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동안 많은 카페의 글을 썼지만
마라나타에 관한 글을 한번도 쓰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마라나타를 주제로 한 설교를 들은 적이 없고
많은 신학 서적을 읽었지만 마라나타에 관한 책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말씀이나 설교를 통해서 배우지 못한 마라나타를
복음성가 찬양으로 먼저 접하게 되었습니다.
경배와 찬양 운동의 뿌리는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목적으로 기독교 신비주의를 비롯하여
목적이 이끄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목적으로 하는 찬양은
찬송의 세속화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무속의 영매화를 부흥과 선교 비전으로 이루었습니다.
기독교 음악으로 자리잡은 CCM은 수 많은 찬양 사역자를 배출하면서
말씀을 통하지 않고도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 사역으로 체험하는 제 3의 물결이 되었습니다.
찬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소위 말하는 직통계시의 수단이 된 찬양은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영성으로 경험하는
찬양의 신비주의로 주님 오시는 길도 만드는 인본주의 신앙, 그 영성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경을 많이 읽어 말씀을 분별하는 감각은 가졌지만 소위 경배와 찬양 운동으로
만들어 가는 기독교 영성 문화는 정통을 비롯해서 이단과 사이비의 공통분모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마라나타와 찬양의 마라나타 사이의 간극은
신본주의 신앙과 인본주의 영성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찬양의 마라나타가 부흥의 물결을 이루는 동안
말씀의 마라타나를 온전히 선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뿌리를 가진 수 많은 찬양을 부르며.....
그래도 락이나, 트롯트나 대중 가요보다 낫다는 천편일률적인 생각은 찬양의 이웃 사랑이 되었습니다.
경배와 찬양 운동의 뿌리인 빈야드 찬양이나, 신사도 찬양이나 예수 전도단의 찬양은
잠자는 정통 교회를 깨우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세상 경배와 찬양의 물결을 이루어
세상속의 교회를 세우는 선교와 대형교회 성장 비전의 영매가 되었습니다.
성경의 마라나타는 고전16장 22절에 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면서 친필로 아람어인 마라나타를 헬라어 음역으로 썼습니다.
마라나타와 같은 뜻의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마라나타의 헬라어 음역을 사용하지 않고 마라나타의 뜻을 가진 헬라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헬라어 단어에 마라나타란 단어는 없으며
마라나타는 복음서에 나오는 달리다굼과 에바다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와 같은 아람어의 음역입니다.
바울은 고전16:21-22 말씀에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마라나타의 뜻은 영어 성경 KJV와 ASV에서는 헬라어 음역 그대로 Maranatha로 번역하였고
그 외 대부분의 영역본은 Our Lord, come!이라고 의역하였습니다.
우리 말 성경 개역한글은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번역하였고
개역개정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공동번역은 마라나 타! (주여 어서 오소서!)라고 하였고
한글 KJV는 마란아다, 헬라어 음역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표준새번역은 마라나타, 우리 주님, 오십니다.
(d. 이 아람어를 달리 마란 아타라고 읽으면 우리 주님 오셨다가 됨)이라고 헤석을 덧붙였습니다.
여기까지는 마라나타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적 이해요,
다음부터는 말씀의 마라나타와 찬양의 마라나타에 대한 글입니다.
말씀의 마라나타와 찬양의 마라나타, 그 간극을 상고한 사람은
신본적인 마라나타의 신앙을 가졌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찬양의 마라나타를 노래하면서
말씀의 마라나타를 묵상하지 않은 사람은 고매한 성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매한 성도란 말씀을 상고하고 묵상하는 성도요,
종일 말씀을 묵상하나이다는 다윗의 길로 행하는 성도를 지칭합니다.
바울은 마라나타를 말씀하면서
먼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친필로 말씀하였습니다.
바울이 말씀한 주를 사랑하지 않는 문화를 대처하고 이기는 것이
곧 마라나타의 신앙입니다.
바울이 말씀한 저주받지 않는 성도의 삶을
마라나타의 말씀으로 못 박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그 많은 문제는 주를 사랑하지 않는데서 비롯되었다는 이해룰 하였습니다.
주를 사랑하는 문화는 일차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는 말씀 가운데 사는 성도일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사랑이란 말씀을 18번 하였고 고린도후서까지 32번하였으며
바울서신 전체에서 132번 말씀할 정도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의 말씀으로 충만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의 사랑을 이해하는 바울의 깊이는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랑이란 말씀을 할 때마다
하나님과 주 예수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소위말하는 사랑학의 대가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 서신의 사랑에 대한 깊은 말씀의 묵상과 상고는
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11:1)고 말씀하신 바울을 본받아
바울 서신에 하나님과 주 예수의 사랑을 진리의 복음과 구원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저주의 삶, 그 곳은
주님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구원의 주가 아닌 심판의 주를 맞을 것입니다.
고린도전후서에 있는 일부 사랑의 말씀입니다.
☞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2:7-10)
☞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전4:20 -21)
☞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고전8:3 )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5:14-15)
☞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6:3-10)
☞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후7:1)
☞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13:11-13)
한편 사도 요한은 마라나타와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시면서
바울이 말씀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저주의 삶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22:18-19)
이 말을 하시면서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2:20)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저주의 삶은
계시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을 더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계시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는 삶의 문화는 오늘날 교회 강단의 설교요,
주의 말씀을 때라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온전히 살지 않는 성도의 실천적 무신론의 삶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1:6-12)
이처럼 말씀의 마라나타는 저주의 삶으로 가득한 세상을 본받지 않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넘치는 선포된 진리의 복음과 구원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넘치는 삶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11:9)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탄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
너는 낮에 넘어지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넘어지리라
내가 네 어머니를 멸하리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그들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도다( 호4:1-8 )
참으로 찬양의 마라나타는 주를 사랑하는 것과 심판에 대한 가사는 전혀 없고
주님 오실 길을 다시 만들자는 인본주의 영성 신앙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끝.
오늘날 몰입하는 무속지행의 찬양은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직통계시의 수단으로 행하는 인본주의 신앙의 영성입니다.
마라타나의 찬양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저주 받을 삶과 그 문화에 대한 긴장감이 전혀 없고
길을 만드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선포가 없고 주님 오실 길을 만들자는
인본주의 신앙의 영성, 그 찬양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는데
종말론적인 신앙은 환난 가운데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라고 계시록은 말씀하였습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1)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7:13 )
마라나타의 신앙은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 계시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는 자들을 경계하며
주 예수에 대한 사랑과 인내의 믿음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선포하는 신앙입니다.
마라나타 신앙은 종말론적인 큰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요,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주의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