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건 한 미군 병사의 힘이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도 한 사람이다. 모든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 시작된다. ”
16일 서울 마포구 극동방송 사옥에서 김장환(극동방송 이사장) 목사를 만났다.
마침 2005년 1월8일부터 시작한 라디오방송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가 800회 특집(6월19일 방송)을 앞둔 차였다. 진행자인 김 목사는 16년 동안 단 한 번도 결방을 하지 않았다.
올해 그는 한국 나이로 87세다. 국내 최고령 라디오 진행자다.
방송계에서는 이미 ‘TV는 송해, 라디오는 김장환’으로 통할 정도다.
요즘도 그는 4층 집무실을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오르내린다.
그에게 '한 사람의 힘'을 물었다.
김장환 목사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변하게 하는 건 두 사람도 아닌 단 한 사람이다"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16년 방송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출연자는.
“택시 기사부터 대통령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이 출연했다.
모두 합하면 1000명이 훌쩍 넘는다.
정부에서 받는 생활보조금 8만원 중에서 매달 1만원을 떼어 내
극동방송 전파선교에 써달라고 보내주신 분도 있었다.
내게는 그 모두가 ‘한 사람’이다. 세상을 바꾸는 건 결국 ‘한 사람의 힘’이다.”
4년 전에 김 목사는 제31회 유엔국제조찬기도회에서 설교를 했다.
동양인으로선 처음이었다.
그때도 ‘한 사람의 힘’을 강조했다.
그는 UN에서 “아담이라는 한 남자가 죄를 지음으로 세상이 죄로 신음한다.
모세라는 한 남자가 이스라엘 자손을 노예에서 해방시켰다.
마리아라는 한 여자를 통해 이 세상에 구세주가 태어났다”며 “나도 한 사람이고,
여러분도 한 사람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 말끝에 김 목사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게 한
칼 파워스 미군 상사 이야기를 꺼냈다.
경기도 수원에서 살던 김 목사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우리 집은 소작농이었다.
농사를 지으면 60%를 땅 주인에게 주고, 나머지 40%로 살았다.
식구는 13명이었다. 양식이 모자라 한 가마를 빌리면 가을에 한 가마 반을 갚아야 했다.
쌀이 한 톨도 섞이지 않은 보리꼽쌀만 먹고 자랐다. 그래서 꿈이 정치인이었다.”
왜 꿈이 정치인이었나.
“육촌 형집에 갔더니 쌀밥도 먹고, 청어도 구워 먹더라. 그게 너무 부러웠다.
‘저걸 먹으려면 어떡해야 할까. 그렇지. 정치인이 되면 되겠구나.’
오직 그 이유 하나였다. 그래서 정치인을 꿈꾸었다.”
한국전쟁 와중에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를 하던 시절의 김장환과 칼 파워스 상사. [사진 극동방송]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는 16살이었다. ‘펑! 펑!’하는 대포 소리가 울리고,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 6월27일에는 국군 패잔병들이 총도 없이 수원으로 내려왔다.
곧이어 인민군이 수원을 점령했다.
“나보다 서너 살 많은 동급생 중에는 인민군 의용군으로 간 이들도 꽤 있었다.
키가 작은 내게는 그런 요청이 없었다.”
대신 인민군은 그의 집에서 소와 마차를 가져갔다.
9월28일 수복이 되자 수원교도소 자리에 미군 부대가 들어왔다.
“친구들과 종종 미군 부대로 놀러 갔다.
운 좋으면 초콜릿이나 껌을 얻을 수 있었거든.”
하루는 미군이 장작을 구해 난로에 불을 피워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는 막사 청소까지 해놓았다.
남달리 똘똘하고 영리한 그는 하우스보이가 됐다.
“소와 마차를 빼앗겨 집안은 빈털터리였다.
미군 부대에서 얻어가는 담배와 비누, 통조림 등을 팔아서 집안 생계를 이었다.
김장환 목사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목회의 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지금은 코로나 이후의 목회와 예배 방식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해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전쟁 시기였다. 위험한 적은 없었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1ㆍ4 후퇴를 했다.
미군 부대는 남쪽으로 밀려났다.
나도 그들의 차를 타고 대전을 거쳐 경북 경산까지 후퇴했다.
어머니는 나의 생사도 몰랐다.
나도 가족의 안부를 몰랐다.
미군들은 백인이건, 흑인이건 내게 친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미군 병사가 내게 오더니
‘너, 미국에 가고 싶지 않니?’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묻는 미군은 많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미군 병사가 칼 파워스 상사였다. 당시 22살이었다.
미혼인 그는 하우스 보이 김장환에게 헌신적이었다.
직접 미국 대사관과 외무부, 국방부, 문교부를 숱하게 들락거리며
결국 미국 비자와 여권을 받아냈다.
당시 미군 병사는 한국전에서 1년간 복무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파워스 상사는 무려 여섯 차례나 귀환을 자진 연기하면서 위험천만인 전쟁터에 남았다.
하우스 보이에게 미국에 가서 공부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김장환(오른쪽)과 칼 파워스 상사.
파워스는 가난한 탄광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한국전쟁 후에 대학을 졸업한 뒤 독신으로 지내며 교사 생활을 했다. [사진 극동방송]
김장환은 결국 미군 보급선을 타고 미국으로 갔다.
파워스 상사가 태평양을 건너는 배편과 학교 입학허가서까지 마련했다.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해 건물마다 켜져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봤을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의 밥 존스 고등학교와 신학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9년간 그 모든 학비를 파워스 상사가 댔다.
“그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탄광 노동자의 아들인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교사로 일했다.”
왜 정치인이 되지 않고 목사가 됐나.
“미국에 갔을 때 죽도록 외로웠다. 나의 영어 이름은 ‘빌리’였다.
기숙사 학교의 동급생들은 나를 ‘벙어리 빌리’라고 불렀다.
그때는 비만 와도 눈물이 흘렀다. 공부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루는 기숙사 옆방의 신학생이 찾아왔다.
내가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내게 요한복음 3장16절을 읽어주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신학생은 거기에 나까지 포함돼 있다고 했다. 놀라웠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거짓말처럼 외로움이 사라졌다.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리고 용기가 생기더라.
그래서 목사가 됐다.”
김장환 목사는 "처음에는 미국에서 영어도 전혀 못해 무척 외로웠다.
기숙사 옆방 신학생이 와서 성경을 읽어주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했다.
그말을 듣자 거짓말처럼 외로움이 사라지더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