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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산 에서
대구 개신교는 지금부터 120년 전 1893년 4월 22일에 미국 개신교 북장로회의 선교사 베어드(한국명 배위랑)가 개척하고 아담스(1867~1929 : 한국명 안의와)가 현 약전골목 남성로 안에 제일교회(남문안 교회)를 세움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선교의 효과를 올리기 위해 학교와 서양식병원을 세우게 됩니다.
학교는 초등학교과정의 희도학교(현 종로초등학교의 전신)와 중등학교과정의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의료시설은 현재 동산병원으로 발전한 제중원입니다.
처음에는 초가에서 교회를 열고 학교와 병원을 같이 하고 선교사의 생활을 하다가 정착지를 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침 사람의 발길이 없는 황무지이고 성내와 가까운 이 곳 동산을 헐값에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였던 미국을 개척하고 살던 사람들이라 이곳은 오히려 그들에게는 알맞은 조건의 환경이었습니다.
교회예배당(제일예배당)은 동성로 마을 가운데 그대로 두고 주택과 학교와 의료시설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대구 개신교회는 이곳을 대구 최초의 개신교 선교기지로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개척자 현재명은 당시 선교사가 세운 계성학교 학생으로 이곳 영남신학교(현 제일교회 신축건물)앞에서 시내를 내려다보고 노래 연습을 했다고 당시의 어른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 선교사 주택
현 위치의 동산과 건너편 계성고등학교 계성초등학교와 현 계명대학 대명동 캠퍼스가 그들이 구입한 황무지였습니다.
1910년 주택 3채를 이 동산 가장 높은 곳에 미국식 가옥을 미국식으로 떨어져 지었습니다.
이 주택은 대구 개신교의 교회사뿐만 아니라 100년 전의 미국의 가옥과 미국인의 마을 형성을 연구하는데 또 건축구조 등을 연구하는 자료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대구시에서 보호 받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 건물의 아래 받침돌은 대구성벽을 헐었을 때 나온 성벽의 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옛 대구성의 돌의 재질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미국선교사 주택은 미국선교사가 완전히 물러가자 동산병원(계명대학의료원)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담장을 헐고 세 주택 건물을 각각 교회사박물관, 초기 의료활동을 했던 내용을 전시한 의료박물관과 교육관으로 구성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동산병원, 영남신학교
1903년 선교사이며 의사인 존슨은 현 동성로 제일교회에 있던 제중원을 지금의 동산병원인 동산 서쪽 아래로 옮겨 벽돌집으로 건립하였습니다.
1933년 700평, 80병상을 갖춘 벽돌 건물을 신축하여 오늘 날의 동산 병원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 주택을 짓고 난 3년후인 1913년 03월에 선교사 안의와(아담스)는 보통성경학교 즉 영남신학교 (현 영남신학대학 전신)를 주택 동쪽 현 제일교회 자리에 2층 일자로 대구 시내를 내려다보게 세웠습니다.
※ 신축 건물 대구제일교회
이 가옥 동쪽에 들어선 거대한 화강암의 제일교회 건물은 영남신학교의 건물을 제일교회에서 인수받아 헐고 1989년 10월 20일 공사를 착공 1993년에 완공한 것으로, 대구서 제일 크고 전국적으로 몇째 가는 큰 교회 건물입니다. 남성로(약전골목)에 있는 제일교회가 예배당으로서는 신도 수에 비해 너무 작아 이렇게 거대하게 신축한 것입니다. 남성로 예배당은 교회기념관으로 남아 대구최초의 개신교교회예배당으로 시보호문화재가 되어있습니다
※ 동성로 제일교회(예배당)-초가-서양식 강당형식의 건물- 1933년 고딕식 벽돌 건물로 신축- 현 제일교회 기념관
※ 선교사가 심은 최초의 미국 사과나무 정원수 apple tree
주택을 짓고 나서 정원을 가꾸는데 봄에는 꽃이 아름답고 가을에는 방울도마도와 같이 작고 예쁜 사과가 열리는 미국에서 가정마다 심는 apple tree도 심었습니다. 요즘 꽃사과로 분류되는 사과나무입니다.
