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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거당 내 만권당엔 1만권의 책 비치 “전국의 문인·학자 토론의 場” ■ 광거당 뜰 안의 대숲 ‘운치’ 석촌·추사 편액 걸려… 사극촬영·공연장 활용 보기만 하는 古家 아닌 ‘즐기는 곳’ 발상 전환 ■ 수백당 곳곳에 거북 문양 눈길, 우당·위창·심재 등의 뛰어난 편액 눈길… 송덕비 길가 안 세우고 마루 밑에 그냥 둬 수봉 선생 인품 짐작 옆 공터엔 문중서고도
숲과 꽃들이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풍요롭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같다. 대구에는 팔공산과 비슬산이라는 큰 산이 있어 봄철에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필자도 주말에 연이어 비슬산 자락을 찾았다. 현풍의 대니산 자락과 비슬산 자락의 옥포 용연사 계곡을 거닐었고, 화원의 인흥마을에 자리한 남평문씨 세거지(이하 세거지)를 찾으면서 용문사와 화원자연휴양림을 잠시 거닐었다. 얼마전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 남평문씨 세거지에 자리한 광거당과 수백당(일명 수봉정사)을 답사하였다. 세거지는 인수봉 아래 한옥촌을 이루고 있다. 건물마다 사람이 실제 생활하고 있고 문중에서 잘 보존하고 있어 전국적으로 많은 이들이 답사하는 곳이다. 대구시티투어 버스가 다녀가기도 한다. 필자도 이미 여러 번 이곳을 방문했던 곳이라서 익숙한 편이지만, 갈 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볼수록 정겹게 느껴지는 멋진 곳이다. 세거지는 널리 알려진 곳이어서 찾아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화원읍에서 비슬산 방향으로 골짜기를 향하면 들판이 나오고, 본리 마을 입구 왼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 방천에는 수령이 오래된 버드나무가 여러 그루 서있고, 왼편 논가에 마을을 수호하는 상징물 같은 탑 모양의 돌무더기가 있다. 세거지 마을은 9채의 주거공간과 재실 2곳, 문고 2곳 등 크고 작은 60여채의 건물들로 짜여 있다. 일일이 답사하여 모두 소개하려면 원고량이 많아지기에, 간략하게 수백당과 광거당, 인수문고·중곡서사·거경서사를 중심으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수백당(守白堂) 수백당은 세거지의 중심에 위치한 건물로 1936년에 지은 건물의 당호이며, ‘결백을 지키는 집’이란 의미다. 수봉 문영박(1880~1930) 선생을 추앙하기 위해 수봉의 아들 5형제가 합심하여 세운 건물이다. 수백당은 마을 정면에 위치하여 방문객을 맞이하거나 문중 모임, 공사간의 모임을 가질 때 사용하는 주요 건물이다. 수백당 왼편에는 언덕처럼 흙을 쌓아 만든 석가산(石假山)에 전나무와 소나무, 매화나무, 대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가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당의 소나무 아래에는 자그마한 돌에 재미있게 새겨진 거북 문양이 있고, 대문의 빗장도 거북 모양으로 달아 두었다. 아마도 집을 지을 때 실용·장식성과 함께 거북의 상징성을 떠올리면서, 거북처럼 오래도록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으로 여겨진다. 중앙에 마루 2칸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고, 우측면 마루는 전면의 마루보다 한자 반 정도 높게 하고 측면에 난간을 두어 누마루 형식을 취한 독특한 구조이다. 수백당에는 여러 개의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어 건물의 격조를 높이고 있다. 사람의 이름을 지으라고 하면 함부로 짓지 못하듯, 건물의 이름도 되는대로 이름하여 걸어두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세거지 건물 곳곳에 걸려 있는 수많은 당호와 편액은 필자에겐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실제 작년에 이곳의 편액과 주련을 탁본하고 자료집을 만들면서 당대 편액을 건 주인의 성력(誠力)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현재 걸린 당호 글씨는 우당(愚堂) 유창환(兪昌煥·1870~1935)이 썼으며, 예서체로 결구미가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예전에는 오세창 선생이 쓴 ‘수봉정사(壽峯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그 외의 편액으로, 중국 명나라 때 서예가인 문징명(文徵明)의 글씨로 된 사백루(思白樓)와 이청각(履淸閣), 영남의 거유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이 쓴 수백당, 위창 오세창이 쓴 ‘경유당(敬遺堂)’, 추사의 글씨 ‘쾌활(快活)’이 걸려 있고, 기둥에도 주련 4폭이 걸려 있다. 수백당 마루 밑에 작은 비석이 있다. 후일 답사하는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비는 수봉의 송덕비다. 