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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사
44. 제1차 돌격의 격퇴(1)
7월 17일 뤼순을 포위중이던 일본군 제3군은 3개 보병사단과 2개 예비보병여단(제1, 제4보병여단) 및 제2야전포병여단 등으로 새로이 증강되었다. 제3군의 총 병력은 4만 8천 명에 달했으며, 중․대구경 포 198문을 비롯하여 총 386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배치상황을 보면, 제11사단은 바다에서 철도에 이르는 지역을, 제9사단은 철도에서 볼치예 산의 남쪽 경사면을 따라서 만다린 도로까지, 제1사단은 만다린 도로에서 바다까지 담당했으며, 제1 및 제4 예비보병여단은 제2선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볼치예 산을 점령한 직후부터 진지를 강화하고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공병작업에 착수했다. 7월 25일 전 포위망에 걸쳐 참호와 거점이 구축되었다. 뤼순을 방어중인 러시아군이 공격에 나설 수도 있다고 생각한 노기 장군은 근처의 부락 등지에도 방어시설을 구축하도록 지시했다. 전선 앞의 러시아군 전진기지와 인접한 곳까지 첩보원을 파견했으며, 휴식 중에도 경계에 임했다. 뤼순을 포위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인 7월 18일 이미 일본군 진지에서는 포위포가 배치되기 시작되었다.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은 만주에서 활동중인 일본군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뤼순을 점령해야 한다고 본 도쿄의 최고사령부의 요구에 의거하여 1894년의 청일전쟁 당시와 같이 속도전으로 진지를 점령한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보루 №.Ⅲ에서 포대 B에 이르는 구역을 그 희생물로 삼았다.
동부전선의 이 구역은 약간 전면으로 돌출되어 있어서 포위포를 이용하여 정면과 측면에서 조준포격을 가할 수 있었으며, 보루의 앞에는 접근을 도와주는 사각지대가 많았다. 일본군이 뤼순 요새의 우측을 공격할 경우 바다 때문에 필수적인 군사력을 전개할 수 없게 되며, 일본군 좌측이 러시아 군함의 포격권에 들게 되어 적절하지 못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서부전선 역시 러시아군의 강력한 전진진지 때문에 공격하기 곤란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동부전선 역시 러시아군이 샤오구샨 산(현지명을 잘 모르겠음)과 다구샨 산(大孤山)을 점령하고 있는 한 난공불락이었다. 동부전선의 우측에서 앞으로 나와 있던 두 산의 전진기지는 포위작업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군 지휘부의 계획을 분석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뤼순 요새의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노기 장군은 러시아의 방어구역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동부전선을 가장 약한 곳으로 오판했으며, 이런 근거 없는 판단에 기초하여 공격계획을 수립했다. 반면 보다 손쉬운 공격대상이었던 서부전선을 난공불락으로 여겼다. 그는 뤼순을 방어하는 러시아의 병력에 관한 정확한 자료 또한 보유하지 못하여 러시아 수비대의 총 병력을 2만에서 2만 5천 명 정도로 산정했다.
일본군은 7월 17일부터 일주일 동안 샤오구샨과 다구샨 산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이 산의 수비대(8개 중대와 3개 의용군부대 및 대포 8문)는 서둘러 진지를 보강했다. 공병장교 라셰프스키 중령은 산 정상에 참호를 구축했다. 다구샨 산의 경사면에는 사각지대를 공격하기 위해 진지가 구축되었으며, 보병용 엄폐물과 철조망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완료되지 못했다.
일본군 제11사단 소속의 2개 여단이 각각 다구샨과 샤오구샨 산을 공격하기로 했다. 일본군 포병은 뤼순 수비대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려는 의도에서 7월 25일 10시부터 뤼순 시와 함대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15시가 되자 일본군 포병부대는 다구샨과 샤오구샨 산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 보병은 공격준비 위치에 섰다.