현제 그 3세대 나무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나무가 워싱턴이 베었다는 사과나무와 같은 종류입니다. 100년 전에 이식된 미국 사과나무 중 한 종류 입니다.
※ 선교사묘
그런데 여기 정원 안에 있는 미국선교사의 묘는 원래는 현재 위치에서 서북쪽 약 100m 지점인 지금 주차장 입구 길가에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1980년대 대서로가 생기고 나서 선교사 터가 대서로의 길가에 접하자 동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현 위치로 옮긴 것입니다. 선교사의 자취와 미국 사람의 묘역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 청라 언덕
1923년경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한 음악가 박태준이 20대 초 마산 창신중학교에 근무할 때 같이 근무하던 나이 비슷한 유명한 가고파의 작사가인 시조시인 친구 이은상에게 자기가 이 동산아래(섬유회관 부근) 살면서 보았던 동산과 이 동산위에서 놀던 일 또 이 동산을 지나 학교에 다니던 일 그 추억을 이은상에게 자랑했습니다.
이은상이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가 바로 동무생각이고 이 동산을 이은상은 청라언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음악선생 박태준은 이 동무생각 시에 곡을 붙였습니다. 바로 유명한 사우(동무생각)가 그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입니다.
※ 대구의 최초의 시멘트 길 삼일만세 거리 (동산말랭이)
1919년 삼일 만세 때는 서문시장은 동산북단아래에 섬유회관 앞이어서 계성학교학생들은 당시의 동산북단아래에 있는 섬유회관 앞의 의거 현장인 서문시장으로는 경찰이 막기 때문에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 동산을 넘어 시가지로 바로 갔다고 합니다. 당시로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산길이고 주변에 사람도 살지 않아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 길을 삼일 만세길이라 요즘 명명하였습니다.
1923년 현 섬유회관 뒤에 있던 서문시장을 큰 못이었던 현 자리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 길은 대구 시내에서 새 서문시장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주위가 번잡하지 않아 사람들은 많이 이용하였습니다.
2일 7일 장인 장날과 명절 대목에는 길이 꽉 찰 정도였고 경산 청도 방면의 장꾼뿐 아니라 큰 장에 소장이 설 때는 소장수까지 소를 몰고 이 길로 다녔습니다. 그래서 장 보러가는 사람이 많이 다녔기 때문에 야바위꾼이 자리 잡아 부녀자를 울리기도 하였으며 사주 보아주는 할아버지가 언제나 자리를 깔고 앉아 사주를 봐 주기도 허였습니다.
대구사람은 이곳을 동산말랭이라고도 불렀는데 큰 장으로 가는 사람이 많이 다니었음으로 일제강점시대에 당시 대구부청(현 시청)에서 시멘트로 층계를 만들었고 층계 끝 아래 도랑에는 튼튼한 다리를 놓았기 때문에 이 길을 속칭 층계다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길은 일제강점 시 대구최초의 시멘트로 만든 길이었습니다.
이 시멘트 층계 길은 낡아 1960년대 초에 다시 만들었고 현재의 길은 1970년대 말에 만든 길입니다. 지금은 주위에 좋은 길이 많이 생겨 다니는 사람이 극히 적지만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중요한 대구의 경제골목이었습니다.
소설사이며 일장기말소사건 때 동아일보 사회부장인 현진건은 대구 동성로에서 태어난 대구사람으로 작품 구상을 할 때 이길을 걸었다는 것을 그가 기술한 바가 있는 길입니다.
※ 서문시장
서문시장은 평양, 충남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시장의 하나로 1922년까지의 원래 위치는 지금 섬유회관 길 건너 실골목 혹은 신(발)골목으로 불리는 곳의 일대였습니다. 그 곳은 대구성의 서문 밖이었기에 서문시장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일제강점 시 시가지를 정리하고 확장하면서 1922년 공설시장 개설 허가를 받아 현 서문시장 자리인 천황당지를 매립하여 장을 옮긴 것이 오늘날의 서문시장입니다.
