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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제 지심도
배에서 내려 가장 먼저 섬을 올려다본다. 한낮에도 커다란 동백나무가 내리쬐는 햇볕을 가려주는 천연파라솔 역할을 한다. 이런 정도의 동백나무라면 아마도 수백년을 성장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자라는 식물은 동백나무를 비롯하여 소나무, 후박나무, 거제 풍란 등 모두 37종에 이른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나무들의 터널이 시작된다. 동백나무, 소나무, 후박나무 등의 상록수가 울창한 모습이다.
가난했던 시절, 대부분 지역은 산이 벌거벗을 정도로 벌목을 하여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심도의 소유권자가 국방부였기 때문에 나무들을 함부로 벨 수 없어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울창한 원시림을 이루게 되었다. 국방부가 섬의 주인이었다는 게 주민들에게는 불편했지만 나무들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섬이 작고 경사진 까닭에 차가 다닐 수 없다. 유일한 운송수단은 4륜 오토바이들이다. 가파른 길이어서 그냥 맨몸으로 올라가도 숨이 찬데 주민들은 가스나 무거운 짐을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다녔단다. 지금은 문명의 혜택을 받아 4륜 오토바이가 대신해 준다.
선착장에는 배가 한 척도 없다. 수심이 워낙 깊어서 섬에 방파제가 없다. 바람이 많이 불면 기댈 곳은 선창인데 배석이 없으니 어업이 발달하지 않는 곳이다. 배에서 내려 오솔길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면 이미 폐교가 된 분교가 가장 먼저 나타나고, 그 앞에는 지심도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운동장에 교실이 한 두 개였을 것이다. 폐교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천주교 지심도 공소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에 성모상이 반갑게 손님을 맞이한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아름다운 소나무가 우뚝 선 공터에 이른다. 여기가 국방연구소이다.
지심도는 일본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일제시대 일본 해군기지로 사용되었는데 해방 후 진해 해군통제부 소유로 관리 전환되었다. 현재 국방과학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능선길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우거진 동백숲에 막혀서 잘 보이지가 않던 동쪽의 푸른 바다가 나타난다. 좁다란 오솔길을 가다보면 일본군이 포대로 사용하던 곳이 나타난다.
1937년 10월 지심도가 일본군의 해군기지로 사용되면서 가난하고 힘이 없는 주민들은 1936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쫓겨났다. ‘거제문화’ 지심도 편에 따르면 특히 진해사령부 기지로 지정되어 지심도 주민들은 지세포 선창마을과 대동마을로 강제 이주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해군부대는 1개 중대의 부대에서 전쟁 말기에는 군함 2척, 육군 특전대 군인 320명 등으로 증원되었다. 지심도의 발전소 자리에 ‘진해요항사령부 근거지’라는 표지석이 있어 부대설치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지심도는 일본 해군기지로 바뀌면서 군막사, 발전소, 병원, 배급소, 식당, 포대, 방공호 3곳, 대포를 보관하던 곳이 있으며 대포를 쏘기 위한 장치인 방향 지시석도 남아 있다. 그 방향이 남쪽은 해금강, 북쪽은 부산과 진해, 동쪽은 대마도로 나누어져 있다. 그 당시 통신대 지휘소 등이 있었는데 1945년 6-8월에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해방과 동시에 지심도 주변에서 미국 공군과 일본 해군이 혈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폭격을 하던 미군 전투기를 향하여 대공포를 쏘면서 대항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지심도 동쪽 끝에는 울창한 숲길이 있는데 일본군들이 경비행기를 타고 내리기 위해서 만든 활주로였다. 지금은 헬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 지심도에는 1937년 당시 건축된 주택도 여러 채가 있다. 그들이 만든 주택은 일반 구조 다다미 방 2개, 욕실, 부엌으로 되어 있다. 지심도는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8년 동안 일본군들이 주둔해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다시 사람들이 교체되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내무부 ‘도서지’를 보면 1973년도에 19가구 126명, 분교생이 35명으로 나와 있다.
