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 70s] 11
씬 태을방직, 정문 앞(밤)
고창회, 생각에 잠겨 걷고 있다.
고창회의 시선에,
실랑이를 벌이는 더미와 최비서, 경비가 보인다.
더미: 취직시켜주세요.
여기 채용통지서두 있잖아요.
좀 늦긴 했지만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요.
최비서: 아, 글쎄. 통지 나간지가 한달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이러면 곤란하지.
고창회: (다가와서)
무슨 일인가?
최비서: (보고)
회장님.
(인사하고)
더미: (놀라서 고창회를 보다, 따라서 인사하고)
최비서: (인사하고)
이 아가씨가 채용기한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우리 회사에 들어오겠다고 떼를 써서요.
더미: (고창회한테 인사를 한다)
저기... 전, 한더밉니다.
좀 들어가게 해주세요,회장님, 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더미: 제가요. 틀질도 좀 하구요!
동네 아줌마들 옷두 웬만한 건 다 만들었어요.
고창회: (웃으며) 재주가 많구나. 어디 멀리서 왔나?
더미: 예! 배 타구, 또 배 타구, 차 타구, 정말 멀리서요.
맨날 라디오에서 태을방직 광고 들었어요.
여기 취직하는 게 제 꿈이에요.
고창회: (최비서를 본다)
인사과에 좀 알아보지?
최비서: 벌써 기숙사도 그렇고, 학교도 수용 인원 초괍니다.
매일 찾아오는 아가씨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더미: (다급한)
저, 그냥 창고 같은 데서 자도 괜찮아요!
교실 뒤에 서서 공부해두 괜찮아요!
고창회: (더미를 물끄러미 본다)
우리 이렇게 하자, 더미양.
잠시, 집에 내려가 있는 거야.
육 개월마다 한 번씩 여직공 재모집을 하니까.
그 때 제일 먼저 연락해주지.
더미: ...
(실망하는)
고창회: (지갑에서 오백원짜리를 집히는 대로
여섯 장 정도 꺼내준다)
자. 차비해서 내려가.
넉넉잡아 오 개월만 기다리면 돼.
널, 잊지 않으마.
더미: ..(보는)
씬2 태을방직, 정문 일각/ 고창회의 차 안(밤)
고창회의 차, 출발하려고 한다.
더미, 뛰어온다.
더미: 잠깐만요!! 잠깐만요!! 회장님!! 잠깐만요!
고창회, 뒷좌석에 타고 있고.
최비서, 조수석에, 타고 있다.
고창회, 문득 보면 더미가 달려오고 있다.
고창회, 차 문을 열고 내린다.
최비서도 따라 내린다.
더미: 여기...
(돈을 내민다)
고창회: (본다)
왜?
더미: 오란 날짜보다 늦게 온 것두 제 잘못이구.
모집 끝났는데, 떼쓴 것도 제 잘못이구.
받고 싶긴 하지만 돌려드릴게요!
고맙습니다, 회장님.
고창회: (받고)
꼭, 집으로 가야 된다. 알았지?
더미: 예.
(웃는)
고창회, 잠시 더미를 바라본다.
뭔가 이 아이한테서 애틋한 느낌이 든다.
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창회.
최비서: 회장님.
반도 구사장님하고 약속 시간이..
고창회: (더미에게)
어. 그래. 나중에 우리, 꼭 다시 보자.
더미: 그럼요, 회장님!! 건강하세요!
고창회, 더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차에 오른다.
최비서 문 닫아주고, 조수석에 탄다.
더미,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다.
고창회의 차가 떠난다.
씬3 고창회의 차 안(밤)
창회, 뒤창으로 잠시 더미를 바라보다 앞을 보고 앉는다.
더미, 그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
고창회: (혼잣말로)
..시간이 늦었는데 어디서든 재워 보낼 걸..
최비서: 우리 회사가, 여직공들한테 너무 후하다고,
지난 번 방직 협회 모임에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고창회: 줄 거 안준다고 돈 버는 거 아냐.
최비서: 형평성이라는 게 있질 않습니까..
고창회: 하루 종일 애들 어깨 바서져라 일하는 거 보면
가슴이 아려.
다 부모들한테는 뼈마디가 시리게 소중한
딸자식들이 아닌가.
다..우리 준희 같아서 말야...
씬4 태을방직, 정문 일각(밤)
더미, 인상 찌푸리며 고민하고 있다.
더미: 그냥 모른 척 받을 걸.
나중에 월급서 조금씩 까세요, 할걸..
아냐. 다섯 달만 회장님댁 식모시켜주세요.
밥두 잘 하구! 반찬두 잘해요! 할껄.
아아- 바보, 바보!
(자기 머리통을 세게 쥐어박는다)
씬9 더미와 동영의 몽타쥬(밤)
동영, 사격장에서 사격을 하고 있다.
더미, 눈이 휘둥그레져서 서울 거리를 구경하고 있다.
더미, 하드를 하나 산다.
입에 물고 야금야금 빨아 먹으면서,
신발가게도 구경하고,
미용실도 구경하고 걸어간다.
더미, 호떡도 하나 사서
입에 물고 백화점 쇼윈도우를 구경하고 있다.
가방 들고, 입 벌리고 선 폼이 영락없는 가출처녀다.
동영, 뭔가 그리운 시선으로 아득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사격에 몰두한다.
씬10 시내 길(밤)
동영, 걷고 있다.
더미와 동영, 스쳐 지나갔지만
서로를 등지고 있어 보지 못한다.
더미,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여기가 충무로에요? 충무론 어떻게 가요?’ 묻는다.
동영,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에 뒤돌아보지만,
더미 이미,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동영과 더미, 서로를 보지 못하고 지나쳐간다.
씬11 유명흥신소 앞(밤)
더미, 하드를 먹다가 문득 그 옆에
‘유명흥신소’ 간판을 본다.
(인서트) 유명흥신소
‘사람 찾아줍니다. 떼인 돈 받아 줍니다’
더미: ...
(물고 있던 하드를 입에서 꺼낸다)
씬12 유명흥신소 안(밤)
흥신소 주인, 술집 여주인(40대),
남자1?2 섯다판을 벌이고 있다.
나 구두가 한 켤레(9땡까며)여~/
띠라. 손뜨겁다. 나, 삼팔선(38광땡)이다./
한 판 까였다구 빨래질 할 일 없겠지?/
가리질(외상노름)하지 마러.
