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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4월, 정 주영은 불하받은 그 땅에다 자동차 수리공장을 짓고 현대
자동차공업사라고 하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전의 아도 써비스공장 경험을
되살려 보자는 의도에서였다.
다시 그의 동생 순영과 매제 김 영주가 와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홀동
광산에서 사귄 최 기호와 고향 친구 오 인보도 와서 일했다. 오 인보는 신
설동 써비스공장 시절에도 같이 일하면서 경리 일을 맡아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미군 병기창에 가서 엔진을 바꾸어 간다든가 하는 자동차 수리
를 청부했었다. 그러다가 한 일년쯤 지나면서부터는 낡아 빠진 일제 차들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1톤 반짜리 트럭 차체의 중간 부분을 이어 내서 2톤 반
짜리 트럭으로 만들기도 하고, 휘발유가 귀한 때였으므로 연료공급장치를
목탄이나 카바이트로 개조하는 등의 작업이었다.
한두 사람씩 늘어나기 시작한 종업원이 어느덧 3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
다. 한편 자동차의 수요는 날로 급격하게 증대되어 갔다. 해방 당시 전국의
4천 5백대에 불과하던 자동차 대수가 1947년 3월에는 그 배인 9천대로 증가
했다. 그 중에서도 8할로 추산되는 6천3백여 대의 차량이 서울을 중심으로
붐볐다. 일제 때 생활근거를 잃고 국외로 이주했던 동포들의 대부분이 서울
로 몰려 들었으며 크고 작은 장삿군들의 도시에로의 집중 현상은 비단 우
리 나라에서만의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서울로의 인적 물적 유입량은 크게
불어났지만 생필품을 비롯한 제반 물자의 수급 고갈은 물가를 자극했으며
이에 편승한 유통 마진을 노리는 상인들의 절실한 기동성의 욕구는 교통량
을 증대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 서울 부산간을 잇는 1호 국도에는 화
물자동차의 홍수사태를 빚어내기까지 했다.
그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업고 정 주영의 현대자동차공업사는 날로 번창
해 갔다. 일년 만에 30명이던 종업원이 80명으로 불어났다. 자동차 수리 관
계로 관청출입을 자주 하던 그는 47년 5월 25일 드디어 현대토건사라는 또
하나의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그것은 정 주영에게 건설업을 할 만한 자본금이 비축되었다는 사실을 뜻
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 주영이 건설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간단했다. 관청에다 견
적서를 넣고 계약을 하고 일을 끝낸 다음에 돈 받기는 마찬가지인데, 돈 받
을 때 보면 자동차 수리업을 하는 자신은 30만원이나 40만원을 받는 데 반
해서 건설업을 하는 사람들이 받는 돈은 보통 천만원 단위였다. 그럴 바에
야 나도 큰일을 맡아서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 주영이 막상 토건업 간판을 내 걸려고 했을 때 그의 측근들은
만류했었다.
"형님, 토건업은 첫째 자기 자본도 넉넉해야 하지만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자동차나 만지던 우리가 어떻게 토건업을 합니까?"
매제 김 영주의 반대였다.
"그리고 토목이나 건축공사라는 게 한두 달에 끝나는 게 아니잖은가. 어
떤 공사는 일년도 걸리고 이년도 걸리는데.......물가는 자고 새면 오르니
잘못 공사를 맡았다간 망하네 망해."
경리를 맡고 있는 친구 오 인보의 반대 의견이었다.
하지만 토건업이 정 주영 자신으로서는 아주 생소한 분야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토목 공사판에서도 일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토
건업이라는 것이 대개가 수리 영선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견적서 넣고 계약
하고 일해 주고 돈 받기는 자동차 수리업이나 진배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당시의 우리 나라 토건업계는 미군 시설관계의 긴급공사가 대량으로 발주
되고 있었기 때문에 자못 활기를 띠고 있었다. 미군은 국내 토건업계의 유
일한 조직기관인 조선토건협회에 업자추천을 의뢰했고, 협회에서는 소위 일
류업자라는 사람 15명을 추천해서 그들로 하여금 미군 공사를 감당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날로 증가하는 미군공사는 그들 소수업자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와 같은 현상은 일반업계에 큰 충동을 주어 기존
업자는 물론 수많은 속성업자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기 시작해서 한때는 서
울에만도 3천여 업체들이 미군공사를 수주하기 위한 피 나는 싸움을 하게
했다.
