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를 울린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부성애
최효찬 칼럼니스트
서구 문학의 원형으로 꼽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s)'는 트로이의 성을 의미하는 일리오
스(Ilica)'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이오스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여기서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가 주인공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왕자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트로이인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가하는 부분일 게다. 더욱이 헥토르의 아버지이자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단신으로 적군의 진영을 방문하는 장면은 긴박감을 더해준다. 이 대목은 '일리아스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의 하나로 꼽힌다.
아킬레우스는 혈혈단신으로 적진으로 자신을 찾아온 프리아모스 왕을 보고 깜짝 놀랐고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얼굴만 쳐다보았다. 더욱이 프리아모스 왕은 아들과 같은 아킬레우스에게 무릎을 꿇는다. 이때 당황하는 아킬레우스에게 프리아모스는 이런 말로 애원했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시오! 나와 동년배이며 슬픈 노령의 문턱에 서 있는 그대의 아버지를. 그래도 그분은 그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마음 속으로 기뻐하며 날이면 날마다 사랑하는 아들이 트로이에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오."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에게 고향에서 자식의 무사귀환을 고대하고 있을 '아버지'를 거론하며 동정심에 호소한다. 아킬레우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 돌아올 희망 속에서 아들을 기다리지만 프리아모스 왕자신은 되레 아들을 죽인 적장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아들의 시신만이라도 돌려받기를 간구하는 처지라고 말한다.
"아킬레우스여!, 여신을 두려워하고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나를 동정하시오. 나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차마 못한 짓을 하고 있지 않소! 내 자식들을 죽인 사람의 얼굴에 손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오."
즉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가슴 속에 아버지를 위해 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그만 고향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함께 울고 만다.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발 앞에 쓰러져 헥토르 위에 꺼이꺼이 울었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때로는 그를 대신해 죽은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울었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온 막사 안에 가득 찼다.
여기서 약자의 강자에 대한 간구의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아들을 죽인 적장의 손에 입을 맞춘 프리아모스 왕의 참담한' 부정 연민을 느꼈고 그만 함께 울고 만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노인이 된 프리아모스 왕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고 노인의 흰 머리와 흰 수염을 불쌍히 여겼다. 또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정성스럽게 수습해서 프리아모스에게 인계해주고 헥토르의 장례가 치러지는 12일 동안 휴전을 선언한다. 적이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가 느껴진다.
이게 바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인 '측은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3천 년 전 호메로스에 의해 묘사된 '부성애의 원형'이 담긴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킬레우스는 그 자신도 요절할 운명을 타고났다. 용맹스러운 영웅 헥토르를 죽인 영웅이지만 그 또한 트로이 성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아킬레우스가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온 프리아모스를 보고 눈물을 함께 흘리고 헥토르의 시신을 정성스럽게 수습해준 것은 어쩌면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스스로 정해서가 아닐까. 즉 머지않아 그 자신이 트로이 성에서 최후를 맞게 되면 아들의 시신조차 볼 수 없는 자신의 아버지는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온 프리아모스보다 더 불쌍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우리 시대에는 부성애가 설 자리가 없다고 한다. 사춘기가 된 자식들은 아버지와 대화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부성애란 아들의 주검을 찾으러 홀로 적진으로 뛰어드는 그런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아버지 또한 프리아모스의 가슴과 다를바 없을 것이다. 3천 년 전 호메로스 또한 아버지의 마음이 되어 이 장면을 쓰지 않았을까. 이 여름날, 아버지를 생각하고 부성애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