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25절. 조창훈목사강해(칼빈주석에 근거)
출 2: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모세의 부모
모세의 부모들은 그들의 겁 때문에 의무도 잊어버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깊이 생각해 볼 때, 용서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이 충성과 보호를 완전히 의탁한 그 자녀들을 버릴 정도로 공포로 인해 몰인정하게 된다는 것은 더욱 더 야비한 일이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를 무관심이나 게으름의 핑계로 삼는 것은 그것을 악용하는 것이다.
출 2: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출 2: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출 2: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과 인도하심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가 그 왕의 딸을 강가로 오게 해서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양육할 용기를 갖도록 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또한 그녀로 하여금 그 생명을 구하는 친절한 행위를 하도록 움직이셨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가 일 전체를 주관하신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마음 속에는 그릇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역사도 보지 못하고 인류가 단순한 기회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로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실 동안에 그의 선택하신 자들을 특별히 돌보심으로써 영예롭게 하시고 그들의 구원과 도움을 주의깊게 지켜보신다는 원칙을 굳게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상황들을 깊이 생각해 본다면, 모세의 보존을 꾀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인도에 의해, 그리고 그의 후원 하에, 그의 성령의 은밀한 영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에피큐러스- 원자로 우연히 이루어짐
에피큐러스가 세상은 원자들의 우연한 결합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출 2: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출 2: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출 2: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출 2: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출 2: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출 2: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의 섭리- 모세를 교회로 끌어 당기심
하나님의 섭리는 완만하게 나타날수록 그 결과는 더욱 훌륭하게 빛난다. 하나님은 그의 종에게 그의 이름 속에 나타난 그의 태생을 되돌아보도록 시사하심으로써 손을 펼쳐서 그렇게 하듯 그를 하나님께로 그리고 그의 교회로 끌어 당기셨다.
출 2: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모세-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각오
이제 히브리서 저자가 칭송한 그 믿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모세가 왕궁의 쾌락과 부를 멸시하고서, 그 선택된 백성과의 동지애를 떠나 행복하게 여김을 받기 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로 하여금 이 책임을 수행하게 만든 것은 그의 민족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약속에 대한 믿음 때문이기도 했는데, 그는 이것으로 인해 그가 온 애굽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가 재물과 영예로운 위치, 힘과 권세를 즉시 내놓지는 않았을지라도 이것은 그가 이 모든 유혹물들을 벗어버리려는 준비였다. 그러므로 그 시도는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히11:24)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오래 전에 헤어졌던 그의 참 혈육에게로 돌아가고 싶다고 고백했던 것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맥으로 보아서 그가 그 형제들의 상태를 동정하기 위해서만 온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어떤 위안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심지어는 그 고통의 짐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왔다는 사실을 추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출 2: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모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
스데반은 모세가 격렬한 감정에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이 아니라 그가 그의 민족의 보복자와 구원자가 되도록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임을 증언하고 있다(행7:25).
우리는 첫째로, 모세가 분별없이 칼을 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무장했으며, 그의 올바른 천직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그 자격을 올바르고 분별력 있게 사용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출 2: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출 2: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거절당함
우리는 이 히브리 사람이 퍽 교만한 사실을 봐서 온 민족의 마음이 얼마나 패역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스데반은 모세가 그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거절당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들을 배은망덕한 자들로 고소하고 있다(행7:35).
출 2: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모세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
우리는 모세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끈질긴 투쟁에 대처할 만큼은 아직 분명히 익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즉, 모세는 궁중에서 곱게 그리고 호화롭게 자라났기 때문에 역사의 결과가 그를 정복자로 판명할 바로 그 위대하고도 끊임없는 투쟁에 익숙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얼마간 그를 물러나게 하시어서 그로 하여금 그처럼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능력을 점차로 가질 수 있도록 하셨다.
출 2: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하나님의 섭리
세상 사람들은 모세가 이 제사장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돌릴 것이나 하나님은 그 속에서, 이처럼 손을 뻗쳐 자신의 종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섭리의 놀라운 그림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모세의 장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모든 사람들이 고헨이라는 단어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는 않다. 갈대아역은 그것을 군왕으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가 제사장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가장 일반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문제되는 것은 그가 거짓 신들을 섬겼느냐, 아니면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느냐 하는 것인데 많은 사실들이, 그가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지는 않았다는 결론을 우리로 하여금 내리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세는 아무리 설득을 당해도 더러운 불의로 오염된 집에서 거의 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집에 장가도 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후에 우리는 이드로의 말에서 그의 경건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표시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온 세상이 여러 가지 부패한 행실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제사장직도 어느 정도는 타락해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 시대에 멜기세덱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제사장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깊이 생각해 볼 때 나는 참되신 하나님이 이드로의 성직으로 인해, 전통대로, 그러나 순수하지는 못하게 숭배되고 있었다고 밖에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다고 말하겠다.
이드로=브두엘
이드로라는 이름에 관해서 해석자들 간에 또 한가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있다. 브두엘이 이드로와는 다른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곧 논박을 당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이드로가 두 개의 이름을 가졌다고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세가 여기에서 이드로라 부르고 있는 사람이 호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추측으로서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다.
출 2: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출 2:18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출 2: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출 2:20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출 2: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출 2: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출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의 속성- 구원자
압제당하는 자를 구하는 것과 갇힌 자를 건져주고 낮은 자를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임무를 그는 끊임없이 수행하고 계신다.
은혜언약
‘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셔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하신 은혜로운 약속을 다시 확인해 주셨는가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값없는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를 돕기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자신을 주고 계시며 우리를 자발적으로 초대하고 게신다. 그러므로 기도의 확신을 우리는 오직 그의 약속에서만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출 2: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출 2: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