이 장은 1960년대까지는 전국에서 가장 컸고 특히 포목상은 전국 제일의 상권을 가지고 있었고 어물은 동해 서해 남해의 산물이 다 모이는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어물이 거래되었으며 어물도가는 전국의 건어물을 장악하였습니다. 이 시장의 거래 범위는 충청도 강원도남부 전라도 경상남북도를 덮는 큰 장이었습니다.
1960년대까지는 서문 시장이라는 이름 보다 큰 장으로 불렀으며 당시로서는 전국 최고의 큰 장이었지만 국가 근대화로 교통이 발달하여 서울로 집중되자 서울로 상권이 빼앗기어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 계성학교
교장 안의와, 교사 이만집(李萬集)이 학생 27명으로 수업을 시작했으며, 1908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908년에 지은 아담스관 2층 정면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뜻의 ‘인외상제지지본(寅畏上帝智之本)’이라는 교훈을 부각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이 학교의 교육목적을 엿볼 수 있다. 寅畏[인외]공경(恭敬)하고 두려워함
1906. 10.15(을사늑약 이듬해) 미국 북장로회 아담스 (J. E. Adamas 한국명 안의와) 선교사가 남문안교회 내의 선교사 사택을 교사로 본교를 창설하고
1908. 03. 30 현재 자리에 2층 양옥 교사인 아담스관을 지어 지금의 계성학교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5호 )
1913. 09. 20 맥퍼슨관을 준공하고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6호 )
1931. 11. 30 헨더슨 관을 준공하여 학교 교사로서 훌륭한 모양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대구 근대화 초기의 중등학교 건물을 볼 수 있어 이 세 건물은 대구시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 계성학교는 음악가 박태준(작곡가 연세대 음대교수), 성악가이고 서울대 음대창설자이며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선구자인 현제명, 유명한 한글학자 이윤재, 문학가 박목월, 김동리 등 이 나라를 대표할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였습니다.
현제명은 계성학교 다닐 때 이 동산에서 아래로 내려 보고 성악 연습을 하였다고 당시 살았던 어른들이 증언하여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당시는 선교사 집이 있는 동산과 계성학교 신명학교는 한 울과 같았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 대구에서는 3월 8일 교사 백남채(白南採)의 지휘 아래 목사 이만집, 졸업생 손인식(孫仁植)·김정오(金正悟) 등이 시내의 남녀학생을 규합하여 민족의 독립을 부르짖으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 신명학교
1907. 10. 23 대한제국 중학교령(1899. 4. 4 제정)에 의거 선교사 부마태여사가 남산동 동산(당시는 南山동 3번지 : 현 동산길 17)북단에 신명여자중학교를 설립 개교 하였습니다.
1913. 04. 20 본관 2층 벽돌로 신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헐고 신 교사를 건설하여 구교사는 볼 수 없습니다.
김종필총리 부인 박여사는 신명여학교를 졸업하였고 코롱회장 이동찬 부인, 이희경 하와이 독립투사. 일제 강점시 한국최초의 여성비행사 박경원(1912~1916에 신명학교다님)등 많은 여성 선각자를 배출한 학교입니다.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의 여성 활동에 참여한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습니다.
이 두 학교는 삼일 만세 운동에 모든 학생이 참가한 자랑스러운 학교입니다.
※ 마르타 스콧 브루엔(Martha Scott Bruen·=한국명 부마태
이하 참고자 료
※Baird=한국명 배위량 ※James Edward Adams=한국명 안의와 ※제일교회=처음이름 남문안예배당, 남성정예배당은 초기 일제 강점시대 이름, 1933. 09. 30 현 남성로 예배당완공. 교회 명을 “제일교회”로 고침 부르기는 제일예배당
※ apple tree (선교사집마당의 사과나무)
요즘은 분류되어 식물도감에 꽃사과로 명명되었다. 사과나무의 한 종류 (식물도감에 따라 서부해당화로 명명된 것도 있다.)
