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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불꽃
한 강
*
그녀는 비에 젖은 도로를 바라보며 서 있다. 마석읍 터미널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이다. 거대한 화물차들이 굉음을 내며 일차선을 질주해 지나간다. 빗발은 그녀의 우산을 뚫고 들어올듯 거세다.
그녀는 아주 젊지 않다. 딱히 미인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다만 목선이 고운 편이고 눈매가 서글서글하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옅은 화장을 했으며, 흰 반소매 블라우스는 구김 없이 청결하다. 누구에게든 호감을 줄 법한 그 단정한 인상 덕분에, 희미하게 얼굴에 배어 있는 그늘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녀의 눈이 잠시 빛난다. 기다리던 버스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도로 내려가 팔을 뻗는다. 맹렬히 달려오던 버스가 속력을 늦추는 것을 본다.
축성 정신병원 가지요?
늦은 중년의 버스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올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차비를 낸 뒤 앉을 의자를 찾는 그녀의 눈에 승객들의 얼굴이 들어온다. 모두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 환자인가, 보호자인가? 어디 이상한 구석은 없나. 의심과 경계, 혐오와 호기심이 얽힌 그들의 시선을 그녀는 익숙하게 외면한다.
그녀의 접힌 우산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버스 바닥은 이미 젖어 검게 번들거린다. 우산으로 채 가리지 못한 비 때문에 그녀의 블라우스와 바지는 절반 가까이 젖었다. 버스는 속력을 내어 빗길을 달린다. 그녀는 균형을 잡으려 에쓰며 안쪽으로 걸어들어간다. 두 좌석 다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창 쪽에 앉는다.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김 서린 차창을 닦는다. 오랫동안 혼자여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시선으로, 차창을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를 바라본다. 마석읍을 벗어나자 늦은 유월의 숲이 도로변으로 펼쳐진다. 폭우에 잠긴 숲은 포효를 참는 거대한 짐승 같다. 축성산으로 접어들면서 도로는 차츰 좁고 구불구불해진다. 그럴수록 숲은 더 가까이 다가와 젖은 몸을 넘실거린다. 석달 전 그녀의 여동생 영혜가 발견되었다던 숲이 저 산기슭 어디쯤이었을까. 빗발 속에 흔들리는 나무들 하나하나를, 그 아래 숨겨져 있을 캄캄한 공간들을 눈앞에 그리다가 그녀는 차창에서 고개를 돌린다.
영혜가 병원에서 사라진 것은 오후 두시에서 세시까지의 자유산책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먹구름이 깔려 있었을 뿐 비는 내리지 않아, 여느 날의 일정대로 경증의 환자들이 산책을 나갔던 것이다. 오후 세시가 되어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체크하던 중 영혜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 확인됐다. 비는 그때쯤부터 한두 방울씩 흩뿌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병원의 전 스태프에게 비상이 걸렸다. 버스와 택시가 지나가는 길목을 원무과 직원들이 신속히 막았다. 실종 환자의 경우 일찍 산을 내려가 이미 마석 쪽으로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하나, 오히려 산속 깊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다른 하나였다.
늦은 오후로 접어들며 빗발은 차츰 굵어졌다. 삼월의 해는 날씨 때문에 더 빨리 저물었다. 근방의 산을 구석구석 수색한 보호사들 중 하나가 영혜를 찾아낸 것은 천만다행한 일, 아니, 거의 기적이라고 동생의 담당의는 그녀에게 말했다. 깊은 산비탈의 외딴 자리에서 영혜는 마치 비에 젖은 나무들 중 한그루인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고 했다.
영혜가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은 오후 네시경 그녀는 여섯 살 난 아들 지우와 함께 있었다. 지우의 체온이 닷새째 사십도를 맴돌아 폐 사진을 찍으러 간 참이었다. 불안한 듯 촬영실 안의 기사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지우는 촬영기 앞에 혼자 서 있었다.
김인혜씨세요?
그런데요.
김영혜씨 보호자 되시죠.
영혜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그녀의 휴대폰으로 먼저 연락해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면회시간을 예약하거나, 때로 동생에게 별일이 없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걸곤 했을 뿐이었다. 간호사는 다급함을 감춘 침착한 말씨로 실종상황을 전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찾고 있지만, 혹시 그쪽으로 가면 바로 이리 전화주셔야 해요.
전화를 끊기 전에 간호사는 물었다.
다른 곳으로 갈 가능성은 없을까요? 부모님 이라든지.
부모님 댁은 먼데…… 필요하시면 그쪽 연락은 제가 할게요. 그녀는 휴대폰을 접어 가방에 넣고는 촬영실을 나가 지우를 안았다. 며칠 사이 가벼워진 아이의 몸은 뜨거웠다.
엄마, 나 잘했지.
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아이의 얼굴은 칭찬에 대한 기대로 상기돼 있었다.
그래, 정말 조금도 안 움직이더라.
폐렴은 아니라는 의사의 소견을 들은 뒤 그녀는 지우를 안고 빗속의 택시에 실려 집으로 돌아갔다. 서둘러 아이를 씻기고 죽과 약을 먹여 일찍 재웠다. 그녀에게는 사라진 동생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을 조일 여유가 없었다. 닷새째 아이가 아펐으니 그녀 역시 닷새째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날 밤에도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큰병원에 입원시켜야 했다. 긴급상황에 대비해 미리 가방에 의료보험증과 지우의 옷가지를 넣고 있을 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아홉시가 되어가던 참이었다.
찾으셨다구요.
정말 다행이네요.
면회는 예정대로 다음주에 갈게요.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고 인사하긴 했지만, 피로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는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날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는 것을, 그러니까 영혜가 발견된 산에도 비가 쏟아지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전화를 끊고 나서였다.
직접 본 것도 아닌 그 모습이 어떻게 그토록 명확한 풍경으로 떠올랐는지 그녀는 알 수 없다. 코를 쌕쌕거리는 아이의 이마에 밤새 물수건을 얹으며, 깜박깜박 기절하듯 잠에 떨어지기도 하며, 그녀는 혼령처럼 어른거리는 빗속의 숲을 보았다. 검은 비, 검은 숲. 흠뻑 젖은, 희끄무레한 환자복. 젖은 머리칼. 캄캄한 산비탈. 귀신처럼 우뚝 선, 어둠과 물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영혜. 마침내 새벽이 되어 아이의 이마를 만져보았을 때 그녀는 손바닥에 느껴지는 서늘함에 안도했고, 안방을 나가 거실 베란다로 드는 푸르스름한 박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몸을 둥글게 말고 소파에 모로 누워 잠을 청했다. 지우가 깨어나기 전에 한시간이라도 자둬야 했다.
언니,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응,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잠결에 들은 영혜의 목소리는 처음엔 나직하고 다정했으며, 중간쯤에선 어린아이처럼 천진했으나, 마지막 부분은 짐승의 소리처럼 뭉개어져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생시에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혐오감 때문에 그녀는 흠칫 눈을 떴다가 다시 잠들었다. 이번에 그녀는 욕실의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 자신의 왼쪽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얼른 손을 들어 피를 닦아냈지만, 거울 속의 그녀는 어쩐 일인지 손을 움직이지 않고, 선혈이 흐르는 자신의 눈을 우두커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우의 기침소리에 그녀는 휘적휘적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그 방의 구석자리에서 웅크려 앉아 있었던 영혜의 모습을 지우며, 경기하듯 허공으로 쳐든 아이의 작은 손을 잡았다. ……이제 괜찮아.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는데, 그것이 아이를 달래려는 것이었는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
버스는 언덕길을 돌아 두 갈래 길에서 멈춘다. 앞문이 열리자 그녀는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 우산을 펼친다. 이곳에서 내린 승객은 그녀뿐이다. 버스는 지체없이 빗길을 달려 멀어져간다.
이곳에서 갈라져나가는 좁은 도로를 따라 비탈진 언덕을 넘고, 오십여 미터 길이의 터널을 빠져나가면 산 가운데 자리한 자그마한 병원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조금 잦아들었다고 하나 아직 기운찬 빗발이 쏟아지고 있다. 그녀는 허리를 수그린다. 바지 밑단을 접는 그녀의 눈으로 아스팔트에 쓰러진 실망초들이 들어온다. 그녀는 묵직한 가방을 고쳐멘다. 우산을 바로 쓰고 병원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이제는 수요일마다 영혜의 경과를 보러 가지만, 그 비내리던 날 영혜가 실종되었다가 발견되기 전에는 한달에 한번쯤 지나던 길이다. 과일이나 떡, 유부초밥 따위를 싸들고 걸어가던 이 길은 인적도 차량도 드물어 적요했다. 원무과 옆의 면회실에 마주앉아 탁자 가득 음식을 펼쳐놓으면 영혜는 숙제하는 아이처럼 말없이 그것들을 씹어삼켰다. 그녀가 영혜의 머리칼을 쓸어 귀 뒤로 넘겨주면 눈을 들어 가만히 웃기도 했다. 아무 문제 없는 것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순간들이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닐까. 이곳에서영혜는 말하고 싶을 때만 말하고, 고기를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되는 것 아닐까. 그녀는 가끔씩 이렇게 동생을 보고 가면 되는 것 아닐까.
영혜는 그녀보다 네살 어렸다. 터울이 제법 져서인지, 그녀들은 자매간에 흔히 볼 수 있는 티격태격하는 갈등 없이 자랐다. 손이 거칠던 아버지에게 차례로 뺨을 맞던 어린시절부터 영혜는 그녀에게 무한히 보살펴야 할, 흡사 모성애와 같은 책임감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발뒤꿈치에 새카만 때가 끼어 있고 여름이면 콧잔등에 땀띠가 빨긋하게 돋던 여동생이 성장하여 결혼하는 것을 그녀는 신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다만, 나이를 먹을수록 동생의 말수가 적어진 것이 내심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녀 역시 신중한 성격이긴 하지만 분위기에 따라 밝고 싹싹한 편인 데 반해, 영혜의 심중은 어느 때건 들여다보기 어려웠다. 너무 어려워 때로는 타인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가령 지우가 태어난 날 병원에 첫 조카를 보러 온 영혜는 축하한다는 말 대신 “처음 봐, 이렇게 작은 아이는…… 갓 태어나면 원래 이런 거야?” 하고 중얼거리듯 물었을 뿐이었다.
엄마 계신 J읍까지 혼자 안고 갈 수 있겠어? 운전이야 형부가 하겠지만……힘들 것 같으면 내가 같이 갈까?