계속되던 포격이 19시에 그쳤다. 제1산병선이 다구샨 산의 산기슭에 접근하여 하부 진지의 러시아군을 격퇴한 후, 정상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총과 대포의 사격에 의해 진격이 저지당하고 많은 양의 비가 내리자 일본군은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비가 그친 후에 재개된 공격 역시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익일 04시 일본군은 뤼순 요새의 지휘부를 혼란시켜 러시아군 예비대를 자신들의 공격목표로부터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우글로바야 산을 공격했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일본의 위장 공격을 간파하지 못했으며, 전황을 걱정한 콘트라첸코 장군은 서둘러 전장으로 향했다.
약 11시경 일본군은 다구샨과 샤오구샨 산을 동시에 공격했으나, 로쉰스키 장군의 기를 게양한 상태에서 따허 만으로 진입한 포함 2척, 수뢰정 7척 그리고 순양함 노비크 호 등의 화력에 의해 제압되었다. 그러나 13시가 되자 일본의 순양함 4척과 전함 1척이 따허 만으로 접근해 왔으며, 일본 군함의 수적 우세를 확인한 러시아 군함은 회항했다.
일본군은 이런 상황의 변화를 재빨리 이용하여 포격을 재개했다. 19시 45분 일본군 보병은 다구샨 산의 보루에 은밀하게 접근하여 공격했다. 제16연대 소속의 제7, 제8, 제10, 제12중대가 이들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러시아군은 수차례에 걸쳐 백병전을 치렀다. 그러나 현저한 차이를 보였던 군사력으로 인하여 21시에 다구샨 산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산을 방어하던 부대원의 1/3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는데, 대부분의 장교가 사상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방어부대는 파괴된 대포를 방치한 채 뤼순 요새로 후퇴했다.
일본군 포병은 다구샨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샤오구샨을 포격했다. 러시아군이 다구샨에서 후퇴하자 샤오구샨에 대한 포격이 더욱 맹렬해졌다. 7월 26일 자정 무렵 일본군이 재차 샤오구샨을 공격했지만, 막대한 손실만 입은 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러시아 방어군의 상황 또한 비관적이어서,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2문의 대포가 파괴되었으며, 병력손실 또한 심각한 수준이었다.
7월 27일 01시경 일본군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야음을 이용하여 샤오구샨의 측면을 우회공격하면서 그곳에 집중 공격을 가했다. 1시간 후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참호에 접근하여, 수류탄을 투척했다. 03시 30분 러시아군은 진지를 뒤로한 채, 요새로 후퇴했다.
샤오구샨과 다구샨의 두 전투에서 1,280명의 일본군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450명이었다.
45. 제1차 돌격의 격퇴(2)
일본군이 다구샨과 샤오구샨을 점령했다는 것은 곧 뤼순이 가장 중요한 전진진지를 잃었으며, 반면 일본군은 뤼순 요새의 동부전선을 포격할 수 있는 포위포대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스미르노프 장군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반격을 감행하여 잃어버린 진지를 재탈환하려고 했다. 실제로 수차례에 걸쳐 러시아군의 반격이 있었지만 소수의 병력만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모두 간단히 격퇴되고 말았다.
다구샨과 샤오구샨을 점령함으로써 최적의 공격거점을 확보하게 된 일본군은 뤼순의 동쪽 방어라인의 우측을 포격하기 위해 포위포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뤼순의 서부전선은 우글로바야 산과 빤룬산 산의 앞에 펼쳐진 페레도바야, 트료흐골로바야 그리고 시로트카 산을 따라 형성되었는데, 이 서부전선중에서도 좌측 방어라인의 전진진지는 우측 방어라인을 공격하려는 일본군에게 큰 장애물이 되었다. 6개 의용군부대와 제5, 12, 28연대에서 각각 차출된 3개 중대가 이 전진진지를 방어하고 있었으며, 2개 해병중대가 예비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7월 31일 20시 30분 일본군이 월등한 군사력으로 서부전선의 전진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에 참가한 제1보병사단은 제1예비여단과 제2야전포병여단 및 3개 중야전포중대 등으로 전력이 보강되었다. 공격은 3개 종대로 이루어졌다. 제1보병여단의 2개 연대가 중앙에서 공격했으며, 제1예비여단 소속의 3개 연대가 오른쪽에서 공격했다. 좌측에 있던 제2여단 소속의 2개 연대는 중앙을 공격하는 부대를 엄호했다. 포병부대는 후방의 촌락 근처에 배치되었다.
