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급생 누나(송유창) 2024. 8.3..최종
아주 옛날식 시골 중학교 옆에 최신식 행정복지센터 복지관 건물이 들어서 있다. 나는 그곳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요가 활동에 참여한다. 손자뻘 되는 후배 중학생들을 바라보노라니, 나의 상념은 까마득한 옛 추억으로 달음박질한다. 저들도 나처럼 ‘꽃을 흔드는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이곳 중학교는 입학시험만 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고, 한 학급이 70여 명쯤 되는 남녀 공학이었다. 여학생 중에는 남동생과 같은 학년에 다니는 학생도 몇 명 있었다. 한두 살이 많은 이들은 이미 사춘기를 맞아, 아마 남학생들이 때로는 철부지 동생처럼 때로는 연애 대상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남학생은 농업, 여학생은 가정을 배우는 시간이 일주일에 한 번 있었다. 별난 남학생은 평소에 지목해 둔 여학생이 있으면 그 여학생의 도시락을 반쯤 까먹거나 책에다 온갖 낙서를 해버리기도 했다. 호감을 가진 남녀 간에는 편지를 책 속에 살짝 넣어두기도 하였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몇 번이나 여학생의 편지를 받았다. 사춘기 시절 시골 학교에서 일어난 우리들만의 세계였다.
입학 초에는 서로 얼굴을 익히느라 서먹한 분위기였으나, 사는 동네와 출신 초등학교를 알게 되면서 분위기는 금세 달라졌다. 1학년 2학기가 시작되는 날 등교를 하니 내 책상 안에 연필, 지우개, 칼 등이 가지런히 채워진 분홍빛 플라스틱 필통이 들어있었다. 구하기 어려운 귀한 필기도구들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다른 급우들에게 사귀는 여학생이 있는 것처럼 비칠 수 있고, 그 학생이 밝혀지면 난처해질 것 같아서였다. 선물을 받지 못한 남학생들이 끝까지 밝히자고 달려들 것 같아 나는 잠자코 있었다. 분홍빛 연필통은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반장인 나를 좋게 보아서인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학기 중 어느 날 등교를 하니 신문지로 싼 큼직한 종이 뭉치가 책상 안에 들어 있었다. 책상에 바짝 배를 붙이고 조심스럽게 그 뭉치를 벗기자 하얀 종이에 싸인 찰떡과 시루떡이 들어있었다.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다른 학생이 “야! 내 책상 안에 떡이 들어 있어”하고 소리쳤다.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까지 입을 열면 일이 더 커질 것 같아서, 나는 조용히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간밤에 제사를 지낸 한 여학생이 행한 일이었다. 그때 바로 알지는 못했지만 한참 후에 두 살 많은 동급 여학생의 행위임을 알게 되었다.
2학년이 되자 미술 선생님이 갑자기 전교생을 대상으로 방과 후에 ‘미술 특별활동’을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데생부터 수채화며 조각까지 시골 학교치고는 제법 체계적으로 지도하는 미술 프로그램이었다. 선생님은 조금이라도 소질을 보이는 학생이 있으면 수채화나 조소반에 가입시켰다. 읍(邑)이 주최하는 ‘문화제 학생미술전’에서 입상자를 늘려보려는 의도에서였다. 나도 미술 선생님의 호출을 받아 수채화 반에 들어갔다. 그러나 방과 후 활동인데다 수업 후 집에 가서 소꼴을 먹이거나 집안일을 도와야 하니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더구나 미술보다 진학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컸다. 미술 활동에 빠질 때마다 선생님은 나를 불러 주의를 주었다. 미술 활동으로 귀가가 늦을 때마다 부모님은 야단을 쳤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을 한복판에서 이젤을 설치하고 냇물에다 붓을 씻으며 스켓치북에 물감을 묻히면 마치 화가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선생님은 우리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개인의 개성에 맞는 그림지도를 해 주셨다. 조소반은 시장통 옹기골에서 고령토를 사서 직접 작품을 만들게 했다. 특별활동과 집안일이 얽혀 이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고민하다 한 가지 꾀를 냈다. 일주일에 반은 그림을 그리는 척하고 반은 집으로 내빼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러나 집으로 가는 날엔 그림 도구를 어떻게 챙길 것인가가 문제였다. 그때 미술반에서 가끔 도와주는 여학생에게 차마 집안일 때문이라고 털어놓지는 못하고, “미술 특기로 진학할 것도 아니고, 인문고에 가야 하니 그림 그리기가 싫다”고 둘러 됐다. 그러자 여학생이 걱정하지 말라며 웃음을 보였다. 처음으로 그 여학생과 이야기를 나눈 셈이다. 집으로 오는 길에 흔쾌히 도와주겠다며 붉어진 그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내 그림 도구를 미리 설치해 주는가 하면, 수업이 끝나면 그림 도구를 빠짐없이 미술실에 가져다 주었다. 뿐만 아니라 스케치북, 붓, 물감 등 내가 계속 쓰고 있는 그림 도구들이 떨어지려 하면, 다음 날 미술 도구함에 내가 쓰던 물감이나 붓은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마 자신의 새것을 나에게 채워주고 내가 쓰던 것을 자신이 쓰는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는 날이면 그녀는 내가 잘 보이는 위치에다 이젤을 설치해 놓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내가 불편해 하는 게 없는지 살펴보는 듯했다. 면(面) 소재지에 중학교는 하나지만 초등학교는 두 곳인데, 그녀는 내가 나온 초등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미술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녀는 나에게 이상할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충분히 치우고 정리할 수 있는 미술도구들도 때로는 내팽개치고 그냥 가곤 했다. 그러면 동생 보살피듯 깨끗이 정리해 주어 가끔 엉뚱하게 저질러 놓고, 그것이 어떻게 정리되나 하고 지켜보는 얄궂은 버릇까지 생겼다.
