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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年 정착과 부흥의 해☜
마12:39)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표적을 구하나,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딤전4:5)
사1:1-9절) 만신창이 나라 유다
英國의 에드워드 6세가 왕으로 즉위 했을 때, 칼빈 선생은 즉시 자신의 이사야서 주석을 헌정(獻呈)했습니다. 칼빈은 격동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에드워드 6세가 이사야의 가르침을 경청했던 히스기야처럼, 통치하기를 바란다고 헌사(獻詞)에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드워드 6세가 아까운 나이로 일찍 죽고, 엘리자베스 l세가 즉위 했을 때, 칼빈은 이사야서 주석 개정판을 헌정했습니다. 이사야서의 메시지가 통치자나, 백성들 모두에게 얼마나 적절하면서도 중요한 교훈을 주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자신이나 우리나라 위정자들이 이 이사야의 설교를 다시 경청할 수만 있다면, 어떤 난관에서도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가 처음 예언활동을 시작할 때는 웃시야 말기였습니다. 6장에 보면,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서 놀라운 환상(幻像)을 체험하며, 유다 민족에게 보내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유다 나라는 웃시야 때부터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북 이스라엘의 기세에 눌려 거의 명맥만 유지하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호세아 선지자의 말대로 여로보암 2세 때부터 몰락했고, 그 틈을 타서 유다는 다시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웃시야 때는 유다가 솔로몬이후 가장 강생(講生)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흥왕에 유다는 교만(驕慢)해졌고, 영적(靈的)으로 피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사야는 물질적 부요가 유다의 영혼(靈魂)을 썩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호황은 요담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때부터는 영적(靈的) 부패의 댓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습니다. 아하스 때, 유다는 큰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의 베가와 수리아의 르신이 연합군을 만들어서 유다를 친 것입니다.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 아하스는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 이곳을 침략할 기회를 노리던 앗수르는 수리아를 망하게 하고, 이스라엘을 거의 멸망(滅亡)직전까지 가게하고, 유다에까지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목숨만 건졌지,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나라 전체가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때를 초점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하스는 특히 다메섹에 갔다가 그곳 제단의 모형을 그려가지고 와서 그것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만들게 했습니다. 그는 유다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히스기야는 정직하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우상(偶像)을 없애는 대개혁을 일으키고, 꺼져가는 유다에 부흥의 불길을 다시 밝혀 놓습니다.
히스기야 때,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영구적으로 멸망(滅亡)하고 맙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쳐들어왔던 앗수르는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이 보낸 사자(使者)로 말미암아 18만 5천 명이 죽는 엄청난 재앙(災殃)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히스기야 때, 유다의 영적(靈的)부흥은 다시 회복됩니다. 그러나 왕의 제도적 개혁은 백성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있는 죄는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다시 시들어갑니다. 히스기야는 앞으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滅亡)할 것이라는 예언(豫言)을 듣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무지막지한 배교자였습니다.
물론 역대서 에서는 포로로 끌려간 후, 나중에 회개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의 개혁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다시 우상(偶像)의 나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므낫세의 손에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유다가 어렵게 지내다가 막 잘 살게 된 때부터 엄청난 영적(靈的)인 침체 후, 다시 부흥기로 접어드는가 싶더니, 결국 종말(終末)을 향하여 가라앉는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아하스의 부패(腐敗)를 돌이키고, 히스기야의 부흥을 가져오게 한 것은 이사야의 예언(豫言)활동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앗수르라고 하는 엄청난 강대국이 결국 멸망(滅亡)하고, 바벨론이라는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북 이스라엘 왕국이 영구적으로 멸망(滅亡)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 나라 유다도 새로 고개를 쳐들고 있는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滅亡)할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보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일찍 똑바로 보는 것이 우리가 겪는 이 어려움에서 빨리 벗어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가장 큰 비극은 자신들이 누구냐? 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데서 있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그 일 자체에 빠져서 내가 누구며, 무엇하는 사람인지,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내가 주인이 되어서 일을 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일이 주인이 되어 나를 부려먹고 있습니다. 그때는 일이 너무 방대해져서 내 힘으로도 어쩔 수 없이 내리막길을 향해 달음질치게 됩니다. 즉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배(船)는 낭떠러지를 향하여 가고 있고, 이미 방향을 돌리기에는 너무나 늦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역사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즉 나라나 단체의 방향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일상적인 일에 빠져서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끊임없이 물길을 거슬러 가도록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만약 물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반드시 낭떠러지를 향하여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는 길이라는 것은 뻔합니다. 좀 어렵게 살다가 먹고 살 만해지면, 부인을 두 명씩 두고, 사치와 방탕에 빠져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낭떠러지를 향하여 조금씩 조금씩 내려가는 이것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는 영안(靈眼)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며, 예언자(豫言者)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소경(盲人)일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끊임없이 낭떠러지를 향하여 내려가는 유다의 흐름을 말씀으로 막았던 자입니다. 그는 학교 안이나, 교회(공동체) 안에서 폐쇄된 세계를 대상으로 교리 교육만 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시대의 흐름 앞에 온 몸을 던졌으며, 시대적인 질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답을 제시했던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폐쇄(閉鎖)된 공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시대가 던지는 수많은 도전(挑戰)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누구이며,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느냐? 는 이것입니다.
