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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가>
함평천지 늙은몸이 광주고향을 보려하고
제주어선 빌려타고 해남으로 건너갈제
흥양의 돋은 해는 보성에 비쳐있고
고산의 아침안개 영암을 둘러있네
태인하신 우리성군 예악을 장흥하니
삼태육경의 순천심이요 방백수령이 진안현이라
고창성에 높이앉아 나주풍경 바라보니
만장운봉은 높이솟아 층층한 익산이요
백리담양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만경인데
용담의 맑은물은 이아니 용안처며
능주의 붉은꽃은 곳곳마다 금산인가
남원에 봄이들어 각색화초 무장하니
나무나무 임실이요 가지가지 옥과로다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인데
이초는 무주하고 서기는 영광이라
창평한 좋은세상 무안을 일삼으니
사농공상 낙안이요 부자형제 동복이라
강진의 상고선은 진도로 건너갈제
금구의 금을 일어 쌓인게 김제로다
농사하는 옥구백성 임피사의 둘러입고
정읍의 정전법은 납세인심 순창이요
고부청정 양유색은 광양춘색이 팔도에 왔네
곡성에 숨은선비 구례도 하려니와
흥덕을 일삼으니 부안제가 이 아니냐
우리 호남의 굳은 법성 전주백성 거느리고
장성을 멀리싸고 장수를 돌아들어
여산석에 칼을갈아 남평루에 꽂았으니
대장부의 할일이 이외에 또 있으랴.
2,3면
< 길위에서 > : 카페 앨범에 들어 있습니다.
4,5면
< 답사후기 >
내 마음에 남을 답사
고 혜 숙
도시에는 빨강 넝쿨장미가 어우러지고, 산과 들에는 하얀 찔레가 향기를 뿜어내는 5월,
나주와 목포로 답사를 간다는 민학회 소식에, 가을 햇살에 나른해지는 오후가 떠올랐던 것은 아마도 가까이 다녔던 곳이었기에 긴장이 되지 않은 탓이었을 게다.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를 좋아한다는 큰아들과 뛰어 노는 것 밖에 모르는 둘째 아들을 데리고 버스에 올랐다.
전라가 굶으면 팔도가 굶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주는 중요한 곡창지대이다. 구한말 고깃배들이 성시를 이루었던 영산포구가 있던 영산강, 나주를 지키는 진산으로 민족의 민간 신앙 중심지였던 금성산이 있다.
나주시청 앞에서 윤여정 회원의 안내를 받으며 가장 먼저 간 곳이 완사천이었다.
꽃잎을 벌려 놓은 듯한 조그마한 샘이었는데, 표주박에 버들잎 띄워 왕건에게 건네주던 오 씨 처녀를 상상해 보았다. 옛이야기에서 많이 등장하는 설화 속 얘기지만 그래도 가슴 설레이는 건 여자의 맘일까?
버스는 장어 요리집이 즐비한 구진포 삼거리에서 좌회전(난 항상 우회전만 했는데). 회진의 임제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조용한 시골 강변길.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 받으며 임제 선생의 기념관 앞 비석 앞에 섰다.
죽음을 앞두고 남긴 유언이 새겨져 있는데, 조선만이 중국을 받드는 것을 한탄하는 내용의 문장은 당시 쉬이 생각 할 수 없었던 그만의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성격을 잘 드러 내주는 문장이라 할 수 있겠다.
영모정에서 회장님이 준비해 주신 새참을 먹고 「나무새」 소리를 들으며 한숨 돌릴 때 큰 정자나무와 어머니와 같이 포근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가족 친척 모여서 소풍 나온 것 같은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포만감에 젖은 몸을 안고 우린 400 여 년 간에 걸쳐 사용된 여러 가지 복합양식의 무덤인 복암리 고분에 올랐다. 이 고분을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시골의 한 할아버지의 옹고집 덕분이었다니, 이 거대한 고분을 뒤로하고 사진 한 컷 찍을 수 있는 것도 그 고집 덕분이리라...
버스는 들판의 넓은 보리밭을 뒤로하고 목포로 달렸다.
목포는 답사 때마다 항상 들었던 김우진과 윤심덕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우진이 태어나 자란 곳이며, 독창적인 언어 세계를 보여준 비평가 김 현. 목포 문화원에서 만나 본 최초 여류작가 박화성의 고향이다.
옮기는 발걸음이 무거워질 무렵.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는 유달산에 올랐다. 목포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노래를 타고 스쳐지나갔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마음
한 때 유행가 가사일진데 이리도 마음 속에 남아 애달플까?