오늘 날 우리가 즐겨 먹는 대구 사과와는 다른 종의 사과나무입니다. 대구 사과는 일인들이 금호강을 둑으로 막고 생긴 잉여 토지에 일인들이 일본에서 사과나무(축 홍옥 국광 인도 등)를 1930년경에 가져와서 과수원을 만들었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제배되어 현재도 과수 묘목은 일본에서 경제성 있는 우수한 묘목을 수입하고 있다.
이 apple tree와는 대구 사과라는 과일과는 다른 종의 정원의 화초용 사과나무입니다. 일본에서 들어온 사과나무를 처음 심은 곳이 평광동이고 원조나무가 현재 시에서 보호되고 있습니다.
박상진 (경북대학교 임산공학과 교수) 사이트 “우리 숲“에서 선교사집마당의 사과나무를 곷사과라 하였음
※ 동산병원 (현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동산의료원)
1899년 12월 성탄절을 앞두고 제일교회 내에 영남지역 최초의 의료기관인 '제중원'을 연다.
1903년 존슨은 제중원을 동산 언덕으로 옮겨 벽돌집으로 건립하였고,
1933년 연와(煉瓦) 방화건물 신축(700평, 80병상)
※ 영남신학교 - 대구제일교회 신축건물
1913. 03 미 선교사 안의와(아담스)는 보통성경학교(영남신학교 현 영남신학대학 전신)를 주택 동쪽 현 제일교회 자리에 이층 일자로 대구 시내를 내려 보게 세웠다.
1989.10.20 영남신학교 건물을 헐고 대구제일교회 신축건물 공사를 착공 1993년에 완공
※ 제일교회
1885. 12.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부산에서 대구로 이전
1893. 04. 22 미국 북장로회 배위량 선교사 대구에 개척전도(제일교회 창립)
1896. 01. 현재 본교회 기지구입(대지 420평, 초가 5동 20간, 435원 50전)
1897. 04. 안의와 선교사 내구
1899. 02. 교회 구내에서 대구동산병원(濟衆院)설립
1900. 11. 11 희도학교 설립
1906. 10. 15 본교회 구내에서 계성학교 설립
1911. 04. 05 최초의 한인목사로 김천일 목사 동사목사로 취임
1921. 10. 27 대남유치원 개원
1923. 03. 18 이만집목사 자치선언 (1931. 11. 15. 종식)
1933. 09. 30 동성로 예배당 완공. 교회명을 “제일교회”로 고침.
1957. 03. 31 이상근 목사 부임
1993년에 동산에 현 교회당 완공
이상 제일교회 홈페이지에서
※ 선교사스윗즈주택 [宣敎師─住宅] 대구유형문화재 제24호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에 있는 선교사 스윗즈가 살던 집.
1989년 6월 15일 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스윗즈, 핸더슨, 캠벨 등의 선교사들이 살았다. [출처] 선교사스윗즈주택 [宣敎師─住宅 ] | 네이버 백과사전
※ 선교사블레어주택 (1989년 6월 15일 대구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
1910년 무렵 미국인 선교사들이 블레어 선교사를 위하여 지은 집이다. 동산 위의 여러 주택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붉은 벽돌의 2층 집이다. 남쪽은 경사지로 반지하실이 딸려 있다.