가리질 하다 송장 구덩 여럿 판다’
이런 이야기들 하며 판 섞는데.
문 열리고, 비쭉이 고개만 들이미는 더미.
문소리에 섯다 하던 사람들, 멀거니 더미를 본다.
더미: (쭈빗해서)
여기..사람 찾아주는 데죠? 요금이 얼만가요?
주인: (보고)
엔간하면 흥정은 들와서 하지?
더미: (들어온다)
제가..돈이 쪼끔 밖에 없거든요..
여주인: (가방 꼭 쥐고 있는 더미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손가락을 빙빙- 돌린다)
더미: 에?
여주인: 한 번 돌아보라구.
더미: (영문도 모르고, 한번 돌고)
사람 찾는데...이런 것두 해야 되나요?
여주인: 한두 달, 빠다에 밥 좀 비벼대면 그럭저럭 살집 붙겠다.
취직할래, 너?
더미: (좋아서)
취직요!
씬13 을지로 술집골목(밤)
술집 여주인, 남자1?2 더미를 데리고 오고 있다.
더미, 왠지 기분이 그렇다.
가방을 꼭, 쥐고 따라가던 더미, 발을 멈춘다.
여주인: (돌아보고) 왜?
더미: 건어물..가게라면서요...?
오징어 팔구, 노가리 팔구, 멸치 팔구.
여주인: 그래. 맞어. 그런 거 팔지.
더미, 주변을 둘러보면
‘우정’, ‘약속’, ‘꽃가마’
붉은 불 들어와 있는
영락없는 싸구려 술집 겸 색시집이다.
더미: 저...그냥 갈게요..(하고 돌아서려면)
남자1?2 더미의 앞을 가로막는다.
여주인: 겁먹을 거 없어. 나, 건어물 파는 거 맞어.
건어물만 팔믄 좀 그러니까, 과일두 좀 팔구..
가끔은 햄 치즈두 팔구.
(빈의 소리) 비어도 좀 팔구. 가짜 양주도 좀 팔구.
이게 뭔 소린가 더미, 돌아보면 빈이 서 있다.
더미: (구세주 만난 기분이다)
빈씨!!!
빈: (아줌마한테)
상황 봐서 여자두 좀 팔구~ 맞죠, 아줌마?
여주인: 너, 누구니?
누군데, 다 만들어 놓은 밥상에 초치니?
빈: (더미에게)
일루 와.
더미: 네.
(가려면, 아줌마가 팔을 잡는다)
놔주세요...
빈: 아줌마 사람 잘못 찍었어~
걔, 데리구 가면 가게 망해~
쟤요, 딱 보면 모르겠어요? 남자 쫓는 귀신이야.
(더미에게)
뭐해! 일루 오라니까!
더미: 가구..싶은데요..나두..
(여주인을 본다)
여주인: ..
(남자1?2한테 짜증을 와락 낸다)
멀거니 뭘 보구 섰어!
남자1?2 예고도 없이, 빈을 공격한다.
더미, 놀라서 비명을 지른다.
빈과 남자1?2와의 싸움이 예사롭지 않다.
빈, 남자1의 다리를 잡아채 넘어트리고 일어나서
바로 몸 돌려 남자2의 턱을 가격한다.
다시 일어나는 남자1 등뒤에서 빈을 공격한다.
개싸움을 하는 빈...
더미를 끌고가는 여주인을 다시 잡아채다가
다시 두드려 맞는 빈.
미친 듯이 남자1,2에게 달려드는 빈.
피 투성이가 되는 빈.
씬15 명동 큰 거리(밤)
여기저기 터져서 피가 흐르는 빈,
더미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걸어간다.
빈: 명동으로, 충무로로 쏴 다닐 때부터
이런 일 생길 거 같더라.
취직도 못한 애가 히쭉히쭉 웃고 다니더라니.
더미: 미안해요. 아프죠....
빈: (더미의 손을 피하고)
더미: (머쓱하다)
서울 오면..젤 먼저 구경하고 싶었거든요.
(미안한 맘에)
근데 왜 내 뒤 쫄쫄 따라다녀요? 그니까 다치지...
빈: 서울까지 데려온 책임이 있으니까.
날 밝으면 내려가.
차비 줄 테니까.
더미: (손 빼며)
이러구 내려갈 거 같으믄 올라오지두 않았어요.
빈: (다시 손잡고 걸어가며)
흥신소엔 왜 갔니?
더미: 찾을 사람 있어서요..
빈: 남자 찾아왔냐?
더미: (본다)...
빈: (더미보고)
그러네.
(혼잣말처럼)
또, 웬 서울놈이 섬처녀 하나 울렸나보군..
더미: (손 뿌리치며)
당신이 뭘 안다구 그래요!
빈: (본다)
더미: 그 사람이 나한테 얼마나..소중한 사람인지..
뭘 안다구..그런 소릴 함부루 해요.
도와주면 말 막해두 되는 거예요?
(눈물이 그렁하게 맺힌다)
빈: ..(기분이 왠지, 별로다)
미안하게 됐네.
너한테 내 인생 삼년 빚진 게 있어서 그런가.
자꾸 참견하게 되네.
가자.
빈, 더미의 가방을 들고 걸어간다.
더미, 꼼짝두 않고 서 있다.
빈, 돌아보고
‘통금 다 되가는데. 거기서 밤 샐 거야?’ 하면,
더미, 발걸음을 뗀다.
씬16 앙상블, 연경의 방(밤)
연경, 배 깔고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 잡지를 보고 있다.
상희, 책상 앞에 앉아 숙제를 하고 있다.
바닥에, 침대에 연경이 팽개쳐 둔 천과 옷본 등이
늘어져 있다.
연경: 흐흥~ 야, 야. 상희야. 너 이것 좀 볼래?
어찌하면 좋으리까? 상담난.
상희: (열심히 손바느질로 옷 밑단에 스팽글 달고 있다,
건성으로)
너나 봐.
연경: 불쌍해서 어쩌냐? 시골 샥시가 에스 오빠하구 펜팔하다,
결혼약속 믿구, 서울 왔더니,
상희: (목소리에 날이 섰다)
조용히 하구 너나 보래니까!
연경: 아, 이것만 들어 보래니깐, 골 때려.
서울 왔더니, 글쎄 에스 오빠가 제비였단다.