일본군은 야간에 일곱 차례에 걸쳐 공격했으나,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24시경 일본군은 페레도바야 산을 재차 공격하여 거의 포위했으며, 방어군은 근처의 트료흐골로바야 산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페레도바야 산을 점령한 일본군은 트료흐골로바야 산을 집중공격했다. 그러나 러시아 수비대는 수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공격을 집중사격과 백병전으로 막아냈다.
약 02시경 제1보병연대가 시로트카 산을 포위했으며, 러시아 수비대는 여명까지 방어했지만, 결국 판룬샨 산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판룬샨 산을 공격했으나, 제5동시베리아보병연대 소속의 보병중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8월 1일 동틀 무렵 일본군 16개 포병중대는 재차 포문을 열었다. 점심 무렵 뤼순 요새로부터 러시아 증원부대가 도착했다. 따라서 16시에 재차 공격한 일본군은 커다란 손실만을 입은 채 격퇴되었다. 다음날인 8월 2일의 공격 역시 실패하면서, 05시경 일본군은 산기슭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아침 08시부터 지뢰폭탄과 유산탄으로 러시아의 전진진지를 맹렬히 포격하기 시작했다. 1시간 후 새로운 공격이 이어졌는데, 계속된 공격에 지쳐 있던 러시아군이 일본군의 강습에 후퇴하면서 보코바야 산과 트료흐골로바야 산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두 산의 전진진지를 빼앗길 경우에 초래될 수 있는 상황을 즉시 파악한 콘트라첸코 장군은 반격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서부전선의 지휘관 이르만 대령은 후퇴중인 병력을 모아서 트료흐골로바야 산을 공격했으나 소수의 병력만이 참여했기 때문에 반격은 실패로 끝났으며, 러시아 보병은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후퇴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공격으로도 일본군의 진격을 잠시 억제할 수 있었는데, 콘트라첸코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남쪽의 방어선을 보강했다.
관둥 반도에서의 모든 전투가 그랬던 것처럼 뤼순의 전진진지에서 러시아군이 보여준 완강한 저항으로 일본군 제3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그런 사실에 일본군 지휘부가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노기 장군의 참모부와 도쿄의 총참모부는 뤼순 전투에서 장차 더 많은 희생이 요구될 것이며, 그것이 일본군의 사기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했다. 이 점을 참작한 노기 장군과 일본 함대 사령관 도고 장군은 총공격을 펼치기 이전에 뤼순 요새를 무혈인도하고 모든 주민을 뤼순에서 철수시키라는 제안이 담긴 편지를 8월 3일 오전 10시 뤼순 요새에 전달했다.
같은 날 소집된 방어위원회에서는 일본의 최후통첩을 거부하기로 결정한 후, 다음날 아침 일본군 지휘부에 “요새를 포기하라는 제안은 러시아군의 명예 및 품위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서 요새의 현 상황을 고려할 때 합당한 것이 아닌 만큼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의 답변을 발송했다.
4일 노기 장군은 총돌격명령을 하달했다. 총돌격은 5일로 예정되었으나 전날의 비 때문에 땅이 질어지면서 거동이 불편해지자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밤은 고요했다. 6일 아침 제3군 참모부에서 외국 언론사의 종군기자들을 접견한 노기 장군은 “여러분께서는 전쟁을 직접 목격하고자 매우 긴 여행을 하셨습니다. …… 그러나 불굴의 돌격이 완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때맞추어 도착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에 찬 어조의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군 지휘부가 마련한 전반적인 공격계획은 다음과 같다.
8월 6일 모든 전선을 포격하기 시작한다. 이후 포격의 지원을 받으며, 서부전선의 전진진지를 양동공격을 가한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전진진지를 지원공격한다. 8월 8일 여명에 주력부대를 동원하여 동부전선을 공격한다. 돌격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하여 노기 장군의 예비대인 제4예비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공격에 가담한다.