그래도 큰 공사는 역시 그 당시 건설업계에 <제너컨>으로 군림하던 신건
공영.광진토건.삼환기업 드으이 베스트 쓰리 업체와 오공무소.삼강기업.해
신토건.마공구점 등이 사전 당고를 통해서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제너컨>이란 말은 제너럴 컨드랙터라고 해서 일괄 수주업자 또는 종합건
설업자라는 뜻이었는데, 사실상 그때의 제너컨은 명색만 제너컨이었지 그
시공능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다른 군소업체들은 그 제너컨의 하청업자들로서 도토리 키
재기로 올망졸망해서 수니위도 알 수 없는 정도였는데 정 주영의 현대 토건
사 역시 그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처럼 일류업자들에 의해서 분할 점령되고 있는 건설시장 틈바구니에 끼
어서 그나마 현대토건이 창사 초년도에 1천 5백 30만원의 게약고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정 주영의 수완으로 미 군정청 관리들과의 교섭에서
이것 저것 잡다한 영선 수리 공사 등을 따낸 덕분이었다.
현대토건은 처음 초동 현대자동차공업사에 더부살이로 내 걸었던 간판을
떼어서 이듬해에는 광화문에 있는 평화신문사 빌딩에 다 따로 방 두 개를
세 내어 사무실을 차리고 옮겨 달았는데, 기술자라고는 겨우 공업학교 교사
출신인 송 상술이라는 한 사람이 있었으며 기능공도 10여 명 정도가 들락날
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 주영은 한 일년 경험하고 나서 토건업은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생각했
다. 공사를 따 내기가 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시작하면 수지는 맞았다.
그는 현대토건이 공사를 따는데 힘 드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토건업도 자동차 수리업과 같이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신용을 쌓아 올리
면 일 거리는 저절로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48년에도 49년에
도 47년도의 계약고를 유지하면서 착실하게 기반을 굳혀 나갔다.
9150년 1월, 정 주영은 토건업에 박차를 가할 생각으로 현대토건사와 현
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서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공칭자본금을 3
천만원으로 하는 현대건설은 1월 10일에 설립등기를 필함으로써 법인체로서
의욕적인 출발을 했었지만 공사다운 공사는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6.25동란의 와중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 무렵, 현대건설은 돈암동 전차 종점에다 승무원 대기소를 짓고 있었
다. 미아리 고개에서 피난민들이 물밀 듯이 밀려 넘어 오고 포성이 찌렁찌
렁 울려오는 6월 28일까지도 미련할이만큼 충직한 그는 현장공사를 지휘하
고 있었다. 큰 동생 정 인영이가 초동의 써비스공장엘 들렀다가 돈암동 현
장으로 찾아온 것은 오정이 조금 지나서였다.
일본의 청산학원 영문과 출신인 정 인영은 영어에 능통했다. 그래서 미군
정 시절에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통역관으로 활약하면서 많은 미군들과
인연을 맺어 오다가 49년에 미군이 남한으로 부터 철수한 후로는 언론계에
종사해 오고 있었다.
"형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예요?"
현장 일에 정신 없는 형을 본 인영은 답답하고 안타까왔다.
"왜? 여긴 웬일이냐?"하고 돌아보는 형을 인영은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
보다가,
"형님, 지금 공산군이 바로 이 고개 너머까지 쳐들어왔어요."하며 미아리
고개를 가리켰다.
"뭐라구? 그럼 이 공사를 어떡하지?"
피난 가자고 찾아온 동생 앞에서 그는 중단될 공사 걱정만 하고 있었다.