건축이 끝난 뒤 블레어, 라이스 등이 거주해오던 것을 1981년 동산의료재단에서 인수하여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산병원 의사인 강진성이 거주하면서 내부 마감재를 바꾸었으나, 건물의 형태와 구조는 당시 그대로이다. [출처] 선교사블레어주택 [宣敎師─住宅 ] | 네이버 백과사전
※ 선교사 챔니스 주택(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25호)
선교사 Reiner가 살던 집으로 191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Reiner 후로 Chamness, S선교사 Reiner가 살던 집으로 Reiner 후로 Chamness, Sawtell 등의 선교사가 살았고, 1984년부터는 동산병원 의료원장인 H.F Moffett가 살았다. 당시 우리나라에 거주했던 미국인의 건축·주거·생활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건물이다. [출처] 선교사챔니스주택 [宣敎師─住宅 ] 네이버 백과사전
※ 대구 동산병원 구관 [大邱東山病院舊館] (등록문화재 제15호)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에 있는 근대병원 건물. 대구 최초의 서양의학 병원으로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학교법인 계명기독학원이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1903년 존슨은 제중원을 동산 언덕으로 옮겨 벽돌집으로 건립하였고,
1931년 미국 선교사 플레처(Fletcher)가 건립하였고 공사는 중국인기술자들이 하였다. 대구 최초의 서양의학병원으로 연면적 2,015㎡, 건축면적 655.33㎡, 지상 3층 규모이다. 일자 모양의 건물로서 정면 가운데에는 현관이 돌출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이었으나 일부가 멸실되었다. 건물 벽은 시멘트 벽돌을 쌓은 뒤 붉은 벽돌로 마감하였고 슬라브지붕을 두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 중에는 일본군들이 경찰병원으로 사용하였고 1950년 6·25전쟁 중에는 군부대에서 징발하여 국립경찰병원 대구분원으로 썼다. 현재는 의사당직실, 화상병상, 소독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최근에 건물 내부를 리모델링하였으나 외관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대구 지역 향토사와 의료사 및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출처][大邱東山病院舊館]네이버 백과사전
※ 꽃사과나무 (Malus prunifolia (영) Crab apple (일) ヒメリンゴ(イヌリンゴ) (한) 海棠)
우리 주변의 공원이나 큰 공공건물 앞에는 가을이면 예쁜 아기사과가 달리는 나무를 흔히 만난다. 열매는 대체로 작은 새알만하지만 제법 굵은 것도 있으며, 색깔은 붉은 색이 대부분이다. 이과(梨果)라고 부르는 사과열매 특징이 잘 나타나며 꽃받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봄날이면 잎과 같이 거의 나무 전체를 뒤덮어버릴 만큼 많은 꽃이 핀다. 처음 꽃봉오리 시절은 진분홍색이다가 꽃이 활짝 피면 하얗게 된다. 나무는 높이 5~6m, 지름 한 뼘 정도에도 이르나 원래 아름드리로 자라는 나무는 아니다. 잎은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고 잎의 앞뒷면에는 털이 있어서 희끗희끗하게 보이기도 한다. 열매와 마찬가지로 잎이나 껍질모양도 사과나무를 많이 닮았다. 열매는 떫고 별다른 맛이 없어서 그냥 먹기는 어렵지만 과일주를 담기도 한다.
대구 계명대학교 부속 동산의료원에는 1899년 선교사들이 가져다 심었다는 꽃사과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높이 7m, 둘레 90cm의 고목으로서 서양 사과나무를 가져와 접붙이는데 필요한 밑나무로 심은 것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꽃사과나무는 중국 원산의 나무이나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개량하여 원예품종을 계속 만든 탓에 수많은 품종이 있고, 학자들 간에도 이 나무의 분류학적인 위치에 대하여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서 서부해당화(Malus halliana)와 꽃아그배나무(Malus froribunda)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꽃사과’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이들 셋은 비슷비슷한 나무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다. 서부해당화는 중국원산이며 현재도 널리 심는 꽃나무의 하나이다. 꽃봉오리는 붉은 빛이나 꽃이 완전히 피면 연분홍색이 되고 열매는 꽃사과보다 작다.
꽃아그배나무는 일본에서 개량한 품종으로 보이며, 에도시대 말기인 19세기 중엽 유럽에 건너가 지금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꽃봉오리 때는 붉은 색이 강하고 꽃잎이 벌어지면 분홍색이었다가 꽃이 완전히 피면 거의 백색이 된다. 열매가 붉은 경우보다 노랑열매가 더 흔히 달린다. 셋 중에 가장 꽃이 아름답고 분홍빛이 강하다.
그러나 이들 셋은 구분이 어렵고 상호간 혹은 야광나무나 아그배나무와 수많은 교잡종이 있어서 특징을 딱히 나누어 말하기는 어렵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셋 모두를 꽃사과나무로 알고 있어도 크게 잘못이 없을 것 같다.