약 04시 30분경 일본군 진지의 중앙에서 일발의 포성이 울려퍼졌다. 이는 러시아군의 전체 방어라인에 대한 집중포격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시내 전체와 하구가 장거리포의 사격에 들어갔다. 보다 집중적인 포격의 대상이 된 것은 항포격용 보루 №.Ⅲ과 포대 B, 보루 №.5 등이었다. 요새 내의 각 보루와 전함 역시 지체 없이 대응포격에 임했다.
이후 엄호포격을 받으면서 일본군 제1공격종대가 우글로바야 산과 남부전선의 중앙을 공격했다. 우글로바야 산의 보루는 산 정상을 둘러싸듯이 구축된 단순한 사격용 참호로 구성되었다. 6개 보병중대가 방어에 임하고 있었으며, 16문의 포를 갖춘 7개 포병중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일본군의 움직임을 적시에 발견한 러시아군은 적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약 07시경 러시아군의 포격이 뜸해진 틈을 이용하여 일본군은 재차 공격에 나섰다. 러시아 수비대의 강력한 소총사격에도 불구하고 08시경 일본군은 러시아군 제5연대 소속 제10중대가 방어중이던 산 정상 좌측 앞에 위치한 참호 중 일부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다른 지역의 참호 또한 점령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09시경 우글로바야 산에 도착하여 직접 전투를 지휘하던 콘트라첸코 장군은 “제5연대는 마치 바위와 같이 현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고 요새사령관에게 보고했다.
46. 제1차 돌격의 격퇴(3)
트레치아코프 육군대령의 지휘 하에 6일에서 7일로 넘어가는 밤 사이에 참호탈환작전이 여러 차례 감행되었지만 모두 무산되었다. 7일 08시에 일본군은 우글로바야 산을 3개 방면에서 포위했다. 러시아군의 참호와 보루가 적의 포격에 의해 파괴되면서 수비대의 병력손실이 늘어났다. 점심 이후 러시아군 잔여 병력은 203고지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203고지, 들린나야 산 그리고 세들로바야 산을 집중적으로 포격했다. 22시에 디비지온나야 산을 공격했지만 실패한 일본군은 8월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밤에 들린나야 산과 묘르트바야 봉을 공격하여 후자를 점령했다.
북부전선에서는 공격 첫날 보루 №3과 항포격용보루 №.Ⅳ 사이의 지역 및 보도프로보드늬, 쿠미르넨스키, 스칼리스틔 등의 다면보루를 집중적으로 포격했다. 보도프로보드늬 다면보루에만 분당 7~8발의 지뢰폭탄과 유산탄이 집중되면서 엄개부를 비롯한 다른 보강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8월 7일 약 14시경 일본군은 보도프로보드늬 다면보루로 돌격했으나, 막대한 손실만 입은 격퇴되었으며, 그 날 밤부터 다음날, 즉 8일 아침까지 이루어진 재공격 역시 실패로 끝났다.
일본군은 8월 6일 새벽에 쿠미르넨스키 다면보루 부근의 촌락과 판룬샨 다면보루 부근의 방치된 러시아군 참호를 점령했다. 쿠미르넨스키 다면보루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은 7일에도 계속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같은 날 21시경 포병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수비대가 후퇴한 판루샨 다면보루는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스미르노프 장군은 다면보루를 탈환하라고 지시했다. 제15연대 산하의 3개 중대가 명령에 따랐으나 보루의 일부를 탈환했을 뿐, 전체를 수복하지는 못했다. 일본군은 8월 2일 04시 30분에 잃어버린 보루를 재탈환하기 위해 맹렬히 공격했지만, 외부 굴강을 점령하는 성공했을 뿐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격퇴되었다. 같은 날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일본군의 공격은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러시아군 5개 중대는 11시에 콘트라첸코의 명령에 따라 판룬샨 다면보루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 임하여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탈환한 보루는 모두 파괴되고 소실된 상태였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근처의 참호에서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8월 6일 북부전선의 우글로바야 산을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군 제9, 11사단 소속의 부대가 포대 A에서 보루 №.3에 이르는 지역을 집중 포격함으로써 동부전선에 대한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야전포, 요새포 및 해안포 등 포대에 설치된 모든 대포 또한 일본군의 포병과 예비대를 향하여 포문을 열었다.
