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현 모세 신부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야 58,1-9ㄴ 마태오 9,14-15
예수님 시대에 단식은 속죄의 날에 지키도록 정해져 있었는데, 공적으로 집단에서 지키거나
개인이 따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단식은 의도하지 않게 율법을 지키지 않았거나 어긴 것을
본래대로 회복하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또한 단식은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속죄하는 행위로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후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도 단식을 권고한 기록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도교 문헌인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할 것을 권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단식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시지 않습니다(마태 6,16-18 참조).
다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이 회개해야 할 때라고 보았습니다(3,2 참조).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스라엘이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혼인하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때라고 보셨습니다(이사 62,5 참조).
단식의 실천과 관련하여 세례자 요한이 강조한 회개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치의 초대는
어느 하나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닙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영적인 삶은
비이성적인(irrational) 것이 아니라 이성에 지배되지 않는(nonrational)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단순히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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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구 스테파노 신부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야 58,1-9ㄴ 마태오 9,14-15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된 단어가 있습니다.
(단식!!)
오늘 독서에서는 단식의 효과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바꿔 얘기하면, "제대로 된 단식을 하였을 때, 너희 목소리가 저 높은 곳까지
전해지게 되는 것이??" 단식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올바른 단식은 그 목소리가 하늘까지 전해지는 효과가 있다고 독서는 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단식이 알아야 되겠지요?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사순 기간 동안 적어도 세 번 '한 끼'의 단식을 합니다.
재의 수요일에
사랑의 단식 권고일에
주님 수난 성 금요일에
'단식'이라는 말은 먹을 것이 있음에도 의지적으로 의식적으로 먹는 것을
참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에...이 단식과 비슷한 말이 또 있습니다.
'굶다' - 이 '굶다'는 말은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끼니를 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단식'과 '굶다'의 차이는'안' 먹는 것과 '못' 먹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먹는 것을 포기하는 의미로 단식을 해야 하는데
한 끼를 먹어서는 안되는 날 한 끼 굶는 날로 생각들을 합니다.
단식의 의미를 잘못알고 있는 것이지요.
단식은 자신의 의식적으로 먹음의 욕구를 참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우리 교회의 전통인 '단식'과 요즘 유행하는 '다이어트'를 구분할 필요도 있습니다.
다이어트의 목적이 뭡니까? (살을 빼기 위해서)그러면 단식의 목적은 뭡니까?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욕구 중에 하나인 식‘욕’을 참아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먹는 것을 참는 것이 단식과 다이어트인데
그 목적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단식의 방법을 말씀드립니다.
먹어야 될 음식이 있는데 먹지 않았으니 먹지 않은 음식이 남아야 합니다.
금육 고기 먹기를 포기하는 날이기에 먹지 않은 고기가 남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단식해야하니까 몰아서 한 번에 두 끼의 식사를 하고 금육해야하니까 놔뒀다가
내일 먹는 것은 단식의 의미와 금육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단식했으면 한 끼의 식사가 남아야 하고 금육을 했으면 먹지 않은 고기가 남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가난한 이에게
이렇게 단식의 의미와 목적과 방법을 짧게 말씀드렸는데 새겨서 실천으로 옮기셨으면 합니다.
내가 하는 행위에 신앙이 담겨있지 않다면 그 행위는 푸닥거리에 불과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옮겨지는 행동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그런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부산교구 강인구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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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야 58,1-9ㄴ 마태오 9,14-15
단식, 많이가 아니라 잘
“저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회개의 사순절에 실천해야 할 것으로 단식, 자선, 기도 이 세 가지를 권면하는데
그것은 그제 읽은 복음말씀대로입니다.
사실 회개한 사람과 성인들은 예외 없이 이 세 가지를 잘한 사람들이기에
우리도 회개하여 성인이 되려면 이 세 가지 실천을 잘해야 하는데
이 세 가지 중 오늘은 단식에 집중하여 교회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들은 단식을 많이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단식을 아무리 많이 하였어도 어떻게 많이 했다고 주님 앞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단식을 많이 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이 중요한 거야!’라고 흔히 얘기하듯
단식도 많이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환갑이 되던 해에 서품 30주년이 겹쳐 자연스럽게 제 인생과 수도 생활을 함께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때 든 생각이 제가 60년을 그리고 사제생활 30년을
참 열심히 살았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열심히는 살았는데 잘 산 것은 아니었다는 반성이 되었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열심히’가 아니라 ‘잘’이어야 한다고 마음먹었지요.
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이 중요하고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도 그런 조로 얘기합니다.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요,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요,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기 욕심을 채우려 사랑을 거스르지요.
내 배 부르기 위해 남의 입의 것 빼앗고, 높이 오르기 위해 남을 짓밟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잘하는 단식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음식을 끊는 것보다 욕망을 끊는 것이요, 욕망을 끊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겁니다.
내 입에 넣기 위해 남의 것 빼앗던 우리가 내 입에 들어갈 것으로 자선을 실천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단식인데 그러나 오늘 주님은 여기서도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신랑을 위한 친구의 단식을 가장 완전한 단식의 예로 제시하십니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가 먼저고 음식은 늘 2차적인 겁니다.
사람보다 먹는 것이 중요한 식도락가는 맛에 탐닉하지만
사랑이 중요한 사람은 맛보다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요즘 와서 저의 최고의 식탁은 맛집에 가서 먹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정성껏 준비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와 맛있게 먹어주는 식탁이고,
그래서 협동조합을 시작하고 센터가 마련되면 이런 식탁을 마련할 것입니다.
한 주일에 한 번 열두 분의 조합원을 번갈아 초대하여 미사를 봉헌한 후
제가 준비한 식탁에서 주님과 제자들처럼 사랑의 나눔을 하는 겁니다.
음식은 내 배를 채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라고 있는 것이니
사랑을 배운 우리는 누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쁘게 축하하며 먹고,
안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넘어가지 않아서 먹지 않습니다.
세월호 단식투쟁을 할 때 옆에서 폭식한 사람들처럼 그래서도 문제지만
좋은 일에 같이 기뻐해주기를 바라는 사람 앞에서 단식하는 것도 문제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과의 식탁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단식하시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식사하시겠습니까?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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