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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복중의 복입니다/열왕기하 4:42-44
오늘은 열왕기하 4장 42절에서 44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음은 복 중의 복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복이라 할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첫째 건강해야 합니다. 제가 건강을 잃어 본 후에 비로소 건강이 귀한 복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항상 건강하게 사는 사람은 '나는 으례히 건강해야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절대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합니다.
'나는 으례히 건강해야 하는 사람인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건강이 참 귀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던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둘째 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큰복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가정 없이 살 때에는 명절이 돌아오면 그렇게 슬펐습니다.
갈곳이 없었습니다. 여느 때는 친구에게 놀러도 가고 친구가 놀러 와 주기도 하지만 명절 때는 어디로 놀러 가며 누가 놀러 옵니까? 그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가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 모릅니다.
셋째 쓰며 먹으며 하는 재물이 큰복입니다. 재물이 없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활이 너무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재물도 큰복입니다. 넷째는 일감이 큰복입니다. 일감이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큰복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면 궁극적으로는 이런 것이 복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믿음이 복중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믿음은 복중의 복입니다'라고 정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의 따라 믿음을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바치는 믿음(42)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유월절에 혹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4번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전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셨습니다. 우리처럼 헌금 시간에 헌금 주머니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성전 입구에 연보궤를 놓아두면 각자가 알아서 연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바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셨습니다.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뜻입니다. 잠깐 보고 가시려면 서서 계시지 왜 앉으셨겠습니까? 부자가 헌금을 많이 하고 갑니다.
이어서 가난한 과부가 오더니 두렙돈을 헌금했습니다.
두렙돈은 액수로 하찮은 돈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때 '가난한 과부가 저 부자보다 더 많이 넣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헌금에 대한 칭찬은 처음입니다. 성경에는 칭찬으로 끝이 났지만 주님이 칭찬하신 후에 어떻게 하셨겠는지는 여러분들이 상상해 보시면 됩니다.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실 만큼 예수님은 헌금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십니다. 제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까닭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머니에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신경이 쓰입니까? 그러나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첫째 헌금궤를 대하여 앉으신 것은 헌금에 관심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교하셨습니다.
부자는 많은 것 중에서 실컷 누리고도 많이 남았습니다.
그 중에 얼마는 떼어서 받쳤는데 액수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부자의 전 재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과부의 두렙돈은 그 날 하루 종일 온 식구가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생활비의 전부였습니다. 과부의 돈이 액수 자체는 적었습니다. 그러나 비율로 따져보면 부자는 극히 적은 것이지만 가난한 과부는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셋째 만천하에 공포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어느 곳에서 봉사를 하든지 봉사하는 것은 다 드러납니다. 그러나 누가 얼마를 했다고 하는 헌금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헌금을 한번 천하에 공개해 볼까요? 언젠가 한번 공개했더니 왜 신경질을 그렇게 부립니까?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떳떳하면 왜 신경질을 부리겠습니까? 주님은 공개를 하셨습니다. 넷째 돈 부자가 꼭 믿음 부자는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섯번째 돈이 가난하다고 해서 믿음도 가난한 것은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돈보다는 믿음이 귀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바칠 줄 아는 믿음은 그 자체가 귀한 보배가 되고 복중의 복이 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2절을 보면 '한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 부터 와서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바알살리사라고 하는 곳에서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흉년이 들어서 많은 것을 거두지 못할 때입니다. 그런데 농사를 지어서 제일 처음 익는 곡식은 따로 베어 타작을 해서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선지자에게 드리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무엘상 9장 9절을 보면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지자에게 나아갈 때에는 엘리사라고 하는 사람에게 나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심정으로 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사에게 드린 것은 곧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농사지어 처음 익은 곡식은 하나님의 것으로 내가 손을 대면 안되고 반드시 하나님께 바치는데 하나님의 법이 제사장에게 가져다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지자에게 드렸습니까? 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과 성전은 남왕국 유다에 속해 있습니다. 