포격 첫날 이미 동부전선의 보루가 심하게 파괴되었으며, 포의 일부가 손상을 입었다. 또한 보루와 포대간의 전화선이 두절되었다. 낮과 같은 집중포격은 아니었지만 야간에도 포격은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러시아군은 파손된 보루를 수리했다.
그 사이에 일본군은 산재한 계곡과 수렁, 수수밭 등에 은폐해가면서 항포격용보루를 향해 전진했다. 일본군은 전진하면서 집게를 이용하여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절단하기도 했으며, 전류를 땅속으로 유도하는 특수 갈고리를 철조망에 투척하기도 했다.
8월 7일 날이 밝자 다시 포격이 강화되었다. 다면보루 №.1과 2 및 그 인접포대, 항포격용보루 №.Ⅱ,Ⅲ 등이 집중포격의 대상이 되었다. 잠시 후 일본군은 만리장성에 구멍을 뚫기 위하여 집중포격을 가했다. 낮에 계속되던 포격은 밤이 되면서 잠잠해졌다.
이 포격으로 동부전선의 요새는 전 날보다 더욱 심하게 파괴되었다. 보루 №.Ⅱ를 수비하는 부대의 인적,물적 손실은 심각했다. 병영이 심하게 파괴되었고 4문의 항돌격포 중 2문이 파손되었으며, 보수한 지 얼마 안 된, 좌측 능보가 완파되었다. 한편 우측 능보에서는 유산탄에 대비한 엄폐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보루 №.2의 파손 정도가 심각했으며, 다면보루 №.1은 완파되었다.
8월 7일의 러시아군의 대응포격은 전 날에 비해 덜 집중적이었는데, 만약의 돌격에 대비하여 대포와 포탄을 아껴야 한다는 벨릐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상대방 포대만 포격했으며, 간혹 일본군 전위부대와 예비대를 포격하기도 했다.
8월 7일 일본군 지휘부는 부대집결만 계속할 뿐, 동부전선을 공격하지 않았는데, 그 날 밤에 일본군이 항포격용보루 №.Ⅱ를 공격하여 보루의 방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 수비대의 소총사격으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동시에 일본군은 №.2를 공격했지만 그 또한 격퇴되었다.
같은 날 일본군은 쿠로파트킨 안경보를 공격했으나, 두다예프 육군중위의 지휘하에 백병전으로 맞선 수비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곧 이은 재공격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02시경 일본군은 안경보에 침투하여 백병전으로 저항하는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두 차례에 걸친 반격전을 펼쳤으며, 결국 안경보를 수복했고 항포격용보루 №.Ⅱ의 포병은 일본군의 재점령 시도를 무산시켰다.
같은 날 밤 일본군은 세 차례에 걸쳐 다면보루 №.1을 공격했으나 №.2에 위치한 포병의 지원 속에 수비대가 성공적으로 방어해 내었으며, 8일 07시에 일본군을 최종적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다면보루 №.1과 2에 대한 일본군의 포격은 계속되었다. 08시에 일본군은 다면보루 №.1을 다시 공격했지만 철조망을 넘지 못했으며, 이후 더 밀집된 대형으로 재차 공격했으나 그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중단되었다가 점심부터 재개된 공격이 17시까지 계속되었다. 다면보루 №.1과 2에 대한 돌격이 성공할 수 없음을 확인한 일본군 지휘부는 저녁에야 공격을 중단했다.
47. 제1차 돌격의 격퇴(4)
동부전선의 러시아 수비대는 새로운 공격에 대비하여 파괴된 보루를 보수했다. 19시에 동부전선에 도착한 요새사령관 스미르노프는 만리장성에 배치되어 있던 7개 상륙중대를 이곳으로 이동배치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부전선의 항포격용보루 №.Ⅱ와 Ⅲ의 중간지점을 돌파하여 했으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군사력을 집결했다. 8월 9일 밤 제9, 11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최후의 예비대인 제4예비여단이 가세했다. 다면보루 №.Ⅱ, 쿠로파트킨 안경보 및 포대 B를 점령하기 위해 군사력이 보강되었다.