고맙게도 그렇게 살가운 제안을 해주었지만, 그때 영혜의 입가에 어린 조용한 미소는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마치, 그녀가 영혜를 낯설게 느끼는 것만큼이나 영혜 역시 그녀를 낯설게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침착하다는 인상을 넘어 거의 적막하게 느껴지는 그 얼굴 앞에서 그녀는 대답을 잃었다. 그것은 남편의 우울한 태도와는 전혀 닮은 데가 없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동일하게 그녀를 좌절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다 비슷하게 말수가 적 어서였을까.
그녀는 터널에 들어선다. 날씨 탓에 터널의 내부는 평소보다 어둡다. 그녀는 우산을 접는다. 커다랗게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어둠이 축축하게 배어나오는 것 같은 벽면 가운데에서, 처음 보는 종류의 커다란 얼룩무늬 나방 한마리가 날아오른다. 그녀는 잠시 멈춰 그 날갯짓을 올려다본다. 캄캄한 천장에 자리를 옮겨잡은 나방은 관찰자를 의식한 듯 더이상 움직 이지 않는다.
남편은 저렇게 날개가 있는 것들을 즐겨 찍었다. 새, 나비, 비행기부터 나방이나 파리에 이르기까지. 작업 내용과 그다지 관련돼 보이지 않는 그것들의 비행장면은 그러잖아도 미술에 문외한인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다. 저 장면은 왜 들어간 거예요,라고 그녀는 물은 적이 있었다. 무너진 다리와 장례식의 오열장면 끝에 느닷없이 새의 검은 그림자가 2초쯤 천천히 허공으로 솟아올랐을 때였다.
그냥, 이라고 그는 그때 대답했다.
그냥 저런 걸 넣게 돼. 넣고 나면 마음이 편해져.
그러고는 익숙한 침묵이었다.
결코 관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침묵에 싸여 있던 남편의 실체를 과연 그녀는 만난 적이 있었을까. 그의 작업이 그것을 보여줄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는 짧게는 2분에서 길게는 한시간 분량의 비디오작품을 만들어 전시했는데, 사실 그녀는 그를 알기 전에 그런 미술분야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처음 그를 만난 늦은 오후를 그녀는 기억한다. 수수깡처럼 마른 몸에 며칠째 수염을 깎지 않은 얼굴의 그는 한눈에도 무거워 보이는 캡코더 가방을 둘러메고 그녀의 가게를 찾았다. 애프터셰이빙 로션을 찾으며 유리진열대에 두 팔을 내려놓는 그는 지쳐 보였다. 유리진열대가 그와 함께 무너져버릴 것 같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연애경험이 거의 없었던 그녀가 그에게 “점심은 드셨어요?”라고 서글서글하게 물은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는 조금 놀란 듯, 그러나 놀람을 표시할 만큼의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듯 피로한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게문을 잠그고 나가 그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은 것은, 물론 그녀 역시 그날 점심을 걸러서였기도 했지만, 그의 독특한 무방비상태가 그녀까지 경계를 풀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가 그에게 바란 것은 자신의 힘으로 그를 쉬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써 기울인 여러 배려들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에도 그는 여전히 지쳐 보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일로 바빴고, 어쩌다 집에 머물러 있는 시간에는 마치 여관에 든 여행자처럼 서름서름해 보였다. 특히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그의 침묵은 고무처럼 질기고, 바위처럼 무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
자신의 애정을 확신하지 못한 것과 같이, 그가 그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역시 그녀는 확신한 적이 없었다. 그가 일상생활에 워낙 서투르기 때문에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따금 느끼기는 했다. 그는 고지식해 보일 만큼 올곧은 성격의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든 과장이나 아첨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그녀에게는 늘 친절했고, 한번도 거친 말을 쓰지 않았으며, 이따금 존경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에게 과분해.
결혼 전에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 그런 게 감동을 줘.
그 말은 다소 어려웠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오히려 그가 사랑 따위에 빠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고백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가 정말 사랑한 것은 그가 찍은 이미지들이거나, 그가 찍을 이미지들뿐이었을 것이다. 결혼 후 그의 전시회에 처음 갔을 때 그녀는 놀랐는데,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위태해 보이던 이 남자가 이렇게 많은 곳을 캠코더와 함께 누비고 다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촬영이 민감한 장소에서 그가 치렀을 협상, 때로 보여야 했을 용기와 뱃심, 끈덕진 인내를 그녀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말하자면, 그의 열정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열정어린 작품들과,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 같은 그의 일상 사이에는 결코 동일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간격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꼭 한번, 집에서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지우가 돌을 넘겨 발을 떼어놓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캠코더를 꺼내든 그는 햇빛이 드는 거실 가운데를 위태위태하게 걷는 지우를 찍 었다. 지우가 그녀에게 와락 안기는 장면, 그녀가 지우의 정수리에 입맞추는 장면도 찍었다. 알 수 없는 생명의 빛이 번쩍이는 눈으로 그는 말했다.
지우가 한발 한발 디딜 때마다, 미야자끼 하야오의 영화처럼 발자국에서 꽃이 피어나도록 애니메이션을 넣을까? 아니, 나비떼가 날아오르는 게 낫겠어. 아, 그러려면 풀밭에서 다시 찍는 게 좋겠어.
그는 그녀에게 캠코더의 작동법을 알려주고, 방금 찍은 장면들을 재생해 보여주며 열띤 어조로 말했다.
애도 당신도 흰옷을 입어야 돼. 아니, 아니야. 오히려 아주 남루한 옷을 입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래, 그게 더 좋겠어. 가난한 모자의 소풍, 아기의 서투른 발걸음마다 기적처럼 날아오르는 색색의 나비떼……
그러나 그들은 풀밭에 가지 않았고, 지우는 곧 자라 더 이상 서투르게 걷지 않았다. 아이의 발걸음에서 나비떼가 날아오르는 비디오는 오로지 그녀의 상상 속에 남았다.
언제부턴가 그는 부쩍 더 고단해했다. 주말도 밤도 없이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작업실에 틀어박혔지만 어떤 성과물도 만들어내는 것 같지 않았다. 운동화가 새카매지도록 거리를 헤매고 돌아와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새벽에 깬 그녀는 불켜진 욕실에 들어갔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그가, 물을 받지 않은 욕조 속에 옷을 입은 채 웅크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집에 아빠 있어?
그가 떠난 뒤 지우는 그녀에게 묻곤 했는데, 그 질문은 그가 떠나지 않았을 때에도 아이가 아침마다 던졌던 것이었다.
없어,라고 그녀는 짧게 대답하곤 했다. 소리나지 않는 말로 그녀는 덧붙였다.
아무도 없어. 너랑 엄마만 있는 거야. 언제까지나 그럴 거야.
*
빗속의 병사(病舍)들은 고적하다. 짙은 회색의 콘크리트 벽면은 비에 젖은 탓에 평소보다 어둡고 육중해 보인다. 이층과 삼층에 배치된 병실의 창들은 철창살로 막혀 있다. 맑은 날에는 그 사이로 얼굴을 내민 환자를 보기 어렵지만, 이런 날씨에는 비를 구경하는 환자들의 회색 얼굴이 여럿 보인다. 영혜의 병실이 있는 별관건물의 삼층을 어림해 올려다보다가, 그녀는 매점과 면회실로 통하는 원무과 쪽 입구로 걸어들어간다.
박인호 선생님 뵙기로 했는데호.
원무과의 여직원은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한다. 그녀는 물이 흐르는 우산을 접어 묶은 뒤 목제 긴의자에 앉는다. 의사가 상담실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언제나처럼 고개를 돌려 병원 안뜰의 느티나무를 내다본다. 수령이 사백년은 되어 보이는 고목이다. 맑은 날에 수많은 가지들을 펄치고 햇빛을 반사하던 저 나무는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았는데, 비에 잠긴 오늘은 할말을 안으로 감춘 과묵한 사람 같다. 늙은 밑동의 껍질은 흠뻑 젖어 저녁처럼 어둡고, 잔가지의 잎사귀들은 말없이 떨며 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 형상 위로 귀신처럼 겹쳐지는 영혜의 모습을 그녀는 조용히 쏘아본다.
그녀는 충혈된 눈을 오래 감았다 뜬다. 여전히 침묵하는 나무가 시야에 가득 찬다. 지우는 그날 밤 이후 회복되어 다시 어린이집에 다니지만 그녀는 여전히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꼬박 석달째 한시간 이상 이어서 잠들지 못했다. 영혜의 목소리와 검은 비가 내리는 숲, 눈에서 선혈이 흐르는 자신의 얼굴이 긴 밤을 사금파리처럼 잘게 바수어낼 뿐이다.
그녀가 마침내 더이상의 잠을 포기하고 일어나는 시각은 새벽 세시경이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반찬을 만들고, 구석구석 집안을 정리해보지만 시계바늘은 육중한 추라도 매단 듯 좀처럼 빠르게 돌아가주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그의 방에 들어가 그가 남겨놓고 간 음반을 듣거나, 예전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허리에 손을 짚고 방 안을 빙빙 돌기도 하며, 옷을 입은 채 욕조에 웅크려 누워 처음으로 그를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한다. 아마 그에게는 옷을 벗을 힘이 없었던 모양이다. 샤워기의 온도를 조절해 목욕을 할 힘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 우묵하고 비좁은 공간이야말로 서른두 평의 아파트 안에서 가장 아늑하게 느껴지는 장소라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런 순간에, 이따금 그녀는 자신에게 묻는다.
언제부터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을까. 아니, 무너지기 시작했을까.
영혜가 처음 이상해진 것은 삼년여 전 갑작스럽게 채식을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채식 주의자들이야 이제는 흔해졌지만, 영혜의 경우 특이한 점은 그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체중이 빠졌고, 거의 잠을 자지 않았고, 원래 조용한 성격이었다곤 하지만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만큼 말을 잃었다. 제부는 물론 친정식구들 모두 그런 동생을 염려했다. 마침 그녀가 아파트를 옮겼을 무렵이었다. 집들이를 위해 친정의 가족들이 모였을 때 아버지는 영혜의 뺨을 때리고, 입을 억지로 벌리게 한 뒤 고깃덩어리를 쑤셔넣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얻어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영혜가 짐승 같은 고함을 지르며 고깃덩어리를 뱉는 것을, 과도를 집어들고 자신의 손목을 긋는 것을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지켜 보았다.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작고 파릇한 몽고반점이 남편에게 어떤 영감이라는 것을 주었는지 그녀는 알고 싶지 않다. 그 가을 아침 영혜에게 줄 나물을 싸들고 자취방을 찾았을 때 그녀가 본 광경은 상식과 이해의 용량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전날 밤 자신과 영혜의 나신에 울긋불긋한 꽃을 가득 그리고는 몸을 섞는 장면들을 테이프에 담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그의 행동을 미리 예측할만한 단서를 놓친 적은 없었을까. 영혜가 아직 약을 먹는 환자라는 사실을 그에게 더 강하게 인식시킬 수는 없었을까.
