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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5. 묵상글 ( 성 야고보 사도 축일. - 처음엔 뜻이 엇갈렸을 지라도. 등 )
*** 05:32,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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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처음엔 뜻이 엇갈렸을 지라도 < 2023.07.25 05:20 >
“너희도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오늘 야고보 사도 축일의 복음을 읽으면서 떠오른 단어는 엇갈림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신 뜻과 야고보 사도의 따르는 뜻이 엇갈렸다는 뜻입니다.
뜻이 엇갈리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야고보 사도 간에 처음에는 뜻이 엇갈렸습니다.
주님의 뜻은 야고보 사도가 당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당신과 함께 고통의 잔을 마시게 되는 것이었는데
야고보 사도의 뜻은 꽃길을 가고 축배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고배를 마시는 것임을 알았다면 아예 따르지를 않았을 텐데,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마침내 뜻이 엇갈리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야고보와 요한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났을 때
주님께서는 적지 아니 실망하셨겠지만, 그것을 드러내시지 않고,
당신께서 마실 고배를 너희도 함께 마실 수 있겠냐고만 물으십니다.
이에 야고보와 동생 요한은 마실 수 있다고 호기롭게 대답하는데
주님께서도 너희도 마시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래서 그 예언대로 야고보 사도는 첫 번째로 수난하게 됩니다.
뜻은 엇갈렸지만, 운명은 엇갈리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야고보 사도가 자기의 뜻이 좌절되었을 때,
그제서야 자기 앞에 놓인 운명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고,
그때라도 엇갈렸던 자기 뜻을 주님의 뜻과 일치시켰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모범이 되는 점이고,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로 갈 때
나의 성공과 성취를 목적으로 갔다가도
그것이 주님 부르심의 참된 길이 아님을 알게 됐을 때
그때라도 주님과의 일치로 나의 목표를 바꾸는 겁니다.
우리도 야고보의 어머니처럼 수없이 청하고,
우리도 야고보처럼 수없이 주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마리아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창설자 마리 드 라 빠시옹의 말씀처럼
우리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고,
그래서 주님께 청원할 때 처음엔 성공과 성취를 주십사 청했다가도,
궁극적으로는 성공과 성취가 아니라 사랑과 일치를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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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7)
오늘은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곧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인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복음의 능력으로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입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온갖 환란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8-10)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했습니다. 곧 높은 자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와 아들들의 열망을 나무라시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청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곧 진정 청해야 할 바가 무엇이고, 진정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이며, 무엇을 먼저 행해야 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는 우리에게 높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이요, 으뜸인 사람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왕이 되고 싶다면 내 아내를 왕비로 대하고, 내가 왕비처럼 살고 싶다면 내 남편을 임금으로 받들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성인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여기고, 내가 예수님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예수님으로 바라볼 일입니다. 남을 무시하면 자신도 그렇게 무시당하게 되고, 남을 정당하게 대우하면 정당하게 대우받게 되고, 남을 존중하면 그만큼 존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곧 남을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자신도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불신 받을 것이요, 남에게 자비로우면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면, 필시 그도 나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뻔하고 당연한 이치를 알면서도 살지를 못합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며,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가 버릴 그 제자들을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닙니다. 혹은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곧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들어 올림’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높이는 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학원”(<규칙서> 머리말 45)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학교에서 ‘주님 섬기기’와 ‘형제 섬기기’를 배우는 학생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섬기면서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청하게 하시고,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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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보여주세요
“프란치스코성인은 가난을 상징했던 분이었고, 평화를 대변했던 분입니다. 피조물을 사랑하고 돌보던 분이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늘의 우리에게 위대하게 보이는 것은 교회가 가난해지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의 정신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하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인이 보여준 겸손과 봉사의 모습으로 교회를 이끌고자 교황 이름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하셨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신 후 추기경단 앞에서 순명을 서약받았는데 교황좌에 앉아서 받은 것이 아니라 추기경들이 서 있는 자리로 내려와 선 채로 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 베드로광장에 모인 신자들 앞에 나타나 그들에게 목례로 인사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황금색 망토를 걸치지 않으셨고, 빨간 구두를 새로 마련하지도 않으시고 평상시 신던 검은색 구두를 신으십니다. 방탄차를 타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서로에게 소통하려면, 가림막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방문 중에도 한국에서 만든 경차를 타셨고 꽃동네에 오셨을 때는 거창하게 준비된 의자를 마다하고 평범한 일반의자에 앉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출세하신 그분은 세상 것을 누리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 삶이 끝까지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존경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존경을 권위에서 오기보다는 권력에서 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존경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 권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권력을 소유했던 우리 역대 대통령이 얼마나 존경받고 있나요?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이 권력을 추구했다면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을까요? 