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마찬가지로 도시도 시간이 흐르면 나이를 먹는다. 그러나 인간과 달리 도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성해지기도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로마의 통치에도 알렉산드리아는 쇠퇴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대 최대의 자유무역국인 로마제국과의 완전합병은 알렉산드리아의 통상 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인구도 점점 늘어갔다.
이러한 풍요에는 대가가 따랐다. 비록 독재군주가 지배하긴 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통치하의 알렉산드리아는 권력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배를 타고 3주 동안 지중해를 건너가야 있는 머나먼 로마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속국에 불과했다.
로마는 대체로 자국의 이익만 충족된다면 그다지 알렉산드리아를 간섭하지 않았다. 나일강 주변의 비옥한 농토는 로마제국의 곡창지대가 되었으며, 로마 황제들의 주된 관심은 단지 곡물을 실은 운송선들이 정기적으로 도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끔직한 수단을 동원해 알렉산드리아 일에 직접 간섭하는 경우도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최대의 암흑기는 젊은이들을 전부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변덕스러운 황제 카라칼라의 통치기였다. 또 3세기경 시민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당국은 국제적인 배움의 전당인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을 폐쇄하고, 왕실지구뿐 아니라 도시 전체를 둘러싼 것으로 전하는 성벽을 허물게 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근처 관목지의 모래들이 지금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으나 한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궁이 서있던 곳으로 밀려 들어서, 한 세기가 지나자 다른 지역은 번창하고 항구에는 여전히 수많은 배가 오가는데도 그곳만은 사막이나 다름없는 불모지가 되었다.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공직국교로 선포되자 세라페이온이 파괴되는 등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교 신인 세라피스를 모신 이 신전은 세계적으로 로마의 주피터 신전(capitol) 다음으로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되었다. 그곳에는 당시에 이미 화재로 사라진 알렉산드라의 세계적인 도서관에서 남은 두루마리 책들도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콥트 교회의 교구로서 새로운 명성을 얻기는 하였으나, 세계로 뻗어 나갔던 문화적인 영광은 이제 단지 과거사일 따름이다.
동방과 서방에 각각 수도를 가지겠다던 클레오파트라의 꿈처럼 395년 로마 제국은 로마와 비잔티움으로 갈라졌으며, 이때 알렉산드리아는 비잔티움에 속하게 되어서 로마가 야만인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의 격변은 7세기에 일어났는데, 이때 아랍의 침략군들이 도시를 14개월간 포위공격한 끝에 점령했다. 소수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알렉산드리아는 그 후로 이슬람교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침략자들은 관대했으면 현재의 카이로 근처에 새 수도가 세워지면서 알렉산드리아는 정치적인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알렉산드라가 정치와 종교면에서 타격을 입을 때 기록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은 중대한 사건이 이 도시를 뿌리째 흔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지중해 동부에는 지진이 자주 일어났는데, 해일을 동반한 지진이 계속 알렉산드리아 근처의 북아프리카 해안을 강타하여 육지가 바다로 가라앉는 현상이 벌어졌다. 알렉산드리아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365년 7월 21일에 일어난 지진이었다고 전하면, 그 후에도 수세기 동안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그치지 않았다. 이슬람 연대기를 살피면 약 1000년 후인 1308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파로스 등대가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한다.
겉보기와 달리 알렉산드리아는 자연 재해에 취약했다. 지질학적으로 볼 때 지구 표면을 이루는 대륙 규모의 지각 판 두 개가 만나는 부위근처에 있어서 단층선이 지나가기 때문에 지진이 쉽게 일어날 뿐 아니라 육지가 점차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눈에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알렉산드리아가 있는 아프리카 대륙붕이 북쪽에 있는 유럽 대륙붕 밑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어가서 연안 지역이 전부 물밑에 잠기고 말았다. 현재 남아 있는 증거로 추정해보면 클레오파트라 사후 연해 지역이 약 6미터 정도 가라앉고 같은 시기에 해수면은 1.2~1.5미터 가량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과거 알렉산드리아의 마레오티스 호에 민물을 공급하던 나일 강의 카노피 지류가 떠내려온 흙으로 막혀버려서 13세기 무렵에는 선박이 다니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지구물리학적인 변화의 결과로 알렉산드리아의 고대 해안선은 계속 도시 동쪽 항구의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그리스 통치자들이 해안에 건설한 왕실지구는 완전히 수장되고 말았다.
오랜 세월을 아랍, 노예기병, 터키 제국 등 이슬람 세력이 번갈아 지배하여 상업의 중심지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중요성은 갈수록 미미해졌고, 19세기 초에는 밑바닥에 다다라 6000의 활력 없는 지중해의 벽지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도시가 침체되어도 클레오파트라는 잊혀지지 않았다. 유럽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로 헬레니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조되었고, 카이사르나 안토니우스가 그랬듯 여러 세대의 지식인들이 클레오파트라에 매혹되어 지중해를 건너왔다.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플루타르코스의 『전기』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비극『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로 부활시켰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어졌다. 알렉산드리아는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학자들은 문서상으로라도 도시를 부흥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자료가 거의 없었다. 고대 지도 한 장 없이 단지 책에 있는 기록뿐이었으면,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
16세기부터 학자들은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직후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한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의 기록을 주된 자료로 삼아,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윤곽을 그리려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스트라본이 각각의 건축물들과 전체적인 배치에 대해 상세히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건물들이 어떻게 놓여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다가 1865년 당시 프랑스의 통치자이던 나폴레옹 3세가 이집트 당국에 카이사르의 이집트 원정에 대한 책을 쓰는데 필요한 정확한 고대 알렉산드리아 지도를 요구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이집트 정부는 이 요청에 호응하여 천문학자이자 토목기사인 마흐무드 베이(후에 마흐무드 엘 팔라키라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에게 지도 제작을 맡겼다. 그는 본토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윤곽을 파악하기 위해 도랑을 파는 등 성실히 작업했다. 그러나 물에 잠긴 지역은 어림짐작으로 짜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마흐무드 베이가 만든 지도는 그 후로도 알렉산드리아 재현에 주로 사용되었는데,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게 밝혀졌다.
이러한 오류는 도시가 겨우 해안에서 몇백 미터 거리에 잠겨 있었는데도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생긴 것이다. 좀더 정확한 알렉산드리아 지도를 작성하려면 수중 고고학 관련 과학이 발전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마흐무드 베이가 살던 시대에는 해저탐험을 하려면 조잡한고 불편한 잠수복을 입고 물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수중호흡 장비의 발명으로 큰 발전이 있었다. 1828년에 최초로 수중호흡기가 특허 등록되긴 했으나, 그 후로도 100년의 세월이 더 지난 1946년에야 에밀 가냥과 자크 이브쿠스토가 완벽한 호흡 밸브를 발명하여 현대에 사용하는 스쿠버(수중호흡장치)의 기초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 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바다 밑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광대한 범위의 수중탐사가 마침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장비를 사용한 초기 탐사로 엄청난 발견들이 잇달았다. 1960년대에 이집트 잠수부 케말 아부엘 사다트가 파로스 등대 자리 부근에서 두 조각난 거대한 상을 발견하였다. 7미터가 넘는 그 상은 이시스 여신으로 분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이었다. 이어서 엘 사다트는 내항구를 탐사할 목적으로 잠수를 시도했는데 철저한 탐사를 하기에는 장비가 부족했다. 그러다가 1980년에 비상한 자질을 갖춘 탐험가 프랑크 고디오가 물에 잠신 도시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