자료 : 박상진 (경북대학교 임산공학과 교수)----“우리숲”의 수목도감에서
사과나무속
①꽃사과나무
Malus prunifolia (영) Crab apple (일) ヒメリンゴ(イヌリンゴ) (한) 海棠
우리 주변의 공원이나 큰 공공건물 앞에는 가을이면 예쁜 아기사과가 달리는 나무를 흔히 만난다. 열매는 대체로 작은 새알만하지만 제법 굵은 것도 있으며, 색깔은 붉은 색이 대부분이...
②꽃아그배나무
Malus floribunda Miller (영) Japanese Crab, japanese Flowering Crab Apple (일) カイドウズミ
중국 원산의 원예품종으로 낙엽활엽수 소교목이다. 나무높이 6∼7m에 달한다. 가지가 아래로 처져서 원추형의 나무 모양을 이루고 나무 껍질은 연한 잿빛이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타원...
③능금
Malus asiatica Nakai (영) Apple Tree (일) チョセンリンゴ (漢) 林檎<임금>
한국 야생의 사과나무이며 임금(林檎)이라 한다. 동의보감에는 <목이 말라 자꾸 물이 먹히는 병(당뇨병등)을 멎게하고 배가 아픈 것을 치료하며 담을 삭히고 이질을 멎게 한다>고 소개...
④사과
Malus pumila var. dulcissima Koidz. (영) Apple (일)りんご (한) 沙果(사과)
대표적인 과일나무로서 낙엽 소교목이다. 높이 4-5m정도로 키우며 껍질을 회갈색이고 어린 가지와 겨울눈에는 처음에 털이 있다가 없어지며 색깔은 자주 빛이다.
잎은...
⑤아그배나무
Malus sieboldii Rehder (영) Toringo Crab, Cherry Apple (일) ズミ (漢) 棠梨<당리>, 野黃子<야황자>, 三葉海棠<삼엽해당>
배고픔이 일상이던 시절, 설익은 열매를 어린애들이 따먹고 <아이구 배야!> 한다하여 아그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부 이북에 자라며 낙엽활엽수 소교목으로 나무높이 ...
⑥야광나무
Malus baccata Borkh. (영) Siberian Crab-apple (일) ヒメリンゴ, エゾノコリンゴ (漢) 亞棠梨<아당리>
야광나무는 밤에도 빛을 발한다는 야광(夜光)의 의미이다. 이는 야광나무의 꽃이 필 때는 한꺼번에 새하얀 꽃이 지천으로 피기 때문에 깜깜한 밤에 보면 마치 빛을 내어 주위를 밝게 ...
※이상은 유리나라 식물도감에 올라 있는 사과나무 종입니다.
뒷부분은 사이트 “우리 숲” 수목 도감에 들어가 보세요.
수목에 대해 많은 지식을 얻을 것입니다.
● 현진건 (한국 소설가) [玄鎭健] 브리태니커
1900. 8. 9 경북 대구~ 1943. 4. 25 서울. 소설가.
한국 사실주의 단편소설의 기틀을 다진 작가이다. 본관은 연주(延州). 아호는 빙허(憑虛).
대한제국 말기에 대구 우체국장을 지낸 경운(慶運)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형 홍건(鴻健)은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으로 러시아 대사관 통역관으로 근무했고, 둘째 형 석건(奭健)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출신으로 대구에서 변호사로 근무했다. 셋째 형 정건(鼎健)은 상하이[上海]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평양에서 옥사했다. 1917년 일본 세이조중학[成城中學]을 졸업하고, 그해 귀국했다가 다시 중국 상하이로 가서 후장대학[滬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1919년에 귀국했다. 당숙인 희운(僖運:필명은 현철[玄哲])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20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게 된 것도 그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1922년 홍사용·박종화·나도향·박영희 등과 〈백조〉 동인이 되었고, 그해 직장을 종합시사지 〈동명〉으로 옮겨 1925년까지 근무했으며 동아일보사로 옮겨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언론계를 떠날 때까지 기자로 일했다. 그뒤 닭을 키워 생계를 꾸려가며 주로 장편소설 창작에 몰두했다. 과음과 울화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1943년에 결핵으로 죽었다.
※일장기말소사건 때 동아일보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