지금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줄서기를 잘하고, 청탁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벌써 치맛바람이 불었나 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도 불쾌하게 여기며 화가 나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도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생각했든, 그 형제들의 무례에 화가 났든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7-28)고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속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스승 예수님께서 몸소 섬기는 삶으로 본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그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상대로부터 대접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며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높이 오르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더 많이 낮아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이 아니라 그야말로 교종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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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랍장의 손잡이가 떨어져서 ‘순간접착제’로 붙여 보려고 하였습니다. 성격이 급하다보니 접착제가 손가락에 묻었습니다. 떨어진 손잡이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손에 묻은 접착제를 떼어내려고 하였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저 같은 분들이 많았는지 손에 묻은 접착제를 떼어내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식용유, 소금, 마가린, 세제, 비누, 아세톤’을 이용하는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하려면 일회용 장갑을 끼고 하는 것이 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손에 묻은 순간접착제는 불편하기 때문에 빨리 떼어내야 하지만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의 관계는 순간접착제로 붙이듯이 계속 끈끈하게 이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관계’에 금이 가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것 중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소감’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감사와 찬미를 드렸으면 좋은 열매를 맺는 성지순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평과 비난이 함께했으면 나쁜 열매를 맺는 성지순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았지만 불평과 비난의 마음이 있었던 분들 중에는 제가 그분들을 향해서 글을 썼다고 오해 하였습니다. 오해가 풀려서 웃음으로 만났지만 처음에는 저도 좀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3년 동안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권위에 놀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그 무엇으로도 떼어 놓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도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는 ‘욕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욕망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그 욕망을 떨쳐 버리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재물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겸손의 길만이 우리를 하느님과 더욱 강하게 묶어 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크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모두 뿔뿔이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반석’이라고 하였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던 베드로도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둠을 이기는 것은 작은 불빛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오직 ‘성령’의 빛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이제 용기를 내서 다시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니 두려움은 ‘담대함’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환난도, 박해도, 칼도, 죽음도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야고보 사도는 ‘욕망’을 버리고 ‘겸손’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두려움’을 버리고 ‘담대함’으로 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습니다.
왼손에는 겸손을 들고, 오른손에는 담대함을 들고 우리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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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런 장담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몰라서라고 우리는 말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도 예수님 앞에 장담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 하겠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화내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장담은 한순간 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죄와 같은 잘못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 봐 나는 안 돼, 나는 예수님과 약속한 것을 또 어겼어, 나는 죄인이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죄는 누가 만든 것이지요? 누가 그런 올가미를 놓았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의 장담이, 약속이 덫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책하고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제일 좋아하는 이들은 바로 악마들, 유혹자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은총을 허락하신다면 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힘을 얻고 당신에게 안식을 얻는다면 저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런 말 들어 보셨습니까? ‘하느님은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를 지어주신다.’라는 말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과 함께 이 십자가를 지고 가겠습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짊어지고 갈 수 있도록 자만이나 교만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세상 모든 좋은 것을 얻으려면
두려움은 적게, 희망은 많이
푸념은 적게, 호흡은 많이
미움은 적게, 사랑은 많이 하라.
그러면 세상 모든 좋은 것이 당신 것이다.
-스웨덴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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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금 혹시 자신에게 바꾸고 싶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바꾸고 싶은 것이 많은데 경제적인 부분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못 바꾼다면 이런 경우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바꾸고 싶습니까? 차를 바꿀까요? 집을 바꿀까요? 고급스러운 명품 옷과 비싼 보석류? 혹시 자기 외모를 바꾸겠다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이 제일 먼저 바꾼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부분이 참 재미있습니다. 글쎄 로또 당첨자들이 제일 먼저 바꾼 것은 자기 배우자라고 하네요.
로또에 당첨된 후 배우자와 헤어지고, 몇 달 안에 직계 가족과 의절하고, 친구들과도 연을 끊는 것이 순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되면 ‘불신의 형벌’을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을 멀리하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쾌락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결국 고통스러운 결말을 맞이하고 맙니다.