그 아침, 붉고 노란 꽃으로 온통 물감칠이 된 알몸의 영혜 곁에 이불을 쓰고 누운 남자가 그이리라는 생각을 그녀는 꿈에도 하지 못했다. 뛰쳐나가고 싶은 두려움과 싸워 이긴 것은 오로지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하나였다. 그 거부할 수 없는 책임감에 의지해 현관에 놓인 캠코더를 집어들었고, 다름 아닌 그에게서 배운 작동법을 기억해 거기 담긴 것들을 보았다. 불이 붙은 물건인 듯 테이프를 꺼내다 떨어뜨리고, 더듬더듬 휴대전화 버튼을 눌러 두 명의 정신이상자를 데려가달라는 신고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이 현실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눈조차 믿을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남편의 행동이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정오가 지나서야 그가 깨어났고, 영혜가 깨어났고, 구속복과 보호장비를 갖춘 응급요원 셋이 뒤이어 들이닥쳤다. 영혜가 베란다에 위태롭게 서 있었으므로 그들 중 둘은 먼저 그애에게 달려갔다. 알록달록한 알몸 위로 구속복을 입히려 하는 그들에게 영혜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응급요원의 팔을 거세게 물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새된 고함을 질렀다. 몸부림치는 영혜의 팔뚝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그 틈에 남편은 현관 쪽에 있던 응급요원을 제치고 달아나려 했으나 오히려 한팔을 붙들렸다. 온힘을 다해 빠져나온 그는 뒤돌아서더니 눈 깜짝할 사이 베란다로 달려나갔다. 마치 자신이 한마리 새인 듯 난간 위로 훌쩍 뛰어오르려 했다. 그러나 막상 발빠른 응급요원이 그의 다리를 껴안자 그는 더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며 몸을 떨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끌려나가는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힘을 다해 그를 쏘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욕정도 광기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후회나 원망도 아니었다. 바로 그 순간 그녀가 느낀 것과 똑같은 공포,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끝났다. 그날 이후 그들의 삶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병원에서 정상으로 판명된 그는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수개 월의 소송과 지루한 구명운동 끝에 풀려났으며, 잠적해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영혜는 폐쇄병동에서 나오지 못했다. 첫 발광 이후 잠시 말문을 열었던 영혜는 다시 침묵했다.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대신, 아무도 없는 양달에 쪼그려앉아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여전히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고기반찬이 나오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햇빛이 강한 날에는 창에 바싹 붙어 환자복 단추를 풀고 가슴을 드러냈다. 돌연 병로해진 부모는 더이상 둘째딸을 보려 하지 않았고, 짐승만도 못한 사위를 연상시키는 큰딸과도 연락을 끊었다. 막내동생 내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영혜를 버릴 수 없었다. 누군가 입원비를 대야 했고, 누군가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그 가을 다섯살이던 지우는 이제 여섯살이 되었고, 환경이 좋고 입원비가 합리적인 이 병원으로 옮길 때쯤 영혜의 상태는 매우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어린시절부터, 그녀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았으며,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 성실의 관성으로 그녀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 삼월 영혜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면. 비내리는 밤의 숲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날 이후 모든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지 않았다면.
*
탁탁탁탁, 활기찬 구둣소리를 울리며 흰 가운을 입은 젊은 의사가 복도 저편에서 걸어온다. 그녀가 일어서서 인사하자 의사는 가벼운 목례를 던진다. 큰 동작으로 팔을 뻗어 상담실을 가리킨다. 그녀는 잠자코 의사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다.
삼십대 후반의 의사는 보기 좋게 살이 붙은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다. 자신감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과 걸음걸이를 가진 남자인데, 책상 앞에 앉아서는 이마를 찡그린 채 그녀를 건너다본다. 이 면담 자체를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 그녀는 마음이 무거워 진다.
동생은……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한 상탭니다.
그럼, 오늘……
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얼굴을 붉힌다. 의사는 그녀의 말을 대신 이어준다.
오늘 튜브로 미음을 주입해보고, 조금이라도 상태가 나아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반병원 중환자실로 옮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의사에게 묻는다.
그전에 잠깐 제가 다시 영혜를 설득해보면 안될까요?
의사는 희망을 갖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건너다본다. 그는 지친 것 같다. 뜻대로 되지 않는 환자에게 숨겨진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손목시계를 보고는 말한다.
삼십분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성공하면 간호사실에 알려주세요. 아니면 두시에 뵙지요.
그냥 얘기를 끝내기 미안했던지,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던 의사는 조금 더 대화를 이끌어간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신경성 거식증의 경우 십오에서 이십 퍼센트가 기아로 사망합니다. 뼈만 남았어도 본인은 살이 쪘다고 생각하죠. 지배적인 어머니와의 갈등이 주된 심리적 이유가 되고…… 하지만 김영혜씨 같은 경우는 정신분열증이면서 식사를 거부하는 특수한 경우예요. 중증의 정신분열증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솔직히 예측 못했습니다. 차라리 피독망상이 있는 경우엔 설득할 수 있지요. 보는 앞에서 의사가 같이 음식을 먹는다거나. 하지만 김영혜씨는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 자체가 불분명하고, 약도 전혀 효과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저희도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쉽지 않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데…… 저희 병원에선 그걸 장담할 수가 없으니까요.
일어서기 전에 의사는 그녀에게 묻는다. 직업적인 예민함이 느껴지는 질문이 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잠을 잘 못 주무시나요?
그녀는 얼른 대답하지 못한다.
보호자가 건강하셔 야지요.
목례를 나누고, 의사는 올 때 그랬던 것처럼 탁탁탁, 발소리를 내며 먼저 상담실 문을 열고 나간다. 그녀가 따라나가자 의사의 뒷모습은 벌써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다.
그녀가 원무과 앞의 긴의자로 돌아왔을 때, 화려한 성장을 한 중년여자가 중년남자의 팔을 잡고 현관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환자를 면회하러 온 사람들인가. 다음 순간 여자의 입에서 거침없는 욕설이 쏟아져나온다. 남자는 익숙한 듯 욕설에 개의치 않고 장지갑에서 의료보험증을 꺼내 원무과의 창구에 내민다.
사악한 것들! 내장을 다 빨아먹어도 시원찮은 것들! 나 이민갈 거야. 너희 같은 것들하고 하루도 더 못 지내!
남편 같지는 않다. 오빠나 남동생쯤 될까. 저 중년여자가 오늘 입원수속을 밟으면 아마 안정실에서 밤을 새우게 될 것이다. 팔다리를 묶이고 진정주사를 맞을 확률이 높다. 그녀는 고래고래 악쓰는 여자의 화려한 꽃무늬 모자를 바라다본다. 이제는 저쯤의 미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병원에 자주 드나들게 된 뒤, 그녀에게는 가끔 정상적인 인간들로 가득 찬 평온한 거리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그녀는 영혜를 이 병원에 처음 데려오던 날을 생각한다. 초겨울의 청명한 오후였다. 서울의 종합병원 폐쇄병동은 가깝긴 했으나 입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수소분 끝에 환자에 대한 처우가 좋은 편이라는 이 병윅우루 옮겨온 것이었다. 통원치료를 권고받은 것은 그쪽 병원에서 퇴원하려고 담당의와 면담했을 때였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경과가 좋습니다. 사회생활까지 다시 시작할 순 없겠지만, 가족의 지지는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녀는 대답했다.
지난번에도 그 말씀만 믿고 퇴원했었어요. 퇴원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다행히 영혜 역시 입원을 원했다. 병원이 편해요,라고 분명하게 의사에게 말하는 평상복 차림의 동생은 차분해 보였다. 눈빛이 또렷했고 입매도 야무졌다. 식사량이 줄어 그에 따라 몸무게가 준 것, 마른 편이던 몸이 유난히 더 가늘어진 것 외에는 보통사람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택시를 타고 오는 중에도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 어떤 불안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며, 택시를 보내고는 마치 산책나온 사람처럼 순순한 걸음걸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느 분이 환자시죠, 라고 원무과 직원이 물어왔을 정도였다.
수속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영혜에게 말했다.
여긴 공기가 좋아서 입맛이 더 좋아질 거야. 좀 많이 먹고 살이 붙어 야지 .
그즈음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한 영혜는 창밖의 느티나무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응…… 여기엔 큰 나무들이 있네.
원무과의 연락을 받고 온 건장한 중년의 남자 보호사가 입원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속옷과 평상복, 슬리퍼, 세면도구. 보호사는 꼼꼼히 옷 하나하나를 펼쳐갔다. 끈이나 핀 따위가 없는지 조사하는 것 같았다. 코트를 여미는 길고 두꺼운 모직 벨트를 빼내고는 두 사람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보호사는 열쇠로 문을 열고 앞장서서 병동으로 들어갔고, 그녀와 영혜는 뒤를 따랐다. 그녀가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영혜는 시종 침착했다. 마침내 6인용 병실에 입원가방을 내려놓는 그녀의 눈에 촘촘한 창살들이 세로질러진 창문이 들어왔다. 순간, 미처 느끼지 못했던 죄의식 이 무거운 덩어리처럼 가슴에 만져져 그녀는 당혹했다. 영혜가 소리없이 걸어와 그녀 곁에 선 것은 그때였다.
……여기서도 나무들이 보이네.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약한 마음 먹지 마. 어차피 네가 지고 갈 수 없는 짐이야.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아. 이만큼 버티는 것도 잘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곁에 선 영혜의 옆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직 잎을 다 떨구지 않은 낙엽송들 위로 부서지는 청명한 초겨울 햇살만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위로하듯 평온하고 낮은 목소리로 영혜는 그녀를 불렀다.
언니.
