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레위기 19,1-2.11-18 마태오 25,31-46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가톨릭평화 신문 2월 12일 가사에서 3가지 소식을 보았습니다. 1면에는 암 환자들을 위해서
20억 원을 기부한 김성주 씨의 이야기입니다.
김성주 씨는 가족들을 설득해 동생 김계숙 씨의 유산을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마뗄암재단’에 기부하였습니다. 김성주 씨도 매년 2억 원씩 5년간 더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유산 때문에 가족들이 불화를 겪고 재판까지 가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김성주 씨 가족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유산을 봉헌하였습니다.
6면에는 교황님이 ‘민주콩고와 남수단’을 방문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황님은 민주콩고에서는 내전의 상처를 딛고 서로 용서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남수단에서는 난민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령의 교황께서 몸이 불편함에도 기꺼이 아프리카를 방문한 것은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7면은 매주 소개되는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입니다.
홀로 가족들을 돌보며 열심히 살았던 어머니의 사연이 소개 되었습니다.
이 어머니의 안타까운 소식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어머니의 건강과 가족을 위해서
정성을 나눌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화려해 보이고, 성공과 명예가 주어질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이지만 그 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초라해 보이고, 힘들고 외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깃발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며,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셈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산 사람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병들고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 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 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들이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이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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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레위기 19,1-2.11-18 마태오 25,31-46
멈추어 익명의 그들에게로
나의 님은 어디에 계실까?
지금이 바로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고 힘 있어 보이는 것들을 좇는 발길을 멈출 때이다.
오늘 제1독서에는 하느님의 ‘거룩함’에서 오고 그것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도 요구되는
‘성덕의 율법’이 나온다. 이는 거룩한 관계나 종교의식에 관한 규정들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 있어서의 도덕적, 규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 중심 주제는 공동체에 중요한 형제적인 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그 밑바탕에는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법칙이 자리하고 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역사의 피안(彼岸)에 존재하시는 신비 자체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거룩함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보여주시며, 인간을 자아와 물질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켜주신다.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해주는 길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레위기 19장 18절)이 거룩함으로 가는 지름길이요
님 만남의 장(場)이다.
‘도둑질하거나 속이거나 사기해서는 안 되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레위기 19장 11절-12절). 또한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되며(레위기 19장 13절),
귀먹은 이에게 악담하거나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레위기 19장 14절).
재판할 때는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되며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레위기 19장 15절).
중상하러 돌아다니거나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되며,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레위기 19장 16-17절).
형제자매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고,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레위기 19장 18절).
오늘 복음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주었는가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임을 말해준다.
“가장 작은 이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
그들은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의미한다.
마태오 교회에서 많은 지식을 가지지 못하면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겸손한 신자들의 딱한 사정은
분명히 문제시 되었던 것 같다.
마태오는 지식인과 비해서 멸시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존엄성을 상기시켜 준다.
따라서 마태오는 심판의 보편성과 나라의 보편성을 연결시키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구현하려면 ‘가장 작은 이를 사랑해야 함’을 확인하고 있다.
가장 작은 이는 우리의 이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수님의 공생활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복음 13장 34절)
하신 말씀처럼 자신 전부를 내놓으시는 사랑의 생활이었다.
예수께서는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나 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동등한 인격체로써 대하셨다. 그분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충만히
베풀어주시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셨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바로 주님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삶의 목표이다.
사랑만이 우리를 진정한 삶의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셨듯이, 우리도 먼저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전 존재를
봉헌하고 그분 뜻대로 생각하고 그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분의 심장으로 더불어 연민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언제나 한없는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기에 우리 삶은 진정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울고 있는 이들과 굶주린 이들, 소외된 이들,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한 나 홀로 기뻐할 때가 아니다.
이 사순절에 보잘것 없는 나를 귀하게 여겨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회상하자.
나만을 보고 나의 이익과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싶은 것만을 추구하였던 발걸음을 멈추자.
멈추어 내 밖에 '이름 모르는 너', '상관없는 그'로 지나쳤던 보잘것없는 이들에게로 눈길을 돌리자.