작가만이 글을 쓰는 것 아니고 시인만이 시를 쓰는 것 아닐 진데 ... 마음 속에 들어와 잔잔하게 나를 붙잡는 것. 그것이 진정 글이려니 생각 해 본다. 5월 답사도 그렇게 내 마음에 남을 것임을 또한 생각 해 본다.
백호 임제가, 스승이었던 대곡 성운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대곡선생만(大谷先生挽)>이라는 작품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면서...
언덕 너머에 골짜기 하나
산은 높고 물은 흐르느니
사람과 흰 구름 함께 머물다
사람은 떠나고 흰 구름만 남았어라
흰 구름 때로 하늘가로 밀려갔다
해 지면 돌아와 바위 밑에 잠드는데
이 사람 한번 가선 다시 올 줄 모르느니
향긋한 휘장, 쌓인 먼지에 달빛만 밝아라
6,7면
<미리 가본 답사>
아리랑과 혼불, 그리고 상춘곡의 그 곳
우리나라는 지형적으로 어디를 둘러봐도 뒷동산이며 높은 산이 곳곳에 보이는 것처럼, 산지가 70%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지평선을 보기가 쉽지 않다. 이런 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지평선 축제를 여는, 김제의 부량면 용성리 옛 벽골제 앞에 아리랑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다.
"김제 만경평야,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갱 외에밋돌’이라고 불리는 김제 만경평야로 곧 호남평야의 일부였다. 호남평야 안에서도 김제 만경벌은 특히나 막히는 것 없이 탁 트여서 한반도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내는 곳이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만경평야에 대한 묘사다.
'징게멩게 외에밋돌'이라는 표현에서 '외에밋돌'이라는 말은 '너른 들' 즉 평야를 일컫는 말로 곧 '김제 만경 너른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문학관은 2층 규모로 세워졌다. 1층 전시실에는 ‘아리랑’의 발원지인 김제의 전경, 소설진행 시간에 맞춰 당시 역사를 정리한 영상자료, 조씨의 육필 원고 2만장 등을 전시했고, 2층에는 작품구상 노트, 취재 도구, 필기구 등 89종에 350여 가지 물품을 배치했다.
'달님이시여, 좀더 높이 높이 돋으시어 멀리 비추어 주소서'로 풀이 되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이 절로 생각나는 정읍사의 고장, 그 정읍 그리고 칠보에서 상춘곡의 작품현장을 둘러본다. 불우헌 정극인이 벼슬에서 물러나와 10년 동안 고현내에 머물면서 고현동악을 만들어 후진양성과 고현 향약을 실시하였으며, 산수가 아름다운 고현내의 춘경을 읊은 '상춘곡'을 지었다.
『 여보시오. 이웃 사람들아. 산수 구경 가자꾸나. 풀 밟기는 오늘하고 목욕은 내일하세. 아침에 산나물 캐고, 저녁에는 낚시질 하세. 막 익은 술을 두건으로 걸러 놓고 꽃나무 가지 꺽어 수 놓고 먹으리라. 따뜻한 바람이 문득 불어 푸르른 물을 건너오니, 맑은 향기는 잔에 지고, 떨어지는 꽃잎은 옷에 진다. 』
칠보의 향토문화사료관에서 만난 안성렬님의 칠보의 7가지 자랑, 무성서원, 용계서원과 5곳의 사당을 일컫는 2원 5사에 대한 얘기, 향토문화사료관 뒤편의 시산사·송정·후송정, 정극인의 가사비 등 여러 가지에 대한 말씀을 들으며 이 작은 고을의 애국 충절과 문화가 기대이상의 뿌듯함으로 받아들여진다.
조선초인 1483년(성종 14)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겨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그대로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인 사적 제166호 무성서원도 들른다.
김제에서 정읍의 칠보, 혼불문학관 답사를 위한 남원 가까운 사매면까지는 자주 들르는 곳이 아니어서 인지 차를 타는 시간이 좀 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작년 10월에 개관한 혼불문학관의 전경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동네 앞에 들어서자 예전 생각이 났다. 골목길을 쭉 올라가 동네 끝 높이 자리잡은 종가댁이랑 저수지가 눈에 선하다. 혼불문학관은 골목길 왼쪽으로 길을 새로 만들고 넓게 터를 잡아, 아래로는 넓진 않지만 안락해보이는 노봉마을의 논밭들과 소설속의 청강부인이 가뭄을 대비해 팠다는 청호저수지도 보이고, 종가댁의 느낌 만큼이나 당당하고 지붕의 선이 아름다운 문학관 위로는 소설에 나오는 노적봉 등의 산세들도 한눈에 들어온다.