영혜의 낡은 검은 스웨터에서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영혜는 한번 더 언니, 하고 속삭였다.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
행려들과 정신지체환자들을 수용하는 별관 2동을 지나 그녀는 1동 현관 앞에 선다. 유리문에 붙어 바깥을 보고 있는 환자들이 눈에 띈다. 며칠째 비 때문에 산책을 못했을 테니 아마 갑갑할 것이다. 벨을 누르자 일층 로비의 간호사실에서 사십대 후반의 보호사가 열쇠를 들고 걸어나온다. 원무과에서 미리 연락을 받고, 동생이 입원한 삼층에서 내려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나온 보호사는 날렵한 동작으로 돌아서서 꽂아 잠근다. 잠긴 유리문 안쪽에 뺨을 뭉개고 그녀를 바라보는 젊은 여자 환자가 눈에 띈다. 공허한 두 눈이 뚫어지게 그녀를 살핀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결코 타인에게 던질 수 없을 집요한 시선이다.
동생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요?
삼층까지 오르는 계단에서 그녀는 묻는다.
보호사는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젓는다.
말도 마세요. 이젠 링거바늘도 뽑아버리려고 해서, 아예 안정실에 강박해놓고 진정제 맞히고 링거를 놓습니다. 그 몸에서 어떻게 뿌리칠 힘은 나오는지…… 그럼, 지금 안정실에 있어요?
아니요. 좀전에 깨어나서 병실로 옮겼습니다. 두시에 콧줄 주입 한다고 하잖았습니까?
그녀는 보호사를 따라 삼층 로비로 들어선다. 맑은 날에는 창가의 긴의자에 앉아 해바라기하는 노인 환자들이며 탁구에 열중한 환자들, 간호사실에서 틀어놓은 밝은 느낌의 음악으로 힘차게 느껴지던 공간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 모든 활기를 비가 삼켜버린 듯하다. 병실에 들어가 있는 환자가 많은지 실내는 한산하다. 치매환자들은 어깨를 웅크린 채 손톱을 뜯거나 발치를 들여다보고 있고, 몇몇 환자들은 말없이 창문에 붙어있다. 탁구대도 비어 있다.
그녀는 병동의 서쪽 복도 끝, 큰 창으로 오후의 햇빛이 가장 밝게 떨어지던 자리를 향해 눈길을 던진다. 지난 삼월 비내리는 숲으로 사라지기 직전, 그녀가 면회왔을 때 영혜는 면회실로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며칠째 병동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한다고 담당 간호사는 원무과의 수화기 저편에서 말했다. 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유산책 시간에도 병동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됐든 먼걸음을 했으니 얼굴이라도 보고 가겠다는 그녀의 부탁에, 보호사가 그녀를 데리러 원무과로 내려왔다.
서쪽 복도의 저 자리에서 물구나무서 있는 기괴한 여환자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설마 영혜이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좀전에 통화한 간호사가 그녀를 그쪽으로 안내했을 때에야 영혜의 숱 많고 긴 머리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깨로 땅을 짚고 거꾸로 선 영혜의 얼굴은 피가 몰려 새빨갰다.
벌써 삼십분째 이러고 있어요.
간호사는 답답한 듯 말했다.
이틀 전부터예요. 의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을 안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긴장형 환자들하곤 달라요. 어제까지는 강제로 병실에 들여보냈는데, 그래봤자 병실에서 다시 물구나무를 서…… 그렇다고 강박해놓을 수도 없고.
그녀를 남기고 간호사실로 돌아가기 전에 간호사는 말했다.
……조금만 힘주어 밀면 쓰러지거든요. 얘기가 잘 안되면 밀어보세요. 안 그래도 저희가 밀어서 병실로 가게 하려던 참이었어요.
혼자 남은 그녀는 쪼그려앉아 영혜와 눈을 맞추려 했다. 누구든 거꾸로 섰을 때의 얼굴은 바로 섰을 때의 얼굴과 달라 보인다. 별로 살이 없는 편인데도 영혜의 얼굴은 피부가 아래로 밀려 기이해 보였다. 생생히 번쩍이는 눈으로 영혜는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영혜야.
대답이 없자 그녀는 좀더 큰 소리로 불렀다.
영혜야. 지금 뭘 하고 있어. 똑바로 서봐.
그녀는 영혜의 달아오른 뺨에 손을 뻗었다.
똑바로 서, 영혜야. 머리 안 아파? 얼굴이 새빨갛잖아.
마침내 그녀는 영혜의 몸을 힘주어 밀었다. 과연 다리부터 바닥으로 털썩 무너졌다. 그녀는 영혜의 목에 팔을 받쳐 들어올렸다.
……언니.
영혜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언제 왔어?
마치 좋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영혜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보고 있던 보호사가 다가와 그녀들을 로비 한켠의 면담실로 안내했다. 원무과 옆의 면회실로 내려오기 어려울 만큼 증상이 무거운 환자들은 이곳에서 가족과 면회한다고 했다. 아마 의사와의 면담이 진행되는 곳인 것 같았다.
그녀가 탁자에 음식을 풀어놓으려 하자 영혜는 말했다.
언니. 이제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돼.
영혜는 웃었다.
나, 이제 안 먹어도 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는 홀린 듯이 영혜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밝은 영혜의 얼굴을 그녀는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 보았다. 그녀는 물었다.
아까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언닌, 알고 있었어?
대답 대신 영혜는 물었다.
……뭘?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까르록 영혜가 웃었다. 그제야 그녀는 영혜의 표정이 어린 시절의 어느 순간과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꺼풀 눈이 가늘어지며 온통 까매지는 순간, 영혜의 입에서 까르륵, 무구한 웃음이 터져나오곤 했다.
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 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열에 들뜬 영혜의 두 눈을 그녀는 우두망찰 건너다보았다.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없어. 물이 필요한데.
*
수고가 많으시지요.
그녀는 수간호사에게 인사를 건넨다. 가져온 떡을 내밀며 다른 간호사들에게도 일일이 인사한다. 언제나처럼 영혜의 상태에 대해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동안, 매번 그녀를 간호사로 착각하는 오십대의 여자 환자가 창문 쪽에서부터 총총히 걸어와 그녀에게 꾸벅 절을 한다.
나 머리가 아픈데, 의사선생님헌테 약 좀 바꿔달라고 해주세요.
저 간호사 아니에요. 동생 면회왔어요.
여자의 눈이 간절하게 그녀의 눈을 마주본다.
나 좀 살려줘요…… 머리가 아파 살 수가 없단 말이요. 어떻게 이렇게 살아.
그때 이십대의 남자 환자 하나가 그녀의 등뒤에 바싹 붙어선다. 병원에선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녀는 불안해진다. 환자들은 사람과 사람의 육체가 지켜야 할 적당한 간격을 무시하고, 시선을 둘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을 무시한다.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힌 멍한 시선의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의료진이 아닐까 착각될 만큼 명료한 시선을 가진 환자들도 많다. 한때 그녀의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간호사 선생님, 도대체 저 사람 왜 그냥 놔두는 거예요. 계속 날 때리잖아요.
앙칼진 목소리의 삼십대 여자 환자가 수간호사에게 소리친다. 저 환자의 피해망상은 올 때마다 더 심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간호사들에게 다시 목례로 인사한다.
일단 가서 동생한테 얘기해볼게요.
간호사들의 표정으로 미루어, 그녀들 역시 영혜에게 지쳤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무도 언니의 설득 따위가 효과를 거두리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환자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누구의 몸과도 스치지 않으려 주의하며 빠져나온다. 영혜의 병실이 있는 동쪽 복도로 걸어간다. 문이 열려있는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짧은 커트머리의 여자가 그녀를 알아보고 나온다.
오셨어요?
알코올중독과 함께 경조증을 치료받는 희주씨다. 다부진 몸매, 쉰 듯한 목소리를 가졌지만 동그란 눈 때문에 귀염성있게 보이는 여자다. 이 병원에서는 기능이 좋은 환자들에게 치매환자를 돌보게 하고 보호자로부터 용돈을 받도록 주선하는데, 영혜가 계속 식사를 거부해 거동이 불편해지자 그녀 역시 희주씨에게 신세를 져 왔다.
수고 많으셨지요.
그녀가 웃음을 지어 보인 찰나, 희주씨의 축축한 손이 그녀의 손을 잡는다.
어떡해요. 영 혜, 죽을지도 모른다면서요.
희주씨의 동그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상태가 어떤데요.
방금도 피를 조금 토했어요. 안 먹으니까 위산에 위가 깎여서 자꾸만 위경련이 일어나는 거래요. 그런다구 피가 날 수도 있는 거예요?
희주씨의 울먹임이 격해진다.
처음 제가 돌보기 시작했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든 더 잘했으면 괜찮았을까요?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요. 차라리 내가 안 맡았으면 이렇게 괴롭진 않았을 텐데.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는 희주씨의 손을 놓고 그녀는 한발 한발 침대로 다가간다. 차라리 눈이 안 보이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누군가 자신의 눈을 가려준다면.
영혜는 반듯이 누워 있다. 눈길은 창밖을 향해 던져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다. 얼굴과 목과 어깨, 팔과 다리에 조금도 살이 남아 있지 않은, 흡사 재해지역의 기아난민 같은 모습이다. 뺨이며 팔뚝에 긴 솜털이 자라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마치 아기들의 몸에 자라는 것 같은 솜털이다. 오랜 굶주림으로 호르몬의 균형이 깨진 탓이라고 의사는 설명 했었다.
영혜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려는 걸까. 생리는 멎은 지 오래고, 몸무게가 삼십 킬로그램도 안되니 가슴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모든 이차성징이 사라진 기이한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영혜는 누워있다.
그녀는 흰 침대시트를 걷는다. 미동도 하지 않는 영혜의 몸을 뒤집어, 꾸리뼈와 등에 욕창이 생기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지난번에 짓물렀던 부위는 더이상 덧나지 않았다. 뼈만 남은 엉덩이 가운데 찍힌 또렷한 연둣빛의 몽고반점에 그녀의 시선이 머문다. 그곳에서부터 온몸으로 번지듯 퍼져나가 있던 꽃들의 형상이 아뜩하게 그녀의 눈을 가렸다가 사라진다.
희주씨, 고마워요.
……매일 물수건으로 씻어주고 파우더도 두드려주는데, 워낙 날씨가 습해서 잘 낫지 않아요.
정말 고마워요.
간호사 선생님이랑 목욕시킬 때, 전엔 힘들었는데, 이젠 너무 가벼워져서 힘도 안 들어요. 꼭 다시 아기 키우는 것 같아요. 안 그래두 오늘 목욕시켜주고 싶었는데, 다른 병원으로 옮길 거라니까, 마지막으루 꼭……
희주씨의 큰 눈이 다시 새빨개진다.
그래요, 이따 같이 목욕시켜요.
네, 이따 네시에 온수가 나온다고 하니까……
희주씨가 충혈된 눈을 연거푸 닦는다.
그럼 이따 봬요.
