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종교역사
강화역사는 한국역사의 중심에서 외세의 침략과 개방의 압력을 이겨내면서 찬란한 문화를 창출해 냈다. 선사시대의 유적과 단군이 쌓았다는 참성단, 고려 항몽의 흔적 그리고 서구열강의 외세침략에 저항하는 역사를 한 몸에 품고 있다. 이러한 저항역사의 깊은 곳에는 정신적, 창조적인 민족정신을 세우게 하는 민족신앙이 강화사람들의 내면에 흐르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강화의 종교는 우리 민족의 국조신앙(國祖信仰)인 단군(檀君)신앙으로부터 시작된다. 단군이 마리산에 참성단을 축조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이래 왕조가 바뀌어도 제천(祭天)의식이 거행되는 국가적 연례행사로 치러지면서 우리 민족의 신앙과 의식으로 토착되었다. 고구려때 유리왕(溜璃王)이 사슴과 돼지를 잡아 이 곳에서 제사를 지냈으며(13년), 백제 비류왕(比流王)도 참성단에 올라 제사를 지냈고(313년), 신라때에도 이 행사는 계속되었다. 고려때는 고종이 천도한 2년 후인 1234년에 마리산 남쪽 산기슭에 이궁(離宮)을 짓고 왕이 친히 나가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계속 유지되어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왕이나 고위관리들이 참성단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와 같이 강화는 고대 시대부터 하늘을 숭배하는 신앙을 바탕으로 종교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경천교’, ‘숭천교’, ‘왕검교’라 불리다가 후대에 들어서는 ‘단군교’, ‘대종교’ 등으로 불리게 되는 민족종교의 중심으로 계승되어 왔다.
다음으로 대표적인 강화의 종교는 불교다. 강화에 불교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남아있는 사찰 중 가장 역사가 깊고, 가장 대표적인 사찰은 정족산 삼랑성 안에 있는 전등사(傳燈寺)이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381년)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고 있다. 아도는 고구려를 거쳐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인물로 알려져 있어 강화의 불교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절의 본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으나 고려 충열왕때 왕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 것에 연유하여 전등사로 명칭을 바꿨다.
이밖에 고찰로는 고구려 장수왕 때(416년) 창건한 적석사(積石寺), 백련사(白蓮寺), 청련사(靑蓮寺)와 통일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창건한 보문사(普門寺), 정수사(淨水寺) 등이 남아 있어 강화의 불교가 오랜 전통과 흥왕하였음을 보이고 있다.
특히 고려불교는 호국(護國)불교로 몽고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막으려는 종교적 동기에서 판각된 팔만대장경은 종교뿐 아니라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크다.
강화의 종교는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고려왕조가 몰락하고, 조선정부가 들어서면서 유교로 이어졌다. 하지만, 강화의 유교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고려 인종(仁宗)5년(1127년)에 나라에서 각 고을에 향교(鄕校)를 세워 유교의 도를 가르치라는 명이 내렸을 때 강화에서도 고려산 남쪽 기슭 고읍(古邑․지금의 내가면 고천리)에 향교를 세운 것이 강화유교의 기원이 되었다. 고종 31년(1244년)에는 시랑 이종조로 하여금 강화 8경 중 첫째로 꼽히는 월곶의 연미정에서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게 하였으며, 충선왕 때는 고려 말 거유(巨儒) 안유(安裕;安珦)의 문하생인 이연송이 강화에서 유교 경전과 문집들을 판각하여 발행하였다.
특히 강화 유교는 최씨 무인정권의 기틀을 잡은 최충헌에게 신임을 얻어 고려 중기 유학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고려가 강화로 천도할 때 함께 들어와 강화에서 죽어 묻힐 때까지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남겨 문장가로서도 명성을 날렸으며, 그는 유교뿐 아니라 불교,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자유분방한 학문과 생활로 고려 말기 학풍에 큰 획을 그었다.
