이 단순히 어떤 감정을 가진 것에 관해서 그를 칭찬할 수 있다.
(C)논증에 반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관대함에 의해서 움직여지며 또한 관대함이 탁월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탁월성에 의해서 움직여진다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어떤 사람이 감정을 소유할 때는 움직여지지만 탁월성을 소유할 때는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2권 제6장
여기서는 ‘중요 이론’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모든 탁월성은 그것이 무엇의 탁월성이건 간에 그 소유자를 좋은 상태에 있게 하고, 그것의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한다.”
인간의 탁월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우리의 기능을 잘 실행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탁월성이 되는 감정과 욕구의 경향은 중간적인 경향이다.
p99(1106A28-34)의 주장.
이 구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것이 중간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의미를 찾아내고 있다.
(a) 대상에 있어서 중간과 (b)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중간.
(b)의 중간은 품성의 탁월성들의 종차이며 또한 이것은 기예의 특출함에 의해서 확증된다고 생각한다.
p100(1106b16-23)의 주장.
탁월성은 두 대립적인 극단 상태 사이에 놓인 품성의 중간 상태이다.
이 구절에 나타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런 경향의 본성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 속에 위치시키는 나의 감정과 욕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에 위치시키는 판단에 복종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다양한 사유, 감정, 욕구의 경향들이 존재한다고(확실히 매우 올바르게) 생각한다.아리스토텔레스의 논점은 이 사유, 감정 욕구의 몇 가지 경향들은 다른 경향들보다 좋은 것이며 또한 가장 좋은 상태는 중간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품성의 중간 상태를 가진 사람은 에우다이몬적인 삶의 구성요소로서 어떤 좋은 것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삶 속에서 좋음의 가치와 중요성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탁월성은 합리적 선택과 결부된 품성 상태로, 우리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중용에 의존한다. 이 중요은 이성에 의해,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규정할 그런 방식으로 규정된 것이다. 중용은 두 결함, 즉 지나침에 따른 결함과 모자람에 따른 결함 사이의 중요이다”
탁월성은 ‘합리적 선택과 결부된 품성 상태’라고 주장할때의 의미.
비록 탁월성은 습관화된 품성 상태이지만, 그것들 자체는 습관이 아니다.
습관은 '분별없이' 또는 ''사고하지 않고‘ 실행될 수 있다. 그러나 탁월성을 갖춘 행위가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 행동하려는 가장 최선의 일에 관한 행위자의 판단의 표현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지나치게 정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따라서 중용 이론은 ‘개념적으로 공허하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2권 제8장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과 그것에 반대되는 결함 사이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탁월성마다 두 개의 대립적인 결함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인생함이라는 단일 결함에 반대되는 단지 하나의 결함이 존재한다는 견해를 거부하고 있다.
“어떤 극단들의 경우에는, 가령 무모함의 경우 용기에 대해, 또 낭비의 경우 관대함에 대해 그러하듯이 중간의 것에 대한 일종의 유사성이 보이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관대함과 낭비는 그것들의 명백한 유사성 때문에 함께 섞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대안적인 설명을 두 가지 이유에서 거부하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양 극단 중 하나가 중간에 더 가깝고 더 비슷하므로, 우리가 이 가까운 극단이 아니라 그 반대 극단을 더 대립적인 것으로 놓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시각이 이 문제들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2권 제9장
아리스토텔레스는 중간적인 품성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천적인 충고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논점은 탁월성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탁월성은 성취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중간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우리에게 세 가지 실천적 충고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충고는 우리는 중간 즉 탁월성을 겨냥하는 사람은 먼저 그것에 더 대립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충고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자신의 경향성들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을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충고는 우리가 모든 것에 있어서 즐거움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연구를 위한 물음들
1. 품성 상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을 기술 또는 기예와 비교하는가?
3. 중용 이론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을까?
4.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고 있는 품성의 탁월성을 갖춘 상태들을 기술한 목록은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품성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가?
5. 그 목록에서 빠진 품성 상태로 기술될 수 있는 다른 것들이 존재하는가?
논평
제 2 권을 읽으면서 윤리적인 내용이 많이 있어서 어느정도 공감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계속 읽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성의 대한것들은 개념들은 난해하고 너무 애매하고 기준이 없다.
또 거기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설명도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과연 이러한 것들이 후세들에게 제대로 교육되고 가르칠수나 있었던것인가?
최고 좋음은 무엇인가? 에우다이모니아가 무엇인가? 그리고 탁월성은 또 무엇인가?
영혼,이성,비이성,품성의 탁월성,사유의 탁월성, 품성 상태, 습관, 자연적 탁월성,직관적 통찰,엥크라테스,고귀함,고상함 ...
이러한 것들은 너무 개념적으로 공허한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 이론들은 현실성이 떨어지고 실천적으로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한다.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표는 탁월성의 획득과 관련된 실천적인 조언을 제공하는 일이라고 말하는데, 이것 또한 가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가정을 해버리다니?? 또한 이러한 가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내용을 가르칠때 그의 청중들은 잘 양육되었고 논의되고 있는 탁월성을 이미 획득했기를 가정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잘 양육되었다라... 너무 편파적인건 아닌가?
만약,만약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대로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은 바로 이상적인 세계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것인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이러한 삶들 자체가 행복의 의미를 규정해 버린것도 참 의문이 든다. 여러가지 이론을 들어 최고 좋음에 대해 설명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은 한 인간으로서 좋게 생각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이다. 진정한 최고 좋음, 행복, 탁월성은 아무도 모른다. 자신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차차 깨달아가는것이다. 단지 이렇게 책으로 모든 진리를 알수 있다는 것 자체는 인간의 크나큰 욕심이다. 열심히 부딪히고 깨치고 인생의 참 맛을 알면서 살아가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이 참된 행복은 스스로 알기바란다. 자신의 행복은 자신이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우리 자신 자체도 모르는데, 행복에 관해서 알려고 하는 그 자체가 모순적이다. 그래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최고 좋음에 대한 생각들은 참 신선했고 또한 비판받을만할 가치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