희주씨가 걸어나가는 것을 고갯짓으로 배웅한 뒤 그녀는 영혜의 몸에 다시 시트를 덮어준다. 발이 나오지 않도록 여며주다가 혈관이 터진 자리를 본다. 두 팔과 발등, 발꿈치의 정맥까지 성한 자리가 없다. 단백질과 포도당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정맥주사인데, 더이상 바늘을 꽂을 데가 없어진 것이다. 마지막 방법은 어깨에 연결된 대정맥에 연결하는 것인데, 위험한 시술이므로 종합병원으로 이송해야 한다는 담당의의 전화가 어제 걸려왔었다. 코에 긴 튜브를 주입해 식도로 미음을 넘기려고 여러차례 시도했으나 영혜가 목구멍을 닫아버려 성공하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의 시도를 마지막으로 이 병원의 의료진은 영혜를 포기하려 하는 것이다.
삼개월 전 숲에서 동생이 발견된 뒤, 약속한 면회날짜에 원무과를 찾았을 때 그녀는 담당의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을 들었다. 처음 입원시켰을 때 이후 의사를 만난 적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얼마간 당황했다.
……고기반찬을 보면 심리적으로 불안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병원에서도 배식 때마다 주의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식사시간에 로비로 나오지도 않고, 식판을 병실에 가져다줘도 먹지 않아요. 벌써 나흘쨉니다. 탈수현상이 시작되고 있어요. 링거를 맞는 것도 격렬하게 저항하니…… 더군다나 약을 제대로 먹는지도 의문입니다.
의사는 그동안 영혜가 약을 전혀 먹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경과가 워낙 좋아 마음을 놓은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다. 그날 아침 약을 먹는 것을 간호사가 확인하고, 혀를 들어보라고 했으나 영혜는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억지로 혀를 들고 손전등을 비춰보았을 때 알약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날, 손등에 링거바늘을 꽂은 채 병실에 누워 있는 영혜에게 그녀는 물었다.
왜 그랬던 거야. 깜깜한 숲에서 뭘 했어. 춥지도 않았어? 큰병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영혜의 얼굴은 몹시 말랐고, 빗지 않은 머리카락이 거친 해초다발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밥을 먹어야지. 고기 먹는 게 싫어서 안 먹는 건 이해한다 치자. 왜 다른 것까지 안 먹겠다고 해.
영혜가 조용히 입을 달싹였다. 목말라. 물 줘. 그녀는 로비에 나가 물을 가지고 왔다. 물을 마신 뒤 영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의사선생님하고 얘기했어, 언니?
그래, 얘기했어. 왜 밥을……
영혜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나, 내장이 다 퇴화됐다고 그러지, 그치.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영혜의 여윈 얼굴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 나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어떻게 생각을 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영혜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
시간은 흐른다.
그녀에게 주어진 삼십분은 긴 시간이 아니다. 창밖으로는 어느 결에 비가 잦아들고 있다. 방충망에 맺힌 빗방울이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비는 얼마 전에 잠시 그친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영혜의 머리맡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가방을 열고 여러개의 크고작은 밀폐용기들을 꺼낸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영혜의 텅 빈 눈을 들여다보다가, 첫번째로 가장 작은 사각용기의 뚜껑을 연다. 향긋한 냄새가 습기찬 병실의 공기에 퍼진다.
영혜야, 복숭아야. 통조림 황도복승아. 너 이거 좋아하잖아. 정말 복승아가 나오는 철에도 이걸 사먹었잖아, 애들처럼.
그녀는 물컹한 복숭아 한조각을 포크로 찍어 영혜의 코에 가까이 댄다.
냄새 맡아봐…… 먹고 싶지 않아?
다음 용기에는 먹기 좋은 크기로 네모지게 자른 수박들이 담겨있다.
너 어릴 때, 내가 수박 반으로 가를 때마다 냄새 맡아보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어떤 수박은 살짝 칼을 대도 갈라지면서 단 냄새가 온 집에 퍼졌잖아.
영혜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석달을 굶으면 사람은 이렇게 되는 것일까. 머리까지 작아져, 성인의 얼굴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영혜의 얼굴은 조그맣다.
그녀는 영혜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수박조각을 문지른다. 두 손가락으로 동생의 입을 벌려보려 하지만 굳게 다물려 있다.
……영혜야.
그녀는 낮은 소리로 부른다.
대답해, 영혜야.
동생의 굳은 어깨를 흔들고, 억지로 입을 벌리고 싶은 충동을 그녀는 억누른다. 고막이 찢어지게 영혜의 귀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 싶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죽고 싶니. 정말 죽고 싶어? 자신의 안에서 뜨거운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녀는 망연히 들여다본다.
시간은 흐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다. 비는 아무래도 그친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하늘은 흐리고, 짖은 나무들은 침묵하고 있다. 삼층의 병실이라, 휴양림으로 알려진 축성산의 울창한 비탈이 멀리까지 내려다보인다. 그 비탈의 거대한 숲도 침묵하고 있다.
그녀는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낸다. 준비해온 스테인리스 컵에 모과차를 따른다.
마셔봐, 영혜야. 맛이 잘 우러났어.
그녀는 자신이 먼저 입술을 대고 한모금 마셔본다. 혀 끝에 남은 맛이 달큼하고 향기롭다. 그녀는 손수건에 차를 부은 뒤 그것으로 영혜의 입술을 적신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녀는 말한다.
이렇게 죽으려는 거니? 그런 건 아니잖아. 그냥 나무가 되고 싶은 거라면, 먹어야지. 살아야지.
말하다 말고 그녀는 숨을 멈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잘못 생각한 것 아닐까. 처음부터 영혜는 바로 그것, 죽음을 원해온 것 아닐까.
아니다,라고 그녀는 입속으로 되뇐다. 넌 죽으려는 게 아니야.
완전히 말문을 닫기 전, 그러니까 한달쯤 전에 영혜는 그녀에게 말했다.
언니, 나 여기서 나가게 해줘.
이제 완연히 살이 빠져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로 영혜는 속삭였다. 길게 말하기 힘든지 자주 말을 끊었고, 가쁜 숨소리가 거칠게 섞여 나왔다.
사람들이, 자꾸만 먹으라고 해……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여. 지난번에 먹구선 토했다구…… 어젠 먹자마자 잠자는 주사를 놨어. 언니, 나 그 주사 싫어, 정말 싫어…… 내보내줘. 나, 여기 있기 싫어.
그녀는 영혜의 앙상한 손을 잡고 말했다.
지금 넌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 링거라도 맞으니까 버티는 거지…… 집에 오면 밥을 먹을 거니? 먹는다고 약속하면 퇴원시켜줄게.
그때 영혜의 눈에서 빛이 꺼진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영혜야. 대답해봐. 약속만 하면.
고개를 외틀어 그녀를 외면하며, 영혜는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언니도 똑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영혜의 음성은 느리고 낮았지만 단호했다. 더이상 냉정할 수 없을 것 같은 어조였다. 마침내 그녀는 참았던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
영혜는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이옥고 흘러나온 질문을 마지막으로 영혜는 입을 다물었다.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그 질문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았을까. 그걸 대체 말이라고 하느냐고, 온힘을 다해 화라도 냈어야 했을까.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 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 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로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 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날의 가족모임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치기 전에 그녀가 더 세게 팔을 붙잡았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영혜가 처음 제부를 인사시키려 데려왔을 때, 어쩐지 인상이 차가워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육감대로 그 결혼을 그녀가 만류했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렇게 그녀는 영혜의 운명에 작용했을 변수들을 불러내는 일에 골몰할 때가 있었다. 동생의 삶에 놓인 바둑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헤아리는 일은 부질없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만일 그녀가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침내 거기에 생각이 이를 때, 그녀의 머리는 둔중히 마비되곤 했다.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것을 부지중에 알면서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혹 그녀에게는 자신을 좀더 위로 끌어올려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비록 그가 하는 일은 경제적 보탬이 되지 않았지만, 교육자와 의사가 대부분인 그의 집안 분위기를 그녀는 좋아했다. 그의 말투, 그의 취향, 그의 미각과 잠자리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그녀는 노력했다. 처음의 얼마 동안은 여느 부부들처럼 그와 크고작은 언쟁을 하기도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체념할 수 있는 것들은 체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를 위한 것이었을까. 함께 살았던 팔년 동안, 그가 그녀를 좌절시킨 만큼 그녀 역시 그를 좌절시켰던 것은 아닐까.
구개월쯤 전, 꼭 한번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정 가까운 시각이었다. 먼 지방인지 동전 넘어가는 소리의 간격이 짧았다.
지우가 보고 싶어.
낮고 긴장한, 애써 침착을 가장한 그의 낯익은 목소리가 무딘 칼처럼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꼭 한번만 만나게 해줄 수는 없을까?
그다운 말이었다. 미안하다는 고백도, 용서를 빈다는 애원도 생략한 채, 단지 아이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영혜가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얼마나 예민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얼마나 자존심에 상처입기 쉽고 잘 좌절하는 사람인지. 그녀가 단 한번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연락해오려면 오랜 세월이 걸리리라는 것을.
그것을 알면서, 아니, 알기 때문에 그녀는 대답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한밤의 공중전화부스. 낡은 운동화, 추레한 옷. 절망한 중년의 얼굴.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상상 속의 그 모습들을 지웠다. 영혜의 방 베란다 난간 위로 새처럼 날아오르려 하던 그의 자세가 조용히 그 위로 겹쳐졌다. 그는 비디오 속에 그토록 많은 날개 있는 것들을 집어넣었으면서도, 막상 자신은 가장 필요할 때 날아오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눈을 그녀는 또렷이 기억했다. 공포에 질린 그 얼굴은 낯선 것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존경하려 애썼던 사람, 인내하고 보살피기 위해 몸을 으스러뜨렸던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는 한갓 그림자에 불과했다.
나는 당신을 몰라.
수화기를 내려놓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용서하고 용서받을 필요조차 없어. 난 당신을 모르니까.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전화기의 코드를 뽑았다. 다음날 아침 코드를 다시 연결했지만, 그녀가 짐작했던 대로 그는 다시 전화해오지 않았다.
*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영혜는 이제 눈을 감고 있다. 잠든 것일까. 방금 그녀가 입술에 대준 것들의 냄새를 맡았을까.