완전히 팔자 망한 거지.
상희: (바느질하던 천을 집어 던지면서, 벌떡 일어난다)
걔 팔자 망한 거만 걱정되냐!! 내 팔자는!!!
상희, 도끼눈을 뜨고 연경에게 다가온다.
‘너 왜 이래!! 왜이래!! 야! 야!’
하면서 슬금슬금 피한다.
상희, 연경을 팔로 목 조른다.
상희: 하연경!! 난, 너랑 방 쓰게 된 게 내 운명에 딜레마야!!!
낙제할라믄 너나 해! 너나!!!
연경: 왜 이래! 기집애야 숨 막혀!
(휙- 밀어 버린다)
상희: (벌렁 방바닥에 나자빠진다)
도대...체..니 머리 속엔..뭐가 들었다냐...
연경: 알켜 줘도 또 묻네~
나의 우상 빈씨하구 애국심 밖에 없다니깐~
씬16 앙상블 대문 앞(밤)
빈의 지프 멈춘다.
빈은 자신의 룩색을 더미는 가방을 들고 내린다.
더미: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다)
밀수하믄 진짜 돈은 많이 버는구나..
이렇게 좋은 집에 살아요?
완전히...궁전이네..
빈: 내 집 아냐. 나도 얹혀사는 거야.
더미: 누구 집이에요? 그럼?
빈: 알 거 없어.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빈의 소리) 누나. 연경 누나? 자?
연경, 상희에게 “빈씨다!!” 하며
얼른 머리 매만진다.
씬17 앙상블, 연경의 방 앞(밤)
빈의 뒤에 더미 서 있다.
문, 열리고 연경 나온다.
연경: 빈씨~~어서와요~ 햇볕에 타서 그런가,
까무잡잡하니, 더 멋있어졌네요~
빈: 자는데 깨운 거 아냐?
연경: 아니,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밤이믄 밤마다~
파도 소리 듣느라 잘 수가 있어야죠~
내 귀는 소라껍데기~
철썩, 철썩~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
(가만히 손을 내민다)
빈: (본다)
연경: (수줍게) 빈씨 마음이 담긴 하연경의 소라 껍질~
빈: 아.. 그거. 소라 껍데기 대신에, 인어루 가져왔는데.
(더미를 잡아 끌어당긴다)
더미: (앞으로 나선다)
연경: ...
(이건 뭐야? 입 쭉- 빼물고. 눈 깜빡깜빡 하면서
더미와 빈 번갈아 본다)
더미: 안녕...하세요? 한 더미에요..
빈: 누나 방에 좀 데리구 자~ 꼭 껴안고 있으면
파도 소린지, 바다냄샌지 날지도 모르지. 부탁해.
(손들어 보이고, 계단 쪽으로)
씬19 앙상블, 빈의 방(밤)
빈, 룩색을 던져 놓고 수족관으로 간다.
(수족관 바닥에, 구슬 같은 색유리알들이 깔려있다)
빈: 형, 왔다-
(수족관을 살핀다)
왜 이렇게 밥을 안 먹었어?
(툭툭-치고)
형 없어서, 심심했구나.
짜식들. 그럴 줄 알고 선물 가져왔지.
빈, 주머니에서 보석이 든 비닐봉지를 꺼낸다.
빈, 비닐을 툭툭 털어 손바닥에 보석알을 놓는다.
빈, 수족관에 보석알을 뿌려버린다.
씬18 앙상블, 연경의 방(밤)
더미, 가방을 들고 어쩔 줄을 몰라 서 있다.
침대에 팔짱 끼고 앉은 연경,
더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다.
상희, 의자 돌려놓고 앉아 흥미 있게 본다.
더미: ..저...여기 바닥서 자면 될까요..?
(가방 내려놓고)
저기..빗자루랑..걸레랑 있으면..
연경: (씩씩- 거리며 더 째려본다)
더미: 방해 안하구...조용히 잘게요..
연경: 너 자체가 이미 방해야!!!! 내 인생에 방해!
내 사랑에 방해!!
더미: (깜짝 놀라서 본다)
연경: (벌떡 일어나, 더미에게 다다-거린다)
니가 무슨 인어야! 내가 보니 붕어구만!!
붕어, 너! 나의 빈씨랑 어떤 사이야!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 진돈 어디까지 나갔어!
손은 잡아 봤어!!
상희: 야, 너 미쳤냐. 선생님들 다 깨시겠다.
연경: 미쳤다!! 왜에!!! 뚜껑 열릴라 그런다 왜에!!
상희: 열어봤자 너의 우상 빈씨하고, 애국심 밖에 없다매.
연경: (진지하다)
시정할게.
(머리를 만지면서)
열어보면 두 가지가 있지.
나의 우상 빈씨와 불타는 질투심.
연경, 진지하게 더미를 노려본다.
더미, 그런 연경이가 귀여운 듯,
‘하하하-언니, 진짜 재밌다’
하면서 소리 내서 웃는다.
씬19 앙상블, 빈의 방(밤)
빈, 전축 쪽으로 간다.
로큰롤을 집어 들다,
생각이 바뀐 듯 앨범을 뒤적인다.
꽂혀있는 데 없자, 밑바닥을 뒤적뒤적 하다가
현인의 ‘서울야곡’ 앨범을 찾아낸다.
전축 턴테이블에 걸면 음악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온다.
(음악) 서울야곡
빈, 침대에 벌렁 눕는다.
빈, 더미가 떠오른다.
(인서트) 더미의 눈물
더미: 당신이..뭘 안다고...
그 사람이 나한테 얼마나..소중한 사람인지..
뭘 안다구..그런 소릴 함부루 해요.
(눈물이 그렁하게 맺힌다)
빈: ...(피식-웃고, 눈을 감는다)
씬20 앙상블, 연경의 방(밤)
더미, 상희와 연경의 침대 사이에서
가방을 베고 곤하게 자고 있다.
옷은 잘 개켜 머리맡에 두고
예의 국방색 러닝셔츠 차림으로 잔다.
불타는 질투심에 죽어도 잠이 안 오는 연경,
벌떡 일어나 앉아 더미를 내려다본다.
연경, 더미에게 베개를 던진다.
더미, 손으로 더듬더듬 해,
배 위에 얹힌 베개를 쳐내고 잔다.
연경, 화가 나서 발을 뻗어 발가락 끝으로
더미의 배를 꾹꾹, 찌른다.
