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안토노바 세르기에브나 저 일본 경제 성장의 이면 (1994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미국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은행 시스템과 언론 시스템을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한 맥아더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담배를 문 채 비행기에서 내렸습니다. 미 군정이 일본인들 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주려는 계산된 포즈였죠.
이때 맥아더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서구식 민주주의를 전파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의 머릿 속에는 오직 1인 군주에 대한 복종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일본 전체 은행의 대출장부는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전쟁 관련 산업에 돈을 쏟아부었기 때문이죠.
이때 일본은행(중앙은행)은 이 문제를 가볍게 해결했습니다.
일본은행이 한 것이라곤 은행의 부실채권을 새로 창출한 본원통화로 매입한 것 밖에 없었습니다. 휴지조각에 불과하던 채권을 돈을 마구 찍어내서 매입한 것이죠. 일본식 양적완화였습니다.
미 군정은 일본은행 총재로 아라키 에이키치를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아라키 에이키치가 전범으로 기소되어 시끄러워지자 미군정은 주미일본대사로 보냈다 아라키 에이키치를 다시 일본은행 총재로 재임명했습니다.
미 군정은 미국에 맞서 싸운 전범을 최고 요직인 일본은행 총재로 앉힌 것이죠.
이때 미군정은 전범으로 기소된 대부분의 경제, 정치, 교육 관련 인사를 복직시켰습니다.
이에 대해 미군정 대변인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자꾸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전범 인사들 전부를 처단하라고들 하는데 인사문제는 엄연한 미 군정의 권한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아시아 전체 경제에 피해를 줄 수도 있어요. 아시아판 경제공황이 발생하면 자기들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을 거면서 공산주의자들은 말만 많아요. 아시아 전체 국가들의 경제는 일본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시 인프라 시설은 물론이고 비료, 의료 시스템 등등 열거할 수도 없어요. 아시아 국가 어느 나라도 일본에 부역한 인사를 중용할 수밖에 없게 될겁니다. 좋아서 그러는게 아니에요. 그렇게 안하면 나라 경제가 어려워질게 뻔하거든요. 중국과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일본에 부역한 사람들을 전부 처단한다고 한다던데 그게 가능할까요? 미친 짓입니다. 정말 그걸 하면 거지꼴될겁니다. 아무리 공산주의자라도 절대 못해요. 그게 현실이에요."
그러나 이 조치로 중국의 반미감정이 고조되었고 한동안 큰 불협화음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후 중공과 북한은 친일 인사를 전부 처단했죠.
이 당시 미 군정은 여론을 달래기 위해 일본재벌개혁에 착수했습니다. 일본 대지주와 전범들이 소유한 땅을 소작인에게 나누어준 것이죠. 이 조치로 미 군정은 일본인과 주변국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아시아 주변국가들도 미 군정의 정책을 벤치마킹했습니다.
이후 미-일 상호방위조약 체결 움직임이 있자 일본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의회 내 폭력사태도 일어났었죠.
이 사태가 마무리 되고 미-일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자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가 되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는 도조 히데키 밑에서 상공장관을 맡아 식민지 전역에서 노예 수급을 지휘했던 장본인입니다. 게다가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은행 총재인 아라키 에이키치의 충견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일본은행에 우호적인 인사였습니다. 기시 노부스케 총리취임과 함께 전범 대부분은 요직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후 자민당과 일본은행의 공생관계는 4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 재무성(대장성)입니다. 미군정이 일본 재무성이 일본 경제활동의 대부분 컨트롤하도록 조치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재무성이 건드리지 못하는 한 분야가 있었는데 신용창출의 양에 대한 결정이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은행의 몫이었기 때문이죠.
당시 일본 언론에는 재무성의 이자율 정책에 대한 얘기만 나올 뿐이었습니다. 재무성은 일본은행과 협력하여 이자율 정책을 집행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단 한 번도 언론에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은행이 컨트롤하는 돈의 '양'에 관한 얘기였죠. 일본은행은 양적완화와 양적긴축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재벌들과 정치인들을 컨트롤했습니다.
이 당시 일본은행은 창구지도라고 불리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창구지도란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의 신용창출에 대한 할당량을 정해주는 것입니다. 이 방식으로 중앙은행에 다른 은행에 다음 분기의 대출을 누구에게 해줄것인지 컨트롤했습니다. 중앙은행이 신용할당으로 은행을 통제했던 것이죠.