그녀는 영혜의 얼굴에 두드러진 광대뼈를, 꺼진 눈두덩을, 움푹 파인 뺨을 본다. 그녀는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낀다.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음을 옮긴다. 조금씩 하늘의 짙은 회색이 엷어지며 사위가 환해지고 있다. 축성산의 여름숲도 제 빛을 찾으며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날 밤 영혜가 발견된 곳은 저 비탈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소리가 들렸어,라고 영혜는 링거바늘을 꽂고 누운 채 대답했었다.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간 것뿐이야…… 더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길래…… 거기 서서 기다린 것뿐이야.
뭘 기다렸다는 거야, 하고 그녀가 묻자 영혜는 갑자기 눈빛에 열기를 띠었다. 바늘을 꽂지 않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 악력이 너무 강해 그녀는 놀랐다.
비에 녹아서…… 전부 다 녹아서…… 땅속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다시 거꾸로 돋아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거든.
희주씨의 격앙된 음성이 느닷없이 기억 속으로 뛰어든다.
어 해요, 영혜. 죽을지도 모른다면서요.
비행기가 빠르게 이륙할 때처럼 그녀의 귓속이 멍해진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기억이 그녀에게 있다.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년 전 사월, 그러니까 그가 영혜의 비디오를 찍던 해의 봄에 그녀는 한달 가까이 하혈을 했다. 피에 젖은 속옷을 빨 때마다 수개월 전 영혜의 손목에서 허공으로 솟구치던 선혈이 떠오르는 까닭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워 하루하루 진찰을 미루며 그녀는 생각했다. 만일 나쁜 병이라면,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일년. 육개월. 아니면 삼개월.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생생하게 의식한 것은 그와 함께 살아온 긴 시간이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 최선을 다한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바로 그녀 자신이 선택한 시간이었다.
마침내 지우를 낳은 산부인과로 향하던 오전, 그녀는 국철 왕십리역의 실외승강장에 서서 유난히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후락한 철조 가건물들이 서 있었고, 차량이 다니지 않는 가장자리의 침목들 사이로 손질 안된 풀들이 웃자라 있었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떨림과 수치심을 숨기고 침대에 올랐을 때, 중년의 남자 의사는 차가운 복강경을 질 속 깊이 밀어넣고는 질벽에 붙은 혀 같은 폴립을 떼어냈다. 날카로운 통증에 그녀는 몸을 뒤틀었다.
이것 때문에 출혈이 있었던 거군요. 깨끗이 떼어냈으니 며칠간 출혈이 더 심해졌다가 멎을 겁니다. 난소엔 이상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순간 그녀는 뜻밖의 고통을 느꼈다. 살아야 할 시간이 다시 기한 없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한달 동안 염려했던 큰병의 가능성은 오히려 사소한 번민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돌아오는 길, 다시 왕십리역의 승강장에 섰을 때 그녀의 다리가 허전거린 것은 방금 시술한 자리의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침내 굉음과 함께 기차가 플랫폼으로 밀려들어오자 그녀는 더듬더듬 철제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 안의 누군가가 자신을 그 단단한 차체 앞으로 내던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후 그녀가 보낸 사개월여의 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혈은 이주쯤 더 계속되다가 상처가 아물며 멈췄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몸에 상처가 뚫려 있다고 느꼈다. 마치 몸뚱이보다 크게 벌어진 상처여서, 그 캄캄한 구멍 속으로 온몸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을 그녀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화장품을 사들고 나가는 여자들의 옷차림이 차츰 화려하고 짧아졌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손님들에게 미소를 지었고, 활달하게 제품을 권했고, 적당한 에누리를 해주었으며, 샘플과 사은품을 넉넉히 챙겨주었다. 신제품의 포스터를 눈에 띄는 자리에 붙였고, 손님들의 평이 좋지 않은 피부관리사를 탈없이 교체했다. 그러나 직원들에게 가게를 맡기고 지우를 데리러 가는 저녁이면 그녀는 무덤처럼 지쳐 있었다. 음악과 연인들로 넘쳐나는 열대야의 거리 한편을 걸으며, 그녀는 예의 캄캄한 구멍이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서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빨아들이려 하는 것을 느꼈다. 땀에 젖은 몸을 끌며 그녀는 그 거리를 통과해 나아갔다.
그렇게 무더웠던 여름이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지던 즈음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며칠 만에 새벽에 들어온 그가 도둑처럼 그녀를 안았을 때 그녀는 그를 밀쳐냈다.
피곤해요.
정말 피곤하다니까요.
그는 낮게 말했다.
잠깐만 참아.
그때 그녀는 기억했다. 그 말을 그녀가 잠결에 무수히 들었다는 것을. 잠결에, 이 순간만 넘기면 얼마간은 괜찮으리란 생각으로 견뎠다는 것을. 혼곤한 잠으로 고통을, 치욕마저 지우곤 했다는 것을. 그러고 난 아침식탁에서 무심코 젓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싶어지거나, 찻주전자의 끓는 물을 머리에 붓고 싶어지곤 했다는 것을.
그가 잠들고 나자 안방은 고요했다. 모로 누운 아이의 몸을 바로 누이며, 그녀는 어둠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부자의 옆얼굴이 가련하게 닮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것도 문제될 것 없었다.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언제까지나 살아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는 어떤 다른 길도 없었다.
잠은 깨끗이 달아났지만, 대신 육중한 피로감이 그녀의 목덜미를 짓눌러왔다. 온몸의 습기가 바싹 말라버린 것 같다고 그녀는 느꼈다. 그렇게 건조된 육신이 이미 너덜너덜해진 것 같았다.
안방을 걸어나온 그녀는 검푸른 베란다창을 내다보았다. 지우가 간밤에 놀다 둔 장난감들, 소파와 텔레비전, 싱크대의 캄캄한 문짝들과 가스레인지의 얼룩들을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인 듯, 처음 들어와본 집인 듯 둘러보았다. 그녀는 이상한 흉통을 느꼈는데, 마치 그 집이 점점 자신의 몸을 죄어들어오는 것 같
은 압박감이었다.
그녀는 옷장문을 열었다. 아이가 젖먹이 때부터 좋아했던, 그래서 그녀가 집에서 자주 입었기 때문에 색이 바랠 대로 바랜 보라색 면티셔츠를 꺼냈다. 몸이 좋지 않을 때 그녀는 그 옷을 입곤 했는데, 수없이 빨았는데도 젖내와 배냇내가 맡아지는 것 같은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효력이 없었다. 흉통은 차츰 심해졌다. 숨이 가빠왔으므로 그녀는 계속해서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녀는 소파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둥글게 돌고 있는 시계 초침을 눈으로 따라가며 호흡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문득 그녀는 이 순간을 수없이 겪은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고통에 찬 확신이 마치 오래 준비된 것처럼,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마치 추운 듯 떨려오는 몸을 일으켜 그녀는 장난감을 놓아두는 방의 문으로 다가갔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저녁마다 지우와 함께 장식해 걸어놓은 모빌을 떼어낸 뒤 끈을 풀기 시작했다. 단단히 묶어두었기 때문에 손가락 끝이 아팠지만, 참을성 있게 마지막 매듭을 풀어냈다. 장식했던 별 모양의 색종이와 셀로판지를 차곡차곡 보아 바구니에 정리한 뒤, 끈을 말아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그녀는 맨발에 샌들을 꿰어신었다. 육중한 현관문을 밀어 열고 나갔다. 오층의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바깥은 아직 어두웠다. 거대한 아파트 건물은 두어 점의 불빛만을 밝히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아파트 뒤편의 쪽문을 지나 뒷산으로, 어둡고 좁다란 길을 밟아 올랐다.
검푸른 어둠 때문에 뒷산은 평소보다 깊게 느껴졌다. 새벽부터 약수를 뜨러 다니는 부지런한 노인들도 아직 잠든 시각이었다. 고개를 수그린 채 그녀는 걷고, 또 걸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손등으로 묵묵히 문질렀다. 자신을 집어삼키는 구멍 같은 고통을, 격렬한 두려움을, 거기 동시에 배어든 이상한 평화를 그녀는 느꼈다.
*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의자로 돌아온다. 마지막 남은 밀폐용기의 뚜껑을 연다. 동생의 빳빳한 손을 억지로 끌어 매끄러운 자두들의 껍질을 어루만지게 한다. 앙상한 손가락들을 둥글게 말아, 그중 하나를 쥐게 한다.
자두 역시 영혜가 좋아하는 과일이었던 것을 그녀는 잊지 않았다. 언젠가, 어린 영혜가 씹지 않고 입 안에서 굴리며 감촉이 좋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 영혜의 손은 반응이 없다: 영혜의 얇아진 손톱이 마치 종이 같다고 그녀는 느낀다.
영혜야.
고요한 병실에 울리는 그녀의 음성은 메말라 있다. 어떤 대답도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영혜의 얼굴에 바싹 얼굴을 댄다. 그 찰나 거짓말처럼 영혜의 눈꺼풀이 열린다.
영혜야!
그녀는 동생의 텅 빈 검은 눈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얼굴이 비쳐 있을 뿐이다. 놀란 만큼의 실망에 그녀는 맥이 풀린다.
…… 미친 거니, 너 정말 미친 거야.
지난 수년 동안 자신이 결코 믿을 수 없었던 그 질문을, 그녀는 처음으로 영혜에게 던진다.
……네가 정말 미친 거니.
그녀는 알지 못할 두려움을 느끼며 동생으로부터 주춤 물러나 앉는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병실의 정적이 물먹은 솜처럼 그녀의 귀를 틀어막는다.
어쩌면……
침묵을 깨고 그녀는 중얼거린다.
……생각보다 간단한 건지도 몰라.
그녀는 망설이며 잠시 말을 끊는다.
미친다는 건, 그러니까……
그녀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대신 팔을 뻗어 동생의 인중에 집게손가락을 얹는다. 가느다랗고 따스한 숨이 느리게, 그러나 규칙적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히 경련한다.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잠을 이루지 못한 지난 석달 동안 그녀는 이따금 혼란 속에서 생각해왔다. 지우가 아니라면――
그애가 지워준 책임이 아니라면――자신 역시 그 끈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고.
다만 기적처럼 고통이 멈추는 순간은 웃고 난 다음이다. 지우가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그녀를 웃기고, 그녀는 문득 멍해진다. 어떨 때는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더 웃기도 했다. 그럴 때 그녀의 웃음은 즐거움이라기보다 혼돈에 가까울 테지만, 지우는 그렇게 그녀가 웃는 모습을 좋아한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엄마가 웃었어?