01시경 일본의 제22보병연대는 유산탄과 기관총 사격의 엄호하에 포대 B의 전방에 배치된 참호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군이 참호에 겨우 접근했을 때, 러시아군은 “우라!”라는 구령과 함께 백병전을 펼쳤다. 일본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이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항포격용보루 №.Ⅲ의 참호를 돌파하려 했지만 그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04시부터 다면보루 №.1과 2에 대한 포격이 계속되었다. 러시아 포병 역시 응사했으며, 포성이 산발적이지만 끊임없이 이어졌다. 작렬하는 유산탄의 하얀 연기가 다면보루를 뒤덮었으며, 이 연기로 인해 간혹 인근의 다면보루가 보이지 않았다. 다면보루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엄폐시설이 파괴되었다.
일본군은 약 09시부터 13시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다면보루 №.1을 공격했지만 러시아 수비대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다면보루 №.1의 수비대가 보여준 완강한 저항에 일본군 또한 경탄했다. 일본의 공식적 기록에는 동부전선의 보루를 방어했던 러시아군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적군은 완강하게 저항할 뿐만 아니라, 전방과 측면 그리고 후방에서 아군을 기습적으로 포위한 후 포탄과 총탄을 퍼부었다. 아군의 돌격대형은 거의 붕괴될 위기에 직면했다. 양 사단은 2차, 3차에 걸쳐 잔류부대와 예비대를 돌격에 투입하려 했다. 그러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바쳐서 자신의 보루를 지키기로 결정한 적군은 사력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아군의 용감한 공격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양 사단 사이의 통신이 두절되었으며, 전투는 점점 곤란한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약 14시경 일본군이 유산탄으로 다면보루를 다시 포격하기 시작하자 파괴된 엄폐물에서 다면보루를 더 이상 고수할 수 없었던 수비대는 고르바토프스키의 명령에 의거하여 만리장성 뒤편으로 철수했다.
한편 다면보루 №.1에 대한 공격이 실패했다는 보고를 접한 노기 장군은 군사위원회의를 소집했는데, 여기에서는 돌격작전을 중단하고 지구전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회의 중일 때 일본군 제7연대 및 제35연대 소속의 부대가 다면보루 №.1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고는 그것을 점령했으며, 뒤이어 №.2도 점령했다. 동부전선 지휘관 고르바토프스키는 이 다면보루를 탈환하려 했으나 자신의 예비대가 고갈되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수비대의 장교와 병사들이 일본군의 격렬한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던 8월 9일 19시에 스텟셀 장군은 방어회의를 소집했다. 본 회의에서는 “뤼순 요새의 방어를 어렵게 만드는 결점”이 논의되었는데, 육상방어의 책임자로서 모든 전투행위를 직접 지휘했던 콘트라첸코 장군이 초대되지 않았다. 그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스텟셀과 포크는 일본군의 부분적 승전에 자극되어 요새의 중요한 결점으로 다음의 사항을 들었다.
즉 많은 축성 설비의 미완성, 모든 항포격용보루와 보루가 도시 및 항구와 지나치게 인접한 곳에 구축됨으로써 보루가 적군의 야전포로부터 도시와 항구를 보호하지 못하며, 다수의 고지와 협곡 그리고 사각지대로 인해 적군이 비밀리에 포대를 설치하고 부대를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 항포격용보루가 지형에 알맞은 형태가 아닌데다 보루를 한 선으로 배치한 결과 방어라인이 형성되면서 후방에 진지가 없을 경우 적에 의해 손쉽게 돌파될 수 있다는 점, 보루의 설비가 미비하며, 대포가 개활지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 곡사포의 부족과 대포의 구경이 상이하다는 점, 비행시설이 없어서 ‘적군의 포대를 관측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엄폐된 적 목표물에 대한 아군의 포격을 정정하기 어렵다는 점, 요새 내의 철도시설이 없고 양호한 비포장도로가 부족한 결과 각 항포격용보루와 보루간의 연락과 다양한 화물의 운송이 어렵다는 점, 전화가 비효율적이고 무선전신이 없다는 점, 20㎞에 달하는 육지전선과 9㎞의 해안전선을 2개 사단만으로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 등이었다.