모든 대출은 상위 산업분야와 아래 하청분야로 쪼개져 흘러들어가게 되고 상위 산업분야 차입자들의 이름만 기록되었습니다.
일본은행은 이 방식으로 독단적으로 어떤 분야를 살리고 어떤 분야를 죽일지 결정했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회사는 돈줄을 조여서 말려죽이고 경쟁력이 있는 회사만 선별해서 지원했습니다. 자칫 이 방식이 중남미 스타일의 정경유착을 통한 카르텔로 변모될 가능성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서 미국이나 유럽 대비 어마어마하게 높은 상속세를 책정했습니다.
당시 일본국민들은 자민당을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엄청난 경제성장과 더불어 부의 분배도 과거 어느 시절보다 잘 이뤄졌으니까요. 참고로 자민당은 일본은행의 무자비한 전횡을 지지한 정당이었습니다.
1959년 한 해 동안만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17%였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이후 일본 경제는 고도성장기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이 당시 일본 언론에는 이대로만 가면 유럽국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문제는 일본경제의 지나치게 빠른 성장 때문에 쓰다 남은 기자재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일본에 우호적인 한국의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제 2 도약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때 한국의 군사정권측은 일본식 경제성장의 핵심인 일본은행을 중심으로한 국가경제 시스템 운영에 대한 노하우 전수를 해주지 않으면 한일수교는 불가능하다고 했고 일본 정부는 한국 군부의 입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일본은 쓰다 남은 자동차, 전기, 전자, 제철 관련 생산자재를 한국에 수출하고 새로운 기자재를 미국과 유럽에서 도입하게 되면서 미친듯이 성장했습니다. 웬만한 유럽국가들은 전부 따돌리고 15년 뒤에는 미국과 맞짱을 뜰 수 있는 레벨까지 올라가버린 것이죠.
그러나 이 정책에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윤이 아닌 시장점유율을 높히기 위해 디자인되었기 때문이죠. 기업들은 경쟁기업이 파산할 때까지 서로간에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야쿠자가 동원되었고 회사 대표들이 암살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때 또다시 활용된 것이 창구지도였습니다. 일본은행이 창구지도로 대출의 양을 컨트롤하여 기업간의 무분별한 경쟁자 죽이기를 견재했습니다. 일본의 이 시스템은 그대로 한국으로 수출되어 한국의 군사정권도 창구지도를 적극 활용하여 급격한 경제상장을 드라이브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는 세계경제의 최정점에 있던 미국-유럽 기업들 간에 자유경쟁시장 원리를 바탕으로 살아남기 위한 피튀기는 경쟁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변방에 불과하던 일본 기업과 한국 기업은 중앙은행의 창구지도 덕분에 자기들간의 싸움을 최소화하여 세계시장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최신 경제이론들은 오직 자유경쟁시장이 담보되어야 성공이 가능하다는 것이 다수설이지만 일본은 자유경쟁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 없이 군대식 경영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지속했습니다.
즉 일본의 전후 경제 시스템은 전시 동원체제의 군수품을 소비재로 전환시켜 막대한 공급을 하고 이것을 전 세계에 저가로 뿌려대며 시장의 기존 강자들을 제압했던 것이죠.
이 당시 일본은행 총재인 히사토 이치마다는 일본은행은 어느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고 숲 속의 사찰 처럼 은신하는 편이 일본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일본경제는 완전한 자유경쟁체제이며 중앙은행의 신용통제 또한 자발적인 것일 뿐이라고 홍보했습니다. 창구지도에 대한 얘기는 언급도 비판도 하지 않았습니다.
1965년에 일본 정부가 발행한 채권이 시장에 풀렸습니다. 그 때부터는 정치인들이 예산을 편성할 때 재무성을 채근해서 국채를 발행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일본 재무성이 끝없이 쌓여가는 국가채무의 원인제공자가 되었습니다. 이때도 일본은행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없었죠.
모든 비난의 화살을 재무성에 돌려놓고 일본은행이 중심이 된 일본경제체제는 플라자 합의 직전까지 승승장구하며 전세계의 알짜 기업과 부동산을 흡수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안토노바 세르기예브나는 1994년 당시 빈곤국가가 된 러시아도 한국 처럼 일본식 경제 시스템을 수입해야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푸틴 정권이 들어서면서 중앙은행과 군부를 중심으로 한 일본식 경제체제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