더미, 몸을 모로 세워 상희 쪽 침대를 보고 잔다.
연경, ‘하후!
(후 -한번 입김 내뿜고)
뭐..저런 붕어가 다 있냐..’ 본다.
씬1 앙상블 안/밖(아침)
오픈시간 전에, 학원생들 청소를 하고 있다.
상희와 피에르 방, 양동이에 물을 퍼 놓고
앙상블 유리창을 물걸레로 닦고 있다.
앙상블 안에서는 더미, 연경을 도와 청소한다.
살랑살랑하는 연경과 달리, 열심히 일하는 더미.
연경: 자기~ 청소 넘 씩씩하다~ 고마워서 어쩌나아~
더미: 재워준 값은 해야죠~
더미, 청소하면서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의상들을 흘끔흘끔 본다.
하나같이 놀랍다.
그 중, 미대사부인 드레스에 시선이 간다.
더미, 일어난다. 옷 앞에 선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서 걸레를 떨어트린다.
더미의 천재성이 봉실의 옷으로 깨어나는 순간이다.
더미: 아...아...
(벌어진 입에서 감탄사 밖에 안나온다)
연경: 섬 샥시가 그래두 보는 눈은 있네. 뭔가 삘이 와?
더미: (연경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나비를 잡듯이 옷에 손을 대본다.
살며시 쓸어본다)
연경: (도대체 얘가 좀 이상하다)
자기...왜 그러니..?
더미: (돌아본다. 조심스럽게)
이거 한..번 입어 봐도 되요?
연경: (놀라서)
안 되징! 클나징!! 대사 부인 옷을 자기가 왜 입어!.
더미: 이런 거...처음 봤어요.... (눈물이 핑 돈다)
너무...너무...고와서...
아니..그냥..고운 것만은..아니구..
아아...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손으로 만져보는데, 눈물이 고인다)
연경: 어머. 애두 아니구. 뭐야?
옷 못 입게 한다구 울어?
이상한 사람이다, 자기.
더미: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아, 진짜 내가 왜 이러지. 그냥 눈물이 나네
(겸연쩍은 듯 연경을 보고 웃는다)
씬2 동, 장소(시간경과)
더미, 미 대사 부인의 옷을 입었다.
체격 차이로 헐렁하지만 우아하다.
연경, 뒤에 지퍼를 채워주면서 쫑알쫑알 거린다.
연경: 자기가, 나의 우상 빈씨 따라온 게 아니구.
딴 남자 잡으루 왔다 그래서 봐주는 거야.
큰 맘 먹구 입혀주는 거야.
더미: 잡으루 온 건 아니구요,
(하는데)
연경: 찾으루 온 거나, 잡으루 온 거나.
(보고)
푸대자루 뒤집어 쓴 거 같네..
뭐 그렇게 이쁘다구
울구, 불구 그랬어?
더미: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자신을 보는 게 아니라 옷을 보는)
씬3 앙상블 사택, 정문 근처
차연, 꽃을 한 아름 사들고 오고 있다.
사택으로 들어가려는데, 차 소리 들린다.
돌아보면 준희의 차다.
준희, 일할 수 있는 편안한 옷이다.
준희: (내리면서)
안녕하세요?
차연: 고준희씨 오늘 예약 있어??
준희: 아뇨.
차연: 하긴. 우리 선생님 작품이, 인정이 안 되는데,
뭐. 앞으루야 앙상블서 옷 맞출 일 있겠어?
근데 무슨 일? 출근 안 해? 뷰티 안 바빠?
준희: 앞으루 이리루 출근 할려구요.
(웃는)
씬4 장봉실의 방
장봉실, 미 대사 부인과 전화통화하고 있다.
(소리) 똑똑
문 열리고, 꽃을 든 차연 들어온다.
장봉실,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고 계속 이야기한다.
장봉실: (영어로)
네, 이해하죠.
여사님
(사이) 아뇨, 가봉을 미룰 순 없습니다.
(사이) 그럼 제가 대사관저로 가겠습니다.
(사이) 예, 예.
(끊고, 화병에 꽃을 바꾸려는 차연을 본다)
건, 됐어. 두구 포터 부인 가봉 준비 해.
차연: 벌써요?
장봉실: 지금 대사관저로 들어갈 거야. 뭐하니? 서둘러야지?
차연: 아, 예. 건..그런데요. 선생님, 고준희씨 왔어요.
장봉실: 준희가?
차연: 이상한 소리 하던데요.
이제 이리루 출근을 한데나...어쩐 데나..
씬5 앙상블, 안
연경, 문 열어보면, 준희 가까이 왔다.
연경, 얼른 문 닫고 와서 더미를 구박하다,
발을 동동거리다,
지퍼를 흔들다, 호들갑 떤다
(지퍼에 속감이 물려서 지퍼가 안내려간다)
연경: 어떡하니! 어떡하니!!
몰래 입어본거 알믄 선생님한테 쫓겨난단 말야.
빨리 벗어. 얼른! 아우, 왜 안내려가!!
(지퍼를 억지로 내리려하면)
더미: 어! 안 돼요!! 속감 물었어요. 찢어져요.
연경: 아우, 아우, 환장한다, 환장해. 그냥 위루 훌렁 벗어봐.
아, 얼른!!
더미: 잠깐만요. 잠깐만요!
(당황해서, 벗을 방법을 찾는데)
문 열리고, 준희가 ‘안녕하세요~’들어온다.
연경, 그 찰나에 더미를 피팅룸에 밀어 넣고
커튼을 닫아 버린다.
연경, 어색하게
‘굿...모닝..요...흐흥..’하면서 웃는다.
연경: 이렇게 일찍 웬일이세요? 아직 오픈 시간 멀었는데요.
준희: 그렇게 됐어요.
(청소도구 보다)
나두 도울께요. 어디부터 해요?
(걸레든다)
연경: (앞을 막아서며)
손님이 뭔 청소를 해요.
원장님 뵈루 오셨음, 안으루 가세요.
내가 쫌 바쁘거든요.
준희: 나, 이제 손님 아녜요.
앞으루 같이 공부하구, 같이 일하구. 잘 부탁해요.
연경: (못 알아듣고, 눈만 깜빡깜빡 하는)
준희: (걸레 들고, 유리창으로 간다)
연경, 피팅룸 커튼 조금 젖히고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더미에게 들어가라는 손짓하고
준희 옆으로.