이러한 회의 내용은 곧바로 전신을 통해 봉천(극동총독 알렉세예프 장군의 참모부)에 보고되었으며, 그 곳에서 육군대신 사하로프 시종무관장에게 보고되었다. 이 전신을 받은 사하로프는 “본인이 읽었음. 이 보고서는 무엇 때문인가?”라고 결재를 했으며, 총참모부장 프롤로프 육군중장은 “본 보고서는 유감스럽게도 요새가 직면한 과제의 진술서이자 보루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지형을 면밀히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다음 세대와 시대를 위한 교훈 같은 것”이라고 부언했다.
8월 10일 낮에 일본군 지휘부는 적극적인 공격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러시아 역시 콘트라첸코의 요청에 따라 따허 만의 해안에 위치한 일본군 측면을 포격하기 위해 전함 세바스토폴 호와 몇 척의 수뢰정을 출항시켰을 뿐이었다. 세바스토폴 호는 12인치 포탄 7발과 6인치 포탄 60발을 발사했다. 포격에 대응한 일본군 포병은 러시아 해군에 압도되었다.
잠시 후 일본의 장갑순양함이 접근해오자 러시아 군함은 함대기지로 회항했다. 그러나 회항하는 중에 일본이 설치한 기뢰에 닿은 세바스토폴 호는 파손되었고 2척의 수뢰정은 침몰했다. 이 사건 이후 러시아 전함은 더 이상 뤼순의 내항을 떠나지 않았다.
48. 제1차 돌격의 격퇴(5)
9일의 전투로 동부전선에서의 승리를 예견한 일본군 지휘부는 계속해서 다면보루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8월 10일 자정 무렵 일본군이 다면보루 №.1과 2에서 만리장성을 돌파하려 했다. 23시 30분 4개 여단이 투입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만리장성과 그 옆의 자레드트나야 포대를 방어중이던 러시아 수비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다음날 01시경 처음보다 더 격렬한 돌격이 재개되었지만, 공격을 예측하고 있었던 러시아 수비대는 예비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더욱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8월 11일 낮에 치러진 수차례의 격렬한 전투가 끝난 뒤 속전으로는 러시아의 요새를 접수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노기 장군은 16시를 기해 돌격을 중지시키고 이미 점령한 진지에서 방어에 임하라는 명령을 제3군에 하달했다.
일본군은 8월의 공격으로 일부 지점에서 방어라인을 돌파한 것과 항포격용보루 №.Ⅱ와 Ⅲ사이에서 중요한 거점이었던 판룬샨 다면보루 №.1,2 및 우글로바야 산을 점령한 것이 전부였다. 반면 동부전선에서 입은 일본군의 병력손실은 약 1만 5천 명이었으며, 전체적으로는 2만 명에 달했다. 러시아의 병력손실은 6천 명을 넘었다.
일본군의 속전을 격퇴한 것은 러시아군의 첫 성과로서 앞선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던 일본군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러시아의 주력부대를 괴멸시킴으로써 전세를 확정지으려는 의도에서 노기 장군의 부대를 만주로 파병했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모두 군의 사기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러시아 병사와 장교는 일본군의 힘과 에너지가 결코 무한한 것이 아니며, 적의 월등한 군사력 또한 불굴의 완강한 방어로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제1차 돌격의 실패와 큰 병력손실은 일본군의 전투력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8월의 격렬한 돌격전 당시 일부 일본군 병사들은 공격을 거부했으며,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심지어 장교를 살해하기도 했다. 8월 11일 밤 제8예비연대에서는 노골적인 폭동이 발생하여 일본군 지휘부를 크게 당황시키기도 했다.
속전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일본군 지휘부가 자신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한 반면 뤼순 수비대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당시 노기 장군의 진영에 있었던 영국의 군사평론가 노리가드는 러일전쟁 직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요새의 군사력에 관한 자료를 접한 현재 그렇게 단기간 내에 요새를 점령한다는 것과 그런 의미에서의 모든 계획은 확신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대체로 상당히 정확한 편이었던 일본군 첩보부가 어떻게 요새가 지닌 무한한 힘의 근원을 평가하지 못했는지 또 그런 모험적 방법에 대해 미리 경고하지 않았는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일본군은 자신이 파괴하려 했던 대상이 얼마나 견고한지 잘못 계산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상대방의 군사력이 분산되도록 모든 전선을 상대로 공격할 수 없었다. 또한 중앙 및 좌측 방어선에 대한 공격 역시 곧 중단되었으며, 돌격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모든 군사력이 동부전선 중 약 1㎞에 불과한 구역에 집중되었다.