강화 유교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표방한 조선시대에 들어 크게 발전하였다. 역대 유수들은 강화와 교동의 향교를 수축 또는 증축하는데 정성을 다하였으며, 인조 8년(1630년)에는 강화유수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明倫堂)을 건축하여 강화 유교를 중흥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정종대왕의 아들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화도면 사기리에 살던 이충익(李忠翊) 가문은 강화 유교의 위상을 크게 올려놓았다. 이충익의 아들 이면백(李勉伯)은 실학(實學)의 정약용(丁若鏞)과 학문적 교류를 나누며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강화 유학의 맥을 창출하였다. 다시 그의 아들 이시원(李是遠), 이지원(李止遠)은 병인양요 때 의병을 일으켜 대항하다가 프랑스군의 강화 함락 직후 자결하여 ‘충정공(忠貞公)’이란 시호를 받았던 절개 있는 유생이었다. 그리고 이시원의 손자 이건창(李建昌)은 고종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을 다녀온 바 있으며, 한성소윤(漢城小尹) 함경도 안핵사(按覈使)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까지 되었다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자 벼슬을 내 놓고 강화에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와 동행했던 정원하(鄭元夏), 홍승헌(洪承憲), 그리고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李建昇), 이건방(李建芳) 등이 이건창을 중심으로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후세에 ‘강화학파(江華學派)’라고 불리는 강화 유학의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중국의 양명학과 조선 후기 실학을 계승하고 있으며 항일(抗日) 민족의식이 강한 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이건창, 정원하, 홍승언, 이건승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압록강을 건너 망명길에 올랐으며, 이건방이 홀로 남아 강화학파의 맥을 이어 오다가 근세 국학의 선구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그 뒤를 계승하였다.
다음은 강화 천주교회이다. 강화본당(江華本堂)이 설립된 시기는 1958년이지만 강화 천주교회의 역사는 조선 말기 신유사옥(辛酉邪獄)(18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1801년 천주교인 박해로 강화도에 귀양 온 은언군(恩彦君) 인(裀)의 부인 송(宋)마리아와 며느리 신(申)마리아가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模)에게 영세를 받고 천주교인이 된 것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순교한 사건이 있었다. 이것이 강화 천주교의 첫 순교사건이었다.
강화에서 천주교의 전파가 정확히 언제 이루어 졌으며, 교인의 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천주교와 관련되어 순교당한 역사는 계속 이어졌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에서 프랑스함대에 올라 리델신부를 만났던 성연순(成連順)과 원윤철(元允哲)이 처형당하였다.
2년 후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소 도굴사건이 터졌을 때 이에 분노한 대원군은 2년 전 리델신부를 만났던 최인서가 체포되었고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조참봉의 부친)과 함께 강화에 압송되어 강화에서 처형당하였다.
다시 3년 후인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를 공격한 신미양요 때에도 천주교인들은 미국인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강화 출신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박상손(朴尙孫) 등 세 명이 그해 5월 29일(음력)에 갑곶나루터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 박해는 끝이 나고 강화에도 천주교회의 신앙공동체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강화의 천주교 신앙공동체는 외지 출신 천주교인이 강화에 살려고 이주하여 오면서 시작되었다. 신미양요가 나던 1871년, 충청도에서 살던 이(李)아가다가 강화읍 대산리 돌머리에 사는 김씨 집안으로 시집와서 자기 남편을 전도하여 영세를 받게 하였다. 이들은 자기의 어린 딸 김루이사를 인천에 있는 천주교 보육원에 보내 양육시킨 뒤 1918년 영종도에 사는 안일만(베드로)와 결혼시켰다. 이 가족은 1922년 강화읍 대산리 이아가다가 살던 집에 정착하여 강화주민들에게 전교하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강화 본당의 뿌리가 된다. 1925년에는 충청도에 살던 안야고버가 하점면 부근리에 정착해서 독점을 경영하며 전교활동을 벌였으며, 1928년에는 충남 서산에 살던 양촌명 등 교인 9명이 길상면 온수리로 이사 와서 전교활동을 벌였다. 1935년 포천에서 이주한 이재명(야고보)이 안일만의 딸 안아가다와 결혼하면서 강화의 천주교 전교활동이 활발해 졌다. 이 무렵 강화읍의 이용매(아가다)가 자택을 공소로 정하고 신부를 처하여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이재명은 대산리와 이아가다 집을 다니면서 활동하였다. 그는 일제시대와 해방 후 한국전쟁을 겪는 시련기에 강화 천주교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활약하였고, 1956년 강화읍 관청리에 대지를 구입하였으며, 1957년 강화공소를 거쳐 1958년에 노기남 주교로부터 정식 성당 설립인가를 받기까지 강화 본당설립에 헌신하였다.