북왕국에서는 모든 백성들이 명절이 되면 성전으로 예배하러 가게 되는데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설까 염려가 되어 이스라엘의 왕이 그것을 두려워해서 절대로 절기를 지키러 가지 못하게 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송아지 우상을 북쪽과 남쪽에 만들어 세워 놓고 그 송아지 우상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이 그것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북왕국 이스라엘에 있는 제사장들이 모두 남왕국 예루살렘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제사장이 없습니다. 그럴 때 바알살리사의 농부는 핑계거리가 얼마나 좋습니까? 제사장이 없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농부는 제사장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제사장이 없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종은 누구인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은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에게 가져다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칠 줄 아는 믿음이 복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에 자기의 믿음만큼만 봉사를 하면 됩니다. 제가 아들 딸을 길러 보니까 유치원에 열심히 다닙니다. 평시에는 잠꾸러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치원에 갈 시간이 되었다고 하면 벌떡 일어납니다. 하루도 안 빠지고 얼마나 출석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유치원생만큼의 어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생 만한 믿음, 중고등학교 만한 믿음, 대학생 만한 믿음, 대학원생 만한 믿음, 심지어 박사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도 주일 낮 시간에 나옵니다. 주일 낮 시간에는 여러 층의 믿음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도대체 누구의 믿음에 표준을 맞추어 설교를 해야 합니까? 주일 낮 시간 설교가 그래서 참 힘든 겁니다. 유치원에 다닐 적에 어리지만은 결석을 하지 않고 출석은 꼭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혹시 유치원 다닐 만한 믿음밖에 안 되는 분들이 계실지라도 교회에 출석은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음으로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니면서 글공부를 합니다. 유치원생 만한 그런 정도의 믿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성경공부는 해야 되지 않습니까? 또 유치원생은 선생님의 말씀에 순종을 잘합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말은 잘 안 들어도 유치원 선생님이 하는 말은 어떻게 잘 듣는지 모릅니다. 몇 시까지 오라고 하면 그 시간에 꼭 맞추어 갑니다. 숙제를 해 오라고 하면 꼭 숙제를 해 가지고 갑니다. '너는 왜 이렇게 늦게 자곤 하느냐? 밤 10시면 꼭 자거라'고 하면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어도 10시가 되면 꼭 잠자리에 듭니다. 그렇게 말을 잘 듣습니다. 우리가 유치원생 만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선생 중에 선생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순종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유치원 학생들이 봉사도 잘 합니다. "아빠!" "왜?" "돈 백원" "야 너 이름을 백원이라고 짓고 말자"라고 우스개 소리도 해 봅니다. 그럴 때 돈 백원을 그냥 주면 안됩니다. "신문 가지고 와"라고 합니다. 그러면 현관으로 달려가서 아침 신문을 가지고 옵니다. 이것이 봉사가 아닙니까? 유치원 학생으로서 제딴에는 아버지께 큰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을 가지고 오면 백원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출근할 때 "구두는 왜 안 닦아 놓았지?"라고 하면 구두를 닦습니다. 유치원생이 구두를 닦으면 제대로 닦겠습니까? 그렇지만 구두 닦아주는 봉사를 합니다. 그러면 돈 백원을 주는 것입니다. 몇 만원씩 주는 것이 아닙니다. 유치원생도 그렇게 아버지께 봉사할 줄 아는데 우리가 유치원생 만한 어린 믿음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께 내가 할 수 있는 봉사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아버지의 것과 자기의 것을 분별할 줄 압니다. 그 전에는 아버지의 것도 내 것이요, 엄마의 것도 내 것이요, 내 것도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간할 줄 압니다. "너 아버지 주머니에 손 넣어서 꺼내 가면 무엇이 되는지 아느냐? 아버지 주머니에서 아버지의 것을 가져가거나 다른 사람 것을 가져가거나 똑같이 도둑질이야" 알아듣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것과 자기의 것을 분간할 줄 압니다. 우리가 믿음이 어리더라도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 내 것이 무엇인지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많이 성장하여 수입이 생깁니다. 그래서 "십일조 바치라"하면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 다음에는 아버지에게 십일조를 가지고 와라 하면 그 중에서 십일조를 다시 떼어서 아버지에게 가지고 옵니다. 왜 그러는 것입니까? 아버지에게 용돈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네가 지금부터 용돈 바치는 버릇을 가져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이 다음에 장가가고 시집갔을 때 내가 너희들 집에 가 봐라 그러면 뭣하러 왔나? 그럴텐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 바칠 줄 알아야 하는 거야"라고 가르쳐 줍니다. 용돈을 바칠 줄 아는 때가 되면 돈 백원으로 떨어집니까? 주었다 하면 뭉치 돈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줄 아는 믿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만큼 큰복입니다. 여러분의 믿음도 나 중심으로 달라고만 하던 믿음에서 하나님께 바칠 줄 아는 믿음까지 큰 믿음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믿음이 복중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누는 믿음 (43)
본문으로 돌아가서 42절 하반절에서 43절을 보면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알살리사에 농사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농사를 지어 제일 먼저 익은 곡식은 따로 베어 타작을 해서 하나님께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 농부는 처음 익은 것으로 떡을 만들었는데 떡이 스무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자루에는 채소를 담아 갖고 왔습니다. 잘 먹는 장정이면 두 사람이 먹어도 모자라는 양입니다. 그 때 엘리사가 그것을 받아 감추어 두고 자기만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 흉년에 함께 굶주리는 무리가 있으니 나누어 먹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리하였고 그 다음에도 사환이 와서 "선생님! 무리가 백명이나 되는데 이것으로 어떻게 합니까?"할 때 "잔말말고 나누어 먹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먹고 남는지 안 남는지 한번 주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했더니 먹고 남지 않았습니까? 혼자 먹고 싶지만 함께 나누고 더불어 사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이 없으면 우리는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정신은 내 몰라라 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더불어 살고 나누며 살고 함께 사는 믿음이 복 된 것입니다.