Ⅰ.문제를 공개함(상)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한 시대는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서두(序頭)에서 설명한 대로, 이사야의 본격적인 활동은 웃시야 왕이 죽던 때부터입니다.그러나 그것이 그가 전에는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웃사야는 나중에 문둥병에 걸려서 격리되었고, 그의 아들 요담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물론 요담이 정식 왕이 될 때는 웃시야가 죽은 후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도 요담은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이사야는 웃시야 때도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웃시야 때는 유다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부강(富强)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약(弱)해지고, 세계정세가 불안정한 틈을 타서 강해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유다를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얻어진 물질적 축복은 유다 백성들에게는 온전한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물질적 부요함은 그들 안에 있는 교만(驕慢)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유다 백성들은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난하면 대부분 겸손(謙遜)합니다. 물론 지독하게 악(惡)한 사람들도 있지만. 비교적 순수한 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손에 한번 돈이 주어지면, 그들 안에 잠재되었던 본성(本姓)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됩니다. 정말 겸손(謙遜)한 사람은 돈이 생기면 더 두려워합니다. 돈이 자기를 교만(驕慢)하게 만들 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회가 없어서 교만(驕慢)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물질적 풍요는 무서운 시험(試驗)거리가 됩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웃시야 시대의 부강(富强)은 그런 무서운 시험(試驗)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잘살고 난 후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곧 이런 시기에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유다 백성들에게 물질적 풍요가 축복이 아니라, 무서운 시험(試驗)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盲人)들을 설득해서 안전한 길로 인도 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끝없는 낭떠러지 길에서 멋대로 뛰어가려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무데서나 손만 놓으면, 달려갑니다. 즉 갓길도 낭떠러지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잠시라도 눈을 팔면, 금방 멸망(滅亡)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어린아이들은 힘이 없으니까 억지로라도 끌고 올 수 있지만, 어른들은 자기 길이 옳다고 끝까지 우깁니다. 또한 조금이라도 과격하게 말을 하면, 기분이 상해서 틀어집니다. 이사야는 이 싸움을 평생에 걸쳐 했습니다.
평안할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만(驕慢)과 부패(腐敗)와 싸워야 했고, 위급할 때는 바로 눈앞에 쳐들어와 있는 적군(敵軍) 앞에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해야만 했습니다. 이사야의 한평생의 삶은 끊임없는 영적(靈的) 전투(戰鬪)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가 이토록 웅장하고 장엄하며, 능력 있는 예언(豫言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볼 때,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獻身)되었으며, 유다 백성들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소경(盲人)을 설득하려면, 소경(盲人)의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또 아이들을 설득하려면 아이들 처지에 있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득력 있는 말씀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무엇보다 유다 백성들의 문제를 천하(天下)에 공개(公開)하려고 합니다.
1:2절)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여기‘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는 것은 모세의 말을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은 영원하기 때문에 하늘과 땅을 증인(證人)으로 삼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신32:1절)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여기서 이사야가 하늘과 땅을 부르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의 비행(非行)을 온 천하에(天下) 공개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존심(自尊心)을 생각해서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지 않고, 쉬쉬해 왔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비행(非行)이 온 천하(天下)에 공개되는 이것입니다. 전에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음행(淫行)이 온 천하(天下)에 공개되었습니다. 사실 미국인들 대부분은 그것이 공개되지 않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텔레비전 방송과 신문을 통하여 클린턴은 백악관에서 근무하는 인턴 여직원과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온 천하(天下)에 시인(是認)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다.
아무리 법치주의 국가라 해도 대통령의 은밀(隱密)한 비밀(祕密)을 누가 감히 온 천하(天下)앞에서 고백하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클린턴은 대국(大國)의 대통령이기 이전에 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법정(法政)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마 클린턴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죄는 은밀(隱密)하게 짓지만, 결국 만천하(滿天下)에 공개(公開)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만 죄짓는 것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쉬쉬하면서 감추어두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침묵(沈默)하신 것은 백성들이 스스로 회개(悔改)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알면서도 침묵(沈默)하고 계신 이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눈물로 회개(悔改)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야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고, 버틸 때,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온 세상에 다 폭로(暴露)해 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죄에 대한 수치심(羞恥心)이 회복(回復)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죄에 대한 수치심(羞恥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부끄러워해야 하고, 얼굴을 붉힐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그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그런데 부끄러운 죄를 짓고 난 후에도 얼굴을 뺏뺏하게 들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나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느냐?’고 한다면, 그는 이미 양심(良心)이 죽어 있는 좀비인 것입니다.
많은 경우 가족들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破滅)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예(名譽)가 손상될까봐 쉬쉬하고 있다가 더욱 큰 파멸(破滅)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담 중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더 부패(腐敗하고, 더 타락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한 때, 바늘을 도둑질하는 것을 보았다면, 그는 얼마가지 않아서 소(牛) 도둑질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도둑질에서 떠나려면, 한번 공개적(公開的)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 문제를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은 이토록 무서우며,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노력해서 번 것이 아니면, 절대로 손을 대지 말아야겠다’는 것이 뼈에 새겨져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죄를 노출(露出)시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해서라도 수치심(羞恥心)이 회복(回復) 된다면, 그는 잃어버린 이상의 고귀(高貴)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아-멘
찬송가 259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매일 새벽(夏)5-6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진리의 복음💖
†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심방(尋訪)및 궁금한 내용 문의☞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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