동네로 들어가기 전에 지나는 서도역은 소설 <혼불>에서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혼불>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철거가 되지 않고 남원시에서 매입하여 보존 상태에 있다고 한다.(새로운 역이 근처에 있음)
남원에서 88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로 오는 사이엔, 혼불문학관 건물의 일부로 처마를 당당하게 쳐들고 있던 그 누각에서 답사의 마무리로 대금 연주나 살풀이를 춰줄 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사일정에 하나 더 남은 고창의 미당문학관까지 둘러 볼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지나친 욕심이려니 생각하고 남겨두기로 했다.
(길잡이 역할을 해주신 신장용, 김세진님, 예비답사 내내 운전해주신 주정업님 애쓰셨습니다.)
<찾아가는 길>
광주 - 김제 벽골제, 아리랑문학관(조정래) - 점심(태인) - 정읍 칠보(향토문화사료관, 정극인 가사비, 무성서원) - 남원시 사매면의 혼불문학관(최명희) - 광주
8면
< 민학사람들 >
5월답사는
오붓한 한가족이었습니다.
복암리 아파트 고분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고 내려오시던 박선홍 이사장님 부부, 나주에서 안내를 맡아주신 윤여정님 부부, 박태학님 가족, 박근옥님 가족, 그리고 5월 답사기를 써주신 고혜숙님 가족 등 모두모두 보기에 정말 좋았습니다.
나주·목포는 잘 알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그냥 지나쳐 다니기만 했는데, 조금만 알고도 멋있을 거라 여겨졌던 백호 임제 선생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게 되면서 사모의 정까지 생기려 드는 것은...
사유지여서 지켜질 수 있었다는 복암리의 아파트 고분에서 바라 본 나주의 들판도 인상깊습니다.
목포의 자연사 박물관 뜰에 있는 박화성의 문학비와, 건물 뒤편 비자림 숲 앞의 김 현 문학비를 찾아 본 것도 의미가 있었고, 목포문화원 건물 2층의 박화성 문학기념관에서는 건물에 대한 이해와 여러 문인들의 문학적 평가와 더불어 멀지 않은 비슷한 세대를 살았으므로 그들의 사생활의 일부를 어른들께 듣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습니다.
윤여정님이
나주에서 안내를 맡아주셨습니다. 과거사는 물론 현재까지 나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주사람입니다. 나주의 이런 저런 자료도 세세히 챙겨주시고 거기에 선물까지, 오래 오래 간직하겠습니다.
민학회 카페에도 매일 방문하셔서 좋은 자료와 사진들을 많이 올려주는, 민학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특별회원입니다. 감사합니다.
고혜숙님이
5월 답사기를 써주셨습니다. 올해 들어 만난 민학회 새내기입니다. 하지만 시티투어나 민학회 답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열정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 마음 그 만큼 뿌리 내려져 진정한 민학인의 한사람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김세진님은
이번 답사에도 특별한 수고를 해주셨습니다. 영모정에서 여러 종류의 새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무를 자르고 큰 나사를 끼워 소리내는 「나무새」의 노래 소리에 모두들 한 때 즐거웠습니다.
강현구 부회장은
무등산 보호단체협의회에서 설립한 생명 숲학교 교장선생님을 맡으셨습니다. 자연에 대한 연구와 사랑만큼 부회장님의 건강도 함께 지켜주세요!
소중한 책을
기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획위원으로 활동했던 김경수님이 '광주땅 이야기’(향지사 刊·사진)를 출간했습니다. 광주의 지리를 풍수지리와 대동여지도 등과 비교해 꾸민 인문지리서인 '광주땅 이야기'는 광주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소개되고 있어 우리 고장을 깊이 있게 알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노력만큼 '광주땅 이야기'가 광주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려있길 바랍니다.
연회비 내주신 분 : 고영두, 성춘경, 송금자
특별회비 내주신 분 : 윤여정(10만원)
내주신 연회비(30.000원)와 특별회비는 민학회의 발전을 위해 소중하게 쓰겠습니다.
회원들의 관심과 동참도 바랍니다.
6월답사는
자기의 분신과도 같은 한가지에 혼신의 힘을 다해 이루어낸 감동을 맛봅니다.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했던 풍류객도 만나봅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충절의 얘기도 들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생각이 많아 피곤하고 지쳐있진 않나요?
도심의 열기에 숨이 막히진 않나요?
우리, 마음을 비우러 같이 떠나 보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