아름다운 동백섬인 지심도는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이 섬에는 지금까지 일제가 남기고 간 흔적과 상처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섬 여기저기 피어나는 야생화와 해변의 용바위, 형제바위, 마당바위 등 기암괴석들로 가득 차서 가파른 절벽의 해안절경을 감상하는 낭만이 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 중에는 낚시꾼들도 많다. 섬 주변 어디든지 낚싯대만 내리면 감성돔, 도다리, 볼락 등이 올라온다.
10년 전만 해도 지심도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문과 방송을 타면서 유명한 관광지가 됐다. 동백꽃이 만발하는 봄이 될 무렵이면 하루에 1,000여 명의 관광객이 몰려오기도 한단다. 대부분 주민들은 장승포에 집을 하나씩 소유하면서 이곳을 드나들며 민박을 친다. 해방 이후에 살아온 주민은 세 가구이며, 나머지 주민들은 외지인들이다. 소매물도처럼 외지에서 들어온 주민들 대부분은 여행이나 낚시를 왔다가 섬에 매혹되어 살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이곳에 여행 왔다가 주저앉아 사는 일본인 부부도 있다. 지심도는 땅의 소유가 국방부이기 때문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땅에 대한 권리가 없지만 건물은 권리가 있다. 주민들은 강제 이주보다 여기서 정착하면서 상생의 길을 모색하기를 바라고 있는 모습이다. 주민들은 보존과 개발을 놓고 설왕설래하지만, 개발의 방향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천혜의 동백섬인 ‘지심도’가 2016년 6월에 거제시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지심도는 국방부 소속으로 시험통제소와 숙소 등 건물 7채를 소유하고 있다. 거제시는 지심도를 ‘에코아일랜드’로 개발하기 위해 국방부로부터 소유권 이관을 위해 전념하던 중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거제시는 일운면 지세포의 서이말 등대 부근에 35억원을 들여서 국방부와 부지를 교환하는 형식으로 소유권을 이전 받게 되었다.
이 섬은 일제강점기 시절 전략적인 요충지로 일본군 요새였으며, 1995년에 국방부 해상시험소가 들어왔다. 매년 동백꽃이 만발하는 봄만 되면 거가대교의 개통으로 거제도와 외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이 장관을 보려고 지심도에 몰려든다. 지심도는 비록 작은 섬이지만 외도처럼 거제시의 엄청난 재산가치가 있는 의미 있는 섬이다. 제대로 잘 활용하면 외도처럼, 통영의 장사도처럼 천혜의 관광명소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지심도 주민들은 거제시로 이전된다는 소식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 그동안 이 섬을 찾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민박, 식당, 매점 등의 수익으로 살아왔지만 본격적으로 개발하면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1957년 한국일보에 실린 ‘내던져진 남해의 고도-거제군 지심도의 분교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소개한다.
부산에서 정기선으로 거제도 동남단을 네 시간 달리면 장승포와 지세포에 다다르고 이 포구에서 다시 덴마를 빌려 타고 근 2시간 저어가면 동백, 여정실 등 상록수로 뒤덮인 지심도가 본토를 향해서 마음 심 자를 그리고 있다. 십리나 되는 섬 둘레를 구석구석 찾아봐도 배 한 척을 매어 둘 곳이 없도록 섬은 절벽만 가리어져 있다.
아무리 깊은 밤중이라 할지라도 ‘배가 들어왔다!’는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모두들 초롱을 들고 뛰어나와서 배를 육지에 끌어올리는 것이 바다에 시달린 이 섬사람들의 인정이었다. 오랫동안 자랑거리라고는 동백꽃뿐이었던 이 섬에 5년 전부터 동화의 소재에 십상 알맞을 새로운 자랑거리가 생겼다기에 기자는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단 28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초등학교가 세워졌다는 사실이었다. 산마루턱에 자리잡은 이 학교의 정식이름은 일운초등학교 지신분교장. 교사라고는 8평짜리 교실에 덧붙여 놓은 이곳 4평짜리 사택뿐이었다. 유리창도 끼우지 못해서 창호지를 발라 놓은 방안을 기웃거려 보니 교탁도 없고 학생들의 의자도 없었다. 여기에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서 눈에 거슬렸던 풍금은 역시 음정을 잃은 채로 시계도 바늘이 멎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 작은 방 안에서 1학년 8명과 3학년 9명과 4학년 5명과 5학년 6명이 네 개의 반으로 나뉘어 한 사람의 교사로부터 4복식의 수업을 만족스럽게 받고 있었다.