참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가장 작은 이를’ 위해 자신과 재물과 시간과 마음을 내놓고,
내 자신처럼 사랑해보자! 바로 그곳이 거룩한 성전(聖殿)이요,
예수님의 거룩한 몸이며, 하느님 나라가 아니겠는가!
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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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수 야고보 신부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레위기 19,1-2.11-18 마태오 25,31-46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마태오 복음 25장 31절-46절 참조)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대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대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이방인이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최후심판 때이다.
오늘 복음에서 몇 가지를 묵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테 선물로 받은 것이다.
즉 나의 생명, 시간, 능력, 이웃 등은 모두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들을 잘 관리하는 것뿐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기 1장 28절)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잘 관리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창조하시어 인간에게 맡긴 모든 것을 잘 관리하여 번성하게 만드는 것이 복을 받는 일이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다. 창조주는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하느님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과 인간과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나는 다만 하느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나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가장 작은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뿐이다.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것이 하느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이고 그 명령을 따라
내가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는 것이 오늘 나의 사명이요 복을 받는 일이다.
둘째,
하느님이 최후 심판을 내리실 때 사용한 동사는 현재이지만 심판을 내리시는 내용은
과거 동사를 사용하셨다.
즉 심판하실 때에는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는
현재 동사이고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라고 그가 한 행동은
모두 과거 동사를 사용하셨다.
그러니까 최후심판은 최후 심판 때에 가서 즉석으로 이루워 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그가 살았던 행적을 가지고 심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후 심판은 먼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재 내가 사용하는 시간을 통해서
이루워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매 순간은 곧 나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실하게 살아야 할 시간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 오늘이다.
하느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미래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시는 것이다.
내가 받아야할 하느님의 축복은 미래에 받을 것이 아니라 오늘 받아야 한다.
하느님은 오늘 복을 주시는 분이시지 마지막 날에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마지막 날에는 당신이 나에게 주셨던 그 복을 거두워 드리실 뿐이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 가서 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은 하느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달린 것이다.
오늘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을 잘 받아들여서 축복 받는 삶을 살았으면 마지막 날에 가서
축복을 받을 것이오, 오늘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들이는 삶이 아니라
저주받는 삶을 살면 마지막 날에 가서 저주받게 될 것이다.
셋째,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삶은 어떤 삶이고 저주받은 사람은 어떤 삶인가? 하느님이 축복으로 나에게
주신 삶을 나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삶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 내가 복을 받는 삶이란 가장 작은 이들이 굶주려 있을 때에 먹을 것을 주는
것이요,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이요,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요,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요,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을 찾아주는 것이다.
저주 받는 삶은 어떤 삶인가?
오늘 가장 작은 형제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는 것이요,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는 것이요, 이방인을 따듯이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지 않는
것이요, 병든 이나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아 주지 않는 것이다.
즉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이 저주 받은 삶이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는
것이 복을 받는 삶이다.
넷째,
내가 받은 것을 나누어 주어야할 "가장 작은 이들"이란 누구인가? 가장 작은 이들이란 내가
하느님 한테 받은 축복을 나누어 줄 대상이다. 그 대상이 부자도 아니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도
아니요, 지식인도 아니다.
가장 작은 이란 내가 언제나 만날 수 있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내가 무엇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그 어떤 댓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아무런 조건없이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나누어 주는 것을
겨우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가난한 사람이다.
"가장 작은 이들"란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나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다.
지금 현재 나의 상황이 어떻든 나는 "가장 작은 이들"보다는 나은 형편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위에 그 어떤 사람도 나의 것을 나누어 주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든 이들이 다 내가 나누어 주어야할 대상들이다.
세네카는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요 그것도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영원히 번성하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축복해주시고 그 축복으로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 축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이 바로 자살하는 사람이다.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심는 것을 거둔다.
심지 않고는 거둘 수가 없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는 법이다.
아버지께 축복을 받는 사람은
"세상 창조 때부터 나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요,
저주 받는 사람은
"나에게서 더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야고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