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벗어 걸면서
강희근
옷을 벗어 걸면서 걸려 있는 셀 수 없는
옷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나의 입 대신,
나의 표정 대신,
또 나의 몸짓 대신,
나를 무언으로 말해온 옷들
넥타이들
무어라 나를 드러낼 수 없었던 사상,
그렇다 나의 사상을 분명히 표시해 왔을 것이다
때로 언어는 부실하기도 하고
표정은 이중적일 수도 있었을 것이나
옷은 언제나 단정히, 느낌에 따르지 않고
상황에 따르지 않는
보석같이 단단한 말,
말이면서 길이었을 것이다
한 번 꿰입으면 바꿔 입을 때까지
외길로 가는,
오솔길이든 소릿길이든 처음의 이름 바뀌지 않는
길이었을 것이다
옷을 벗어 걸면서 옷들도 족보가 있음을
본다
브랜드의 계통도 계통이지만
옷과 옷 사이 물결이 흐르거나 물결의 앞뒤에
맥박이 뛰고 있음을 본다
아, 가문의 족보는 가문을 지켜주는 울타리지만
내 옷들의 족보는 생리 같은 내 문화의 기록이다
내 취향의 법전이다
—《시와 시》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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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 1943년 경남 산청 출생.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연기 및 일기』『풍경보』『사랑제』『기침이 난다』『바다, 한 시간쯤』『깊어가는 것은』『물안개 언덕』『새벽 통영』등. 경상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