지우는 그때부터 조금 전의 행동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입을 뾰족하게 모으고 이마에 뿔을 만든다든가, 콰당 넘어지는 시늉을 한다든가, 두 다리 사이로 얼굴을 끼우고는 “엄마, 어엄마” 하고 우스꽝스러운 억 양으로 익살을 부린다. 그녀가 웃을수록 지우는 익살의 강도를 높인다. 마침내는 언젠가 통했다고 기억되는 모든 웃음의 비법들을 동원한다. 어린아이의 그런 필사적인 노력이 오히려 그녀에게 죄책감을 일으켜, 그녀의 웃음이 결국 흐려져버린다는 것을 지우가 알 리 없다.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의 단내 나는 작은 몸뚱이가 곁에 눕고, 아직 죄 지어보지 않은 어린 얼굴이 곤한 잠에 들고 나면 어김없이 밤은 다시 시작된다.
아직 어두운 새벽, 지우가 깨어나기 전까지의 서너 시간. 어떤 살아 있는 것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 시간. 영원처럼 길고, 늪처럼 바닥이 없는 시간.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영혜가 들려준 환상 때문일까. 살아오는 동안 보았던 무수한 나무들, 무정한 바다처럼 세상을 뒤덮은 숲들의 물결이 그녀의 지친 몸을 휩싸며 타오른다. 도시들과 소읍들과 도로는 크고작은 섬과 다리들처럼 그 위로 떠올라 있을 뿐, 그 뜨거운 물결에 밀려 어디 론가 서서히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모든 밀폐용기의 뚜껑을 닫는다. 보온병부터 차례로 가방에 챙겨넣는다. 가방의 지퍼를 끝까지 닫는다.
저 껍데기 같은 육체 너머, 영혜의 영혼은 어떤 시공간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걸까. 그녀는 꼿꼿하게 물구나무서 있던 영혜의 모습을 떠올린다. 영혜는 그곳이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라 숲 어디쯤이라고 생각했을까. 영혜의 몸에서 검질긴 줄기가 돋고, 흰 뿌리가 손에서 뻗어나와 검은 흙을 움켜쥐었을까. 다리는 허공으로, 손은 땅속의 핵으로 뻗어나갔을까. 팽팽히 늘어난 허리가 온힘으로 그 양쪽의 힘을 버텼을까.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영혜의 몸을 통과해 내려갈 때, 땅에서 솟아나온 물은 거꾸로 헤엄쳐 올라와 영혜의 샅에서 꽃으로 피어났을까. 영혜가 거꾸로 서서 온몸을 활짝 펼쳤을 때, 그애의 영혼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하지만 뭐야.
그녀는 소리내어 말한다.
넌 죽어가고 있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커진다.
그 침 대에 누워서, 사실은 죽어가고 있잖아. 그것뿐이잖아.
그녀는 입술을 악문다. 피가 비칠 만큼 이의 힘이 세어진다. 영혜의 무감각한 얼굴을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세차게 흔들고, 패대기치고 싶은 충동을 그녀는 억누른다.
이제는 더이상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가방을 메고 의자를 밀어넣는다. 허리를 앞으로 수그린 채 병실을 빠져나온다. 고개를 돌리자, 빳빳이 굳은 영혜의 몸이 여전히 침대시트 아래 누워있다. 그녀는 좀전보다 세차게 이를 악문다. 로비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
단발머리의 간호사가 희고 자그마한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로비의 탁자 앞에 나가 앉는다. 바구니에는 여러 종류의 손톱깎이가 들어 있다. 환자들이 줄을 서서 손톱깎이를 하나씩 받아간다. 저마다 좋아하는 것이 따로 있는지, 고르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한쪽에서는 머리를 묶은 간호조무사가 치매
환자들의 손톱을 차례로 깎아준다.
그녀는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보며 서 있다. 뾰족하여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 긴 줄의 형태여서 목을 조를 수 있는 것은 병원에서 금기다. 타인에게 해를 입힐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해칠 것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손톱깎이를 반납하기 위해 저마다 자신의 손에 골몰해 있는 환자들의 얼굴을 그녀는 건너다본다. 벽에 걸린 시계는 두시 오분을 가리키고 있다.
의사의 흰 가운이 유리문에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로비의 출입문이 열린다. 영혜의 담당의다. 그는 뒤돌아서서 익숙한 동작으로 문을 잠근다. 어느 큰병원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정신병원에서 전문의의 권위는 더욱 특별해 보인다. 아마 환자들이 감금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흡사 구세주를 발견한 듯 환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의사를 에워싼다.
선생님, 잠깐만요. 제 집사람이랑 통화해보셨나요? 퇴원해도 좋다고 선생님 이 한말씀만 해주시면……
중년의 남자 환자가 미리 준비해둔 쪽지를 의사의 가운 주머니에 밀어넣는다.
제 집사람 전화번홉니다. 저, 한번만 전화를 해주시면……
중년남자의 말을 가로막으며 치매로 보이는 노인 환자가 끼어든다.
선생님, 약 좀 바꿔주시오. 자꾸만 귀에서 우웅……소리가 난단 말이오.
그사이, 예의 피해망상증 여자 환자가 의사에게 다가가 소리치기 시작한다.
선생님, 저랑 얘기 안하실 거예요? 저 사람이 때려서 살 수가 없어요. 아니, 왜 이러세요? 왜 발로 차고 그러세요? 말로 하시라구요.
의사는 직업적인 느긋한 미소로 여자를 달랜다.
제가 언제 발로 찼다는 겁니까. 잠깐만요, 이분하고 얘기 좀 먼저 하구요. 언제부터 귀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지요?
쿵, 쿵 소리를 내며 한발을 구르면서 기다리는 동안, 여자의 찡그린 얼굴은 난폭함보다는 비참함과 불안을 드러내고 있다.
그때 다시 로비 문이 열리며 처음 보는 의사가 들어온다.
내과 선생님이에요.
어느 틈에 그녀의 곁에 와 있었는지 희주씨가 귀띔해준다. 정신병원마다 한명씩 상주하게 되어 있다는 내과의사인 모양이다. 동안인지 퍽 젊어 보이는, 차갑지만 영민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다. 마침내 환자들을 떼어낸 영혜의 담당의가 탁탁탁, 발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다가온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주춤 뒤로 물러선다.
얘기해보셨습니까?
……제가 보기엔 의식이 없는 것 같았어요.
외견상으론 그렇게 보이지만, 모든 근육이 빳빳하게 긴장돼 있어요. 의식을 놓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의식을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는 겁니다. 그 상태를 억지로 깨뜨릴 때의 반응을 보시면, 완전히 깨어 있었다는 걸 아실 겁니다.
의사의 태도는 진지하고, 조금 긴장되어 보인다.
가족으로서 지켜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되시면 빨리 피해 계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한다.
괜찮을 것 같아요.
몸부림치는 영혜를 어깨에 들쳐멘 보호사가 복도를 걸어와 비어 있는 2인용 병실로 들어간다. 의료진을 따라 그녀도 그 방으로 들어간다. 의사의 말이 맞았다. 영혜의 의식은 분명하게 깨어 있다. 그토록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영혜의 몸짓은 크고 거칠다. 태반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이 목구멍에서 터져나온다.
…… 놔아!……놔아아!
발버둥치는 영혜를 두 명의 보호사와 간호조무사가 달려들어 침대에 눕힌다. 두 팔과 두 다리를 묶는다.
나가 있으세요.
머뭇거리며 서 있는 그녀에게 수간호사가 말한다.
가족은 보기 어려워요. 나가 있으세요.
순간 영혜의 눈이 그녀를 향해 빛난다. 고함이 격렬해진다. 분절되지 않은 말들이 쏟아져나온다. 묶인 사지를 버둥거리며, 영혜는 마치 강박을 끊고 그녀에게 달려들려는 것 같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영혜에게 다가간다. 뼈만 남은 영혜의 가느다란 팔이 꿈틀거린다. 입에 흰 거품이 물린다.
싫…… 어……!
처음으로, 분명한 발음으로 영혜가 고함을 지른다. 흡사 짐승 같은 소리다.
싫……어……! 먹기싫·…‥어……!
그녀는 영혜의 경련하는 뺨을 두 손으로 감싸안는다.
영혜야. 영혜야!
공포에 지질린 영혜의 눈빛이 그녀의 눈을 할퀸다.
나가세요. 오히려 방해만 되잖아요.
보호사들이 그녀의 겨드랑이를 잡고 일으킨다. 저항할 틈도 없이 열린 문밖으로 밀어낸다. 밖에 서 있던 간호사가 그녀의 팔을 이끈다.
여기 있으세요. 그쪽 때문에 더 흥분하고 있어요.
영혜의 담당의가 장갑을 낀다. 수간호사가 내민 튜브를 받아들고, 가늘고 긴 튜브에 고루 젤리를 바른다. 그사이 보호사가 두 손으로 온힘을 다해 영혜의 얼굴을 고정시킨다. 튜브가 가까이 오자 영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보호사의 손을 뿌리친다. 보호사의 말대로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발을 내딛는다. 간호사가 그녀의 팔을 붙잡아 제지한다. 마침내 보호사의 억센 두 손아귀에 영혜의 움푹 꺼진 두 뺨이 잡힌다. 그 틈에 담당의는 튜브를 영혜의 코에 집어넣는다.
젠장, 또 막혔어!
담당의가 탄식하듯 외친다. 영혜가 목젖으로 식도를 막아, 입술을 비집고 튜브가 밀려나온 것이다. 맑은 미음을 주사기로 튜브에 흘려넣으려 기다리던 내과의사가 이마에 주름을 만든다. 담당의는 영혜의 코에서 튜브를 뽑아낸다.
자, 한번 더 해봅시다. 이번엔 더 빨리.
다시 튜브에 젤리가 발라진다. 다시 말버둥치는 영혜의 얼굴을 건장한 체격의 보호사가 짓누른다. 튜브가 영혜의 코에 꽂힌다.
됐어. 이제 됐어.
의사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내과의사의 손이 민첩해진다. 주사기로 미음을 흘려넣기 시작한다. 그녀의 팔을 잡고 있던 간호사가 손에 힘을 주고는 그녀에게 속삭인다.
됐어요. 성공이에요. 이제 잠을 재울 거예요. 토할 수도 있으니까.
수간호사가 진정제 주사를 꺼내는 순간, 갑자기 간호조무사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진다. 그녀는 잡혔던 팔을 뿌리치고 침상으로 뛰쳐나간다.
비켜요, 다 비켜요!
그녀는 담당의의 어깨를 젖히고 영혜 앞에 선다. 튜브를 잡고 있던 간호조무사의 얼굴은 피투성이다. 선혈은 튜브에서, 영혜의 입에서 연이어 솟구쳐나온다. 주사기를 든 내과의가 뒷걸음질친다.
