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 속의 순정
전홍구
갈대의 진가는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드러난다.
봄과 여름에는 푸른 잎을 흔들며 무리 속에 섞여 산다. 그 시절의 갈대는 평범하다. 들판의 나무와 풀들 속에서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게 긴 시간을 초록의 모습으로 보낸 갈대는 가을이 되면 변화를 맞이한다. 그 초록빛은 어느새 희끗희끗한 은빛으로 바뀌고, 겨울을 앞두고 마침내 백발의 머리를 드러낸다.
겨울은 갈대의 마지막 무대와도 같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그 자태가 날카로운 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서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하지만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갈대는 마치 "싫다"라며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인다.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에서 어떤 이는 연약함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갈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다. 끝내 뿌리를 놓지 않고, 찬바람 속에서 흔들릴 뿐 쓰러지지 않는 갈대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강인하다.
이 겨울, 들판의 갈대를 보고 있자면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워 보인다. 바람에 고개를 숙이며 흔들리는 그 순간, 사람들은 하나둘 그 옆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도리어 그 겸손한 몸짓이 사람들에게 위안과 감동을 주어서 인가보다. 갈대는 자신이 찬바람에 몸을 낮추는 모습을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한 적이 없다. 그저 본능에 따라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갈대를 보며 "순정"을 떠올린다.
누가 갈대를 순정이라 했던가.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찬바람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 담담히 흔들리는 모습. 그 모습이 갈대가 가진 순수함이자, 고요한 고집이다. 갈대는 저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굽히면서도 꺾이지 않는 생명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어쩌면 우리는 갈대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찬바람 같은 어려움 속에서 흔들리고, 고개를 숙이지만 끝내 뿌리를 놓지 않는 삶. 그 겨울 갈대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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