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농심라면 선전에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카피가 있었다. “형님 먼저 드시오. 농심라면! 아우 먼저 들게나. 농심라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그럼 제가 먼저 ???” 서민적인 코미디언 구봉서 씨와 후라이보이 곽규석 씨가 서로에게 라면을 미루다가 동생 곽규석이 “그럼 제가 먼저…”라고 하자 구봉서 씨가 라면 그릇을 붙잡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체면상 양보를 했기는 했지만 정작 선택의 순간에는 양보를 포기하는 모습을 통해 라면이 얼마나 맛있는지 강조한 것이다. 그렇게 농심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를 쌀국수와 뚝배기에도 리메이크해서 사용했다. 성경 창세기에도 “삼촌 먼저 조카 님 먼저”가 나옵니다.
(창 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창 13: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렇게 읽어보면 사실 삼촌 먼저는 아닌 것 같다. 삼촌 아브라함의 통 큰 양보에 당연히 롯은 “삼촌 먼저”라고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롯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롯은 자신 앞에 놓인 눈앞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창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지금도 성경의 땅을 방문할 때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요단 들을 내려다보면 팔레스타인 땅에서 그나마 살만하고 푸른 곳이라곤 요단강 주변이다. 강 주변은 언제나 물이 풍성해서 마치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푸른 띠처럼 선명하다. 롯이 본 요단 들판은 아름답고 풍성해 보였다. 롯은 지체 없이 그곳을 선택했다.
(창 13: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창 13: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롯은 후일에 소돔이 멸망을 당하여 그곳에서 얻은 그의 모든 재산이 한순간에 일소될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삼촌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지 않고 눈앞에 이익을 선택했을 때 속은 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고상하고 이타적인 정신을 나타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성공이란 세상에서 얼마나 재물을 얻느냐보다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어떻게 살아 내느냐에 두었다.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창 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창 13: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먼저 양보하였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동서남북 모든 바라보는 곳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롯의 선택을 한다. 세속의 이익이 발생하는 곳이라면 유황불 속이라도 뛰어들 것 같은 태세로 자신들의 귀중한 선택의 기회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 열이면 열 모두 결국 롯이 거뒀던 인생의 결과를 거두게 된다. 남은 것은 하나도 없고 저들의 인생은 낭비된 것으로 최종적인 평가를 받는다.
사실 롯의 경우처럼 얻어도 얻는 것이 아니며 벌어도 버는 것이 아닌 그런 수확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사람들이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는 많은 것들이 결국은 좀이 슬고 녹이 나서 못쓰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에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중요한 교훈을 배운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할지라도 아브라함처럼 스스로 자족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봉사하고 사는 참된 가치가 있는 삶을 선택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눈앞의 이익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당장의 현실적 유익이 있더라도 영적인 손실이 발생하는 곳이라면 기어이 우리의 욕심을 내어 버리고 현세를 위하여 영원을 버리는 실수를 범치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