잠언 19장 17절을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에 돈이 아쉽습니다. 그럴 때 도와주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네게 갚지 못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꼭 기억하셨다가 필요로 하는 때에 꼭 같아 주겠다고 하십니다. 나눔이 이렇게 복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을 보면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꼭 갚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요즘은 쌀 파는 집에 가보면 아예 푸대에 넣어서 10Kg, 20Kg으로 넣어서 팔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박이나 됫박에 되어서 팔았습니다. 그 때 푹 떠서 쌀을 담지 않고 살살 담습니다. 말을 세울 때에도 살그머니 세워 놓은 다음에 팍 깎아서 한 말이라고 주지 않습니까? 그것을 집에 와서 다시 한번 되어 보십시오. 한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말입니다. 한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안 되는 이유 가 무엇입니까? 말박에 쌀을 담을 때 그것을 누르고 흔들게 되면 쑥쑥 내려가 버리기 때문에 살그머니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베풀어 준 것에 대해서 갚아 주실 때에는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고 넘치도록 하여 네게 안겨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중간의 사람이 가로채면 안되기 까닭에 '네게 안겨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도로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인색한 마음으로 벌벌 떨면서 베풀어주면 하나님도 복을 주실 때 인색한 마음으로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남에게 베풀고 더불어 사는 그 믿음에는 하나님이 이렇게 후하게 복을 주신다는 그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나누는 믿음이 복된 믿음입니다.
셋째, 말씀의 믿음 (44)
말씀을 그대로 복창을 하고 그대로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에덴동산에 각종 아름다운 과실나무를 만들어 놓고 한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나무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없는 상황에서 하와가 혼자 동산을 거닐었습니다.
여자가 혼자 다니면 안 좋습니다. 얼마 전에 세분의 목사님들이 오셔서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해서 교외에 있는 음식점에 갔더니 남자는 우리들뿐이었고 전부 여자들이었습니다. 두명도 오고, 네명도 오고, 여섯명도 짝을 지어 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제 남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뼈가 빠지게 일을 하는데 마누라들은 와서 지지고 볶고 굽고 마셔대다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여자 혼자 내 보내지 마십시오. 혼자 나가면 좋은 것이란 좋은 것은 다 사 먹고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남편이 부산에 취직했으면 주말 부부가 되지 마십시오. 남자 혼자 가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보따리를 싸들고 따라가십시오. 왜 남자 혼자 내버려둡니까? 우리 교회에서 한 가정이 없어져도 괜찮습니다. 부산에 가서 예수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남자 혼자 내보내도 좋지 않습니다.
