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9월에 왕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이르러 군사를 합쳐 일선군(一善郡)으로 나아가 머물렀는데, 신검(神劒)이 군사를 이끌고 이에 대항하여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왕이 견훤과 함께 군사를 사열하고 견훤과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述熙)ㆍ황보금산(皇甫金山)과 원윤(元尹) 강유영(康柔英)이 마군(馬軍) 1만 명을 거느리고, 지천군 대장군(支天軍大將軍) 원윤(元尹) 능달(能達)ㆍ기언(奇言)ㆍ한순명(韓順明)ㆍ흔악(昕岳)과 정조(正朝) 영직(英直)ㆍ광세(廣世) 등이 보군 1만 명을 거느려 좌강(左綱)이 되었다. 대상(大相)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박수경(朴守卿)과 원보(元甫) 연주(連珠)ㆍ원윤 훤량(萱良) 등이 마군(馬軍) 1만 명을 거느리고, 보천군 대장군(補天軍大將軍) 원윤 삼순(三順)ㆍ준량(俊良)과 정조 영유(英儒)ㆍ길강충(吉康忠)ㆍ흔계(昕繼) 등이 보군(步軍) 1만 명을 거느리어 우강(右綱)이 되었다. 명주(溟州) 대광(大匡) 왕순식(王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렴(王廉)ㆍ왕예(王乂)와 원보 인일(仁一) 등이 마군(馬軍) 2만 명을 거느리고, 대상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ㆍ관헌(官憲) 등이 흑수(黑水)ㆍ달고(達姑)ㆍ철륵(鐵勒) 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 9천 5백 명을 거느리며, 우천군 대장군(佑天軍大將軍) 원윤 정순(貞順)과 정조 애진(哀珍) 등이 보군(步軍) 1천 명을 거느리고, 천무군 대장군(天武軍大將軍) 원윤 종희(宗熙)와 정조 견훤(見萱) 등이 보군 1천 명을 거느리며, 간천군 대장군(杆天軍大將軍) 김극종(金克宗)과 원보 조간(助杆) 등이 보군 1천 명을 거느려서 중군(中軍)이 되었다. 또 대장군 대상 공훤(公萱)ㆍ원윤 능필(能弼)ㆍ장군 왕함윤(王含允) 등이 기병 3백 명과 여러 성의 군사 1만 4천 7백 명을 거느리어 삼군(三軍)의 원병(援兵)이 되었다.
후삼국 최후의 전투인 일리천 전투 직전의 장면입니다. 이 때 고려군은 외부의 군대까지 동원하였습니다. (밑줄 친 부분)
좌강(좌군)이 마군, 보군 합쳐 2만, 우강(우군)이 마군, 보군 합쳐 2만이고, 중군이 마군, 보군 합쳐 2만 3천 + 흑수말갈, 달고, 철륵 등의 기병 9천5백 이므로, 응원군 제외한다면 대략 7만이 조금 넘습니다. 이 중에서 약 1만 정도가 흑수말갈, 달고, 철륵에서 동원한 기병이므로 꽤 많이 동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첫댓글 이때당시 고려군을 보면 기병이 거의 60%에 달한다는 ㅡ.ㅡ;;
달고가 머드래요?
철륵이라면.. 중국 감숙성 부근 아닌가요.. 돈황근처...
아무래도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온애들이 아닐까요???
아마 용병일겁니다. 특히 말갈(여진)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쳐 살았기 때문에 후에 생존권을 보장받거나, 아니면 친 고려파(친 고구려파..라고 하는게 더 적당할듯 합니다) 여진인들이 합세했을 가능성도 높지요.
말갈기병대의 참전은 확실합니다. 유금필이 지휘했다고 하더군요. 글쎄요 철륵이나 달고는 좀... ㅡ.ㅡ;; 그리고 제가 알기론 거의 9만명 가까이 동원됬다고 알고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