연경: 부잣집 딸이 이런 거까지 다 채감, 우린 뭔 일 하나요?
준희: 같이 하믄 되죠.
(유리창 닦는)
연경: 걸렌 낼부터 잡으세요,
네? 우리 선생님 오심 나 죽을 일이 있거든요.
제발요. 제발. 네?
(두 손 모아 비는데)
문 열리고 장봉실과 차연. 방육성 들어온다.
장봉실, 걸레 들고 청소하던 준희를 본다.
씬6 빈의 방
빈, 샤워하고 머리 닦으며 욕실에서 나오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연경,
‘빈씨, 빈씨!’ 하면서 뛰어 들어온다.
빈: 잘 잤어, 누나. 내 선물은 일어났나?
연경: 나, 클났다. 죽었다. 빈씨, 나 어떡하냐.
빈씨, 선물이..사고 쳤어!!!
나, 쫓겨날 거야!! 이제!
씬7 앙상블, 안/피팅룸 안
더미, 옷을 벗으려고 노력해보지만
지퍼에 손이 닿질 않는다.
더미,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다.
포기하고 살며시 주저앉는데
밖에서 이야기소리 다 들린다.
차연: 고준희씨, 아침에 뭐 잘못 먹은 거 아니니?
방육성: 가만..잘못 먹은 정도가 아니라...,
뭔가...크게 충격 받은 일 있나?
차 사고 났나?
(머리를 만지며)
부딪쳤나?
준희: 아세아 복장학원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문하생으로 받아주세요.
차연: 방선생님 말이 진짠가 부네.
(준희 보고)
우리 선생님이 쓰레기라 그래서 쇼크 먹었어?
준희: 네.
차연: 그래, 이해하지~ 그 심정.
생전 남한테 싫은 소리 한 번 안 듣던 공주님이
충격을 넘 크게 먹어 어디 살짝 이상해진 거 맞네.
준희: (웃고, 이력서 준비한 것을 내민다)
이력섭니다. 여사님.
장봉실, 받을 생각 않고 입술 물고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준희를 본다.
차연, 냉큼 받아서, 이력서를 펴본다.
(인서트) 준희의 이력서.
1967년 서울대 섬유공학과 졸업.
1667.3-1968.2 이탈리아 밀라노 마랑고니 패션스쿨,
마스터코스 수료.
등의 이력이 눈에 뜨인다.
차연: 가방 끈 길다구 자랑하는 거야?
장봉실: 어제 일은 내가 사과할게. 말이 과했어.
미안하게 됐어.
회장님께도 죄송하다 전해주고.
그만 돌아가.
준희: 굳게 결심하고 왔어요.
저한테 기회를 주세요.
장봉실: (화나는)
도대체 뭐지? 앙상블이 재벌 집 따님 놀이턴가?
기분 내키는 대로
들락날락 분위기 흐트러뜨리구! 방해하구!
그래두 된다구 생각해! 그만 돌아가 줘! 어서!
준희: 못가요, 저.
허락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더미, 장봉실의 화내는 소리에 너무 궁금하다.
살며시 커튼을 젖히고 내다보고 싶지만 포기하고,
귀를 커튼에 가까이 가져다 댄다.
장봉실: 사과했잖아! 더 이상 뭘 어쩌란 거지!
잘못했다고 빌까? 그걸 원해?
그럼 준희 자존심이 회복되겠어?
차연: 그만 하구..가라.
울 선생님 더 화나게 하지 말구.
공주님은 그냥, 공주님 자리루
(하는데)
준희: (소리를 버럭, 지른다)
난, 공주님이 아니라구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얼마나 치열했는지
당신이 알아요!!
차연과 방육성, 놀라서 준희를 본다.
준희: ...
(차연과 방육성을 본다)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차연: ..
(어떡해야 하나 장봉실을 본다)
장봉실: (어쩔 수 없다는 듯)
나가 있어.
차연: 차..대기 시킬께요..
차연, 준희 한 번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방육성과 함께 나간다.
더미, 도저히 안 되겠다.
커튼을 살며시 열고 밖을 내다본다.
더미의 시선에 장봉실의 등과 준희가 보인다.
장봉실, 티 테이블에 준비된 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그 모습 보던 준희, 결심이 섰다.
준희: (결심했다)
아시다시피..전, 아버지 딸이 되기 전에..
장봉실: ..
(그 소리에 쳐다본다)
준희: 아홉 살 때, 군복 염색해서 내다 팔았어요.
시장통에서, 그날그날을 전쟁처럼 살아남았어요.
장봉실: 너나없이 힘든 시절이었으니까.
(고개 끄덕이고)
헌데 그게 앙상블하고 무슨 상관이지?
준희: 적어도 기분 내키는 대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것.
힘들다고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
잊고 싶은 옛날 얘기,
이렇게 꺼낼 만큼 저한텐 절실해요.
장봉실: ...
(테이블에 이력서를 집어 한 번 본다)
준희: 제 이력이나 자랑하려고, 써온 게 아니에요.
여사님, 제자들이 실습실에 앉아서, 천이나 주무를 때.
적어도 전, 섬유란 무엇인지. 의상이란 무엇인지.
세계 패션 경향은 어떤지,
고민하고 공부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장봉실: (이력서를 접어서 내민다)
잘 봤다. 그만 가봐.
준희: 대체 이유가 뭔가요!
제가 고창회 회장 딸이라는 게,
여기도 못 들어올 만큼 결격사윤가요!
장봉실: (이력서 테이블에 던지고)
넌, 사랑에 올인 하는 사람이잖아.
준희: !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본다)
장봉실: 무댈 박차고 나갔듯이,
준흰 또 그럴 여지가 생기면 여길 박차고 나가겠지.
무의미한 데 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준희: ..
장봉실: 잘 가.
준희: 여사님한텐 사랑에 올인한 때가 없었나요? 있으셨겠죠?
그러니까 오늘날 빈이,
장봉실: !
그만해. 건, 준희가 할 얘긴 아냐.
준희: 사람이란 게 그렇게 단순한가요?
정말 하나밖에 할 수 없나요?
여사님은 예술에 올인 하시느라,
장빈을 그렇게 버려두셨나요?
장봉실: 그만 닥치지 못하니!!
장봉실, 제어할 수 없는 격노에 물잔을 들어
준희의 얼굴에 끼얹어버린다.