인영은 상황이 절박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제서야 정 주영은 현장 소
장으로 있던 최 기호와 인영과 함께 은행으로 가서 예금 전액을 인출해 가
지고 피난길을 나섰다.
가족이 그전 신설동 집에 살고 있었지만 정 주영은 들여다볼 겨를도 없었
다. 며칠 후에는 되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피난길은 그냥 부
산까지 밀리고 말았다.
그때 정 주영이 부산까지 밀려갔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가 그대로 서울
에 주저앉아 있었다면 오늘날의 현대건설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현대건설이 건설업자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바로 6.25를 통
해서였다. 그의 말대로 건설업자란 평화로운 때에는 평화를 건설하고 전쟁
이 일어나면 전쟁에 따르는 공사를 해야 하게 마련이어서, 평화시에도 전시
에도 공사는 언제 어디서나 있었다.
7월 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 유엔의 이
름으로 한국동란에 참전할 것을 결의했다.
부산에는 한꺼번에 10만이 넘는 미군이 밀어 닥쳤다. 하지만 부산에는 별
안간 몰려오는 미군을 수용할 만한 숙박시설의 마련이 전혀 없었다. 학교
교실을 임시 숙박시설로 이용했지만 학교 교실만 가지고는 태부족이었다.
운동장에도 마루를 깔고 천막을 치고 하는 북새를 떨어야 했다.
정 주영은 그와 같은 미군 공병단의 공사를 도맡아서 해냈다. 그의 동생
인영이 미8군 공병감실에서 군속으로 근무하게 됐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 주영은 교통부, 외자청, 현대건설 삼자간의 외자보관 창고건설
및 창고보관업대행 계약을 체결하고 부산 제2부두에다 연건평 2천 백67평에
이르는 3동의 외자보관 창고 신축을 착수했다.
현대건설이 정부지원금으로 외자창고를 신축하고 그 창고의 보관업무를
대행하는 조건으로 월 2백만원의 고정 보관료를 받는 이외에 물품의 출입고
에 따르는 상 하역비와 그 물품의 관리비는 따로 계산해 받는다는 내용의
계약이었다.
보관창고가 미처 다 지어지기도 전에 미국이 제공하는 각종 구호물품과
원조물자는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그는 따로 현대상운주식회사를 설립하고 30톤 내지 70톤 급의 소형선박
세 척을 구입하고 이를 연안해운업에 투입했다.
부산은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든데다가 정부가 이전해 오고, 전방에 투
입될 유엔군 및 국민방위군 등의 보충병력이 집결하는 등으로 정치.경제.군
사의 중심지로 일변했기 때문에 물동량의 유출입이 포화상태를 이루고 있는
때였다.
그와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현대상운은 제주.진해 등지를 내왕하면서 소
금 식료품 양곡 등의 필수물자를 수송해 날름으로써 전시 경기 하의 유통
마진을 톡톡히 누렸다.
그때 이미 현대건설은 건설업체 중에서 유일하게 미8군에 군납 건설업자
로 등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 주영은 미8군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으
며 8군이 발주하는 공사는 거의 독점할 수가 있었다.
정 주영은 9.28수복 때 미군과 함께 서울에 들어왔다.
가족은 다행하게 모두 무사했다.
그는 평화신문사 빌딩에 있는 현대건설 사무실을 초동의 자동차 수리공장
으로 옮기고 흩어졌던 종업원들을 다시 모아 주로 군용차량을 대상으로 하
는 수리업을 재개시켜 놓은 다음 바로 공사 수주활동에 나섰다.
먼저 수주한 공사는 서울대학교 법대와 문리대 건물을 개조해서 미8군 전
방기지 사령부 본부막사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수주한 것은 역시 미8군의 휘하 부대인 8029부대가 발주한 부평
조병창 보충부대 막사 신축공사였다. 그 공사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트러스
로 천정을 만드는 비교적 간단한 일로 1.4후퇴 직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때까지 3백여 채를 지었다.
한 채당 실행예산은 24만환꼴이었지만 실제 공사이익은 실행예산의 5.6백
를 거두었으니 참말 돈을 갈퀴로 그러모은 공사였다.