8월의 전투에서 중포(重砲)와 기관총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군의 중포에 방어군의 화력이 압도되었으며, 보루도 파괴되었다. 결국 우글로바야 산과 판룬샨 다면보루 №.1,2가 파괴된 채 적에게 점령되었다. 러시아군은 소구경 속사포, 라이플 그리고 기관총 등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특히 기관총 화력으로 인해 일본군이 막대한 병력손실을 입었으며, 간혹 전진 자체가 중단되기도 했다.
보루를 쟁취하기 위한 대부분의 전투는 백병전으로 종결되었다. 공격과 반격에서 러․일 양측은 지형의 기복을 이용하여 상대의 화력을 피했으며, 약진에 들어간 부대는 산의 사면과 협곡에 형성된 사각지대에 집결했다. 심하게 차폐된 지형과 제때에 제거되지 않은 수수밭 덕택에 일본군은 비밀스럽게 이동하거나 집결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야간습격을 격퇴하는 데 탐조등을 사용하여 상대 병사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동시에 소총 및 기관총사격과 포격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일본군은 야간전투에서 조명탄을 이용했으며, 근접전에서는 수류탄을 사용했다.
일본의 제1차 공격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파하지 못하고 기지로 회항한 분함대 소속의 수병과 함포 역시 큰 역할을 했다. 공격이 있기 전날 밤과 공격 초기에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분함대의 힘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문제가 매우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전함 레트비잔 호의 함장 센스노비츠 해군대령은 임시함대사령관 우흐톰스키 해군소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여 완편된 함대로는 돌파할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각 전함이 개별적으로 돌파하는 것이 보다 합목적적이라고 보았으며, 돌파계획이 거부될 경우 각 군함을 얕은 여울 쪽으로 집결시킨 후, 간접포격에 필요한 최소의 부대원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으로 육군을 지원하지고 제안했다.
8월 6일에 소집된 협의회에 참석한 함대사령관 및 1등급 전함의 함장들은 분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파할 수 없음을 만장일치로 인정했다. 참석자의 대부분은 각 군함의 개별적 돌파에 대해서도 부정적 입장을 취했으며, 분함대의 병력, 함포 그리고 포탄을 육지방어에 사용하고 군함은 정박한 상태에서 전투준비에 임할 것 등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의거하여 일본군 진지에 대한 간접포격, 작전지역에서 일본 군함을 봉쇄하기 위한 기뢰부설, 일본 전함의 공격을 정찰하기 위한 수뢰정 파견 등의 임무가 각 군함에 부여되었다. 이후 6인치 포를 포함하여 다양한 구경의 대포 120문과 막대한 양의 탄약이 각 군함과 항구로부터 육지 방어선으로 이동 배치되었으며, 이 대포를 조작하기 위한 팀이 각 군함의 승조원 중에서 선발되었다.
제1차 돌격전이 진행되고 있던 8월 8일 각 군함에서는 총 2,267명으로 구성된 7개 해병중대가 해안에 집결하여 육상의 배정된 전진진지로 향했다.
러시아 군함 역시 일본군 진지와 공격대형을 포격하는 등 일본군의 격퇴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전함은 연안의 측지에 따라 간접포격을 가하여 일본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예를 들어 전함 레트비잔 호의 함포사격은 일본군의 탄약고를 폭발시켰으며, 여러 개의 포병중대를 제압했다. 다른 전함의 포격 또한 매우 효과적이었다.
분함대 지휘부는 육군을 지원하는 동시에 러시아 전함을 봉쇄하고 있는 일본에 대응하기 위하여 8월 6일 수뢰정 스코릐 호를 파견하여 일본 군함이 자주 왕래하던 곳에 기뢰 14개를 부설했다.