불신하게 되면 그 어떤 사람과도 함께할 수 없습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인데도 돈의 유혹 속에서 사람에 대한 의심이 더 커져서 함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는 있을까요?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된 보이는 인간을 멀리하는데, 보이지 않는 주님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야고보 사도의 어머니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머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세상의 권력을 탐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세상의 권력처럼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권력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지요.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니, 동고동락했던 동료인 제자를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겸손한 사람만이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갖출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섬기는 삶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더 나아가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맘껏 누리는 유일한 방법은 이 믿음 안에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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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꿈꾸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칼 샌드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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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섬김의 여정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라.”(시편126,5)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이 참 좋은 위로가 됩니다. 우리 말이 참 좋습니다. 번역하면 이 어감을 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라 사람입니다. 사랑, 사람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또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은 ‘섬기다’의 섬김, ‘배우다’의 배움입니다. 봉사와 공부보다 정겹고 그윽한 어감의 섬김과 배움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복음의 사람입니다.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합니다. 마산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녀원 정문에 붙어있는 명칭이 더 좋습니다. 학원이 아닌 배움터라는 표현이 정답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
평생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에서 주님을 섬기고 형제를 섬기는 일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평생 섬김의 배움터에서 평생 섬김의 학인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수도형제들 하나하나의 삶이 섬김으로 요약될 정도로 각자 소임을 통해 섬김의 삶을 실천하는 섬김의 여정을 살아가는 섬김의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수도형제들에게 감동하고 배우는 것도 각자 일터에서 섬김의 책무에 지극히 충실한 점일 것입니다. 역시 섬김의 여정에서도 우리는 기도와 사랑에서처럼 여전히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영성의 잣대입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환대, 섬김의 축복, 섬김의 기쁨, 섬김의 찬미, 섬김의 감사,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리더십등 참 기분 좋은 섬김이란 말마디입니다. 궁극의 섬김의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주님 사랑의 표현이 섬김이요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깁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 영성뿐이요 파스카 영성이 그대로 표현되는 종과 섬김의 영성, 하나뿐일 것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어원도 같습니다. 제가 수도사제로 강론 하면서 역시 참 많이 사용했던 주제중 하나가 섬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결론처럼 당신의 제자 공동체를 섬김의 공동체로 정의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자기 두 아들을 주님의 양편에 있게 해 달라는 요청에 공동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주님은 그 어머니의 청을 지혜롭게 말끔히 정리해 주신후 공동체 분위기를 일신시킵니다. 결코 세속의 사람들처럼 군림하거나 지배하고 통치하며 세도를 부려서는 안되고 오로지 섬김의 삶에만 전념하라는 명쾌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며 온전히 섬김과 비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섬김의 공동체 중심에는 늘 섬김의 주님이 살아 계십니다. 정말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라면 주님을 닮아 섬김의 삶에 전념할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샘솟는 섬김의 에너지야말로 질그릇 속에 담겨 있는 보물입니다. 누구나 지닌 질그릇 속의 보물인 섬김의 에너지는 그대로 예수님의 생명력이요 백절불굴 삶의 원천이 됩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우리에게는 큰 격려와 힘이 되고 용기백배, 신바람나게 하니 참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바오로 일행의 삶인지요! 섬김의 일꾼으로 한결같이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지만 언제나 드러나는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리거 이 질그릇 속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생명이란 보물이 우리 삶의 백절불굴의 원천이 되고 섬김의 직무, 섬김의 여정에 항구하게 합니다.
바로 섬김의 종의 모범이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그 명칭도 참 아름답고 거룩한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입니다. 이 말은 590년 교황으로 뽑힌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최초로 사용했습니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한결같이 미소띤 얼굴로 하루하루 날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섬김으로 환대하는지,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사람 많이 만나는 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미소띤 인자한 얼굴이니 질그릇 같은 존재지만 예수님 생명이란 보물로 가득한 초인적인 교황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총애를 받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중 첫째인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베드로는 흡사 예수님의 삼총사같습니다. 사도들중 첫째로 순교한 분이 야고보 사도요 이분하면 2014년 안식년에 가졌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생각납니다. 성 야고보의 스페인어가 산티아고입니다. 다음 야고보 사도에 대한 전승이 신비롭고 은혜롭습니다.
“야고보의 제자들은 그의 유해를 갈리시아 지방으로 옮겼 모셨으나, 711년 에스파냐와 이베리아반도 전역이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족의 침략을 받고 나서 그 유해 또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중 813년 해당 지방에서 살던 한 은수자가 별빛에 이끌려 기적적으로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하면서 그 위에 성당이 건립되었다. 이는 ‘별들의 들판’이라는 뜻에서 ‘콤포스텔라’라불렀고, 이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는 자연스럽게 야고보의 이른 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되었다.”
이어 전 유럽을 가로질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여러 순례길이 생겨났고 이곳은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3대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죽으셨지만 여전히 살아계셔서 세세대대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는 이들의 영적 섬김의 수호성인이 된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지금도 에스파냐와 포르투칼의 수호성인이자 순례자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그러니 사후에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순례자들에게 영원한 섬김의 수호성인이된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후 9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산티아고 순례여정중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사실 죽을 때까지 섬김의 순례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는 섬김의 순례자들이기도 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섬김의 순례 여정중 종과 섬김의 영성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순례자들의 수호성인인 성 야고보 사도요, 섬김의 순례자들인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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