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글들은 박준 시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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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폐가는 자신과 함께 살던 사람의 시간을 풍장시키듯 서서히 기운다. 깨진 유리창과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바람을 마주 들이기도 하며.
떠난 이를 기억하는 일은, 아직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과 꼭 닮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나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너는 다만 슬프다고 했다.
'살 만해?' 아니 '죽을 만해?' '필요한 것들은 없어?' '지난번에 같이 왔던 사람은 누구야?'
어는 날은 오랜만에 나타난 당신이 하도 반가워서, 꿈속 당신에게 내 볼을 꼬집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당신이 웃으며 내 볼을 손으로 세게 꼬집었다. 하지만 어쩐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꿈속에서 지금이 꿈인 것을 깨닫고 엉엉 울었다. 그런 나를 당신은 말없이 안아주었다. 힘껏 눈물을 흘리고 깨어났을 때에는 아침빛이 나의 몸 위로 내리고 있었다.
당신처럼 희고 마른 빛이었다.
어떤 일을 바라거나 무엇을 빌지 않아도
더없이 좋았던 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날들이 다 지나자
다시는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스스로에게 빌어야 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어쩌면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의 옛 모습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소리가 들리는 방식이 다르다. 저녁이 가고 어둠이 밀려오는 속도가 다르다.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이 다르고 새벽 창으로 들어오는 공기의 서늘함이 다르다.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 그 수많은 다름을 견주어보는 동시에 그 다름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이 우리의 사랑을 아프게 만든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평소 자신에게 조차 내색하지 않던 스스로의 속마음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대개 오랜 상처나 열등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사랑을 외롭게 한다.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새로운 시대란 오래된 달력을 넘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보는 혹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서로의 눈동자에서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첫댓글 혼자 제주 여행 가서 읽게 된 책이었는데 이 부분이 참 와닿았어
제목에 '일은'이 빠진 것 같아 ㅎㅎ
ㄱㅆ 헉 바로 수정해따!!! 알려줘서 고마워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와 ㅠㅠㅠ이런게 진짜 시인이지...책바로 삼....
너무 좋아
내가 인상 깊게 읽었던 구절들이 다 있으니까 왠지 기분이 좋다 느낌이 통한 느낌이야 글 올려줘서 고마워 게녀야
공감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