강화의 대표적인 종교로 성공회를 빼놓을 수 없다. 영국 성공회의 선교단원들은 1890년 9월 3일 와일스가 제물포에 도착하고 이어 코프 주교와 랜디스(Eli Barr Landis)가 뒤따라 왔다. 그들은 곧바로 제물포와 서울 정동에 교회를 세우고 의료사업을 펼쳤다. 서울과 제물포에서의 의료와 사회복지사업을 통하여 선교의 터전을 마련한 성공회는 다음 선교지를 강화로 향하였다.
1893년 봄 코프 주교는 강화선교의 발판을 갑곶나루터에 두기로 결정하고, 그해 7월 워너(L.O.Warner) 신부를 파송하면서 갑곶에 회당겸 선교사 사택을 마련하였다. 1894년 1월 20일 코프 주교가 이 집을 성니콜라회당으로 축복함으로 강화 최초의 성공회 회당이 되었다. 성공회 강화선교본부의 첫 번째 책임자 워너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대신 트롤로프(Mark. N. Trollope)신부, 힐러리(F.R.Hillary)부제, 로스(A.F.Laws)의사와 피어슨(Pearson)인쇄공 등 5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이들은 곧 강화읍내에 고가(古家)를 구입하여 성바우로회당을 마련하고 선교와 교육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1896년 11월에 수십 명의 입교자들에게 망세를 주었고, 1897년 11월 7일엔 인천의 성미카엘 성당에서 김희준, 김군명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이 영세식을 선교 7년 만에 처음으로 한인에게 베풀어진 것이었다. 김희준은 이후 견진을 받고 1915년 최초의 한인 사제로 서품되었다.
교세가 날로 발전해 나가자 트롤로프 신부는 1899년부터 성당건축을 시작했다. 700평의 대지위에 동서길이 10간, 남북길이 4간 총 40간 규모의 전통 한옥 고건축 기법으로 지었다. 1900년 11월 15일 역사적인 강화성당 축성식이 있었으며 이는 성공회가 본격적인 한국선교의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1900년 강화읍에서 의료선교에 전력을 다하던 로스(盧仁山)와 힐러리(吉康後)가 길상면 온수리 난저골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와 의료봉사를 하였는데, 1903년 한해동안 3,541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 온수리 신자들은 자력으로 성당을 건축하였다. 1905년에는 유지 유영흥(劉永興)이 선원면 냉정리에 기도소를 설치하고 조․만도를 인도함으로서 냉정리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강화 전 지역에 전파되어 각 지역마다 교회가 들어서게 되니 1915년에는 2개의 성당과 15개의 회당, 9개의 학교와 2,000명에 달하는 교인으로 성장하였다. 결국 거대한 성공회 조직을 효과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북구․남부 2개의 전도구를 분할하여 강화읍, 냉정리, 다운리, 송산, 삼흥리, 석포리, 김포, 통진, 내리, 여차리 교회를 북부전도구로 속하고, 온수리, 넙성리, 덕진, 초지, 광성, 동검도 교회를 남부전도구로 속하도록 하였다.
이상과 같이 1950년대 말까지 강화 개신교의 역사는 감리교회와 성공회가 주도하였다. 타교파 교회는 해방이후에야 들어왔는데, 1957년 8월 15일 신문리에 통일교회가 김봉기에 의해 강화읍 교역 본부교회가 설립되면서 처음 들어섰다. 1958년에는 강화읍교회에서 분리하여 설립한 관청리 성광교회가 장로교파로 설립되면서 각 교파별로 활발한 선교활동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1963년 8월 7일에 송해면 하도리에 순복음교회가 들어섰고, 1963년에 강화읍 관청리에 강화전도관이 세워졌다. 이후 감리교회와 성공회의 독점지역으로 여겨져 왔던 강화는 성결교회, 침례교회, 안식일교회 등 12개 교파에 179개 교회, 188명의 성직자와 17,170명의 성도를 가진 기독교의 텃밭이 되었다.
그럼 여기서 2000년 현재, 강화 종교단체별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표1」 강화의 종교단체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