내가 미술 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 간 다음 날, 그녀가 가져다 놓은 나의 미술 도구함에는 작은 메모지가 들어있었다. 처음에는 어제 선생님이 언제 다녀갔다거나 다음 날 준비물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꽃 편지지에 유치환의 ‘파도’ 같은 시가 적혀 있는 날도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자 책갈피 속에서 꺼낸 은행잎으로 나비나 하트 모양을 붙이는 등, 그녀가 직접 만든 편지지에 그리움 운운하는 글들이 많아졌다. 이렇게 되자 한편으로 덜컹 겁이 났다. 급우에게 들켜 소문이 나거나, 혹시 선생님께 알려져서 징계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커졌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아는 어머님이 아시면 또 어떻게 하나, 하는 조바심도 생겼다.
보리타작이 한창이던 ‘가정실습’ 때였다. 앞마당에서 도리깨질 하시는 아버님을 도와 튀어나오는 보릿짚 더미를 안으로 집어넣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중학생 교복을 입은 한 학생이 숨을 헐떡이며, 자전거를 타고 타작마당으로 불쑥 들어섰다. 갑자기 나타난 학생을 보고 부모님은 적잖게 놀라셨다. 나도 무슨 일인가 하고 학생을 헛간 쪽으로 이끌면서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학생은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말없이 안쪽 호주머니에서 편지 한 뭉치를 내밀었다. 며칠 학교에 가지 못했으니 당연히 미술 활동도 멈추었다. 그 기간에 그녀가 썼던 편지를 차곡차곡 모아서 동생 편으로 보낸 것이다.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집은 어떻게 알았으며, 동생에게 무슨 말을 하며 편지 심부름을 보냈을까. 여학생의 당돌함에 놀란 나는, 이러다간 결혼까지 해야되는 건 아닌가 하고 덜컹 겁이 났다. 부모님이 알기 전에 빨리 학생을 돌려보내는 게 급선무였다. 얼른 편지 뭉치를 주머니에 넣고, 자전거를 잡아 주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혹시 ‘친척 집에서 무슨 부고(訃告)가 왔나’하고 궁금해하시던 부모님께는 과제물을 알려주려 왔다고 얼버무려버렸다. 친척이 상(喪)을 당하면 부고를 인편으로 전달하던 때였다. 위기 상황을 용케 넘겼다는 안도감에 나는 온 힘을 다해 보리타작을 도왔다.
이렇듯 상황은 점입가경이었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여학생과 그림 시간에 만나면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미술 준비 메모에서 시인의 시를 인용한 편지로 올라섰다가, 애타는 그리움을 표현한 꽃 편지는 나비가 되어 밤마다 나의 미술 도구함에 날아들었다. 첫 수업이 끝나면 화구 속 나비를 만나려 나는 혼자서 미술실로 갔다. 날마다 갖가지 색지에다 고딕체로 또박또박 쓴 꽃 편지는 사춘기 소녀의 감성 그대로였다. 미술실 화구함에 서면 막연한 그리움과 잡히지 않는 기대로 나의 심장은 두근 두근거렸다. 오늘은 또 어떤 글이 씌었을까 하고. 그때마다 마음속엔 더 강렬한 내용이 페이지마다 가득하기를 바랬다.
뒤돌아보면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쓴 그녀의 편지를 읽었던 그 순간들은 내가 천사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편지는 서툴기만 한 사춘기 소년에게 종일 분홍빛 꿈에 젖게 해주었다. 이렇게 동급생들과 선생님의 눈을 피해 그녀는 편지를 보냈고, 나는 읽기만 하는 목석같은 촌뜨기 중학생이었다. 미술 도구함에 아무런 답장 하나 남기지 못했고, 그림 시간에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했다. 그때는 내가 아직 피지 못한 꽃봉오리 같아서 나비처럼 날아드는 그녀의 꿈을 몰랐던 미숙아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철이 든 후 그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적극적으로 안부 한번 살피지 못한 건,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일만큼 최고의 선물이 없을 진대도 이를 뒤늦게야 알았으니 이 얼마나 굼뜬 일인가.(끝)
첫댓글 미송 송유창. 멋진 글입니다. 이러한 소소힌 글이 우리 문우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 생각합니다.
미송의 옛 추억글에 65년 젊어진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자연인으로서 아름다운
글을 공유함은 행복ㆍ가치지향적
삶이 될겁니다.
31문우회 정식회원을 축하드리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