해에 따라서는 5복식, 6복식으로도 가르쳐야 하는 비결을 조창래 선생한테 물어본 즉 동일학과로서 전 학년의 시간표를 짜놓고 각 학년마다 10분 내지 15분씩 직접 수업을 하고는 문제풀이를 맡긴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가르쳐 보면 우수한 하급생들은 상급생의 수업까지 엿들어 엉뚱하게 실력이 늘게 되고, 열등한 상급생은 또한 하급생의 수업까지 엿듣고 잃어버린 기초를 재삼 닦게 되는 결과를 나타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보통 한 교사가 한 학급을 맡았다고 해서 한 시간 내내 직접 수업하는 것도 아니니까 여기 아이들이 4복식 수업을 받았다고 해서 교과의 진도가 떨어질리야 없지 않느냐?”는 반문을 받고 이 외떨어진 섬에 자진해서 찾아온 젊은 조 선생의 정열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학교가 생긴 것은 1954년 4월 1일이었다. 일본 해군이 여기에 포대를 만들려고 원주민을 쫓아낸 지 80년 만에 해방을 맞고 돌아온 귀환동포와 제집차지를 못했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집집마다 7명 이상의 큰 식구를 거느리건만 밭이라고는 한 집에 일곱 마지기밖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나마 워낙 비탈진 밭이라서 고구마를 캘라치면 큰 것은 돌멩이 마냥 궁글어 바다에 풍덩 빠지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섬사람들은 이렇게 살림에 쪼들리는 십년 동안에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해서 몸부림쳤다.
교무실이자 섬사람들의 집회소가 되어 있는 조 선생의 방에는 색다른 식구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섬학교의 5학년생이라는 윤현철 군은 본섬의 일운초등학교 2학년 때 조선생이 맡은 반의 학생이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부산을 가려던 때에 조선생은 윤 군의 가정이 어려운 줄을 알고 ‘부산에 가면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닐 테고 구두닦이로 버림받게 될지 모르니 맡겠다’고 데려온 아이라는 것이다.
섬사람들 말에 의하면 조선생과 사모님은 추석 때도 윤 군에게만 명절치레를 해주었다고 한다. 윤 군은 이 섬에서 기차구경을 한 유일한 소년이었다. 그 밖의 27명의 아이들은 아직 정기여객선도 못 타봤다고 말했다. 여름이면 맨발로 쏘다니기가 예사이고 운동화를 신어봤다고 뻐기는 아이라야 12명밖에 안 되었다. 그들은 아침에 쌀낟을 섞었다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은 고구마와 보리가 반반씩 섞인 시커먼 밥덩어리를 먹고 나면 점심과 저녁은 고구마로 때우고 말았다. 하지만 이 섬에서 이제는 적령아동 치고 학교에 안 다니는 아이는 한 사람도 없으니 완전히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셈이었다. 그 뿐 아니라 일체의 징수금을 아동으로부터 거둘 필요가 없었다. 섬사람들은 학교를 유지해 내기 위해서 공동으로 미역을 따고 부역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 섬사람들은 자기들의 교육열이 식는 날엔 선생님이 떠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희망을 약속해 주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들 손으로 세워진 학교에서 처음으로 지난 봄(1956년) 졸업한 7명 가운데 최초의 유학생으로 본도(本島)에 간 유기광 군과 임성호 군의 커가는 모습이었다. 섬사람들은 토요일만 되면 덴마를 갖고 본도까지 마중 나가서 이 두 유학생을 실어왔다. 윤 군은 그 아우와 함께 홀어머니의 품에서 커 온 학생이었다. 그래서 중학에 들어가서도 부지런하고 성적이 좋다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심 산
거제 지세포항
지심도선착장
마끝
동백터널
일본인 발전소 소장이 살전 집, 현재는 민박으로 이용
일본군 활주로
일본군 포대
해상밀수방지 세관이 있던 자리
일제 강점시 욱일기 게양대
지심도 동쪽 끝단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