그러나 공사마다 그렇게 돈이 벌리는 것은 아니었다. 수원 공군기지 복구
공사는 그가 처음으로 큰 적자를 본 공사였다.
유엔군이 북진을 계속하고 있을 때, 미구니은 수원 비행장의 복구공사를
정 주영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는 곧 복구공사에 쓸 목재를 비롯한 각종 자
재를 실어다 놓고 작업에 들어갔다. 그랬는데 난데 없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공사를 중단한 채 부산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서울이 다시 수복된 후, 그는
미군과의 종전 계약대로 그 공사를 마무리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에 쌓
아 재어놨던 자재는 다 분실되고 물가는 곱으로 뛰어 올랐던 것이다.
다시 부산으로 피난한 정 주영은 제1부두 앞에 있는 제일운수 빌딩에 사
무실을 세 내어 현대건설과 현대상운의 간판을 내걸었다.
이번 피난 길에는 가족과 종업원들도 다 함께 내려왔었다.
이보다 앞서 정 주영은 유엔군이 원산.함흥까지 북진했을 때 38선 이북인
고향으로 달려가서 공산 치하에서 고생하는 아버지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몽땅 서울로 모셔다 놓고 있었다. 그는 46년에도 38선을 넘어 가서 아버지
의 회갑잔치를 차려 드리고 오는 일을 잊지 않았다.
정 주영은 초량에다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리는 한편 미군 공사를 계속했
다.
부산 수산대학과 영도국민학교 건물 내부를 개조해서 미8군 후방기지 사
령부의 보충병 수용막사를 만든 다음, 그는 그 막사를 유지 관리하는 용역
사업가지도 맡았다.
난방으로부터 청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용역을 청부 맡게 되자 현대 종업
원들은 미8군 마아크가 붙은 군복을 입고 미군 부대를 자유롭게 출입했다.
그처럼 미8군과 현대건설과의 관계는 자못 긴밀했다. 유엔군이 평양을 점
령한 작년 12월 중순경, 미8군이 정 주영에게 비행기편까지 제공해서 평양
의 군납공사를 맡기려 했다가 1.4후퇴로 그 계획이 취소되었던 것을 미루어
보아도 미군과 현대건설 사이가 얼머나 밀접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1952년 12월 미국의 아이젠하워가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국전선을
직접 시찰하고 나서 한국전쟁을 평화적으로 종결짓겠다고 한 선거공약을 실
천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게 된 때의 일이었다.
미8군은 아이젠하워가 한국에 와서 머무는 동안의 숙소를 운현궁으로 정
했다. 그러나 운현궁의 외관은 나무랄 데가 없으나 그가 기거할 만한 내부
시설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있을 방에 보일러 시설도 해야 하
고 화장실도 드리고 내부 단장도 해야 하는데 시간은 15일밖에 여유가 없었
다.
미8군은 고심하던 끝에 정 주영을 불렀다. 관계관의 설명을 듣고 난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오. 자신 없어요?"
관계관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올시다. 좌우간 한번 해봅시다. 그러나 이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지
는 일을 하고 나면 뭐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하다 못해 일군들 수고했
다고 막걸리 사발이라도 사 먹이려면 보너스가 있든지......"
관계관이 미군들과 뭐라고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이때도 정 주영은 자꾸
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정사장,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요?"
"만약 공사를 기일 내에 해내지 못하면 공사비를 못 받는 것은 물론이고
거꾸로 정사장이 공사비 백퍼센트의 페널티를 물고, 그 대신 기일 안에 해
내면 이쪽에서 공사비의 백퍼센트를 보너스로 내놓지요."
"좋습니다."
정 주영은 흔쾌히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나오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첫댓글 유엔군이 평양을 점 령한 작년 12월 중순경, 미8군이 정 주영에게 비행기편까지 제공해서 평양 의 군납공사를 맡기려 했다가 1.4후퇴로 그 계획이 취소되었던 것을 미루어 보아도 /정주영 명예회장님의 대북정책 프로젝트의 싻이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네요!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