하와가 남편 혼자 내버려두고 자기 혼자 에덴 동산을 거닐었는데 마귀란 놈이 찾아옵니다. "하와야 하나님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왜 마음대로 덧붙이고 싶으면 덧붙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으리라'하셨는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전혀 딴말이 아닙니까? 우리가 붙이고 싶은 것은 붙이고 떼고 싶은 것은 떼어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은 변질이 되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때 마귀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녕 죽으리라'했는데 마귀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전혀 딴 소리 아닙니까?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하라' 하신 것은 떼어버리기를 잘합니다. 그러면 안 하지 않습니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가져다 덧붙이고 해 버립니다. 솔직히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지 말라' 하신 것은 해 버리고 '하라' 하신 것은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더하고 빼는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더하고 빼버리면 믿음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열매를 맺기 까닭에 그대로 생활 속에 축복으로 열매가 맺어 질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4절을 보면 '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스무 개의 떡 덩어리를 가지고 백명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먹고 남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 하였더니 그대로 먹고 남았다는 이야기가 본문입니다.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믿으면 먹고 남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에 죠지 뮐러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독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가서 고아원을 많이 경영하면서 고아들을 많이 길러냈습니다. 왜 독일 사람이 영국에 갔습니까? 세계 제1차 대전 때 독일이 얼마나 많은 영국의 사람들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마지막에는 1차 대전에 독일이 망했지만 한참 싸우는 중에 영국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독일 군대가 가서 이렇게 희생시킨 영국 사람들에게 내가 그 빚을 우리가 졌으니 나 혼자라도 가서 갚으리라 생각하고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독일 군대들이 죽인 아버지 어머니의 고아된 아들 딸들을 전부 끌어 모아 고아원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런데 뮐러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고 좋은 것으로 주셨습니다. 소위 일생에 5만번 기도 응답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입니다. 그 날도 저녁거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아원의 선생들이 오더니 "원장님!" "왜 그러지?"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식탁을 차려 놓으시오" 저녁 먹을 것이 없다고 하면 그 아이들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식탁을 차려 놓고 포크와 접시를 가져다 놓고 기다렸습니다. 시간은 지나가는데 먹을 것이 있어야 어떻게 하지요? 그래서 죠지 뮐러는 기도할 때 덮어놓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는지 꼭 찾아서 "하나님 여기에 이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면 응답을 받곤 했습니다. 그 날도 이 말씀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다 먹고 남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주십시오. 왜 엘리사에게만 주십니까? 조금 있으려니까 말들이 방울을 울리면서 몇 대의 마차가 옵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가 빵 공장을 크게 하는데 그만 빵을 많이 주문했던 분이 사정이 생겨서 취소를 했습니다. 이 빵을 그대로 두면 내일 못 팔아먹지 않습니까? 그 때 고아원 아이들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얼마나 빵이 먹고 싶을까? 그 아이들이나 가져다주어서 실컷 먹게 하자 싶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냥 풀어서 베풀어주는데 실컷 먹고도 남지 않았습니까? 죠지 뮐러의 일화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대로 믿고 기도했더니 말씀대로 먹고 남았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믿음입니다. 이런 말씀의 믿음은 복중의 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바치는 믿음이 복중의 복입니다. 바칠 줄 아는 사람이 받아도 크게 받습니다. 둘째 나누는 믿음이 복중의 복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말씀의 믿음이 복중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짓기 때문에 믿는 대로 되어지는 까닭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왕하 4:18-37
삶을 살다보면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도무지 내 힘으로 풀 수 없는, 풀려고 하면 할수록 꼬이는 것만 같은 상황들이 연속적으로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로 가장 먼저 나가야 합니다.
수넴 여인은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대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힘들게 얻은 귀한 아들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는 불행한 상황이 일어납니다.
너무 답답하고 힘든 상황이었지만 수넴 여인은 믿음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합니다.
그녀는 죽어 버린 아들의 시체를 끌어안고 비탄에 젖어 있기보다 재빨리 엘리사에게로 달려갑니다. 믿음으로 얻은 아들이었기에 믿음으로 처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죽음이라는 너무나 슬프고 비극적 상황이었지만 남편이나 의사나 그 어떤 사람에게도 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가장 먼저 그 문제를 들고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다 강구하고 난 뒤에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태도와 습관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문제가 생기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그 어떤 사람이나 방법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온 힘을 다해 부르짖어야 합니다.
32절엘리사가 집에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침상에 눕혀는지라. 그걸본 엘리사는 33절 들어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사람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본 엘리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미 아이는 죽었고 인간적으로 볼 때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께 문제를 들고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스승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 아이도 살려주시리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죽어서 싸늘하게 굳어가는 아이의 몸 위에 자기 몸을 포개어 놓고 간절하게 구합니다. 자기 몸을 다 내던져서 지극한 정성으로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34절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입에 자기 손을 그손에 대고 그몸에 엎드니 차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의 간절한 기도와 수렘여인의 확신이 결국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릴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베푸실 때 인간을 도구로사용 사용 하신다
엘리사는 아이의 호흡이 돌아오기까지 기도하는 일을 거듭하며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엘리사의 간절한 믿음과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 수넴 여인의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구할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자에게 아무도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렘33:3).
지금도 부르짖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온 힘을 다하여 믿음으로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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