송덕비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길가에 세워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비는 세워져 있지 않고 마루 밑에 그대로 두게 된 사연이 있다고 한다. 당시 인흥에 출입하던 행객들이 어른의 인품과 덕행에 감화되어 돌아가시던 해에 세운 비석이다. 그러나 병석에 있던 수봉이 알고 즉시 철거하게 했다고 한다. 비석의 내용에 어른의 인품이 잘 나타나 있다. ‘의로써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참된 의가 아니며, 인으로써 명예를 구하는 것은 참된 인이 아니다. 도모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인의를 행하셨으니 이분이 바로 만권당 주인이 아니겠는가(以義謀利者非眞義/以仁要譽者非眞仁/不謀不要而爲仁義/是萬卷堂主人耶)’ ◆광거당(廣居堂) 광거당은 세거지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1910년에 건립하여 후손의 교육장소로 사용되고, 선비 강론의 집합소로 널리 활용되었다. 당의 규모도 크지만 만권의 전적을 소장하여 국내의 많은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광거당의 당호 명칭은 맹자의 ‘천하의 넓은 곳에서 거처한다(居天下之廣居)’에서 취하였다. 광거당이 들어서기 이전에 있었던 건물은 1834년 건립한 용호재(龍湖齋)였다. 1910년 용호재를 허물고 확장 개축하여 지은 재실이 광거당이다. 이후 광거당 안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萬卷堂)’이 설치됨으로써 전국의 수많은 문인, 학자들이 방문하여 학문과 예술을 토론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만권당을 건립한 인물은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1854∼1923년) 의 둘째 아들 수봉이다. 후은은 당대 경제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큰 재산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세거지의 주거공간과 만권당을 마련하는 기반을 이루었다. 수봉은 광거당을 중심으로 수만은 문사들과 교유했다. 심재를 비롯,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 이정(彛庭) 변정상(卞鼎相) 등이다. 광거당에도 많은 편액과 주련이 있다. 건물 정면에 석촌 윤용구가 쓴 광거당을 비롯하여, 대청에도 중국인 장건이 쓴 광거당 편액이 있으며, 누마루에는 추사가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으로 이루어진 집)’이라 적은 편액이 있다. 글씨는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예서체 글씨이며, 원본 글씨는 법첩으로 장정하여 따로 보관하고 있다. 지금은 연못이 메워지고 없으며, 뜰 안의 대숲과 담장 밖의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은 여전히 남아 운치를 자아낸다. 그 외에 장건의 고산경행루(高山景行樓), 수봉이 쓴 ‘아회(雅懷)’라는 편액과 아회의 뒷면에 추사의 글씨인 ‘서복(書福)’이 새겨져 있다. 광거당은 오늘날 사극이나 드라마 촬영장으로 애용되었고, 문중이나 외부의 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멋진 공간이다. 주위에 산재한 고건축물은 그저 바라만 보는 공간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광거당처럼 적극 활용되고 있는 공간으로 유지해가는 방향은 바람직한 일이다. ◆인수문고(仁壽文庫) 인수문고는 1981년 정부 보조를 받아 수봉정사 옆의 공터에 지은 문중서고다. 인수문고는 만권당의 서적과 규장각 도서를 포함하여 1만여권의 도서와 문중의 보물을 모아서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인수문고 옆에는 1993년에 지은 ‘중곡서고’가 있다. 중곡서고는 수봉의 손자인 중곡 문태갑(文胎甲)옹이 평생 모은 근·현대의 서적을 보존하고, 인수문고를 보완하기 위해 설치한 서고다. 거경서사는 두 문고의 서책을 열람·담소·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은 문씨가 17년간 접빈하며 독서생활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 문중이 개기(開基)하여 가문의 문호를 흥성시키고 유지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오랜 세월 문중 구성원들이 화합·노력하고 재력의 바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현재 후손들은 수백당과 광거당 뒤편 주거 공간에 살고 있다. 선조들이 이룬 위업을 지키기 위해 종중의 규약을 준수하고 선조의 덕목을 몸에 익혀 실천하는 모습이 부러울 따름이다. 동방금석문연구회장·능인고 교사 jiju222@paran.com
< 출처 : 전일주의 대구 古家를 찾아서 中에서..> * 서예세상 유적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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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하는 마음 전합니다...
상세한 해설 직접 보는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