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교 게시판 단상(斷想)
1968년 3월은 첫 타향살이의 시작이었다.
시골(玉溪)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산골뜨기 촌놈이 번화한 강릉으로 유학하여
‘사글세 자취’로 처음 맞이하는 객지 생활이었다.
모든 게 낯설고 서툴렀지만...
입학하자마자 그 해는 개교 30주년이라 경희대에 재학 중인 왕서방 엉아를 특별 초빙하여
약 두 달 가까이 개교기념 행사의 하나인 매스게임 연습에 열중하였다.
(학부모님과 이웃 주민들까지 초대하는 거창한 행사로, 하교 후에도 남아서 맹연습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공중제비를 훌훌 넘던 왕서방의 묘기는 신출귀몰(!) 하기만 했었다.
지금이야 올림픽 등을 통해 종목 별로 세계최고 수준의 묘기를 다 감상할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난생처음으로 텀블링이나 마루게임 등, 기계체조의 묘기를 시퍼런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
왕서방 엉아가 신령님과 버금가는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존재로 비춰질 수 밖에는...
경희대 출신의 김 인권 체육선생님이 아마도 모교에서 스카우트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해 4월 23일 개교 기념일 날, 전교생에게 하나씩 나누어준 카스텔라 케잌은
늘 배고프던 자취생에게는 바로 신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쥔집 사모님에게 상납(?)하고 말았으니 나는 한없이 여리고 소심한 시골 촌뜨기였다.
처음엔 ‘솔 갈비(마른 솔잎)’를 사다가 조석(朝夕)을 지었는데,
나중에는 연탄 아궁이로 이사하여 조금 편하긴 하였으나 밤새 연탄불이라도 꺼지는 날이면
그날은 저녁 때까지 꼼짝없이 굶는 날이었다.
허기와 탈진으로 교단에 서계신 선생님이 가물가물~ 어리며 현기증이 이는데...
그래도 옆 친구의 도시락을 넘볼 엄두는 감히 내보지도 못하는 쑥맥이었다.
같이 지내던 룸메이트 선배가 매점에서 조달한 ‘킹구빵(건빵)’ 한 봉지를 전해주고 가는데,
그나마도 두어 개 입에 넣을라치면 벌떼처럼 달려든 친구들에게 압탈(?) 당하고 말았다.
한가락 한다는 논다리 어깨(?)들은 젓가락 하나만 달랑 들고서도 이늠 저늠 한 수저씩,
세금 공납하듯 즐거운 점심시간을 맞이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주변머리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없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된다.
그 당시 가장 괴롭던 날은 소풍이었다.
주로 회산 솔밭으로 소풍을 갔는데, 식사 시간이 되면 따로 도시락을 준비할 수 없었던 나는
들킬세라 냇가에 혼자 앉아서 흐르는 물만 들이키며 쫄쫄~ 주린 속을 달랬었다.
노오란 계란 넣은 김밥을 싸오던 ‘김 XX’이가 왜 그렇게도 부러웠던지...!
나중에 돈 벌면 실컷 먹어보리라~
혼자 되뇌이곤 했던 다짐이 그 당시엔 또 왜 그다지도 절실했던지.....?
그 당시 배고픔과 먹는 문제는 우리의 가장 중차대한 ‘화두’였던 것 같다.
소풍은 가기 싫은데 결석으로 처리 한다고 하니...
즐거워야 할 소풍날 하루가 나에게는 견디기 힘든 천형(天刑)의 시간이었다.
연초부터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시끄럽더니,
그 해 가을에는 120명이나 되는 ‘울진 삼척 무장 공비’까지 침투하여
유달리 춥던 그 해 겨울 12월까지 어린 이 승복 어린이를 비롯한 양민들까지 무참히 학살하는 등,
유난히 더 추운 겨울이 되고 말았다.
동장군이 엄습한 냉방에서 문풍지마저 떨어져 나간 한기와 싸우며 겨우 내내 버텼는데,
마지막 학년말 시험을 보다가 그만 이틀 만에 쓰러져 남은 이틀은 끝내 시험도 못 치른 채
뇌막염으로 장기간 동인병원에 입원하여 수술 받고 끝내는 1년간 휴학까지 하고 말았는데...
(그 시절 ‘뇌막염’은 치사율이 70% 가까운 중병이었다)
생사를 오락가락 했던 그 시간도 이제는 젊은 날의 추억이 되고 말았다.
병원비 때문에 집안의 가장 값진 재산이던 ‘천태(새끼를 천 마리나 낳는 어미 소)’라 불리던 암소까지 팔아야 했는데,
집안의 보물과 내 목숨을 맞바꾼 셈이었다.
‘천태’ 때문에 내 목숨을 살렸다고 어머님께서는 가끔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호기 있게, 나중에 돈을 벌어서 꼭 ‘만태’를 사드리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내가 미처 일가를 이루기도 전에 집이 시내로 이사하는 바람에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기회조차 못 가졌으니,
나도 에지간히 불효하고 박복한 놈이 아닐 수 없다.
그 시절 등교 길에는 나에게 유난히 가슴 설레는 커다란 즐거움이 있었으니,
바로 강당 앞에 서있는 게시판에서 ‘금일의 명언’을 읽는 일이었다.
당시 서예가이기도 했던 ‘고 순재’ 미술 선생님께서 유려한 붓글씨로 매일매일 게시하던
명언을 읽으면서 나의 꿈 많던 사춘기 시절의 지적인 성숙에 일조를 더하지 않았나 싶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여지껏 평생을 나와 함께 하는 명언 한 귀절...
그것은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언제나 짝꿍인양 읊조리면서 다시 재충전으로 힘을 얻곤 하던 글귀도
그 당시 까까머리 시절에 얻었던 소중한 선물이었다.
갈마산 자락 용봉대 언덕에서...
꿈 많던 사춘기 그 불면의 시간들을 고민하고 뒹굴면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꿈꾸면서 되뇌었던 그 귀절이, 딱 40년이 지난 지금 청명한 이 가을 하늘을 보며,
한가위를 며칠 앞둔 오늘에 갑자기 추억하고 싶은 충동은 어인 일인가...?
아직도 할 일은 많고 많은데...
나도 이제 서서히 나이를 먹어 감을 실감하는 계절인가...?
그러나 나는 40년 전,
철침(鐵針)처럼 나의 뇌리에 각인되던 그 또렷한 글귀처럼 아름다운 주름살을
나의 이마에다 새길 수 있었으면 한다.
대 문호 ‘톨스토이’ 영감님의 그 독백처럼......
“겸손의 덕과 침묵의 이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로 하여금
강한 자에게 이기게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
첫댓글 세대는 달라도 어쩜 나와 같이 비젓한 생활이었네요.... 어려웠지만 그시절이 잴루 좋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세상은 살만 하다오...
나와함께~아니.. 나를 좋은산에 안내하고 같이다닐려고 깊은 병마를 이겨냈구려~항상 고마운 후배롤쎄^^
산에서 오래도록 기를 흡수하시더니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나 봅니다. 그시대 거의 비슷한 환경이었지요! 저도 2학년때 8번이나 이사했습니다. 그저 내가 살아온 흔적이지요! 잘봤습니다.
김대장의 글심은 언제나 읽고나면 많은 생각을 하곤하지. 더많은 사람이 읽고 모든이가 지난일을 한번쯤은 회상할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