이거 빼요. 이 줄 빨리 뻬라구요!
자신도 모르게 새된 고함을 지르는 그녀의 어깨를 보호사가 틀어쥐고 끌어낸다. 그사이, 담당의가 몸부림치는 영혜의 코에서 긴 튜브를 뽑아낸다.
가만히,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담당의가 영혜에게 고함을 지른다.
진정제!
수간호사가 주사기를 들어 건네려 한다.
하지마……!
보고 있던 그녀가 울부짖듯 외마디 고함을 지른다.
그만! 하지 마! 하지 마세요!
그녀는 보호사의 팔을 물어뜯고 다시 앞으로 뛰쳐나간다.
뭐야, 씨팔!
보호사의 입에서 신음 섞인 욕설이 터져나온다. 그녀는 내처 달려가 영혜의 몸을 껴안는다. 영혜가 왈칵왈칵 토해낸 더운 피가 그녀의 블라우스를 적신다.
제발 그만 해요. 그만 좀……
그녀는 주사기를 든 수간호사의 손목을 움켜잡는다. 조용히, 자신의 품에서 영혜의 몸뚱이가 경련하는 것을 느낀다.
*
소매를 걷은 의사의 흰 가운 가득 점점이 영혜의 피가 튀어있다. 얼핏 커다란 소용돌이를 연상시키는 그 무늬를 그녀는 멍하게 바라본다.
당장 큰병원으로 옮겨야겠습니다. 서울로 가십시오. 위출혈 문제가 해결되면 그 병원에서 목혈관으로 단백질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그것도 오래갈 수는 없겠지만, 생명을 연장하려면 그 길뿐이에요.
그녀는 방금 출력된 의뢰서를 받아 가방에 넣고 간호사실을 빠져나온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단단히 힘을 주고 있던 다리를 변기 앞에 무너뜨린다. 조용히, 그녀는 토하기 시작한다. 뿌연 차와 함께 노란 위액이 나온다.
바보같이.
세면대 앞에서 얼굴을 씻으며,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바보같이,라고 되뇐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고개를 들자,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물에 젖어 있다. 수없이 꿈에서 피를 흘렸던 여자의 눈이다. 아무리 손을 들어 씻어내도 그 피를 닦을 수 없었던 눈이다. 그러나 지금 그 여자의 얼굴은 울고 있지 않다. 언제나 그래왔듯,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를 말없이 되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좀 전에 그녀의 귀를 찢었던 울부짖음은 자신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생경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마치 술에 취한 듯 복도가 흔들린다.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다하며 그녀는 로비를 향해 걷는다. 문득 햇빛이 들어, 우중충하던 로비가 반짝 환해진다. 오랜만의 햇빛이다. 빛에 민감한 환자들이 동요한다. 술렁이며 창 쪽으로 환자들이 다가가는 사이 평상복 차림의 여자 환자가 그녀 쪽으로 걸어온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다. 어지럼치는 시야 가운데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식별하려 애쓴다. 희주씨다. 다시 울었는지 눈의 흰자위가 붉다. 원래 정이 많은 것일까. 아니면 감정의 기복이 심한 환자이기 때문일까.
어떡해요, 영혜. 지금 가면……
그녀는 희주씨의 손을 잡는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문득 그녀는 손을 뻗어, 이 울고 있는 여자의 다부진 어깨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 창 너머를 애타게 바라보는 환자들에게 눈을 돌린다. 넋이 풀린 그들의 간절한 시선은 마치 창 너머로 걸어나가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들은 여기 갇혀 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그렇듯이. 영혜가 그랬듯이. 그녀가 이 여자를 안지 않은 것은, 영혜를 이곳에 가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쪽 복도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린다. 들것에 실린 영혜를 두 명의 보호사가 잰걸음으로 들고 나오고 있다. 좀전에 간호조무사와 그녀가 급히 씻긴 뒤 옷을 갈아입혀, 눈을 감은 영혜의 깨끗한 얼굴은 목욕을 마치고 단잠에 든 아기 같다. 희주씨의 거친 손이 영혜의 뼈만 남은 손을 거머쥐기 위해 뻗어나가는 것을, 그녀는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
운전석 너머 구급차의 앞 유리로 울창한 여름 숲이 펼쳐진다. 오후의 기우는 햇빛 아래, 비에 젖었던 모든 나뭇잎들이 다시 태어난 듯 맹렬히 반짝이고 있다.
그녀는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영혜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긴다. 희주씨의 말대로 영혜의 몸은 가벼웠다. 어린아이 같은 잔 솜털에 덮인 피부가 희고 매끄러웠다. 척추뼈가 하나하나 튀어나온 등에 비누를 바르며, 그녀는 무수히 동생과 함께 목욕했던 어린시절을, 등을 밀어주고 머리를 감겨주던 저녁들을 기억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가늘고 힘이 없어진 영혜의 머리칼을 그녀는 어루만진다. 아직 지우가 강보에 싸여 있을 때의 머리칼 같다고 생각한 순간, 아이의 작은 손가락들이 눈썹을 스친 것 같아 그녀는 막막해진다.
그녀는 가방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종일 꺼두었던 전원을 켜고 옆집 여자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저 지우엄마예요…… 친척 때문에 병원에 들렀다가…… 네, 사정이 갑자기…… 아니요, 다섯시 오십분에 아파트 정문 앞에 어린이집 버스가 오거든요. ……네, 거의 정확한 시간에 내려줘요. ……아주 늦진 않을 거예요. 늦게 되면 지우를 데리고 다시 병원으로 가든지 해야죠. 어떻게 거기서 재워요…… 정말 고마워요…… 제 전화번호 있으시죠?……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휴대폰의 폴더를 접으며, 그녀는 누군가에게 지우를 부탁하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가 떠난 후로는 반드시 저녁과 주말 시간을 아이와 보낸다는 원칙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녀는 이마에 깊은 주름을 만든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졸음을 느끼며 차창에 등을 기댄다. 눈을 감은 채 그녀는 생각한다.
지우는 곧 자랄 것이다. 혼자서 글을 읽고 사람들을 접할 것이다. 언젠가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아이의 귀에 들어갈 그들의 일을 그녀는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천성이 예민하며 병치레가 잦긴 하지만, 아이는 지금까지 비교적 밝은 성격으로 자라왔다. 그녀는 그것을 계속 지켜갈 수 있을까.
그녀는 덩굴처럼 알몸으로 얽혀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분명히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성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꽃과 잎귀, 푸른 줄기들로 뒤덮인 그들의 몸은 마치 더이상 사람이 아닌 듯 낯설었다.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테이프를 만들고 싶어했을까. 그 기묘하고 황량한 영상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전부를 잃었을까.
……엄마 사진이 바람에 날아갔어. 하늘을 봤더니, 응, 새가 날아가고 있었는데, 새한테서 ‘엄마다…….’ 소리가 들렸어. 응, 새 몸에서 손이 두 개 나오구.
오래전, 아직 말이 서툴던 지우가 잠 덜 깬 눈을 가늘게 뜨며 했던 말이다. 눈물이 나오려 할 때 아이가 짓곤 하는 특유의 흐릿한 웃음에 그녀는 놀랐다.
그런데 그게 왜, 슬픈 꿈이야?
이부자리에 누운 채 지우는 주먹으로 눈시울을 문질렀다.
새가 어떻게 생겼는데? 무슨 색이야?
하얀색…… 응, 예쁘게 생겼어.
훅, 숨을 들이켠 아이가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를 웃기기 위해 지나치게 애쓸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막막하게 하는 울음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것도, 도움을 청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슬픔을 느끼기 때문에 소리없이 우는 것 이다. 달래듯 그녀는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엄마새였구나.
지우는 그녀의 가슴에 묻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감싸올렸다.
봐, 엄만 여기 있잖아. 하얀 새로 변신하지 않았지?
강아지처럼 젖은 아이의 얼굴에 어렴풋이 미소가 어렸다.
……거봐, 그냥 꿈인걸.
정말 그럴까, 그 순간 그녀는 숨죽여 의문했다. 꿈일 뿐,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박명 속으로 일어서는 뒷산의 나무들에게서, 바랜 보라색 티셔츠 차림의 그녀가 뒷걸음질쳐 내려왔던 그 아침이었다.
그냥 꿈이 야.
그날의 지우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가 소리내어 내뱉는 말이다. 자신의 목소리에 뇰라 그녀는 두 눈을 흡뜨고 황황히 좌우를 살핀다. 구급차는 비탈진 도로를 여전히 빠르게 달려내려가고 있다. 오래 손질하지 못한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그녀의 손이 눈에 보이게 떨린다.
그녀는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자신이 그렇듯 쉽게 아이를 버리려 할 수 있었는지. 자신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잔인한 무책임의 죄였으므로, 누군가에게 고백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 다만 소름끼칠 만큼 담담한 진실의 감각으로 느낄 뿐이다.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
으음, 소리를 내며 영혜가 깨어나려 한다. 피를 다시 토할까봐 그녀는 급히 손수건을 꺼내 영혜의 입가에 댄다.
……뜨음.
영혜는 피를 토하는 대신 눈을 뜬다.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그녀를 바라본다. 저 눈 뒤에서 무엇이 술렁거리고 있을까. 어떤 공포, 어떤 분노, 어떤 고통이, 그녀가 모르는 어떤 지옥이 도사리고 있을까.
영혜야.
메마른 음성으로 그녀는 동생을 부른다.
……으음, 음.
그녀의 부름에 대답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코 대답하지 않겠다는 저항인 듯 영혜는 고개를 외튼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둔다.
그녀는 입술을 악문다. 불현듯 그날 새벽 걸어내려오던 산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샌들을 적신 이슬이 맨발에 차갑게 스몄었다. 그녀는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덜너덜한 몸뚱이를 적시는, 바싹 마른 혈관으로 퍼지는 그 차가운 물기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결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다만 그녀의 몸속으로, 뼛속까지 스며들었을 뿐이 다.
……이건 말이야.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영혜에게 속삭인다. 덜컹, 도로가 파인 자리를 지나며 차체가 흔들린다. 그녀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영혜의 어깨를 붙든다.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마디씩 말을 잇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그녀는 고개를 든다. 구급차는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잇길을 달려나가고 있다. 솔개로 보이는 검은 새가 먹구름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쏘는 듯한 여름햇살이 눈을 찔러, 그녀의 시선은 그 날갯짓을 더 따라가지 못한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 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끝-
2016년 5월 2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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