준희: !
더미: 헉!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낸다)
장봉실, 그 소리에 피팅룸을 본다.
더미, 얼른 커튼 닫고 숨는다.
장봉실: 누구니!
더미: ...
(조마조마한)
장봉실, 걸어와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확- 젖혀버린다.
장봉실, 더미가 입고 있는 미대사부인 옷을 보자,
눈이 돌아간다.
‘이런..무례한!’
장봉실, 더미의 손을 와락- 끌어당긴다.
그 힘에 더미, 끌려나와 앙상블 바닥에 패대기쳐 진다.
준희, 더미를 본다.
더미, 장봉실을 올려다본다.
씬8 앙상블 사택, 마당
차연, 연경의 뺨을 철썩-때린다.
연경의 옆에 서 있던 더미, ‘언니!’하고 놀란다.
원생들, 각자의 방문을 열고 내다보고 있다.
빈, 이층 복도에서 내려다본다.
차연: 간이 배 밖에 나왔어! 니가 미치지 않구서야,
감히 선생님 작품에 손을 대!!
연경: 입어...보구..싶다구..울어서요..
한 번두 멋진 의상 같은 거..본 적두 없는..
섬에서..왔다길래..
불쌍해서요..
(훌쩍훌쩍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더미: 죄송해요...잘못했습니다..
언닌 잘못 없구요..제가, 다..
(하는데)
차연: 넌 가만있어!! 니가 누군지, 어서 왔는지 관심 없어!
내 학생, 내가 야단치는 거니까 입 다물구 가만 있어!!
더미: ...
상희, 방에서 더미의 가방을 가져온다.
상희: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선..생님..
차연: (가방을 받아서 바닥에 던진다)
가. 생면부지 너한테 유감은 없는데.
다신 우리 선생님 눈에 안 뜨이는 게 좋을 꺼다.
더미: ...
(가방을 집어 든다)
빈: (이층에서 내려왔다)
이모 그만 화 푸시죠. 그래두 제 손님인데..
연경씨두..잘못 없구요..
차연: (엄하다)
빈인 참견하지 마. 우리 앙상블 불문율이야.
나두, 감히 선생님 작품에 손대는 짓은 안 해.
빈: ..
차연: (더미에게)
넌, 가고.
(연경에게)
넌...
(생각하다)
선생님이 결정하실 때까지 근신하고 있어.
씬9 명동대로
풀이 죽은 더미, 가방을 들고 털레털레 걸어가고 있다.
빈, 뛰어오다 더미를 본다.
더미의 팔을 잡는, 빈. 더미, 돌아보고 놀란다.
빈: 걸음 빠르네. 해녀라 그러더니, 다리 힘 좋네.
더미: (애써 웃으며)
미안해서 어떡해요? 연경 언니한테두 미안하구..
빈씨한테두 그렇구...
빈씨, 어머니한텐 정말 정말 죄송하구.
빈: ..
(생각하다)
니가 이해해라. 너한테는 옷이 옷이겠지 싶겠지만.
여사님한테는..자기 인생 전부라서 그래.
더미: 왜 엄마한테 여사님이라 그래요...
빈: ..넌 궁금한 거 많아서 안 심심하겠다.
더미: ..이상하니까 그렇잖아요.
빈: (주머니에서 전화번호 적어온 쪽지를 준다)
서울 생활 힘들 거다. 내가 필요하면 연락해.
더미: (받고)
고마워요.
(빈을 보며 활짝-웃는다)
씬10 더미와 빈의 몽타쥬
더미와 빈, 반대방향으로 걸어간다.
빈, 문득 돌아본다.
더미, 돌아본다.
더미, 빈을 향해 활짝- 웃는다.
빈, 그녀의 미소가 눈부시다.
마주 웃지도 못하고, 찡그리는 것도 아니고
애매한 얼굴로 더미를 보다 돌아선다.
두 사람, 서로 멀어져 간다.
빈, 다시 돌아본다.
더미, 돌아본다. 더미, 손을 흔든다.
빈, 얼른 시선을 비켜 앞을 본다.
빈, 뛰어간다.
한참을 뛰어가던 빈, 돌아본다.
더미가 사라졌다.
빈, 그 자리에 멈춰서
우두커니 더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본다.
씬11 국수집 앞
더미, 걸어가다 음식점을 본다.
‘아침됩니다’ 쓰여 있다.
더미, 지나쳐 가는데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난다.
더미, 뒤돌아서 국수집을 본다.
씬12 국수집, 안
허름하다.
벽에는 국수, 수제비, 장떡, 막걸리라고 쓰여 있다.
준희, 국수와 장떡, 막걸리를 시켜 놓고 앉아 있다.
준희, 장봉실과의 충돌로 마음이 아파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있다.
음식에는 손도 안대고, 막걸리를 따라 마신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더미가 들어온다.
더미: (자리에 앉고)
여기요! 양 젤 많구요! 젤 싼 걸루 주세요!
준희, 그 소리에 더미를 본다.
앙상블에서 본 그 아이다.
더미, 시선을 느끼고 준희를 본다.
더미: 어..
(알아 봤다)
준희: ..
더미: (어떡해야 할지 망설이다)
안녕..하세요..?
준희: ...
(물끄러미 보다. 이 상황이 탐탁치는 않은)
우리, 서로 민망한 사람들끼리 또 보네요.
더미: (머쓱해서 혀를 쏙, 내밀고 헤헤..웃는다)
준희: (그 모습이 우스워서 조금 미소 짓는다)
더미: (쑥스러워서 머리 긁는다)
준희: 거기 괜찮아요?
더미: ?
준희: (발을 가리키며)
접 지르지 않았어요?
나두 얼마 전에 그래서 고생했는데.
더미: 그런 걸룬 안 다쳐요. 통뼈에요, 저.
준희: ...
(더미를 가만 보다 막걸리를 마신다)
더미: 반준 빈속에 안 좋은데.
울 엄마두 아침에 반주 자꾸 해서, 속 버렸는데.
준희: (손짓해서 부른다)
더미: 에?
준희: 같이 해요.
민망한 사람끼리 한잔 하면서,
장봉실 여사 욕이나 하자구요.
씬13 동, 장소(시간경과)
준희와 더미, 마주 앉아 있다.
벌써 술을 제법 했는지 둘 다 조금 취했다.
