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특집____
비는 날고 있다 외 2편
박정석
온통 비다, 非다, 悲다, 비나이다
밟히는 건 아스팔트인데, 나가떨어지는 쪽인 그대여
길 위에서 어떤 모멸을 느낄까
깨지면서 깨는 것, 폭탄 같은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마, 마, 마멸
백 원짜리 동전 속 이순신 장군의 모자를 엎어
타이어의 패인 홈을 재고
개미들이 지나는 긴 흐름을 본다
머리부터 밀어 넣는 해장국집, 목구멍을 조이는 소리만이 따뜻하다
타이어에 낀 돌멩이가 무심하게 날아가는 일처럼
알게 모르게, 기껍지도 않고
거대하지도 않은 맷돌을 무사히 통과하고 있다
여기에 흰밥은 없다
이빨에 낀 고춧가루 부끄럽다
부부가 나란히 침을 뱉고 간다
침 뱉게 만드는 직업은?
사, 사람.
침 흘리게 만드는 직업도?
사람?
아, 참 좁다
이렇게 좁으니 그렇게 정밀해진다
폭포수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허옇게 배때기를 뒤집고 익사한 생각을 혼절만이 바깥으로 꺼내준다
밀어다준다, 착한 수달처럼
시간을 오 분 단위로 쪼개 쓰며
고시원의 이름을 지으라면 잘할 것 같다
정밀한 크기로 떨어지는 비
때린 곳을 또 때린다
들러리 같은 무수 수의 빗방울들
나는 내가 흘리고 다니는 것을 모른다
나는 내가 흐르는 중임을 자꾸 잊는다
게으름의 문양
모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먼지처럼
모아져서 버려지는 먼지처럼
사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보이지 않는 곳이 보이는 곳인
사랑을 할 거야 흥얼거리는
사내는
입으로만 연신 연기를 뿜어대는 사내는
손 쓸 줄 모르는 사내는
담배의 시간은 안중에도 없네
어깨를 추켜 수화기를 밀어올리는 사내는
손 쓸 틈 없는 사내는
근로시간 준수는 듣지도 못했네
요리를 옮기듯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월간지를 보는 사내는
다른 손으로는 아이를 안았네
부양육자에서 주양육자로
가슴이 부푸는 사내는
소금 찍은 감자 같다가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된 사내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식탁 위에 읽던 책을 엎어놓고 가는 저녁은
반죽을 치대듯
아니 파리를 잡은 듯
나는 당신에게 들킨다
*
양변기 물에 노오란 꼬리를 담그고
앉은
백수대낮
꼬리 잘린 고양이 방울을 흔드는
가스검침 소리가
있는 대로 말하라지만
영구적으로 없다
*
등기가 왔다는 말에
문 헐어주고
따따따따따따따악 따악따따따따악 따따따따따악
이름을 갈기면
모스부호처럼 타전된다
있다의 진실성
*
사랑하는 사람의 잠든 모습
보고 돌아와
같은 자세로 누워본다
길은
오면 줄어 있다
그리움의 수상누각
몇 겁의 파도야
물 건너 가라
위태로움의 기원
앞유리에 감잎 하나 붙어 있습니다. 가지처럼 앙상한 와이퍼 밑에 눌려 있습니다. 모두 잠든 늦은 밤, 남은 짐을 꺼내기 위해 내려온 지하주차장은 고단함을 더하는 것 같습니다. 연휴 이틀 내내 감나무 아래에 차를 세워두었지요. 마당 곁 감나무에 한쪽 벽을 연해 지은 헛간을 헐어내면서부터, 아버지가 한동안 거기에 지게를 놓아두기도 했습니다. 시속 백 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삼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감잎은 건너왔습니다.
어쩌면 같은 감나무의 잎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다른 어떤 공간, 우주에서 날아온 걸까요. 날이 새면 이 시간도 투명한 빛 속으로 스며들 것입니다. 감잎은 나를 자꾸 데려갑니다. 여린 잎맥은 기억의 저장소로 잇닿은 회로처럼 보입니다.
멀어지면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들이 자주 눈물을 흐르게 하거나 눈을 감게 만듭니다. 감잎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불가능성은 한계가 없는 아름다움의 가능성입니다. 감잎의 자리만은 사라지지 않고 도처에서 돋아나겠지요. 어제의 감잎이 오늘의 감잎과, 그곳의 감잎이 미지의 감잎과 뒤섞여 소란스럽습니다. 누구나 그래서 마침내 세상의 모든 미지를 그리워해야 할 것입니다.
오래 매달린 생각은 되살아나 고즈넉한 밤을 밝히기도 합니다. 긴 고민 끝에 첫 생각으로 되돌아와 보면 생각은 한층 깨끗해졌습니다. 미안한 사람에게, 용서받지 못한 표정으로 안부를 묻습니다. 세상의 위태로움들에게 기원을 묻는다면, 시라고 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정석 / 1980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으며 2004년 《현대시》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