주인, 막걸리 한 주전자 새로 가져왔다.
(국수 그릇들은 없다)
더미, 준희의 잔에 술 따르고
자신의 막걸리에 설탕을 넣고
숟가락으로 젓는다.
준희: ...애들 같애.
더미: 헤헤~ 이건 이렇게 먹어야 맛있더라구요.
준희: (웃고, 술을 마신다)
더미: 아까, 군복 염색해서 먹구 살았단 얘기 듣구
깜짝 놀랬어요.
준희: ..
(표정 싸늘해진다)
아까..한 얘기들은 잊어줬음 좋겠어.
우리, 다시 만날 일..없겠지만..
그 이야기들 다 잊어버려줄래요?
건..여사님한테만 한 얘기니까.
더미: ..죄송해요.
준희: ...
(술을 마신다)
더미: ...
(좀 민망하다. 민망함을 가시려고,
‘서울야곡’을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준희: ...
(본다)
더미: ..
(노래를 부른다)
준희: ..
(자리에서 일어난다)
더미: 어, 왜요? 왜 그러세요?
준희: 먼저 갈게요. 고마웠어요, 친구해줘서.
준희, 주인여자에게 오십 원 주고 문 쪽으로 간다.
더미: 저기요!
(일어난다)
미안해요..내가 진짜 뭐 잘못한 거 같애요.
준희: ...그쪽 잘못 아니구.
그냥...내가 그 노랠 싫어해서.. 듣고 싶지 않아서..
더미: 미안해요..아가씨. 괜히..기분 상하게 해서.
준희: (생각하다)
난, 아가씨 아니에요. 고준희예요.
다음에, 혹시 또 만나면.
(웃고)
그땐 준희씨라고 불러요.
더미: ...
준희,
더미에게 고개 조금 숙여 인사하고 문 열고 나간다.
더미: ...
(그런 준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본다)
...준..희...씨.. 고준희..씨..
씬18 시장 일각(저녁)
더미, 일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다.
더미의 뒤쪽으로 지게에 메리야스를 산처럼 지고 가던,
동양 상회 직원(남/20대 후반)
더미, 돌아서는 바람에 동양 상회 직원과 부딪힌다.
지게가 기우뚱 하면서
우르르- 쏟아지는 메리야스 상자들.
더미: 으!! 괜찮으세요!
직원: 니 눈엔 이게 괜찮은 걸로 보여!!
더미: (난감해서 바닥에 쏟아진 메리야스를 본다)
씬19 동양 상회 안
더미, 불려와 있다.
동양 상회 직원(이하 허군)
씩씩-거리며 더미를 노려보고.
박사장(여, 40대) 난감해서
통이 망가진 메리야스 쌓인 것을 보고 있다.
허군: 눈깔은 장난으루 붙였냐? 복잡한 시장바닥서,
왜 홱홱 돌아서구 지랄이야!
아...사장님, 이제 어떡하죠?
박사장: ...
(메리야스 망가진 것과 성한 것을 뒤적여본다)
우째 야스까?
더미: 제가요. 다 세탁해서요. 다림질해서요.
(상자를 보다)
곽은... 독립문하구 낙타표 가 새로 얻어 올게요.
거기다 잘 넣으믄..
허군: 빨아 다림질?
그걸 누가 사 입어!
박사장: 허군아. 니두 잘한 거 하나 ?졍?.
우야겠노..벌써 베리뿌린 걸.
청계천 가 관으루 내다 팔 밖에..
처잔 고마 가 보그라.
더미: 죄송해요..정말..죄송해요..
(인사하고, 문 쪽으로 가려다가 돌아본다)
박사장: (본다)
더미: 저..여기 점원으로 취직시켜 주세요.
제가..손해 보신 거 이상 한 몫 할게요.
허군: 변죽도 좋네, 기집애. 안가! 콱!
더미: 취직두 취직이지만..
제가 발이 안 떨어져서 그래요.
넘 죄송해서.
박사장: (보다)
니..부기할 줄 아나?
더미: (무슨 소린지도 모른다)
박사장: 고마, 주판은 쪼매 되고?
더미: (고개 젓고)
암산은...좀 하는데요.
박사장: 봐라, 여긴 말이다.
그냥 지나는 손님들한테 쪼매씩 파는
소매점이 아인기라, 도매점인기라.
부기, 주판을 해야 장불 볼 꺼 아이가.
더미: 배울께요. 밤을 새서라두..배울께요.
허군: 안가! 기집애야!
어딜 눌러 붙을라 들어!
더미: (사장을 보고)
부기, 주판은 못 해두..저, 부지런하구요.
힘두 쎄구요. 아무리힘들어두 불평안하구요..
점원으루 채용해주세요. 며칠만이라두 지켜봐주세요.
네? 네?
박사장: ...
(더미를 본다)
씬20 더미의 몽타쥬
더미, 다리도 뻗기 힘든 동양 상회 골방에서
주판을 연습하고 있다.
더미, 졸리는 허벅지를 찔러가며
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모두가 퇴근한 밤 혼자 물건을 정리하고,
장부를 쌓아놓고
주판으로 일일이 셈을 맞춰보고 있는 더미.
더미, 허군에게 셈이 틀렸다고,
머리를 장부로 얻어맞고 있다.
더미, 새벽같이 나와서 동양 상회 문을 열고,
청소를 한다.
씬21 동양 상회
허군, 박사장에게
‘돈이 자꾸, 빈다니까요. 사장님
/니가 장부 잘못 기입한거 아이야?
/아..참. 사장님 저보다 그 기집앨 더 믿으세요?’
쑥덕쑥덕 더미의 험담을 하고 있다.
박사장, 장부와 금고를 맞춰보고 있다.
더미, 메리야스를 얹힌 지게를 지고 들어온다.
더미: 다녀왔습니다!
(지게 받혀놓고 땀을 닦는)
박사장: ..오이야. 욕봤다.
허군: 사장니임~
(사장을 쿡, 찌른다)
박사장: (더미를 보다)
니 보증 스줄 사람 있나?
더미: 예? 그게 뭔데요?
허군: 저 기집애 또 쌩까네. 신원보증도 몰라!
니가 돈들구 튀믄 물어줄 사람 있냐시잖아!
더미: 저..돈들구 안 튀는데요..
박사장: 보그라, 더미야. 니 오해 말고 잘 듣거레이.
여가 현금 장사 아이가.
뭐, 점빵이 요새 망쪼가 쪼깨 들어가꼬
장사가 야물지는 못해도 현금 도는 데 아이가.
더미: ..
박사장: 참말로, 널 못 믿어카는 소린 아이고...
그기 관롄기라..우야제?
더미: ..
(난처한)
씬22 당구장
더미, 빈과 이야기하고 있다.
, 혼자 당구를 치던 중이다.
빈: (공치면서 더미 놀리는)
내가 뭘 믿구 보증을 서. 널 뭐 안다구.
더미: 그렇죠? 하긴, 나래두 안서주지 뭐.
보증은 원래 부모 자식 간에두 안 서주는 거라는데...
빈: (큐대 놓고)
한 달 만에 전화 ?例漫? 보잔 용건이 겨우 그거냐?
더미: 미안해요.
나두 별 기대 안했으니깐 신경 쓰지 마요.
빈: 기댄 왜 안 해?
니가 지금 기댈 데가 나밖에 더 있어?
더미: 에?
빈: 월급 탔냐? 탔음 낼 모레 술사라..
더미: 아직..안 탔는데.
빈: 그럼 밥 한 그릇 사든가.
더미: 밥은 왜요? 집에서 먹음 되지.
빈: 신원보증 서주는데 그 정도도 못해?
더미: 으아!! 고마워요!! 고마워요!!!
더미, 빈의 손을 잡고 기뻐서 흔든다.
빈, 그런 더미를 바라본다.
좋아서 펄쩍펄쩍 뛰는 더미를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다, 빈 표정 바꾸고, 쌀쌀하게 팔을 뺀다.
[아세아복장학원 수업]
씬23 앙상블, 실습실 앞
준희 차연 방육성과 실랑이를 벌인다.
안으로 강의를 하고 있는 장봉실 보인다.
준희, 안을 들여다보며 들리는 내용을 필기하고 있었다.
차연: 부잣집 따님이라 맨날 소 심줄만 고아 먹어?
왜 이렇게 질겨? 한 달 만에 나, 아주 심장병이 생겼어.
고준희씨 그림자만 봐두 심장이 다 벌렁벌렁해.
방육성: 심장이 콧구멍이가 벌렁벌렁하게.
차연: 선생님!
(흘기고)제발 좀 가 응?
우리 선생님 한 번 아니면 죽어도 아니셔.
뭐야, 구질스럽게!
가난한 집 애들, 귀동냥 공부두 아니구!
준희: (웃으며)
그냥 가만히 있을께요. 방해 안 되게. 좀 봐 주세요~
빈, 올라오다 실랑이 하는 준희를 본다.
차연: 그만 좀 뻗대!!조옴!!
(소리 지르다가, 강의중이다.
얼른 입 막았다가, 소리 낮춰)
이러구 뻗대는데 신경 쓰여서 선생님, 수업이 되시겠어?
방육성: 참.. 큰일이다. 이 방육성이가 도와줄 수도 없고.
답이 안나오네.
빈: 포기해요. 원래 준희 고집 한 번 부리면 답 안 나와요.
차연: (보고)
빈아 너가 좀 어떻게 안되겠니?
빈: (손 벌리고 어깨 으쓱한다. 내가 뭘 어쩌겠어요)
문 열리고, 수업을 끝낸 장봉실 나온다.
준희, 장봉실에게
‘오늘, 수업 잘 들었습니다~’ 밝게 인사한다.
장봉실: ..
빈: (놀리는) 웬만하면 함 키워보시죠?
쟤, 여사님 판박이잖아요.
성격은 똑 같은데, 실력은 어떨지 안 궁금하세요?
장봉실: ..
(복잡한 심정으로 준희를 본다)
씬24 장봉실의 방
준희, 의자에 앉아 있다.
장봉실, 초조한 듯 책상에 기대 손톱으로
책상을 탁탁, 치면서 뚫어져라 준희를 보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긴장.
장봉실: (손가락 멈추고)
세상에서 젤 골치 아픈 사람이 누군지 아니?
준희: ..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안다)
장봉실: 재능은 전혀 없으면서, 질기기까지 한 애들.
도대체 포기란 걸 몰라. 사람 질리게 해.
준희: ..
장봉실: 네 데자인이 쓰레기라는 말 취소하고 싶지 않아.
말은 심했지만, 사실이니까.
재능 없는 사람한텐 없다고 말해주는 게 돕는 거야.
준희: (웃는다)
취소하지 않으셔도 되요.
다만, 정말 제 재능을 보여드릴 수 있게
기횔 주세요, 여사님.
장봉실: ...
(한숨)
선생님이라고 불러.
준희: (감격해서 일어난다)
선생님!!
장봉실: 한달이야.
한달 안에 내게 어울리는 이메이지를 만들어줘.
크게 기댄 안 해.
일 프로라도 날 만족시켜 줄 수 있겠어?
(책상 위의 줄자를 집어 내미는)
씬18-1 대한상사, 해외영업2부(밤)
동영, 보고 있던 장부들을 정리한다.
‘대한상사, 1967년도 수출현황/68년 현황'등의 자료다.
자리에서 일어난 동영, 장부를 서류함에 집어넣다가
서류함에 든 잡지를 보고 꺼내든다.
(인서트) 타임지.
1969년 5월호로 지난 잡지다.
동영, 표지를 보다, 무심히 목차를 넘긴다.
(인서트)
‘Korean Wig Export Company, Capturing US Market
(한국 가발수출업체들, 미국 시장을 점령하다)’
라는 제목에 붉은 줄이 쳐져 있다.
동영, 고개 끄덕이고 넘기려고 하다
시선이 하단의 제목에 고정된다.
(인서트)
Recollecting the Korean War
‘Did that girl live?‘ Arthur Brown
한국전쟁 회고, ‘그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서 브라운
동영, 그 페이지를 넘겨서 무심히 본다.
눈으로 단숨에 읽어가던 동영,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든다.
동영: !
동영, 잡지를 들고 허둥지둥 의자에 발이 걸려 가면서
인체두상 모형을 쓰러트려 가면서
허진기의 책상으로 가, 수화기를 집어 들고,
전화국 번호 돌린다.
동영: (마음이 몹시 급하다)
해외전화 부탁합니다! 미국 타임지 본사!
(잡지, 속지 전화번호를 보며)
뉴욕 212 484에 1201번요!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